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믿음이 이기는 승리
아들 안에 있는 생명
요한일서의 마지막 장에는 한 가지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앞 장들에서 저자는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구별하라고 거듭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지켜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며,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이 왜 이 편지를 썼는지 밝힙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저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독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믿음이 충분히 강하다는 느낌일까요? 형제를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자신감일까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다는 확신일까요?
저자는 이 모든 질문을 하나의 사실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11절).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중심에 놓으면 5장의 서로 다른 주제들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지, 왜 물과 피와 영의 증언이 중요한지, 기도에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편지의 마지막이 우상을 경계하는 명령으로 끝나는지까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쌓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믿고 있으며, 그분 안에서 무엇을 이미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낳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요한일서 5: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세 가지 관계를 하나의 문장 안에 묶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태어났습니다」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출생이 현재의 신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믿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보다 어디에서 생명을 받았는지를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새로운 출생의 시간적 순서를 세밀하게 확정하려는 논증이라기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의 정체성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생명으로 설명하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낳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에는 가족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자녀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에게서 태어난 이」가 누구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문제를 다루므로, 문맥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다른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단수형 표현이라는 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앞의 고백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읽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은 하나님과 그분에게 속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랑의 본질과 어긋납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사랑의 관계를 반대 방향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것으로 압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행할 때 말입니다.요한일서 5:2 · 본디새김
앞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준이 됩니다.
방향이 뒤집힌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기준도 사랑인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따르는 삶과 일치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뜻대로 그를 움직이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바로잡고 확인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무겁지 않습니다.요한일서 5:3 · 본디새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과 연결된다는 앞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계명은 무겁지 않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도 어렵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힘듭니다. 앞에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3:16).
무겁지 않다는 것은 쉽다는 뜻인가?
「무겁다」는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명이 무겁지 않다는 말은 그 명령에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는다거나, 순종하는 일이 언제나 수월하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그 계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를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그 이김은 이것입니다 —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4 · 본디새김
이제 계명이 무겁지 않은 이유가 드러납니다. 계명이 쉬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그 계명을 감당할 새로운 생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논증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출생의 근원으로 향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세상의 욕망과 거짓을 이겨야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 출생은 세상을 이기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승리의 정체를 밝힙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자체가 마법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독립적인 정신력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누구를 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입니까?요한일서 5:5 · 본디새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막연한 긍정적 사고나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시며, 죄를 없애시고 마귀의 일을 허무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믿는 사람은 바로 그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지배하거나 모든 경쟁에서 성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편지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욕망과 거짓의 질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 질서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삶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 승리는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세상의 욕망과 거짓에 지배되지 않는다면, 저자는 그것을 승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참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저자는 다음 단락에서 증언의 문제를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은 다」에서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중성 단수형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비인격적인 어떤 능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뒤 문맥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을 이야기하므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신 분
이분이 물과 피를 거쳐 오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증언하는 것은 그 영입니다. 그 영이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요한일서에서 가장 어려운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과 피를 거쳐 오셨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저자는 별도의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이 표현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오늘날의 독자는 그 의미를 쉽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라고 한 번 말하고 지나가지 않고,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물은 인정하면서 피는 인정하지 않는 어떤 주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어떤 주장으로 피의 의미를 부정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물과 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주요 해석은 셋입니다. 물을 예수님의 세례, 피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는 읽기, 요한복음 19:34에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나온 피와 물로 보는 읽기, 물을 세례·피를 성찬의 피와 연결하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저자가 지키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 전체인지, 예수님의 실제 죽음과 육체성인지, 초대교회의 예배와 성례적 경험인지가 달라집니다. 첫째를 가장 설득력 있는 읽기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서로 다른 읽기들이 가능하므로 하나를 확정된 뜻으로 본문에 넣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세 읽기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그분의 실제 역사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특히 피를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 피가 그토록 중요한가
앞 장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셨음을 고백하는 것이 참된 영을 분별하는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에서는 그 예수님께서 물로만이 아니라 피로도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오심이 중요하고, 그 인간적 삶은 죽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편지에서는 이미 예수님의 피가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했고(1:7),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이시라고 선언했습니다(2:2). 따라서 5:6의 피를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해 읽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분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과 직접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면, 피를 굳이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구원의 길에서 우연히 일어난 불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사역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언하는 분이 계십니다. 「증언하는 것은 그 영입니다. 그 영이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거짓 예언자들의 영을 시험하라고 했던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의 실제 오심과 죽음을 넘어서는 다른 구원의 비밀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셋의 증언이 하나로 모이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기 때문입니다 — 그 영과 물과 피입니다. 그리고 그 셋은 하나로 모입니다.요한일서 5:7–8 · 본디새김
「그 셋은 하나로 모입니다」는 셋이 하나의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각각의 증언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막연한 신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증언이 있습니다.
그 증언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실제 오심과 사역, 죽음, 그리고 그 사실을 증언하는 영입니다. 일부 오래된 번역본에는 이 자리에 하늘의 세 증인인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을 언급하는 긴 문장이 들어 있지만, 초기 그리스어 사본의 뒷받침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증언하는 셋을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선언으로 바꾸어 읽기보다는,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영과 물과 피의 증언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제 저자는 더 중요한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 증언의 궁극적인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조금 더 깊이
물과 피의 세 읽기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세례와 죽음으로 보는 읽기는 「물로만이 아니라」는 강조를 설명하는 데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때에만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이셨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4와 잇는 읽기는, 요한복음이 그 사건 바로 다음 절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강조하고(19:35) 요한일서 5장도 물과 피에 이어 증언을 반복한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피와 물」의 순서이고 요한일서에서는 「물과 피」라는 차이가 있으며, 「물로만이 아니라」는 강조를 이 해석이 어떻게 설명하는지도 검토해야 합니다. 성찬과 잇는 읽기는 초대교회의 예배를 배경으로 하지만, 저자가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신자의 예배 행위보다 예수님 자신의 역사적 오심과 사역을 가리킨다고 읽는 쪽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영의 증언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15:26에서도 진리의 영이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며, 요한일서의 진술은 그 말씀과 주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셋의 증언은 신명기 19:15의 법적 증언 전통, 곧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확정하지 않고 두세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일서가 이 구절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여러 증언이 하나의 사실을 확증한다는 구조에서는 의미 있는 연결이 있습니다. 하늘의 세 증인을 말하는 긴 문장은 흔히 요한의 쉼표(Comma Johanneum)라고 부르며, 후대 라틴어 전승에서 발전하여 일부 그리스어 사본과 번역에 들어간 것으로 평가됩니다. 짧은 본문은 이러한 본문비평적 판단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 관해 무엇을 증언하셨는가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증언은 더 큽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분이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9 · 본디새김
일상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직접 보지 못한 사건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증언이 믿을 만한지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증언이 더 큰 것은 증언의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증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종교적 원리나 도덕적 교훈에 관해서만 증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는 어떤 종교 지도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0 · 본디새김
하나님의 증언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정보로만 남지 않고, 그 아들을 믿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영이 증언한다고 했고, 이 편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머무는 일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증언을 안에 지닌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증언과 내적인 확신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 낸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 하신 증언을 받아들여 지니는 사람입니다.
반면 그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거짓된 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언을 거부하는 행위가 하나님이 참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취급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언의 내용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11절에서 저자는 마침내 그 내용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1 · 본디새김
저자는 하나님의 증언을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그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자리를 밝힙니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흔히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장차 사람에게 주실 어떤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에는 장차 완성될 소망이 포함됩니다. 요한일서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믿는 사람들이 그분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2).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는 이미 주셨다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끝없이 오래 존재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누리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아 독립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물건과 같지 않습니다.
그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없습니다.요한일서 5:12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이 편지 전체의 논증을 압축합니다. 저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할 여러 단계의 과정을 열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들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분께 속해 있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생명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영적 지식이나 특별한 체험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그토록 엄중하게 경계했는지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는 문제는 단순히 신학적 지식에 오류가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연결됩니다. 첫 장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고, 그 생명을 믿는 사람들이 이미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7:3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연결하십니다. 요한일서도 같은 방향에서 영원한 생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이것을 쓴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내가 이것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3 · 본디새김
저자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생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아직 없는 것을 얻도록 권면하는 일과, 이미 가진 것을 확신하게 하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요한일서의 독자들은 거짓된 가르침과 공동체의 분열 속에서 혼란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를 떠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다른 주장을 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참된지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새로운 비밀이나 특별한 지식을 제공하여 그 불안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증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그분의 아들 안에 있으며, 독자들은 그 아들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확신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물론 이 편지는 믿음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 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와 권면의 목적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까지 끝없는 자기검사의 순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목적
요한복음 20:31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을 밝힙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목적을 밝힙니다. 두 본문의 표현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요한복음은 믿고 생명을 얻는 데, 요한일서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그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 차이를 두 문서의 모든 목적을 엄격하게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도 믿는 사람들의 확신을 다루고, 요한일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확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가지는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는 이것입니다 —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이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4 · 본디새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 다음에 기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생명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하지만, 그 구함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자가 원하는 모든 일을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방식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소리가 하나님께 전달되었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그분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끝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를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최선인지 충분히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이 들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분에게 구한 것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요한일서 5:15 · 본디새김
저자는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에서 구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이 문장은 14절의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구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를 모든 기도의 결과가 이미 눈에 보이는 형태로 실현되었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분께 구한 것을 신뢰 가운데 맡길 수 있다는 확신이 중심입니다.
기도의 확신은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께 말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이 기도의 확신을 가장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합니다. 죄를 짓는 형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장면(마태복음 26:39)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아뢰셨지만,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요한일서가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기도를 아버지의 뜻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보았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자기 형제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구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 형제에게, 곧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나는 그 죄를 두고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요한일서 5:16 · 본디새김
누군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봅니다. 그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자의 첫 번째 대답은 기도입니다.
저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의로운 삶과 형제 사랑으로 구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죄를 짓는 형제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제시하는 행동은 그를 정죄하거나 공동체에서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를 위해 구하는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기도의 확신이 이제 죄를 짓는 형제에게 향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생명은 다른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죽음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저자는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죄,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의 배교,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완고한 상태입니다. 모두 문맥상의 근거가 있지만 본문은 구체적인 죄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행동 하나를 곧바로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확정하거나, 죄의 심각성을 일정한 등급으로 나누어 이 구절에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 육체적인 죽음인지, 하나님과의 생명에서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인지도 논의됩니다. 이 편지에서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영적인 죽음으로 이해할 근거가 강하지만, 특정한 죄에 대한 육체적 죽음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본문은 그 의미를 명시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그 구별을 사용하면서도 독자들에게 모든 죄인을 일괄적으로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인가
「나는 그 죄를 두고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는 「그 죄를 두고 절대로 기도하지 마십시오」와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문장에서도 부정은 「기도한다」는 동사가 아니라 「말한다」는 동사에 걸려 있습니다. 저자는 죽음에 이르는 죄에 관하여 기도를 명령하거나 권면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 명시적인 금지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어떤 사람을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으로 판단한 다음, 그를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죄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절차나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권을 인간에게 주는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형제를 위한 기도이며, 그 기도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연결됩니다. 본디새김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을 하나님으로 읽으면,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을 직접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그 형제를 맡기는 사람입니다.
이미 믿는 형제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말은 새로운 출생의 반복이라기보다, 죄로 인해 위험에 처한 형제를 하나님이 회복시키고 생명의 길에 머물게 하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회복의 과정을 뜻하는지는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죄를 짓는 형제에게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요한일서 5:17 · 본디새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해서 그 죄가 가볍거나 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죄의 심각성을 줄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죄를 죽음에 이르는 죄와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언제나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한 속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가 정확히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형제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상당히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그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는 그를 비판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확인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 형제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거부로 읽는 근거는, 저자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경계했고(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셨음을 인정하지 않는 영을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영이라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4:2–3). 배교로 읽으면 그것은 어떤 잘못된 행동 하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을 거부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또한 16절에서 생명을 준다는 동사의 주어는 그리스어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의 기도하는 사람이 계속 주어라고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주어로 전환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을 주어로 세웠는데,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고(5:11)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읽기에 무게를 둡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 가지 사실
5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독특한 반복이 나타납니다. 18절, 19절, 20절이 모두 「우리는 …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저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고, 독자들이 알고 있어야 할 세 가지 사실을 선언합니다.
첫째,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악한 자의 관계입니다.
둘째,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과 세상의 관계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되신 분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악한 자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죄를 짓지 않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키며, 악한 자가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습니다.요한일서 5:18 · 본디새김
3장의 어려운 진술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표현을 신자는 실제로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으면 편지의 다른 구절들과 긴장이 생깁니다. 바로 앞에서도 죄를 짓는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죄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은 죄를 자신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절의 둘째 문장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본디새김처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키며」로 읽으면 믿는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책임이 강조되고, 마지막 21절에서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라는 명령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키신다」로 읽으면,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여 신자의 보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여기에는 대명사의 차이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관한 문제가 함께 얽혀 있어, 문법적으로 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두 읽기의 차이는 작지 않으므로 번역이 어느 쪽을 따르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악한 자가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습니다」는 같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이나 유혹에서 완전히 면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거짓된 가르침과 죄의 위험을 거듭 경고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소속과 보호에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일서 5:19 · 본디새김
저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과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는 세상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 표현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악하다거나,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행동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편지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질서와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인간 현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저자는 세상이 스스로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악을 선택하고 있다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놓여 있다」는 말은 세상이 악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 있는 현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절을 2:2와 함께 읽으면 뜻밖의 긴장이 드러납니다. 2:2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위한 속죄이십니다. 같은 세상이 한편으로는 악한 자의 영향력 아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 세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악한 자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시고 마귀의 일을 허무시기 위해 나타나셨다는 선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세상이 이미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 악한 자의 영향력이 존재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이제 저자는 세 번째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참되신 분을 알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 계시고 우리가 참되신 분을 알도록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십니다.요한일서 5:20 · 본디새김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목적을 「참되신 분을 알도록」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셨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실제로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깨닫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깨닫는 마음」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능력, 정신이나 이해력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믿음이 인간의 지적 이해와 무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이나 특별한 직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이해를 열어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높은 지혜에 도달하여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되신 분을 알게 하셨습니다.
참되신 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지식에서 관계로 나아갑니다. 참되신 분을 알게 되었고, 그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된 정보를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되신 분 안에,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두 분이 동일한 한 인격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참되신 하나님 안에 있다는 관계를 설명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십니다」가 해석 문제를 남깁니다. 「이분」은 바로 앞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실까요, 아니면 앞에서 두 번 언급된 「참되신 분」, 곧 아버지 하나님일까요?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편지의 첫머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 드러났다고 말했으며, 5:11–12에서도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해석은 요한복음 1:1에서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말하는 것과도 신학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앞에서 「참되신 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그분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합니다. 요한복음 17:3에서도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문장의 지시어가 반드시 가장 가까운 명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므로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해설에서는 양쪽 근거를 검토한 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해석에 무게를 두지만, 지시 대상의 불확실성 자체도 인정합니다. 어느 한 해석이 문법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해석 모두에서 참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아들 안에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편지가 아름답게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 선언보다 더 장엄한 결말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마지막에 단 한 문장을 더합니다. 그 문장은 뜻밖에도 경고입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십시오
자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십시오.요한일서 5:21 · 본디새김
이것이 요한일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문안이나 축복의 인사도 없습니다.
왜 하필 우상일까요?
이 편지는 우상 숭배의 구체적인 관습을 길게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랑, 거짓 예언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영원한 생명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결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앞 20절의 「참되신 분」 「참 하나님」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거짓된 신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아들 안에서 받은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 아닌 다른 대상을 생명의 근원처럼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은 단순한 조각상인가?
「우상」은 신상이나 우상, 신을 나타내는 형상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문자적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여러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관습이 널리 존재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이 말은 실제적인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마지막 문맥을 고려하면, 우상을 물질적인 신상에만 한정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했을 수 있지만, 저자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된 신 이해나 예수 그리스도 이해를 참 하나님 대신 붙드는 일도 우상 숭배와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마지막 절에서 특정한 거짓 교사들을 직접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경고가 실제 신상 숭배를 가리키는지, 거짓된 하나님 이해까지 포함하는지, 또는 두 측면을 함께 포괄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이 서로 대조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지키라는 마지막 명령
저자는 거짓된 가르침의 정체를 모두 분석하여 완벽한 분류표를 만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 지키십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분별과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책임은 이미 받은 생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명령은 편지 전체를 뒤집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 그 생명을 주신 참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아는 사람도, 영원한 생명을 지닌 사람도 여전히 거짓된 것을 붙들고 생명의 근원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위험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된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오늘의 삶과 연결한다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과 안전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는 태도 역시 우상 숭배의 신학적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이 직접 열거한 우상 목록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생명의 근원에 관한 본문의 논리에서 이끌어 낸 적용이라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조는 성경 전체의 우상 비판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115:4–8은 우상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묘사합니다. 그 시편의 본래 관심은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와 사람이 만든 우상 사이의 차이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분이고, 우상은 사람이 들고 옮겨야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이며, 우상은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요한일서는 이 전통적인 대조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선언 다음에 놓고 있습니다.
참되신 분을 아는 자녀들에게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을 마지막까지 「자녀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장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믿음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믿음이 참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거짓된 것을 굳게 믿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자기 믿음의 강도를 끊임없이 측정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그 믿음이 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이 가진 능력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마지막 경고가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이 문장은 아름다운 결론을 갑자기 끊어 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들,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을 생명의 근원처럼 붙들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되신 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별의 끝이 아니라 분별하며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생명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생명은 그분의 아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마지막까지 그 생명을 받은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십시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