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6–27장 · 다윗의 등장
하나님이 보신 왕
사무엘상 16장은 다윗이 처음 등장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장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양과 염소를 치다가 불려 오고, 형제들 가운데서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의 궁정으로 들어가 수금을 연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고, 그를 부르고, 그에게 일을 맡기지만 정작 다윗 자신의 말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왕으로 선택된 뒤 처음 맡는 역할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왕궁에 들어갈 때는 왕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왕좌에 앉아 있는 사울을 섬기기 위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신하게 될 왕의 고통을 덜어 줍니다.
이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말은 ‘보다’입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을 ‘보아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방식과 자신이 보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사울의 시종은 자신이 이새의 아들을 ‘보았다’고 말하며 다윗을 추천합니다.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애도하는 사무엘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
이야기는 사무엘의 슬픔 속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사무엘에게 말했다. 「너는 언제까지 사울을 두고 애도하겠느냐? 나는 그를 거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지 못하게 했다. 네 뿔병에 기름을 채우고 가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보내겠다.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나를 위한 왕을 보아 두었기 때문이다.」사무엘상 16: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셨던 앞 장의 마지막 장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은 사무엘의 애도가 잘못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내려진 판결 앞에서 사무엘이 계속 머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울의 실패는 사무엘에게 아픈 일이었지만, 그 실패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찾아가지만, 하나님은 이미 왕을 보셨습니다. 사무엘에게 필요한 것은 적합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나를 위한 왕’을 보아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장면을 연결하면 왕정의 방향을 둘러싼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백성이 원하는 왕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왕의 모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작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사무엘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사울이 들으면 저를 죽일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어린 암소 한 마리를 끌고 가서 『나는 여호와야훼께 제물로 잡아 바치러 왔소』라고 말하여라.」사무엘상 16:2 · 본디새김
사울은 왕으로서 거부되었다는 선언을 들었지만, 아직 실제로 왕좌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군사력과 정치적인 권한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을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새로운 왕이 실제로 통치하는 일이 서로 다른 시점에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실제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거짓된 목적을 꾸며 낸 것이라기보다, 실제 목적 가운데 왕의 기름부음이라는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본문은 하나님의 지시 아래 목적을 일부 숨기는 행동을 전합니다. 이를 모든 상황에서의 기만을 허용하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야훼가 말한 대로 하여 베들레헴으로 갔다. 성읍의 장로들이 떨며 그를 맞이하여 물었다. 「평화로운 일로 오셨습니까?」사무엘상 16:4 · 본디새김
장로들이 두려워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며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예사롭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방문을 사울의 왕권 문제와 연결하여 알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평화로운 일로 왔다고 대답하고 희생제사를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왕을 이미 보셨지만, 사무엘은 아직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새는 아들들을 데려오지만, 누구에게 기름이 부어질지 모릅니다.
이야기는 독자에게도 선택받을 사람의 이름을 당장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사무엘도 잘못 보았다
이새의 아들들이 도착하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봅니다.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말했다. 「분명 여호와야훼 앞에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있구나.」사무엘상 16:6 · 본디새김
그러나 곧바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여호와야훼가 사무엘에게 말했다. 「그의 생김새와 큰 키를 보지 마라. 나는 그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보는 대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여호와야훼는 마음을 본다.」사무엘상 16:7 · 본디새김
사무엘상 9:2에서 사울은 용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10:23에서는 그가 다른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키가 컸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찾는 자리에서도 다시 큰 키와 뛰어난 외모에 주목합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문학적 대조라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왕에게 적합해 보이는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에서는 아직 사울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셈입니다.
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단지 감정이나 따뜻한 성품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도하고, 결심하는 인간의 내면을 폭넓게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행동을 낳는 내면을 보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보시는 방식을 설명하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다윗이 매우 순수하거나 완벽하게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직 다윗의 성품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엘리압의 마음이 악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거부했다’는 것은 이 문맥에서 왕으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엘리압의 인격 전체에 대한 정죄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예언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 역시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 잘못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더 날카로운 관찰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의 역할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자신의 판단으로 대체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초대받지 못한 막내가 오기까지
엘리압이 선택되지 않자 이새는 아비나답을 지나가게 합니다.
그도 선택되지 않습니다.
다음은 삼마입니다.
그 역시 선택되지 않습니다.
이새는 자기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들을 택하지 않으셨소.」사무엘상 16:10 · 본디새김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윗을 소개하지 않고,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이 준비한 후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앞을 지나간 아들들은 이새가 희생제사 자리에 데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아 두신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다. 「아들들이 이들뿐이오?」 그가 대답했다. 「아직 막내가 남아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양과 염소를 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다.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에 올 때까지 우리는 둘러앉지 않겠소.」사무엘상 16:11 · 본디새김
이새가 왜 그를 부르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막내라서 중요하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고, 단순히 가축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족에게 멸시받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올 때까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곱 아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고, 막내는 들판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일곱 아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없던 막내를 기다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준비한 후보들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새가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다. 그는 혈색이 붉고 눈이 아름다웠으며 용모가 좋았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바로 이 사람이다.」사무엘상 16:12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외모가 왕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았을 때는 자기 판단으로 왕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등장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때까지 본문은 선택받을 막내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은 뒤에야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기름이 든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날부터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세차게 임했다. 사무엘은 일어나 라마로 갔다.사무엘상 16:13 · 본디새김
다윗은 자신의 이름이 이야기에서 분명히 밝혀지는 순간,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한 직무를 위해 선택하셨다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영이 임했다는 것은 그 선택이 단지 사람들의 인정이나 의례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왕좌에 앉지 않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을 소집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왕의 즉위식을 묘사하지 않고, 곧바로 사울에게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둘러앉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돌아서거나 둘러서는 의미를 지닐 수 있어, 제사와 관련된 자리에 앉는 일을 가리키는지 그 자리를 떠나는 일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가축을 먹이고 보호하며 이동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목자’는 백성을 책임지고 다스리는 지도자를 가리키는 비유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78:70–72는 바로 이 연결을 명시적으로 발전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양 떼를 돌보던 자리에서 데려와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가 마음의 온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백성을 이끌었다고 회고합니다. 사무엘하 5:2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음을 회고합니다. 사무엘하 7:8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목장에서 불러내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본문들은 사무엘상 16장에서 처음 등장한 목자의 모습을 왕의 소명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한 사람에게 임한 영, 다른 사람에게서 떠난 영
13절과 14절은 나란히 읽을 때 특히 강한 인상을 줍니다.
13절에서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임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났고,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악한 영이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사무엘상 16:14 · 본디새김
다윗에게 일어난 일은 아직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권력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사울은 여전히 왕궁에 있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보이는 권력의 상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서로 다르게 보여 줍니다.
사울의 왕권은 외적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그를 왕으로 세우실 때 역사하셨던 여호와야훼의 영은 떠났습니다. 다윗은 아직 목자의 자리에서 왕궁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그에게는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했습니다.
왕권의 외적인 모습이 바뀌기 전에, 이야기는 먼저 왕권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영이 사울을 심한 두려움과 고통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신하들도 그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왕에게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자고 제안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음악이 예배나 축제뿐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고 특별한 영적 상태와 관련된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었습니다. 사무엘상 자체에서도 예언자들의 무리와 악기가 함께 등장합니다(10:5). 그러나 이 장은 수금이 어떤 원리로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사울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를 위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좀 찾아 내게 데려오너라.」사무엘상 16:17 · 본디새김
이 짧은 명령을 통해 새로운 왕과 기존 왕의 삶이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하가 찾아낼 사람은 다름 아닌 조금 전에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은 다윗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악한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루아흐 라아입니다. 여기서 ‘악한’은 도덕적인 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해롭거나 고통을 주는 성격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독립적인 악한 영적 존재가 사울을 괴롭혔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거나 보내신 고통스러운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그 영의 정체나 작용 방식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현대의 특정 정신질환으로 진단하거나, 반대로 정신적인 고통은 모두 악한 영 때문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한 ‘여호와야훼에게서 왔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시라는 뜻으로 곧바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이 표현은 고통을 주는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나는 독립적인 힘으로 묘사하지 않는 이 이야기의 신학적 관점을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사울을 괴롭게 하셨는지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사울이 불러들이다
한 시종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시종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금을 탈 줄 알며, 용맹하고 싸움에도 능합니다. 분별 있게 말하고 용모가 좋으며, 여호와야훼께서 그와 함께하십니다.」사무엘상 16:18 · 본디새김
여기서 ‘보았습니다’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시종은 다윗을 왕으로 알아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윗을 사울에게 필요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서만 세상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자리로 나아갑니다.
시종은 다윗의 여러 능력과 특징을 설명한 뒤 그와 함께하시는 분을 언급합니다. 독자는 이 평가를 특별하게 듣게 됩니다. 조금 전에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세차게 임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름부음 사건을 알고 있다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앞부분을 읽은 독자는 그의 말이 다윗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다윗을 곧바로 왕궁에 보내라는 명령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울의 고통이 있고, 신하들의 제안이 있고, 다윗을 알고 있던 시종의 추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울 자신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사울이 이새에게 사자들을 보내 말했다. 「양과 염소를 치고 있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 보내라.」사무엘상 16:19 · 본디새김
그는 다윗이 자신을 대신할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해결할 사람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선택하신 사람이 사울 자신의 요청에 따라 왕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은 사울의 왕권을 빼앗으러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울의 요청을 받아 그를 섬기러 들어옵니다.
이새는 다윗을 보내면서 빵과 포도주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마련합니다. 이러한 물품은 왕을 찾아가는 자리에서 바치는 예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다윗이 여전히 아버지의 집에 속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무기를 드는 사람이 됩니다. 무기를 드는 일은 단순히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넘어, 전쟁에서 지도자의 곁을 지키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다윗이 사울의 가까운 수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다윗이 내 앞에서 시중을 들게 해 다오. 그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사무엘상 16:22 · 본디새김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도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선택하신 사람과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 사이에는 아직 적대감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를 곁에 두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시종이 다윗의 전투 능력을 어떤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다윗이 이미 특정한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확정적인 기록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시종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전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확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괴롭게 하신 목적이 오직 다윗을 왕궁에 들이기 위해서였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정하면 본문이 말하지 않은 하나님의 의도를 확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는 사울에게 일어난 고통과 다윗에게 열린 새로운 길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울을 편안하게 해 주는 새로운 왕
이 장의 마지막 장면은 앞서 나온 모든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읍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가져다가 손으로 탔다. 그러면 사울은 한결 편안해지고 나아졌으며,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났다.사무엘상 16:23 · 본디새김
한 사람은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실 때 주셨던 영을 잃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왕의 자리에 있지 않지만 왕으로 선택받고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섬깁니다.
다윗에게 임한 여호와야훼의 영은 그를 즉시 높은 자리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장에서 다윗이 그 영을 받은 뒤 하는 일은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거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 곁에 서서 수금을 연주합니다.
「임할 때마다」라는 표현은 사울이 반복적으로 고통을 겪었고, 그때마다 다윗이 연주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수금 연주가 사울의 고통을 영원히 끝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주하는 동안 사울이 실제로 안정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거부를 받은 왕이지만, 본문은 그가 더 이상 돌봄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괴로움을 겪고 있고, 그의 신하들은 그를 도울 방법을 찾습니다. 다윗도 그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거부하셨다는 사실은 그를 향한 모든 인간적인 연민이나 도움까지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아직 사울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장에서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고, 사울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이 평화로운 관계를 먼저 보여 주기 때문에 이후 사울과 다윗 사이에 펼쳐질 이야기 역시 더 복잡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직 왕이 아닌 왕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이 장이 끝날 때까지 왕좌에 앉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보이는 상황을 따라 행동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보다 넓습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모든 사람이 부당한 권력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거나, 낮은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다윗의 특별한 역사적 소명을 전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경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이 있고, 그의 곁에 다윗이 서 있습니다. 다윗은 수금을 손에 들고 연주합니다. 사울은 그 소리를 들으며 한결 편안해집니다.
사울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섬깁니다.
그 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다윗 자신뿐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나 신하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왕은 아직 사람들의 눈에 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은 그 모습을 바꾸어 놓으려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윗이 왕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장면도, 사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저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은 젊은이가, 여호와야훼의 영이 떠나 괴로워하는 왕 앞에서 수금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잠시 평안을 얻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