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16–27장 · 다윗의 등장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신 밤, 다윗의 선택
깊은 밤, 이스라엘의 왕과 삼천 명의 군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왕의 머리맡에는 창이 꽂혀 있고, 그 곁에는 물병이 놓여 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군사들 사이를 지나 왕에게 다가가지만 아무도 눈을 뜨지 않습니다.
아비새는 이 순간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가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으니, 이제 단 한 번의 창질로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서술자는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깊은 잠이었다고 직접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울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면, 왜 다윗은 그 기회를 사용하여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앞서 엔게디 동굴에서도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지만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비슷한 사건을 되풀이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사울이 우연히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스스로 사울의 진영에 들어갑니다.
이야기는 단순히 다윗이 다시 한번 사울을 살려 주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는 기회조차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한다는 문제로 나아갑니다.
다시 찾아온 십 사람들 — 사울의 추격은 왜 끝나지 않는가
이야기는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십 사람들은 이미 앞서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에게 알려 준 적이 있습니다(23:19–20). 그들의 행동이 다시 등장하면서 다윗이 처한 위험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전에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악하게 행동했다고 인정했고,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다고 말했습니다(24:18).
그런데 지금 다시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본문은 사울이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전의 고백이 지속적인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그 잘못된 행동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왜 스스로 적진으로 가는가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 사울의 도착을 확인합니다. 그런 다음 직접 사울의 진영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다윗은 일어나 사울이 진을 친 곳으로 갔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군대 지휘관인 넬의 아들 아브넬이 누워 있는 곳을 보았다. 사울은 진지 안에 누워 있었고, 군사들은 그의 둘레에 진을 치고 있었다.사무엘상 26:5 · 본디새김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지휘관이며 사울의 친족입니다(사무엘상 14:50–51).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고 군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동굴 속에서 홀로 용변을 보던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번 사울은 군대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에게 접근하려면 경계를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곳에 들어가기로 결정합니다.
본문은 그가 처음부터 사울의 창을 가져올 계획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구체적인 의도가 언제 정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사람들 가운데 동행할 사람을 찾습니다.
「두 번 찌르지는 않겠습니다」 — 아비새에게 너무나 분명해 보였던 하나님의 뜻
다윗은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한 사람은 헷 사람 아히멜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입니다. 아비새는 요압의 형제입니다. 훗날 다윗의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입니다.
다윗이 누가 자신과 함께 사울의 진영으로 내려가겠느냐고 묻자 아비새가 나섭니다. 둘은 밤중에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은 잠들어 있고, 창은 머리맡 땅에 꽂혀 있습니다. 아브넬과 군사들도 모두 누워 있습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창으로 그를 단번에 찔러 땅에 박아 버리게 해 주십시오. 두 번 찌르지는 않겠습니다.」사무엘상 26:8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두 가지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사울이 무방비 상태에 놓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판단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사울을 죽여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아비새는 이 두 판단을 아무런 간격 없이 연결합니다.
‘두 번 찌르지는 않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비새의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단 한 번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칼을 쥐여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대신 실행하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직접 사울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사울의 죽음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허락 아래 사울이 죽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런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말했다. 「그를 죽이지 마라. 누가 여호와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분에게 손을 대고도 죄를 면하겠느냐?」사무엘상 26:9 · 본디새김
이것은 대리인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길까지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자기 손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신이 허락한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아비새의 판단이 전적으로 허황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뒤에서 서술자는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깊은 잠이 군사들에게 내렸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잠들게 하셨다는 사실과 사울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사울을 죽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비새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상황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윗은 상황이 주는 가능성과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별합니다.
사울의 죽음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 다윗이 선택하지 않는 한 가지 길
다윗은 아비새를 막은 뒤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말했다.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분명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치시거나, 그의 날이 와서 그가 죽거나, 전쟁에 내려갔다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사무엘상 26:10 · 본디새김
다윗의 요점은 사울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죽으리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울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지금 자신이 사울을 죽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왕권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장차 왕이 되리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지는 자신의 뜻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분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결코 있을 수 없다. 이제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챙기거라. 그리고 떠나자.」사무엘상 26:11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창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창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물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을 하나님께서 사울의 죽음에 관하여 세 가지 예언을 주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죽음의 가능성을 열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왕의 창이 사라졌다 — 사울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기
사울의 창은 사무엘서에서 특별한 물건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서 수금을 연주하던 때,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사무엘상 18:10–11; 19:9–10). 사울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도 창을 던졌습니다(20:33). 창은 여러 차례 사울이 행사하려 했던 폭력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창이 사울의 머리맡에 꽂혀 있습니다.
사울이 가진 무기가 사울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그 창을 가져옵니다.
사울은 창을 사용하여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손에 넣었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지 않습니다.
같은 무기 앞에서 두 사람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물병은 왜 함께 등장하는가
다윗은 창만 가져오지 않습니다. 물병도 가져옵니다. 광야에서 물병은 일상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건입니다. 창이 전투와 방어에 관련된 물건이라면, 물병은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입니다.
두 물건 모두 사울의 머리맡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것들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의 바로 곁까지 접근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물건을 가져오는 순간에도 아무도 깨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져왔고, 그들은 떠났다. 보는 사람도 없고,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고, 잠에서 깨는 사람도 없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깊은 잠이 그들을 덮쳐 모두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사무엘상 26:12 · 본디새김
서술자는 이렇게 반복하여 다윗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군사들이 깨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경비가 허술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께서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다윗의 선택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군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다윗에게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윗은 사울을 살려 둡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자리에서 다윗이 내린 선택이, 곧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날 그의 의로움의 증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그의 선택을 시험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이야기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만, 본문은 그중 하나를 명시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산 건너편의 외침 — 누가 정말 왕을 지켰는가
다윗은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진영에서 빠져나옵니다.
다윗은 건너편으로 넘어가 멀리 떨어져 산꼭대기에 섰다. 그들 사이에는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사무엘상 26:13 · 본디새김
다윗은 이제 사울의 군대가 자신을 쉽게 붙잡을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 하지만,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위험에 다시 노출시키지는 않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사울이 아니라 아브넬을 부릅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말했다. 「그대는 사나이가 아니오? 이스라엘에 그대 같은 사람이 누가 있소? 그런데 어째서 그대의 주군인 왕을 지키지 않았소? 군사 한 명이 그대의 주군인 왕을 죽이려고 왔는데 말이오.」사무엘상 26:15 · 본디새김
그는 왕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들어 아브넬의 경계 실패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한 이 일은 옳지 않소.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그대들은 죽어 마땅하오. 그대들의 주군, 곧 여호와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제 왕의 창과 그의 머리맡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는지 보시오.」사무엘상 26:16 · 본디새김
아브넬은 왕을 지켜야 할 사람이었지만 왕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왕에게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왕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사울의 생명을 지킨 결정적인 행동은 삼천 명의 군사가 수행한 경계가 아니라,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통해 사울에게 자신을 계속 추격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이 말하는 ‘군사 한 명’은 자신들의 침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실제로 사울을 죽이려고 진영에 들어갔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실제로 아브넬과 군사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절차를 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왕을 보호하지 못한 잘못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겨라」 —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상실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다윗이 말했다. 「저의 주 임금님, 제 목소리입니다.」사무엘상 26:17 · 본디새김
그러나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맞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두 산의 양쪽에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가족적인 호칭과 물리적인 거리가 한 장면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가 말했다. 「저의 주께서는 어째서 당신의 종을 이렇게 뒤쫓으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으며, 제 손에 무슨 악이 있습니까?」사무엘상 26:18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적·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단순히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밝히라고 요구합니다.
「저의 주 임금님께서는 이제 부디 당신의 종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임금님을 부추겨 저를 치게 하셨다면, 그분께서 제물의 향기를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저주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오늘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라』 하고 말하며, 여호와야훼의 유산에 속하지 못하도록 저를 쫓아냈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26:19 · 본디새김
다윗은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추기셨을 가능성을 말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추겨 자신을 치게 하셨다면,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구합니다. 반면 사람들이 거짓된 말이나 악한 의도로 사울을 부추겼다면, 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고통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판단 앞에 놓고 있습니다.
다윗이 잃어버린 것은 단지 집이 아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 때문에 단순히 집을 떠났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유산에 속하지 못하도록 쫓겨났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땅과 백성, 그리고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땅이었으며, 그 백성은 그 안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가 잃을 위험에 처한 것은 단지 정치적 안전이나 생활의 터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며 살아갈 자리입니다.
실제로 다른 신들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는가
사울이나 십 사람들이 다윗에게 직접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야훼의 유산에서 쫓겨나는 상황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과 공동체에서 내몰린다는 것은, 그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땅으로 가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여호와야훼의 백성 가운데서 살아갈 권리를 빼앗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제물의 향기를 받아 주시기를’이라는 표현은 제물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8:21과 레위기 1:9에서도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언어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제물의 구체적인 종류나 바치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2:5–14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분의 이름을 두고 예배하도록 명령합니다. 여호수아 22:24–29에서도 요단 동쪽 지파들은 후손들이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땅 안에만 계시고 다른 땅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믿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앞서 모압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고(22:3), 지금도 여호와야훼께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벼룩과 자고새 — 왕의 추격이 얼마나 비뚤어졌는가
다윗은 자신의 호소를 두 이미지로 마무리합니다.
「이제 제 피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산에서 자고새를 쫓듯이, 이스라엘 왕께서 벼룩 한 마리를 찾으러 나오셨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26:20 · 본디새김
다윗은 단순히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쫓겨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땅에서 멀어지고, 그곳에서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을 탄식합니다.
벼룩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자고새는 산지에서 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새입니다. 두 이미지는 모두 다윗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을 벼룩과 자고새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하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붙잡으려는 사울의 행동이 얼마나 지나친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산에서 자고새를 쫓는 이미지에는 계속 도망쳐야 하는 다윗의 고달픈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넓은 왕국을 누리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산과 광야를 떠돌며 붙잡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이 끊임없이 추격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왕이 자기 힘을 얼마나 잘못된 곳에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공간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여호와야훼의 면전에서라는 방향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 절에서 여호와야훼의 유산에서 쫓겨나는 일을 말했으므로, 본디새김처럼 여호와야훼 앞에서 멀어진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으면 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 사울의 두 번째 고백은 무엇을 바꾸는가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대답합니다.
사울이 말했다. 「내가 죄를 지었다. 돌아오너라, 내 아들 다윗아. 오늘 내 목숨이 네 눈에 소중했으니, 나도 더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 참으로 내가 어리석게 행동했고, 아주 크게 잘못했다.」사무엘상 26:21 · 본디새김
본문은 사울이 이 말을 진심 없이 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을 처음부터 거짓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며, 그 뒤 다시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이번 고백이 앞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이 장의 대화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대답했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이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사무엘상 26:22 · 본디새김
다윗은 사울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제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의 안전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경계를 유지합니다.
이것은 사울의 회개 가능성을 부정하는 행동이라기보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신뢰를 섣불리 전제하지 않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고백에 응답하지만, 자신을 다시 그의 손에 맡기지는 않습니다.
「제 목숨도 여호와야훼의 눈에 귀하게 여겨지기를」 —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뢰하는 분
다윗은 사울에게 창을 돌려주겠다고 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의로움과 신실함에 따라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호와야훼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여호와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분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무엘상 26:23 · 본디새김
의로움은 이 사건에서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실함은 맡겨진 관계와 책임에 충실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옳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다윗은 최종적인 판단과 보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아비새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하며 죽일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윗도 이제 하나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아비새에게 그 사실은 사울을 죽일 이유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낼 기회였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여호와야훼의 눈으로
이제 다윗은 마지막 말을 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임금님의 목숨이 제 눈에 귀하게 여겨졌듯이, 제 목숨도 여호와야훼의 눈에 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저를 모든 곤경에서 건져 주시기를 바랍니다.」사무엘상 26:24 · 본디새김
조금 전 사울은 자신의 목숨이 다윗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다윗을 더는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약속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호의나 약속만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이 구절에는 ‘귀하다’는 표현이 두 번 대응합니다. 사울의 목숨은 다윗의 눈에 귀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목숨이 여호와야훼의 눈에 귀하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살려 준 행동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선행을 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저에게 원하는 보상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단순한 계산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함에 대한 최종 판단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그분의 보호 아래 두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울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목숨도 사울의 손에 맡기지 않습니다.
「너는 반드시 해내고」 — 축복은 있지만, 함께 돌아가는 일은 없다
사울은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너는 복되다. 너는 반드시 해내고, 틀림없이 이겨 낼 것이다.」 다윗은 자기 길을 갔고, 사울은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사무엘상 26:25 · 본디새김
이 말은 다윗이 앞으로 자신의 길을 이루고 성공할 것이라는 포괄적인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다윗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해낼 것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자비와 경계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상대방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다시 같은 위험에 무방비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장에서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생명도 지키는 길을 선택합니다.
결말 — 사울의 창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날 밤 사울의 창은 다윗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창으로 누구도 죽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이는 방법은 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울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선택을 합니다.
사울은 창을 가지고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지만, 다윗은 창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사울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함께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길을 가고, 사울은 자기 처소로 돌아갑니다.
다윗의 손에는 더 이상 사울을 죽일 기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한 기억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사울의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시기를 바라는 여호와야훼께 그 길을 맡긴 채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