사무엘하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1–24장 · 기근·노래·용사·인구 조사
왕의 마지막 말과 남겨진 이름
사무엘하 23장은 두 개의 전혀 다른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다스리는 왕을 구름 없는 아침의 햇빛에 비유합니다. 그런 통치 아래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한 사람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헷 사람 우리아」. 우리아는 다윗에게 충성했던 용사였지만,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입니다(11:14–17).
의로운 통치를 노래하는 왕의 마지막 말과, 그 왕에게 부당하게 죽임당한 충성스러운 부하의 이름이 같은 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문학적 대조인지 본문이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를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에게 이 배열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 장이 다윗이 받은 구원을 노래했다면, 23장은 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높이 세워진 사람이 누구의 말을 전하는가
다음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선언, 높이 세워진 사람, 곧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은 이이자 이스라엘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는 이의 선언이었다.사무엘하 23:1 · 본디새김
「이새의 아들」은 다윗의 평범한 출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그는 형들 가운데 왕의 후보로 주목받지 못하고 양을 돌보던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 「높이 세워진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높이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기름 부은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왕권의 근거가 단순한 혈통이나 군사적 승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고 세우셨다는 고백 위에 놓여 있습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노래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23에서는 그가 수금을 연주했고, 사무엘하 1:17–27에서는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애가를 불렀습니다. 앞 장에도 그의 긴 찬양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말」은 반드시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이후에도 말하며, 열왕기상 2장에는 솔로몬에게 남긴 지시가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윗의 생애를 정리하는 자리에 놓인 마지막 선언, 곧 그의 왕권과 신앙을 집약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곧바로 자신이 전하려는 말의 출처를 밝힙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나를 통해 말했다. 그의 말이 내 혀 위에 있다.」사무엘하 23:2 · 본디새김
이 대목은 예언자의 선언과 닮아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자 노래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의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무엘하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건들이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은 이 선언의 권위를 하나님의 영에게 돌리는 것이지, 다윗의 전 생애에 무오한 권위를 부여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이유로 통치의 최종 기준을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왕을 기뻐하시는지를 먼저 듣습니다.
그 말이 3절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통치는 아침 햇빛과 같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했다.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일렀다. 『사람을 다스리는 의로운 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스리는 이는』」사무엘하 23:3 · 본디새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왕 자신보다 높은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다스린다는 것은 그 인식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했을 때, 백성은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리고 전쟁에 앞장설 왕을 원했습니다(사무엘상 8:19–20). 그러나 사무엘상 12:14에서는 왕과 백성이 함께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해가 돋는 아침의 빛과 같으니, 구름 없는 아침, 햇빛과 비로 땅에서 풀이 돋는 아침과 같다.』」사무엘하 23:4 · 본디새김
햇빛은 자기 자신을 위해 비추지 않습니다. 빛이 비출 때 땅이 밝아지고, 풀은 자라나며, 생명이 활동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운 통치의 열매는 왕 자신에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나타납니다.
좋은 왕은 사람들 위에 높이 서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수많은 전쟁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권을 지키기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하는 이상적인 왕의 모습은 적들을 쓰러뜨리는 강한 전사가 아니라, 땅에서 풀이 돋아나게 하는 아침 햇빛과 같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능력만으로는 훌륭한 통치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유의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압축적입니다. 아침, 빛, 구름, 햇빛, 비, 풀이 연결되는 방식에 생략이 많아서 문장 관계를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구름 없는 아침의 맑은 빛을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하고, 비가 내린 뒤 햇빛이 비쳐 풀이 돋아나는 장면을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두 이미지를 연결하여 생명이 돋아나는 아침으로 옮겼습니다.
다윗의 집은 정말 그 아침과 같았는가
「내 집안이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지 않은가? 그가 나와 영원한 언약을 맺었으니, 모든 면에서 갖추어지고 지켜지는 언약이다. 나의 모든 구원과 모든 바람을 그가 싹트게 하지 않겠는가?」사무엘하 23:5 · 본디새김
본디새김은 다윗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묻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자신의 집안도 의로운 통치의 약속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면은 다른 가능성도 허용합니다. 「내 집안은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지 않지만」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의로운 왕의 이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집안이 실제로는 그 기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신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에 희망을 둡니다.
어느 한쪽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이 견고하다고 분명히 선언하지만, 다윗의 집안이 이미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통치를 이루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 절을 다윗이 자신의 실패를 명백히 고백하는 문장으로만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집안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안에서는 암논의 범죄와 압살롬의 반란, 가족 사이의 살인과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했지만, 다윗 집안의 현실은 결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앞절에서 땅의 풀이 돋아나는 모습을 노래한 뒤, 이제 하나님이 다윗의 구원과 바람을 싹트게 하시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성장과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다만 여기서도 원문의 마지막 표현에는 부정어가 포함되어 있어, 긍정적인 수사의문문으로 읽을지, 아직 싹트지 않았다는 진술로 읽을지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앞부분과 연결하여 긍정적인 기대를 표현하는 질문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세워졌지만, 그 언약이 약속하는 모든 열매가 다윗의 눈앞에 완성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왕은 자기 집안의 미래를 자기 힘으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윗이 의지하는 것은 자신이 세운 왕조의 견고함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견고함입니다.
풀을 자라게 하는 통치와 불타 버리는 가시덤불
아침 햇빛과 돋아나는 풀의 이미지 다음에는 가시덤불이 등장합니다.
「악한 자들은 모두 내버려지는 가시덤불과 같다. 손으로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무엘하 23:6 · 본디새김
악한 자를 가시덤불에 비유하는 이유는 6–7절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맨손으로 붙잡기 어렵고, 다루려면 쇠붙이와 창자루 같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이 비유에서는 악이 단순히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해를 끼치는 위험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의로운 통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북돋는 일과, 사람들을 해치는 악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3절에서 먼저 제시된 통치의 기준은 왕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아니라 의로움과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그러므로 6–7절을 왕이 자신의 정적을 마음대로 제거할 수 있다는 허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덤불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선언한 직후, 본문은 다윗의 왕국을 실제로 지탱했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왕의 이상에서 왕의 현실로 장면이 바뀌는 것입니다.
위대한 왕의 역사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8절에서 글의 형식이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의 선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용사들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들이 기록됩니다.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은 장교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에센 사람 아디노로, 한 번에 팔백 명을 죽인 사람이었다.사무엘하 23:8 · 본디새김
다윗의 왕국은 다윗 혼자 세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서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전장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무엘상 17장).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고 왕국을 유지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의 싸움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23장은 바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남깁니다.
그다음 등장하는 엘르아살의 이야기는 더욱 생생합니다.
그는 일어나 손이 지치고 그 손이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여호와야훼는 그날 큰 구원을 이루었다. 백성이 그의 뒤로 돌아온 것은 오직 죽은 자들의 것을 벗겨 가기 위해서였다.사무엘하 23:10 · 본디새김
「손이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라는 묘사는 그가 얼마나 오래, 격렬하게 싸웠는지를 보여 줍니다. 손에 힘을 주고 칼을 쥔 채 싸우다가 손을 펴기도 어려워진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엘르아살이 싸웠지만, 본문은 여호와야훼가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전투에서 물러났던 사람들은 승리한 뒤에야 돌아온 것입니다. 엘르아살의 헌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모두가 같은 위험을 감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용사 삼마의 이야기는 장소부터 소박합니다.
그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부대를 이루어 모였는데, 그곳에는 렌즈콩이 가득한 밭이 있었다. 백성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달아났다.사무엘하 23:11 · 본디새김
밭은 단순한 재산을 넘어 사람들의 먹을거리와 생계가 걸린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 밭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밭을 지켜 냈으며,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여호와야훼는 큰 구원을 이루었다.사무엘하 23:12 · 본디새김
엘르아살이 수많은 적군을 물리친 승리도 하나님의 구원이고, 삼마가 평범한 밭을 지켜 낸 승리도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기록자는 전투의 규모나 사람의 명성만으로 구원의 의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앞부분에서 의로운 통치가 땅에서 풀이 자라나는 아침과 같다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이 기록자의 명시적인 의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통치와 농작물이 있는 밭을 지키는 용사의 행동을 함께 읽으면, 왕국을 지키는 일이 단순히 왕의 권력을 보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왕의 나라가 존속하는 것은 왕이 살아남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도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군사적 성공이 곧바로 하나님의 승인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다윗이 승리한 왕이면서도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왕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요셉밧세벳의 기록은 역대상 11:11의 평행 기록과 비교할 때 이름과 숫자에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상에서는 야소브암이라는 이름과 삼백 명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두 기록의 차이가 정확히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전투라고 확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의 물 — 왕을 향한 충성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물 한 모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추수 때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왔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고, 베들레헴에는 블레셋 수비대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요새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에 있는 우물의 물을 내게 마시게 해 줄까?」사무엘하 23:15 · 본디새김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새의 집에서 자랐으며,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장).
이제 고향은 적군이 지키는 곳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누구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입 밖에 냅니다.
그런데 세 용사는 그 말을 듣고 행동합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려 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에게 부어 바쳤다.사무엘하 23:16 · 본디새김
왕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바람일 수 있지만, 왕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이 결과를 예상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실제로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여호와야훼여, 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닙니까?」 그는 그 물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했다.사무엘하 23:17 · 본디새김
다윗이 물을 마셨다면 세 사람의 목숨을 건 헌신이 왕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셈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본문은 다윗의 행동을 물의 낭비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가 단순히 땅에 쏟아 버렸다고만 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에게 부어 바쳤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은 다윗이 세 사람의 헌신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 헌신의 가치를 자기 욕구보다 높은 곳에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충성을 받았지만, 그들의 생명을 자신의 소유처럼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의 모든 바람을 무조건 이루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이 귀한 덕목이라는 사실과 그 충성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은 우리아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전쟁터에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은 다른 사람의 충성을 자신의 욕망에 이용할 수도 있고, 그 충성 속에 담긴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며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의 말은 단순한 갈증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고향의 물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의 내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둘람이라는 장소는 다윗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상 22:1–2에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동굴에 머물렀고, 그곳으로 그의 가족과 고난을 겪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다만 23장의 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기에 일어났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르바임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운 사무엘하 5장의 사건과도 지리적 배경이 겹치지만, 동일한 전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아 사건과 물을 바친 사건이 정확히 어떤 시간적 순서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을 바친 행동을 우리아 사건 이후의 회개나 변화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레위기 17:11과 신명기 12:23에서는 피와 생명이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피가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을 이 율법의 직접적인 실행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사람이 마음대로 취하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서로 통합니다. 이 행동은 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전제, 곧 액체를 부어 바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에는 제단이나 제사장의 참여가 언급되지 않으므로 정규적인 제사의 세부 절차를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용사들에게도 서로 다른 자리가 있었다
다윗에게 물을 가져온 용사들의 이야기 다음에는 아비새와 브나야가 소개됩니다.
아비새는 요압의 형제입니다. 그는 앞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우다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1:16–17). 여기서는 창으로 삼백 명을 죽인 용사로 기록됩니다.
그는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존중받는 이가 아니었던가? 그는 그들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사무엘하 23:19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용사들 사이에 존재했던 서열이나 명예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집단이 「세 사람」이고 누가 그 집단의 구성원이었는지는 본문의 표현만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브나야의 이야기는 세 가지 특별한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모압의 아리엘 둘을 죽였습니다. 눈 오는 날 구덩이로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창을 든 이집트 사람을 몽둥이로 상대하여 그의 창을 빼앗아 죽였습니다.
브나야의 이야기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눈 오는 날 구덩이 속에 있는 사자를 상대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창을 든 전사를 몽둥이로 상대하는 일도 무기의 차이 때문에 불리합니다.
그러나 브나야는 그 상황을 뒤집습니다.
특히 이집트 사람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장면은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사용해 골리앗의 목을 베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사무엘상 17:51). 이것이 직접적인 문학적 인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승리한다는 공통된 이야기 구조가 있습니다.
브나야는 매우 뛰어난 용사였지만, 본문은 그가 최정예 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중요한 직책을 맡습니다.
명예의 순위가 모든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에서 아비새가 세 사람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면서, 19절에서는 그 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장교를 가리키는 말과 ‘셋’, ‘서른’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자음과 발음에서 가까워, 이 대목은 사본 및 읽기 전통의 차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비새가 어떤 집단에 속했고 정확히 몇 번째 지위였는지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아리엘」이 사람 이름인지 특별히 강한 전사를 가리키는 호칭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 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가 등장하므로, 소리의 유사성을 이용한 표현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름만 남은 사람들, 그러나 잊히지 않은 사람들
24절부터 본문은 긴 명단으로 바뀝니다.
아사헬, 엘하난, 삼마, 엘리가, 헬레스, 이라, 아비에셀과 수많은 사람이 이어집니다. 대부분은 이름과 출신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 다윗을 만났는지, 어떤 전투에 참여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록자가 왕국의 역사를 다윗의 이름 하나로 요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름 뒤에 붙은 출신지를 보면 그들이 여러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드고아, 아나돗, 느도바, 기브아, 갈멜 등 서로 다른 곳이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파나 지역을 통해 소개되고, 어떤 이들은 외국 민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소개됩니다.
특히 암몬 사람 셀렉과 헷 사람 우리아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밖의 민족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소개되지만, 다윗의 용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이나 헷 사람으로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다윗을 섬기게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사람은 요압입니다.
요압은 사무엘하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지도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서 그는 독립적인 용사 항목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압의 형제 아비새와 아사헬이 나오고, 요압의 무기를 들던 나하래가 등장합니다(18, 24, 37절).
요압이 독립적으로 수록되지 않은 이유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명단의 구성과 직책의 차이 등 다른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명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또 하나의 이름은 엘리암입니다.
마아가 사람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사무엘하 23:34 · 본디새김
사무엘하 11:3에서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로 소개됩니다. 이 두 엘리암이 같은 사람이라면, 다윗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은 밧세바의 아버지였고 아히도벨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인명과 문맥을 고려할 때 가능한 연결이지만, 본문이 두 엘리암을 명시적으로 동일인이라고 확인하지는 않으므로 단정은 피해야 합니다. 다만 이 가능성은 다윗의 왕궁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왕의 가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윗은 나라를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과 깊은 관계로 얽혀 있었습니다. 왕이 한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은 그 사람 한 명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은 마지막에 가장 확실하고도 무거운 이름 하나를 남깁니다.
「헷 사람 우리아」 — 명단의 마지막이 남기는 질문
헷 사람 우리아가 있었다. 모두 서른일곱 명이었다.사무엘하 23:39 · 본디새김
우리아는 사무엘하 11장에서 이미 자세히 등장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맺은 뒤,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우리아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하고 있고, 자신의 상관 요압과 부하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자신만 집에 돌아가 먹고 마시며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11:11).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충성스러운 사람을 죽이기 위한 편지를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우리아가 그 편지를 직접 가지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11:14). 다윗은 요압에게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세우고 뒤로 물러나 그가 죽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그 뒤 나단은 다윗을 책망하면서 그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선언했습니다(12:9). 따라서 사무엘하 23장에 적힌 「헷 사람 우리아」라는 이름은 단순한 군사 기록의 마지막 항목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그는 다윗의 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적의 배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던 왕의 명령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23장 앞부분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선언을 읽을 때, 그것을 곧바로 다윗에 대한 찬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선언은 다윗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의 죄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왕조에 약속을 주셨지만, 그의 잘못을 책망하셨습니다.
23장 마지막에서 우리아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사무엘서의 최종 이야기 속에서 다윗의 영광이 우리아의 죽음을 덮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는 세 사람과 서른 명이 등장하고,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진 용사들이 소개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름과 부칭을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특히 32–33절의 「야센의 아들들, 요나단, 하랄 사람 삼마」는 이름과 친족 관계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 사람’, ‘서른 명’, ‘장교’와 관련된 표현에는 서로 다른 읽기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역대상 11:10–47에도 평행하는 용사 명단이 있지만, 이름의 형태와 항목 구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주어진 자료만으로 각 사람을 정확히 분류해 서른일곱 명이라는 총수를 확실하게 재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왕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을 완벽한 왕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의로운 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왕을 위해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을 남깁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스리는 왕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왕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오직 왕을 위해 소모된다면 그 통치는 이미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물 앞에 선 다윗이 있습니다.
그는 그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야훼께 부어 바칩니다.
그 순간 다윗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생명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행동으로 인정합니다. 왕이 마실 수 있는 물이었지만, 왕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