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7–30장 · 복과 저주
돌에 기록된 말씀과 온 백성의 아멘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약속의 땅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에 들어갑니다.
그 땅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모세의 명령은 뜻밖입니다.
큰 돌들을 세우고 그 위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돌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을 두 산에 나누어 세운 뒤 저주를 선포하고, 모든 사람이 그때마다 「아멘」이라고 응답하게 합니다.
그리짐산에는 복을 빌기 위한 지파들이 서고, 에발산에는 저주 선포를 위한 지파들이 섭니다. 그런데 정작 15–26절에 기록된 열두 선언은 모두 저주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이웃의 땅 경계를 옮기는 사람, 눈먼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왜곡하는 사람,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백성에게 이런 행동을 특별히 경고하는 것일까요? 왜 모세는 그저 잘못된 행동을 금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온 백성이 그 저주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도록 했을까요?
신명기 27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이 그 말씀의 정당성을 자기 입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갈 책임을 공동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 장까지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여러 규정과 법규를 설명했습니다. 26장 마지막에서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야훼가 서로의 언약 관계를 선언하셨습니다.
27장에서는 그 관계가 새로운 형태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돌에 기록되고, 백성은 그 말씀 앞에 서며, 자기 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율법에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하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돌에 기록하라 —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어도 바꿀 수 없는 기준
27장은 모세 혼자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을 지키십시오.」신명기 27:1 · 본디새김
장로들은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첫 장면은 모세 개인의 가르침이 공동체 지도자들의 책임과 연결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 하필 돌에 기록하는가
「여러분이 요단을 건너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는 날, 당신을 위해 큰 돌들을 세우고 그 돌들에 석회를 바르십시오.」신명기 27:2 · 본디새김
「당신이 건너갈 때 그 돌들 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십시오. 이는 당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당신이 들어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7:3 · 본디새김
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재료입니다. 구전으로 전달되는 말과 달리, 돌에 기록된 글은 일정한 장소에 남아 사람들에게 다시 읽히고 기억될 수 있습니다. 석회로 표면을 정리한 뒤 그 위에 글을 기록하는 방식은 글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적합합니다.
‘모든 말씀’은 정확히 어디까지인가
3절과 8절에서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 전체를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명기에서 모세가 선포한 언약의 법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문은 기록할 말씀의 범위를 구체적인 책의 이름이나 장절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신명기의 문맥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있는 율법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록된 분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들어가는 백성은 그 땅에서 살아갈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받은 말씀을 땅에 들어간 뒤에도 기억하라
모세는 아직 요단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기록할 장소는 요단 건너편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땅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땅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함께 주어집니다.
이 때문에 큰 돌에 기록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념하는 글이 아니라 율법의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7장은 돌에 율법을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6:6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돌에 기록된 말씀은 공동체가 보존해야 할 객관적인 기준을 나타냅니다. 마음에 둔 말씀은 그 기준을 자기 삶의 중심에서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을 신명기 27장의 직접적인 해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고 기억되고 실제 삶을 다스려야 한다는 주제가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다.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 — 저주가 선포될 자리에서 드리는 제물과 기쁨
4절에서 모세는 돌들을 세울 장소를 지정합니다.
「여러분이 요단을 건너면,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십시오. 당신은 그 돌들에 석회를 바르십시오.」신명기 27:4 · 본디새김
에발산은 그리짐산과 함께 세겜 일대에 자리한 산입니다. 창세기 12:6–7에서 아브람은 세겜 근처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듣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신명기 27장은 그 장소와 연결되는 지역에서 다시 제단을 쌓고 율법을 기록하도록 합니다.
아브람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선포된 지역에서, 그의 후손은 이제 그 땅에서 살아갈 법을 새깁니다.
약속의 이야기가 언약의 책임과 만나는 것입니다.
왜 에발산인가
본디새김 본문을 따라 읽으면, 제단은 저주 선포를 위해 지정된 에발산에 세워집니다.
쇠 연장을 대지 않은 돌
5–6절에서 모세는 제단을 쌓을 때 돌에 쇠 연장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온전한 돌들로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서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 번제들을 바치십시오.」신명기 27:6 · 본디새김
이 명령은 출애굽기 20:25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돌로 제단을 쌓을 때 정으로 다듬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돌들」은 반드시 균일한 모양으로 정교하게 가공된 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쇠 연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술이나 장식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의 예배가 중요하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지만, 쇠 자체가 악하다거나 모든 기술적 가공이 불결하다는 뜻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율법을 기록할 큰 돌들을 세우라고 명령하고, 이어서 돌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두 구조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치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저주의 산에서 왜 기뻐하는가
「친교 제물들을 잡아 바치고 거기에서 먹으며,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십시오.」신명기 27:7 · 본디새김
에발산이라는 장소가 단지 두려움과 심판의 장소로만 제시되지 않는 것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온전히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친교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함께 제물을 먹는 공동 식사의 의미를 지닙니다(레위기 3장, 7:11–21).
율법의 저주를 선포하는 일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기념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언약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기쁨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기 때문에 그 관계에 따르는 책임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기쁨입니다.
이제 돌에 율법을 기록하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은 온 백성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 이미 구원받은 백성에게 선포되는 말
9절에서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모세와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이여, 조용히 하고 들으십시오. 바로 오늘 당신은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신명기 27:9 · 본디새김
앞에서는 모세와 장로들이 함께 명령했습니다. 이 변화는 이 장에서 법적·사회적 지도자들의 역할과 제사장들의 역할이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이미 이집트에서 구원받았고, 호렙산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앞선 신명기 26:18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특별한 소유인 백성이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27장에서는 다시 「오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를 이스라엘이 이 순간에야 처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신명기 앞부분과 충돌합니다. 오히려 이미 맺어진 언약 관계를 현재의 백성이 다시 확인하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신명기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을 지금 말씀을 듣는 세대의 현재적인 책임으로 연결합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 그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 다음에 오는 명령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제가 오늘 당신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들과 규정들을 행하십시오.」신명기 27:10 · 본디새김
먼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관계가 선언됩니다. 그다음에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라는 요구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일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순종이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구원받게 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명기의 이야기는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 구원을 받은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조용히 하고 들으십시오」라는 명령은 곧이어 펼쳐질 장면을 준비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들었던 말씀에 자기 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두 산 사이에 선 이스라엘 — 복과 저주를 앞에 놓은 백성
11–13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두 무리로 나눕니다.
그리짐산에는 여섯 지파가 섭니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입니다. 에발산에도 여섯 지파가 섭니다.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입니다.
한 백성이 두 산에 나누어 선다
그리짐산은 복을 빌기 위한 장소이며, 에발산은 저주를 선포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이것을 그리짐산에 선 지파들은 의롭고 에발산에 선 지파들은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어느 지파가 더 훌륭하거나 악하기 때문에 특정한 산에 서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산의 구분은 이스라엘 전체 앞에 놓인 복과 저주의 현실을 표현합니다. 신명기 11:26–29에서 모세는 이미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앞에 두겠다고 선언하고, 그리짐산과 에발산을 언급했습니다. 27장은 그 명령을 구체적인 의식으로 전개합니다.
백성은 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을 추상적으로만 듣지 않습니다. 실제로 두 산에 나뉘어 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배치는 언약의 결과가 이스라엘 전체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합니다.
레위 지파는 어디에 서 있는가
12절에서는 레위 지파가 그리짐산에 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큰 소리로 저주를 선언하도록 합니다.
이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레위 지파 전체와 실제로 선언을 수행하는 레위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그리짐산에 배치되지만, 레위 사람 가운데 제사장이나 특정한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 백성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9절에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등장한다는 사실과도 어울립니다.
그러나 14절은 선언하는 레위 사람들의 정확한 위치와 인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의식의 구체적인 배치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 복의 선언은 기록되지 않았는가
본문은 그리짐산에 복을 빌기 위한 지파들이 서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1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실제로 인용되는 선언들은 모두 저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의식에서 복이 전혀 선포되지 않았다는 뜻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28:1–14에서는 순종에 따르는 복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여호수아 8:34에서는 여호수아가 율법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모두 읽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27장에 저주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복의 선언이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는 복을 약속받은 백성에게, 어떤 행동을 저지르면 그 복된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는지 똑똑히 듣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열두 번의 「아멘」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7장에서 명령한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은 여호수아 8:30–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 제단은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번제와 친교 제물을 바칩니다. 여호수아는 돌 위에 율법의 사본을 기록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짐산과 에발산을 마주하는 위치에 섭니다. 여호수아 8:35에 따르면 그 자리에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 있지 않았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신명기 27장의 「온 백성」이 갖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언약의 말씀은 공동체의 일부 지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사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은밀한 곳에 우상을 두는 사람 — 첫 번째 저주가 겨냥하는 것
첫 번째 저주는 우상에 관한 것입니다.
「『깎은 우상과 금속을 부어 만든 우상을 만들어 은밀한 곳에 두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런 우상은 장인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15 · 본디새김
사람이 만든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다
인간의 기술과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신적인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4:15–19에서 우상 제작을 금지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여호와야훼의 음성을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이 이제 사람이 만든 형상을 하나님처럼 섬긴다면, 그들은 자기들을 구출하신 분을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으로 바꾸어 놓는 셈이 됩니다.
왜 ‘은밀한 곳’이라는 말이 중요한가
이 사람은 공개적으로 여호와야훼를 부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자기 집이나 은밀한 장소에 우상을 둘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언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신명기 27장에는 남들이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경계표를 몰래 옮기는 행위, 눈먼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행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금지된 성적 관계, 은밀한 폭력, 뇌물을 통한 생명 침해 등이 그렇습니다.
모든 저주가 반드시 남몰래 이루어지는 범죄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첫 저주와 뒤쪽의 24절 저주에서 은밀함이 직접 언급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행동들을 저주받을 일이라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도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언약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아멘’이라고 말하다 — 남의 죄를 비난하는 말인가, 나 자신이 받아들이는 말인가
신명기 27장의 저주 선언에는 특별한 형식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온 백성이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과정이 열두 번 반복됩니다.
‘아멘’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다
여기서 백성은 남에게 내려지는 저주를 구경하는 관객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저주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는 응답에 참여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사람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선언할 때 「아멘」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런 행동이 잘못이라는 판단에 동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비난하는 말로만 끝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경우에도 그 판단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을 함께 지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대답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재판에서는 특정한 사람이 죄를 저질렀는지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아직 어떤 특정한 피고인이 재판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앞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행동들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선언을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의식은 특정 범죄자에게 실제로 형벌을 집행하는 재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저주를 선언한다고 해서 모든 사례가 같은 절차로 처벌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어떤 행동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지 공개적으로 확인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아멘」은 다른 사람에게 내려지는 저주를 듣고 안심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앞에서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하는 응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멘(אָמֵן)은 확실함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어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문맥에 따라 어떤 말이 참되다고 인정하거나, 그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응답으로 사용됩니다. 민수기 5:22에서도 여자가 맹세와 저주의 말씀을 들은 뒤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신명기 27장에서는 그 응답이 온 공동체의 입에서 나옵니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이웃의 경계를 옮기는 사람 —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되는 불의
두 번째 저주는 부모를 업신여기는 사람에게 내려집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16 · 본디새김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은 단순히 부모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행동보다 넓습니다. 부모의 지위와 존엄을 하찮게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출애굽기 20:12의 부모 공경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이 구절이 모든 부모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부모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저주하며, 부모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를 설명하는 규정은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토지의 경계가 등장합니다.
경계표를 옮기는 사람
「『자기 이웃의 경계를 옮기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17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토지는 중요한 생계 기반이었습니다. 가족이 땅을 소유하고 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가진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 가족이 살아갈 기반과 후손에게 물려줄 상속 몫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19:14에서도 조상들이 정해 놓은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경계표를 조금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이웃의 땅을 자기 땅으로 편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경계표를 옮기는 행동은 땅의 주인이 없을 때 이루어질 수 있고, 나중에 그것을 입증하기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계표에 관한 저주는 단순한 측량 규정이 아닙니다. 남의 생계 기반과 상속 몫을 침해하는 일을 금지하는 명령입니다.
눈먼 사람을 길에서 헤매게 하는 사람
「『눈먼 사람을 길에서 헤매게 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18 · 본디새김
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내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뢰를 이용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의 약함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14도 눈먼 사람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곳에서는 이 명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요구와 연결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확인하거나 저항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를 이용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더욱 책임 있게 대해야 할 이유입니다.
재판에서 목소리가 약한 사람들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왜곡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19 · 본디새김
이 세 집단은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나 경제적 기반이 약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불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일과 올바른 재판을 받게 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은 궁핍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정작 재판에서는 그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런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도 올바른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앞의 네 저주를 함께 살펴보면 의미 있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이 네 가지 행동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인간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의 정당한 자리를 훼손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에 온 이스라엘은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가족의 경계를 침범하는 성적 관계 — 네 가지 저주가 이어지는 이유
20–23절에는 성적 관계에 관한 네 가지 저주가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일, 짐승과 동침하는 일, 누이와 동침하는 일, 장모와 동침하는 일입니다. 이 규정들은 레위기 18장의 금지된 성적 관계에 관한 법들과 연결됩니다. 특히 20절은 앞서 신명기 23:1에 나온 표현을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옷자락을 들추었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20 · 본디새김
「아버지의 옷자락을 들추었다」는 말은 단순히 옷을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 관계를 맺어 아버지의 혼인 관계를 침범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자기 아버지의 딸이나 자기 어머니의 딸인 자기 누이와 동침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22 · 본디새김
이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같은 누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왜 이런 사례들이 모여 있는가
네 규정은 모두 성적 관계에 관한 것이지만, 정확히 같은 성격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나 누이, 장모에 관한 금지는 가족 안의 친족 관계와 혼인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다룹니다. 짐승과의 성적 관계를 금지하는 규정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성적 경계를 다룹니다.
왜 하필 이 네 가지가 선택되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레위기에는 이보다 더 다양한 금지 규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27장의 목록을 성적 범죄 전체를 빠짐없이 정리한 법전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미 주어진 법규들 가운데 특정한 행위를 선정하여 온 백성이 저주를 선언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가족 안의 죄
이 네 가지 행동은 모두 개인의 가장 사적인 관계와 연결됩니다. 가족 안에서 발생하거나 다른 사람이 쉽게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관계의 영역까지 언약의 명령이 적용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공적인 예배나 공동체 활동에서 올바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 안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7장의 선언은 그런 삶의 분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몰래 이웃을 치고 뇌물로 목숨을 빼앗는 사람 — 마지막에 드러나는 폭력과 권력의 문제
성적 관계에 관한 저주 다음에는 폭력이 등장합니다.
「『몰래 자기 이웃을 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24 · 본디새김
왜 ‘몰래’라는 말을 덧붙였는가
15절에서는 남몰래 우상을 만들어 둡니다. 24절에서는 남몰래 이웃을 공격합니다. 두 행동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폭력입니다.
일반적인 재판에서는 범죄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이루어진 행동은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남들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이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7장은 그런 행동을 공개적인 저주 선언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돈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다
「『죄 없는 사람을 쳐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25 · 본디새김
이 규정에는 돈과 생명의 문제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법정에서 재판관이 뇌물을 받는 사례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6:19에서도 재판을 왜곡하거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27:25는 뇌물을 받는 사람을 반드시 재판관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목적을 위해 돈을 받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재판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른 형태의 폭력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남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정당한 재판을 왜곡하거나, 마침내 죄 없는 사람의 생명까지 해치는 행동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열한 가지 저주가 보여 주는 공동체의 위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외부의 공격만이 아닙니다. 그 땅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불의도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 저주는 지금까지의 모든 선언을 한 문장으로 묶습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치는」은 문맥에 따라 죽이는 행위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이 절 자체에는 죽음이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반드시 은밀한 살인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다음 절에서 죄 없는 사람을 쳐 죽이는 행위가 등장하므로, 두 규정은 은밀한 폭력과 생명을 해치는 범죄라는 점에서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굳게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 — 모든 저주를 하나로 묶는 마지막 선언
마지막 선언은 앞의 열한 가지와 다릅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굳게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7:26 · 본디새김
앞선 저주들은 구체적인 행동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저주는 개별적인 범죄의 목록을 넘어섭니다.
‘굳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의 말씀을 실제 삶에서 확립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마지막에 「행하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에 율법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할 수도 있습니다. 저주의 선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구체적인 저주 다음에 포괄적인 저주가 오는가
앞의 열한 가지 저주만으로는 모든 불의한 행동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선언은 특정한 행동만 피하면 언약을 온전히 지켰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명령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모세가 요구하는 것은 몇 가지 대표적인 범죄를 피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율법의 말씀 전체를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신명기 27:26을 직접 인용합니다. 갈라디아서 3:10에서 바울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계속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여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문제를 논합니다. 신명기 27장은 이미 여호와야훼께 속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와 믿음, 율법과 의롭다 함의 관계를 논증하면서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해석을 그대로 신명기 본문에 되돌려 놓아, 신명기 27장의 목적이 처음부터 인간의 순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증명하는 데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 있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새로운 구원사적 논증 속에서 인용합니다.
두 산 사이에서 울려 퍼진 마지막 응답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은 돌에 기록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기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말씀의 판단 아래 놓는 일입니다.
돌에 기록된 글은 그 자리에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은 그곳을 떠나 각자의 땅과 집과 일터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돌 위의 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글을 듣고 「아멘」이라고 대답했던 사람들이 자기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대답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7장은 그 결과를 아직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산 사이에 선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려줍니다.
「아멘」.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