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밤에 찾아 헤매는 사랑
그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을 때, 사람은 어디까지 그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아가 3장은 한밤중의 잠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를 돌아다닙니다. 거리와 광장을 지나고, 밤중에 순찰하는 파수꾼들에게까지 그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마침내 만나자, 여자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데려갈 때까지 곁에 붙잡아 둡니다.
이것만으로도 한 편의 완결된 사랑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 3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광야에서 향기로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예순 명의 무장한 용사가 둘러싼 솔로몬의 침상이 등장합니다. 은과 금으로 장식한 가마가 지나가고, 왕은 혼인하는 날 어머니가 씌워 준 관을 쓰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한 여자가 밤거리를 헤매며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뒤에서는 한 왕의 침상을 예순 명의 용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랑과 가까이 있는 장소를 다루지만, 그 모습을 보여 주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아가 3장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개인의 간절함과, 사랑을 온 세상 앞에서 기념하는 화려한 의식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 두 장면을 반드시 한 사건의 전후로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가 찾은 남자가 곧 솔로몬인지, 앞의 만남이 뒤의 혼인 행렬로 이어지는지 본문은 명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두 노래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주의 깊게 읽으면, 사랑이 사람의 가장 사적인 갈망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기뻐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다
「밤마다 내 잠자리에서 내 마음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보았다. 그를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아가 3:1 · 본디새김
아가 3장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시작합니다.
첫 문장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여자는 자신의 잠자리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길을 헤매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처음부터 밖에 나가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잠자리에 누워 그를 찾습니다.
이것은 장면을 조금 이상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여자는 잠자리에서 그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잠든 여자가 꾸는 꿈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뒤이어 갑자기 도시를 돌아다니고, 파수꾼을 지나친 직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전개는 꿈의 움직임과 잘 어울립니다. 반면 잠들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실제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본문에는 여자가 잠들었다거나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실제 밤의 경험인지 꿈속의 경험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여자는 자기 잠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둘째, 「밤마다」라는 표현입니다. 원문은 ‘밤들에’라는 복수형 표현입니다. 이것을 여러 밤에 걸친 반복적인 경험으로 읽을 수도 있고,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며칠 밤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밤이 이 사랑의 갈망을 지배하는 시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셋째, 여자가 사용하는 사랑의 호칭입니다. 「마음」으로 옮긴 네페쉬(נֶפֶשׁ)는 문맥에 따라 생명, 자신, 욕구와 갈망을 지닌 존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 영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사랑하는 이」라는 번역은 여자가 자기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이 표현은 1–4절에서 네 차례 등장합니다. 여자는 그를 단순히 ‘그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찾을 때에도, 찾지 못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물을 때에도, 마침내 만났을 때에도 같은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 반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그가 여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강조합니다.
독자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찾는 여자에게 그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 밤의 도시를 헤매는 여자
결심과 실패가 반복되다
「자, 일어나리라. 도시를, 거리들과 광장들을 돌아다니리라. 내 마음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보리라. 그를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아가 3:2 · 본디새김
1절에서 여자는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행동하기로 결심합니다.
히브리어에는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가 사용됩니다. 단순히 과거에 도시를 돌아다녔다는 보고가 아닙니다. 먼저 자신에게 말하듯 결심하고, 그 뒤에 실제로 찾아보았던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는 앞 구절과 같습니다. 「그를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문장은 1절과 2절에서 그대로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잠자리에서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여자는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찾는 장소가 달라졌어도 부재는 끝나지 않습니다.
아가서는 이 과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거리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찾는 행동과 만나지 못하는 결과를 반복하여 여자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집 안은 여자의 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나 거리와 광장은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는 공적인 공간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자기 잠자리를 떠나 도시 한가운데로 나갑니다. 그 움직임 자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간절함을 보여 줍니다.
파수꾼은 여자를 발견했지만, 여자는 아직 그를 찾지 못했다
「도시를 돌아다니던 파수꾼들이 나를 만났다. 『내 마음이 사랑하는 이를 보았는가?』」아가 3:3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여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파수꾼들이 여자를 만납니다.
원문의 동사 마차(מָצָא)는 ‘찾다’, ‘발견하다’, ‘만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1–4절에서는 이 낱말이 반복되면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파수꾼들은 여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자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지 못하는지가 계속 바뀌면서 이야기의 긴장이 높아집니다.
파수꾼들은 밤에 도시를 순찰하는 사람들입니다. 도시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가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행방을 묻는 장면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파수꾼들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여자를 도왔는지, 대답하지 않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행방을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자가 물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습니다.
파수꾼들의 대답이 중요했다면 시는 그것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는 그들이 어떤 정보를 주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여자의 다음 움직임으로 넘어갑니다.
독자의 관심은 결국 한 가지에 집중됩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반복해서 찾는 모습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모습과 연결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63:1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말합니다. 시편 42:1–2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강렬한 목마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갈망의 대상이라고 명시됩니다. 반면 아가 3장의 여자가 찾는 대상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가 3장의 여자를 하나님을 찾는 영혼으로, 남자를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영적 적용에 해당합니다. 그런 읽기가 신앙적 묵상의 한 방식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한 여자의 간절함을 있는 그대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삶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밤도 있고, 그를 만나 기뻐하는 순간도 있으며, 혼인을 기념하는 날도 있습니다. 아가서는 그러한 경험을 성경 안에서 노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룹니다.
찾던 사람을 만나자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마음이 사랑하는 이를 만났다. 나는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밴 이의 방으로 데려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아가 3:4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반복되던 실패가 갑자기 끝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그가 여자를 찾아오고 있었는지, 여자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앞에서 그토록 반복되던 찾는 행동이 이제 「만났다」는 말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시는 만남 자체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곧바로 여자의 다음 행동을 전합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그를 붙잡습니다. 그가 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간절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자가 그를 놓지 않은 심리적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번이나 찾아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마침내 만난 뒤에 그를 붙잡았다는 전개가 그 행동의 강도를 이해하게 합니다.
왜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데려가는가?
여자는 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밴 이의 방」이라고 말합니다. 두 표현은 같은 장소를 반복하여 지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두 번째 표현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여자는 단순히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집, 자신을 잉태한 이의 방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여자가 태어나고 자란 삶의 근원과 연결되는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집은 무엇을 나타내나요?
먼저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속한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도시의 거리와 광장은 누구나 지나다니는 공간입니다. 반면 어머니의 집과 방은 여자의 개인적인 삶과 가족의 기억이 연결되는 공간입니다.
앞에서는 그를 찾기 위해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났다면, 이제는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이끕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일로 시작된 이야기가, 그 사람을 자신의 삶 깊숙한 곳으로 맞아들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여자는 단순히 남자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를 데려가는 사람입니다. 이 장면에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드러나는 여자의 적극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그녀는 찾고, 묻고, 만나고, 붙잡고, 데려갑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이끄는 행동의 주체가 바로 여자입니다.
그러나 시는 두 사람이 어머니의 방에서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이 육체적 친밀함을 나누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를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는 두 사람이 만났고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데려갔다는 사실까지만 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갑자기 익숙한 당부가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어머니의 집은 때때로 여성의 생활과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소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24:28에서는 리브가가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관한 소식을 어머니 집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아가서 안에서도 어머니의 집은 나중에 다시 등장합니다. 8:2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머니 집으로 이끌어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3:4의 장면이 공식적인 혼인 절차나 가족의 승인 의식을 묘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는 어머니가 실제로 두 사람을 만나는 장면도, 가족이 이들의 관계를 승인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찾았는데 왜 사랑을 깨우지 말라고 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가젤들이나 들의 암사슴들을 두고 너희에게 맹세로 당부하니, 사랑이 원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도, 일깨우지도 마라.」아가 3: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아가 2:7에 나왔던 당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놓인 위치가 다릅니다. 2장에서는 연인의 품에 안기는 장면 뒤에 이 당부가 등장했습니다. 3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붙잡고 어머니 집으로 데려간 직후에 등장합니다.
여자는 그토록 간절하게 찾던 사람을 마침내 만났는데, 왜 다시 사랑을 억지로 깨우지 말라고 하나요?
이 질문은 앞선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더 날카로워집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행동 자체가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은 아닌가요?
본문은 그 둘을 직접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붙잡은 것이 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이상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밤중에 도시를 돌아다니는 여자의 행동은 그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시적 장면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거나 상대방의 뜻과 관계없이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는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강렬한 갈망을 보여 줍니다. 반면 이어지는 당부는 사랑이 원할 때까지 사랑을 깨우거나 일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 둘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함께 생각해야 할 두 측면입니다.
사랑은 상대방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해서 사랑 자체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 당부는 여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직후에 등장하므로, 사랑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 사랑을 마음대로 다룰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지, 시가 직접적인 윤리 명령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또한 3장 전체에서 문학적인 경계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는 한 여자가 밤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전혀 다른 규모의 화려한 행렬이 펼쳐집니다.
사적인 만남의 절정과 공적인 혼인 장면 사이에 사랑의 때를 존중하라는 당부가 놓인 것입니다.
이제 시는 어머니의 작은 방에서 광야와 왕의 행렬로 시선을 옮깁니다.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는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상인의 온갖 향가루로 향을 입고 연기 기둥들처럼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는 누구인가?」아가 3: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아가 3장의 두 번째 장면을 엽니다.
지금까지 독자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시각적인 장면을 먼저 펼쳐 놓고, 그 정체를 뒤늦게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가 처음 보게 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연기입니다. 그것도 작은 연기가 아닙니다. 멀리서부터 보일 만큼 큰 규모의 행렬과, 가까이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향기가 한 장면 안에 결합됩니다.
광야에서 올라오는 여성형 표현
히브리어에서 「올라오는 이」(עָלָה)는 여성형으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 등장하는 대상을 여자나 신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6절에서 광야에서 올라오는 여자는 뒤의 솔로몬 왕과 혼인하는 신부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7절은 「보아라, 솔로몬의 침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6절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던 대상이 솔로몬의 침상이나 그와 관련된 행렬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성형 표현이 특정 여성을 가리키는지, 여성형 명사로 표현되는 대상이나 의인화된 행렬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3:4에서 남자를 찾은 여자가 곧 3:6에서 등장하는 신부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두 장면의 인물들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연기 기둥은 출애굽을 가리키는가?
광야에서 올라오는 연기 기둥은 구약의 다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 산에서 연기가 올라갑니다. 따라서 광야와 연기 기둥이라는 조합은 이스라엘 독자에게 하나님의 현현과 인도하심을 연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 3:6에서는 연기의 원인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몰약과 유향 같은 향료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이것을 출애굽 사건의 직접적인 재현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확정적인 상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가 3장에서는 그 이미지가 왕실의 화려한 행렬을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향기로운 행렬을 따라 시선이 가까워지면,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타납니다.
무장한 군인들입니다.
예순 명의 용사가 지키는 침상 — 사랑과 밤의 두려움
「보아라, 솔로몬의 침상이다. 이스라엘의 용사들 가운데 예순 명의 용사가 그 둘레에 있다.」아가 3:7 · 본디새김
6절에서는 행렬이 무엇인지 몰라 질문했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그 정체를 알려 줍니다.
「모두 칼을 쥐고 있으며, 전투 훈련을 받은 이들이다. 밤의 두려움 때문에 저마다 넓적다리에 칼을 차고 있다.」아가 3:8 · 본디새김
왕의 침상을 둘러싼 것은 꽃이나 향료만이 아닙니다. 칼을 찬 용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화려한 행렬에 뜻밖의 긴장감을 더합니다.
혼인을 기념하는 장면이라면 아름다운 옷과 음악, 잔치가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밤의 두려움에 대비하는 군인들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가요? 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실의 이동에는 위험에 대비하는 경호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떤 구체적인 위험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암살의 위협이나 전쟁, 반란 등 특정한 사건을 이 장면의 배경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3장은 밤중의 잠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밤에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파수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의 침상 주변에는 예순 명의 용사가 밤의 두려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두 장면이 같은 밤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의 밤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불안한 여자의 시간이었습니다. 뒤의 밤은 왕의 침상을 지키는 군인들이 경계해야 할 위험의 시간입니다.
같은 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대조는 사랑의 경험이 사람의 처지와 공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왕실의 사랑이 거짓이고 여자의 사랑만 참되다는 비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사랑의 자리에도 밤의 두려움에 대비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이것은 왕실 행렬의 위엄을 높이는 표현인 동시에, 그 화려함이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를 뜻하지는 않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침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미타입니다. 이는 사람이 눕는 침상이나 침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실 행렬이라는 문맥에서는 사람이 누워 있거나 실려 이동할 수 있는 침상형 운반 시설과 연결해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정확한 형태는 본문만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군인들의 수가 예순 명이라는 것은 본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에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 만든 가마 — 사랑을 장식하는 것과 사랑 자체
「솔로몬 왕이 레바논의 나무로 자신을 위해 가마를 만들었다.」아가 3:9 · 본디새김
앞 구절에서 솔로몬의 침상이 등장했다면, 이번에는 가마가 등장합니다. 시의 흐름에서 솔로몬의 침상과 가마가 하나의 왕실 행렬에 속한 대상으로 연결될 수는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은 가마의 장식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그 기둥들은 은으로, 받침은 금으로 만들었다. 앉는 자리는 자주색 천으로 되어 있고, 그 안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서 온 사랑으로 꾸며져 있다.」아가 3:10 · 본디새김
은과 금, 자주색 천은 모두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실의 가마는 평범한 나무로만 만든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여러 귀한 재료를 사용해 정교하게 꾸민 물건입니다.
가마 안을 장식한 것이 사랑이라고?
이 문장은 아가 3장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꾸며져 있다」(רָצַף)에 해당하는 표현은 어떤 표면을 덮거나 장식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식의 재료로 「사랑」이 등장합니다. 은과 금, 자주색 천은 실제 물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물건처럼 가마 안에 붙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마 안쪽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베푼 사랑으로 장식되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예루살렘의 딸들은 왕의 혼인 행렬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반면 원문의 구조는 그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장식했는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장식의 재료나 방식에 관한 표현이 시적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고쳐 읽을 확실한 근거가 없는 한, 「사랑」이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독자는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값비싼 재료의 목록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가마의 기둥은 은이고, 받침은 금이며, 앉는 자리는 자주색 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랑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왕실의 모든 재물보다 사랑이 더 가치 있다는 명시적인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가마를 묘사하는 노래가 물질적인 화려함을 나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랑이라는 말에 이른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왕실의 혼인 행렬을 이루는 것은 귀한 재료와 장식뿐만이 아닙니다. 그 행렬을 기뻐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 장면의 일부로 표현됩니다.
이제 시는 그 사람들을 직접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두 대상을 서로 다른 낱말로 부릅니다. 7절의 미타는 침상입니다. 9절의 아피르욘은 정확한 형태가 불확실한 낱말이지만, 왕실에서 사용하는 가마 또는 특별한 운반 시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두 낱말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레바논의 목재는 고급 건축 재료로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5–6장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사용된 레바논의 백향목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아가 3:9에서는 어떤 수종을 사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나가서 보아라 — 혼인 날의 왕
「시온의 딸들아, 나가서 그의 혼인 날, 그 마음이 기뻐하던 날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씌워 준 관을 쓴 솔로몬 왕을 보아라.」아가 3:11 · 본디새김
아가 3장의 마지막은 사람들을 향한 초대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이어진 시의 움직임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꿉니다. 1–4절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는 시온의 딸들이 왕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오도록 초대받습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사랑은 한 사람의 간절한 갈망이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사랑은 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보고 축하할 수 있는 혼인 행렬이 됩니다.
왕에게 관을 씌운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왕이 직접 관을 쓰거나 신하가 관을 올리는 장면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들의 혼인 날에 관을 씌워 줍니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혼인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혼인은 두 사람의 관계이지만, 왕의 혼인을 둘러싼 장면에는 그를 낳고 길러 온 어머니도 등장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그의 혼인 날」에 어머니가 씌워 준 관이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어머니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11절에서는 솔로몬의 어머니가 아들의 혼인 날에 관을 씌워 줍니다. 두 장면에 모두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다릅니다. 앞에서는 어머니의 집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은 사적인 장소입니다. 뒤에서는 어머니가 혼인 날의 왕에게 관을 씌워 주는 인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장면 모두 사랑이 단순히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적인 만남의 장소에도 가족의 공간이 등장하고, 공적인 혼인의 자리에도 어머니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에 등장하는 관이 정치적인 왕위 즉위식의 관인지, 혼인을 축하하는 관인지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그의 혼인 날」이라고 말하므로, 여기서는 혼인과 관련된 기쁨의 상징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어머니의 대응을 의도적인 문학적 구성으로 볼 수 있지만, 두 어머니나 두 장면이 동일한 가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45편은 왕의 혼인과 관련된 노래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 45:8–15에는 향기로운 옷과 왕궁, 화려하게 꾸민 여인과 혼인 행렬에 어울리는 이미지들이 나타납니다. 아가 3:6–11의 몰약과 유향, 왕실의 가마, 혼인 날의 관과 기쁨은 이러한 왕실 혼인 노래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본문이 서로를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왕실의 혼인을 기쁨과 아름다움의 언어로 묘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사야 61:10에서도 혼인의 이미지는 기쁨과 아름다운 장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곳에서는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이 신랑과 신부가 단장하는 모습에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러나 아가 3장의 솔로몬 혼인을 곧바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가서는 먼저 인간의 사랑과 혼인이라는 현실을 노래합니다. 다른 성경 본문들은 그 현실에서 익숙한 기쁨의 언어를 가져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맺음말 — 밤에 찾던 사람과 혼인 날의 관
처음에는 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이 왕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장에서는 특히 잠자리, 밤, 어머니, 예루살렘의 딸들이 두 장면을 이어 줍니다.
이 반복을 통해 아가 3장은 사랑을 한 가지 크기의 세계에 가두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와 가족, 공동체와도 관계를 맺습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합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부재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그를 향해 있는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가 3장은 왕실의 가마와 용사들을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값비싼 장식과 화려한 의식이 사랑의 깊이를 측정하는 기준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시의 처음에 등장한 여자는 그런 것 없이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은 왕실의 가마와 관계없이 이미 노래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에는 아무도 모르는 밤의 갈망이 있고, 사람들 앞에서 함께 기뻐하는 날도 있습니다.
아가 3장의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솔로몬이 서 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어머니가 씌워 준 관이 있습니다.
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관의 값이나 왕의 권세가 아닙니다.
「그 마음이 기뻐하던 날」이라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올라온 향기와 군인들의 칼, 은과 금의 장식을 지나, 노래는 마침내 혼인하는 사람의 기쁨에 이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