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7장 · 하나님과 백성의 다툼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미가 6장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법정에 세우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법정에 서신 하나님이 처음 하시는 말씀은 예상과 다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네게 무엇을 했느냐? 무엇으로 너를 지치게 했느냐? 나를 상대로 증언해 보아라.」

하나님은 먼저 백성의 잘못을 열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셨는지 말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질문 앞에서 백성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미가 6장이 묻는 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이미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하며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6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은 왜 산들을 증인으로 부르시는가

미가 6:1–2 본문 →

부디 여호와야훼가 하는 말을 들어라. 「일어나 산들 앞에서 소송을 벌여라. 언덕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미가 6:1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이 말이 반복됩니다.

산들아, 여호와야훼가 벌이는 소송을 들어라. 땅의 변함없는 기초들아, 너희도 들어라. 여호와야훼에게는 자기 백성과 벌일 소송이 있고, 그는 이스라엘과 논쟁할 것이기 때문이다.미가 6: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신명기 32장 1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하늘과 땅을 불러 자신의 말을 듣게 합니다. 또한 신명기 30장 19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이스라엘 앞에 놓인 생명과 죽음의 선택을 증언하도록 소환됩니다.

하늘과 땅은 인간의 역사를 지켜보는 거대한 증인처럼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세대마다 바뀌고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산들과 땅은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잠깐의 감정이나 사적인 다툼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맺어진 관계이며, 그 관계에는 서로에게 요구되는 신실함이 있습니다.

이 장면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공적인 자리로 이끌어 내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산들과 땅의 기초들이 그 소송을 듣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송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뜻밖에도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엇으로 지치게 했느냐?」

미가 6:3–5 본문 →

「내 백성아, 내가 네게 무엇을 했느냐? 무엇으로 너를 지치게 했느냐? 나를 상대로 증언해 보아라.」미가 6:3 · 본디새김

하나님은 백성에게 자신과의 관계가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졌는지 묻고 계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셨기 때문인가요? 하나님의 요구가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인가요?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하시는 첫 번째 사건 — 이집트에서의 구출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했고, 노예살이하던 집에서 너를 속량했다. 또 네 앞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냈다.」미가 6:4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일부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자신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속량했다」는 표현에는 구속이나 해방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하셨기 때문에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지도자였으며,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미리암은 출애굽기 15장 20–21절에서 예언자로 불리며 이스라엘 여인들과 함께 구원의 노래를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알아서 길을 찾아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 사람들을 세워 길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가도록 버려진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 — 저주를 계획했지만 축복이 선포되다

「내 백성아, 부디 기억하여라, 모압 왕 발락이 무엇을 계획했는지,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싯딤에서 길갈까지 있었던 일도 기억하여라. 이는 네가 여호와야훼의 의로운 행위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미가 6:5 · 본디새김

이 사건은 민수기 22–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을 불러 그들을 저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이 원하는 저주를 선포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축복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미가는 발락이 무엇을 「계획했는지」와 발람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를 나란히 놓습니다. 신명기 23장 5절은 이 사건을 돌아보면서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의 변론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발락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직접 지켜보며 막아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 — 싯딤에서 길갈까지

싯딤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여호수아 2장 1절에서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뒤 진을 친 곳입니다(여호수아 4:19–20).

그러므로 싯딤에서 길갈까지의 여정은 광야 생활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 구간의 기억이 오직 영광스러운 사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25장 1–9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바알브올 숭배에 가담했고, 그 일로 심판을 겪었습니다. 그런 백성이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싯딤에서 길갈까지」라는 짧은 표현은 하나님의 구출과 인도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불성실함까지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미가는 그 여정의 모든 사건을 하나씩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기억하라는 목적은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야훼의 의로운 행위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단순히 죄를 정확하게 판결하시는 성품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백성을 구출하시고, 위험 속에서 보호하시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는지 설명하기 전에, 자신이 백성에게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기억하게 하십니다.

더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만족하실까

미가 6:6–7 본문 →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말씀하신 뒤, 6절에서는 화자가 바뀝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가며, 높은 곳의 하나님에게 몸을 굽힐까? 번제물들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들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가 6:6 · 본디새김

일 년 된 송아지는 실제 제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다음 절로 넘어가면 그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커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수천 마리의 숫양을, 수만 줄기의 기름 시내를 기뻐할까? 내가 내 반역 때문에 내 맏이를,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내줄까?」미가 6:7 · 본디새김

숫양은 제사의 규모가 커지는 모습이고, 기름이 시내처럼 흐른다는 표현은 정상적인 제사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과장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녀를 제물로 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 18장 21절과 신명기 12장 31절은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미가는 제물의 규모를 극단적으로 확대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많은 것을 바치는가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얼마나 많이 바쳐야 할지를 묻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아직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사가 문제인가, 제사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문제인가

이 대목을 하나님이 모든 제사를 싫어하신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번제와 속죄제, 화목제 등은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에서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문제는 제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만일 사람이 불의하게 살아가면서도 더 많은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긴다면, 제사는 회개와 신실함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덮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한 것도 이런 문제와 연결됩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 역시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마침내 대답이 주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 이 질문을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고발 앞에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묻는 예배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진지하게 회개의 길을 찾는 질문인지, 하나님의 요구를 부담스러워하며 반문하는 말인지도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아, 그는 무엇이 좋은지 네게 알려 주었다」

미가 6:8 본문 →

사람아, 그는 무엇이 좋은지 네게 알려 주었다. 여호와야훼가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정의를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셨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8절은 그 요구를 세 가지 행동으로 압축합니다.

정의를 행하라 — 올바른 일을 아는 데서 멈추지 말라

미가는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실제로 행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의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몫을 빼앗지 않는 일, 부당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 일,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 24장 17절은 나그네와 고아의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은 가난한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을 편들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합니다.

친절을 사랑하라 — 마지못해 선을 행하는 데서 나아가라

두 번째 요구는 「친절을 사랑하며」입니다.

여기서의 친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신실하게 대하며,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삶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미가는 친절을 행하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정의는 행해야 합니다.

친절은 사랑해야 합니다.

정의가 외적인 행동과 판단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면, 친절은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가와도 관련됩니다. 억지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과,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돕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친절한 행동의 횟수를 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관계의 신실함 자체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걸으라 —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

세 번째 요구는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표현은 반복해서 삶의 방향과 방식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5장 22절과 24절에서는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분리하지 않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가가 말하는 겸손은 정의를 실천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소유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길을 살피는 태도입니다.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서로를 바로잡습니다.

정의를 행하면서 친절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냉혹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친절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불의한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개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겸손함 없이 행한다면, 자신의 정의와 선행을 근거로 스스로를 높이게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가의 요구는 세 가지 독립적인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삶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설명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이 아름다운 말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성읍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도 나타나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기 전에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라고 밝히십니다(출애굽기 20:2). 구출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구출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제시됩니다. 미가 6장도 그 순서를 따릅니다.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계량통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 드러난다

미가 6:9–12 본문 →

9절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성읍을 향해 외칩니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성읍을 향해 외친다. 슬기로운 이는 당신의 이름을 알아본다. 「그 매와 그것을 정한 이에게 귀를 기울여라.」미가 6:9 · 본디새김

하나님의 목소리는 성읍의 구체적인 죄를 지목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은 시장에서 사용하는 계량 도구입니다.

악하게 모은 보물과 작은 계량통 (6:10)

「아직도 악한 자의 집에 악으로 모은 보물들이 있느냐? 용량이 모자라는 저주받은 에바 계량통도 있느냐?」미가 6:10 · 본디새김

여기서 「에바」는 곡식과 같은 마른 물품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자 계량과 관련된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정해진 한 단위의 곡식을 판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보다 적은 양을 담는다면, 판매자는 돈을 정당하게 받은 것처럼 보이면서 물건의 일부를 부당하게 남길 수 있습니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겉모습은 정상적입니다. 물건이 오가고, 대금이 지급되고, 장부에 기록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의 몫이 조금씩 빼앗깁니다.

이런 방식의 속임수는 대놓고 강탈하는 것보다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거래 상대방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왕궁과 법정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곡식을 사고파는 순간에도 필요합니다.

속이는 저울과 돌추 (6:11)

「내가 불의한 저울과 속이는 돌추들이 든 주머니를 가지고 깨끗할 수 있겠느냐?」미가 6:11 · 본디새김

고대의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재기 위해 돌로 만든 추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의 무게를 속이면 물건의 양이나 가격을 부당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5–36절은 길이와 무게와 부피를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정한 저울과 추와 계량통을 사용하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5장 13–16절도 서로 다른 무게의 추를 가지고 다니며 속이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이 율법을 생각하면 미가의 질문은 단순한 경제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신을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6–7절의 제사에 관한 질문과 이어집니다. 앞에서는 무엇을 바쳐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도구로 다른 사람과 거래하면서 자신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제단 앞에 무엇을 가져가는가와 시장에서 무엇을 사용하는가는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두 장소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사람을 보십니다.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성읍 (6:12)

「그 성읍의 부자들은 폭력으로 가득 찼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했다. 그들의 혀는 그들의 입 안에서 속임수를 부린다.」미가 6:12 · 본디새김

이제 비판은 계량통과 저울에서 도시 전체로 확대됩니다.

그들의 부와 영향력이 타인의 권리를 짓밟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고발은 분명합니다. 앞의 계량통과 저울을 생각하면, 거짓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거래와 사회적 관계의 일부가 됩니다.

정의를 행하라는 것은 거짓 저울을 버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친절을 사랑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손해를 입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버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자신과 시장에서 거래하는 자신을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 일과 연결됩니다.

미가는 삶의 가장 평범한 도구를 통해 신앙의 진실성을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은 히브리어 문장이 어렵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 곳입니다. 특히 「슬기로운 이는 당신의 이름을 알아본다」라는 말은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다」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 차이는 히브리어에서 「보다」와 「두려워하다」와 관련된 형태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매」로 번역된 마테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뜻할 수도 있고, 문맥에 따라 지파를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심판의 매와 그것을 정하신 분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으며, 공동체를 부르는 다른 형태의 호소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 번역은 심판의 매라는 읽기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요청이 됩니다. 11절의 「내가」가 정확히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해석상 분명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저울을 쓰는 사람이나 그를 대신하는 예언자의 질문으로도, 동사를 달리 읽어 하나님이 그런 자를 깨끗하다 하실지 묻는 질문으로도 읽습니다. 어느 경우든 불의한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수확해도 누리지 못하다

미가 6:13–15 본문 →

하나님은 도시의 죄를 밝히신 뒤, 그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때려 병들게 했고, 네 죄들 때문에 너를 황폐하게 했다.」미가 6:13 · 본디새김

여기서 「나도」라는 말은 앞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폭력과 속임수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도 이제 그들에게 심판으로 응답하십니다.

먹지만 배부르지 않다 (6:14)

「너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며, 네 속에는 허기가 남을 것이다. 너는 옮겨 놓아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안전하게 지켜 낸 것은 내가 칼에 넘기겠다.」미가 6:14 · 본디새김

먹는 행동과 그 행동이 가져와야 할 결과가 서로 분리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풍족함이 아닙니다.

많이 확보하는 것과 만족스럽게 누리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물론 이 구절을 탐욕스러운 사람은 심리적으로 언제나 공허하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장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실제 생활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소유물을 확보하고 보호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무너지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씨를 뿌리지만 거두지 못하다 (6:15)

「너는 씨를 뿌려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너는 올리브를 밟아도 기름을 바르지 못하고, 햇포도즙을 짜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미가 6:15 · 본디새김

노동과 열매 사이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수고한 결과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면서 수확을 기다리고, 올리브를 수확한 사람은 기름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미가가 묘사하는 심판에서는 그 기대가 계속 좌절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줄여 자기 몫을 늘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수고한 것에서도 마땅히 기대한 몫을 누리지 못합니다. 본문이 이 둘을 명시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지만, 악하게 모은 보물에 대한 심판이 먹고 수확하고 누리는 삶의 붕괴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심판의 말씀을 모든 가난이나 질병, 사업의 실패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미가 6장은 특정한 공동체의 불의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반드시 거짓 저울을 사용했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때려 병들게 했고」라고 옮긴 히브리어는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제 처음 심판을 시작하시겠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려진 타격과 황폐함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네 속에는 허기가 남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드물게 사용되는 말이 포함되어 있어 의미를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속이 빈 상태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속이 꺼지거나 낮아지는 모습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면, 먹는 행위가 충분한 만족과 생명을 유지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무엇을 옮기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재산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려는 행동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자신이 지키려는 것을 끝까지 보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28장 30절에서는 포도원을 만들지만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38–40절에서는 씨를 많이 뿌려도 적게 거두며, 올리브나무를 가지고 있어도 기름을 바르지 못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미가는 이런 언약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성실한 백성에게 닥칠 일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길 대신 오므리와 아합의 길을 걷다

미가 6:16 본문 →

미가 6장은 마지막에 두 왕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므리의 규례들과 아합 집안의 모든 행실이 지켜지고, 너희는 그들의 계획을 따라 걸었다. 이는 내가 너를 폐허로, 그 성읍 주민들을 비웃는 휘파람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의 치욕을 짊어질 것이다.」미가 6:16 · 본디새김

오므리와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들입니다. 열왕기상 16장 23–28절에서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세운 왕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은 그가 여호와야훼의 눈에 악한 일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그의 아들 아합은 더욱 심각한 악행을 저지른 왕으로 묘사됩니다. 열왕기상 16장 30–33절에는 그가 바알을 섬기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는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넘겨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거짓 증언을 이용하여 나봇을 죽게 했고,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미가 6장에서는 바로 앞에서 거짓 계량통과 저울, 폭력과 속임수가 고발되었습니다. 따라서 아합의 이름은 우상숭배뿐 아니라 권력이 다른 사람의 권리와 기업을 침해했던 역사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의 규례를 지키는가

16절에서 중요한 표현은 「오므리의 규례들」입니다.

「규례」는 본래 정해 놓은 규칙이나 관습을 뜻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오므리가 실제로 어떤 법률 조항들을 제정했으며, 그 법률이 미가 시대에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다고까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오므리 왕조의 행위와 정책,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는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16절에서는 「그들의 계획을 따라 걸었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에는 모두 걷는다는 동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 있습니다.

오므리와 아합의 계획을 따라 걷는 길이 있습니다.

미가 6장의 처음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왜 자신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는지 물으셨습니다. 마지막에서는 그들이 누구의 길을 따라 걸었는지가 밝혀집니다.

발락의 계획과 아합의 계획

5절에서 하나님은 발락이 무엇을 「계획했는지」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16절에서는 백성이 오므리와 아합의 「계획」을 따라 걸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부의 왕이 백성을 해치기 위해 세운 계획은 하나님이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불의한 왕들의 계획을 선택하여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해치려는 외부의 계획에서 그들을 구출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무너뜨리는 불의한 계획을 스스로 삶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비웃는 휘파람」은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사람들이 조롱하거나 경악하는 반응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한때 부를 쌓고 자신들의 질서를 자랑하던 도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짊어질 것은 치욕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치욕이 정확히 누구의 수치인지를 나타내는 인칭 관계는 다소 복잡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 백성이 수치를 겪는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미가 6:1–16 본문 →

따라서 정의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할 대가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백성이 그분과의 관계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해도 되는 특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정의와 신실한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곡식을 재는 계량통이 있습니다. 무게를 다는 저울이 있습니다. 돌추를 담은 주머니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거래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그 계량통은 정해진 양보다 적게 담기고, 돌추는 사람들을 속이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도시에는 부가 쌓이고 있었지만, 정의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더 많은 제물을 요구하시기 전에, 그들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지 않고 살아가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져와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이 시장에서 사용하던 저울을 보고 계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