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4–7장 · 떠돌게 된 언약궤
돌아온 언약궤 앞의 두려움
사무엘상 6장에는 이상한 여행이 등장합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수레를 끌고 길을 갑니다. 수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실려 있습니다. 암소들은 아직 젖을 먹이는 어미들이고, 그 송아지들은 집에 갇혀 있습니다. 더구나 암소들은 한 번도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암소들은 송아지를 향해 돌아가지 않습니다. 울면서도 한길을 따라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걸어갑니다.
마침내 수레가 이스라엘 땅에 도착하자, 밀을 거두던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고 기뻐합니다. 블레셋 땅에서 일곱 달 동안 떠돌던 궤가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6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던 벳세메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받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언약궤가 자신들 곁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도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블레셋 사람들과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국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사무엘상 6장은 언약궤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보여 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단순히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거나 그분의 임재를 기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문제임을 드러냅니다.
일곱 달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문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낼 방법을 몰랐다
6장은 짧은 시간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의 궤는 블레셋 땅에 일곱 달 동안 있었다.사무엘상 6: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언약궤는 아스돗에서 가드로, 다시 에그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났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 곁에 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일곱 달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빼앗아 온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차지한 뒤에는 오히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말했다. 「여호와야훼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함께 보내어 그 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사무엘상 6:2 · 본디새김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부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회에서 종교적 의례와 신들의 뜻을 해석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점쟁이들」은 징조나 점술을 통해 알지 못하는 일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들의 뜻을 알아내려는 여러 관습이 존재했습니다.
단지 언약궤를 어디로 보내야 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무엇을 함께 보내어」 돌려보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재앙을 일으킨 신에게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상 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보내려거든 빈손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에게 배상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낫고, 그의 손이 여러분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될 것입니다.」사무엘상 6:3 · 본디새김
「배상 예물」이라는 이 말은 죄나 잘못에 따르는 책임, 그 책임을 해결하기 위해 바치는 배상 또는 속건제물과 관련됩니다. 레위기 5:14–6:7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부당하게 취한 경우, 배상과 속건제물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준비하는 것은 레위기에 규정된 이스라엘의 속건제 절차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언약궤와 함께 보내려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정확하게 시행했다기보다, 자신들이 겪는 재앙을 일으킨 신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려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야훼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뜻을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아는 의례와 판단 방법을 동원합니다.
금으로 만든 종기와 쥐
블레셋 사람들이 물었다. 「그에게 바칠 배상 예물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블레셋 통치자들의 수대로 금 종기 다섯 개와 금 쥐 다섯 마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 모두와 여러분의 통치자들에게 같은 재앙이 닥쳤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6:4 · 본디새김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는 다섯 주요 성읍의 지배자들입니다. 종기는 앞 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닥친 재앙입니다. 금으로 종기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들이 고통받은 병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쥐는 이 장에서 새롭게 부각됩니다.
5절은 그것들이 「땅을 망치는」 쥐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쥐가 농경지나 저장된 곡식에 피해를 주는 재앙과 관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 장의 본디새김 본문에는 쥐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칠십인역의 일부 본문 전승은 블레셋 땅의 쥐에 관한 내용을 5장에도 포함합니다. 다만 그 차이만으로 원래 이야기에 쥐가 어느 시점부터 등장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종기와 쥐가 특정한 하나의 전염병을 가리키는지, 서로 다른 재앙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과 땅에 일어난 재앙을 형상으로 만들어 예물로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4절은 금 쥐를 다섯 마리라고 말하지만, 18절에서는 블레셋의 모든 성읍 수에 맞춘 금 쥐가 언급됩니다. 이 두 기록이 어떻게 정확히 조화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통치자를 대표하는 수를 제시하고, 뒤에서는 전체 성읍에 해당하는 예물의 범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실제 금 쥐의 총수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영광을 돌리십시오」 — 떠났던 영광의 새로운 등장
「여러분의 종기 모형과 땅을 망치는 여러분의 쥐 모형을 만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어쩌면 그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신들과 여러분의 땅을 누르는 자기 손을 가볍게 할지도 모릅니다.」사무엘상 6:5 · 본디새김
4장의 마지막에서 비느하스의 아내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고 말했습니다(4:21–22). 그런데 이제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합니다.
다만 두 표현의 의미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4장의 영광은 이스라엘이 잃었다고 탄식한 하나님의 존귀한 임재와 관련되고, 6장에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예와 인정을 드리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패배가 여호와야훼의 영광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무거운 손이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하나님의 손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일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어쩌면」이라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분이 반드시 재앙을 거두실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확실한 방법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억한 이집트의 실패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경고의 사례로 사용합니다.
「왜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가 자기 마음을 완고하게 했듯이 여러분도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까? 하나님이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를 혹독하게 다루자,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나지 않았습니까?」사무엘상 6:6 · 본디새김
앞서 블레셋 군대도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셨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4:8). 그런데 이번에는 그 사건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끌어냅니다.
전쟁터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출애굽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싸웠습니다. 이제는 그 출애굽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들이 빼앗아 온 것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풀어놓으려 하시는 것을 인간이 자기 손에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조상 이야기가 아닌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서 그 사실을 배웁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파라오가 저질렀던 완고함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정말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요?
송아지를 두고 떠나는 암소들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일부러 어려운 조건을 만들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은 특별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이제 새 수레 한 대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젖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오십시오. 암소들을 수레에 매고, 송아지들은 어미 뒤에서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사무엘상 6:7 · 본디새김
한 번도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암소들은 수레를 끄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젖 먹이는 암소들은 송아지와 떨어져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행동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암소들을 수레에 매어 놓고, 사람이 직접 길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암소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면 이스라엘 땅으로 곧장 가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어 놓습니다.
여기서 새 수레와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소는 거룩한 물건을 운반하기 위한 특별한 준비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강조되는 것은 암소들의 움직임을 통해 재앙의 원인을 판단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들은 아직 우연의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지켜보십시오. 궤가 제 땅으로 가는 길을 따라 벳세메스로 올라가면, 바로 그가 우리에게 이 큰 재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손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사무엘상 6:9 · 본디새김
그들은 앞 장에서 이미 여호와야훼의 손이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생각이 정말 맞는지 시험하려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이 우연히 일어났을 가능성을 아직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종교적 판단과 징조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계시의 절차도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 미리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관찰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판단을 확정하려 했습니다.
울면서도 곧장 가는 암소들
이제 계획이 실행됩니다.
그들은 언약궤와 금 예물들을 수레에 싣습니다. 그리고 암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암소들은 벳세메스로 가는 길을 곧장 갔다. 한길을 따라 계속 울며 걸어갔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 블레셋 통치자들은 벳세메스 경계까지 그 뒤를 따라갔다.사무엘상 6:12 · 본디새김
「계속 울며」라는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암소들이 무감각하게 움직이는 존재처럼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아지들과 떨어진 어미들이 내는 울음소리는 그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암소들의 행동은 블레셋 사람들이 설정한 시험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암소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는지 별도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이 움직임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는 그들이 설정한 판단 기준이 실제로 충족되는지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권력자들이 앞에서 길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암소들이 앞서 갑니다.
통치자들은 뒤따릅니다.
언약궤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블레셋의 정치적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전리품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 전리품을 실은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 뒤따라가며 확인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울음이 정확히 어떤 생리적 원인에서 나왔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지만, 새끼와 떨어져 있다는 앞 장면을 고려하면 그 연결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밀을 거두던 사람들이 맞이한 뜻밖의 귀환
전쟁터가 아니라 추수하는 들판으로 돌아오다
이야기의 장소가 바뀝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거두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들어 궤를 보았고, 궤를 보고 기뻐했다.사무엘상 6:13 · 본디새김
앞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떠난 장소는 전쟁터였습니다. 군인들이 죽고, 사람들이 도망쳤으며, 언약궤는 적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언약궤가 돌아오는 장소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밀을 거두는 들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겼고, 실로에서는 큰 슬픔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언약궤가 아무런 이스라엘 군대의 호위도 없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스스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환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준비하던 군인들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을 하던 농부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궤를 돌아오게 하시는 방식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수레가 멈춘 곳에서 제물이 바쳐지다
수레는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으로 들어와 그곳에 멈추었다. 거기에는 큰 돌이 있었다.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쪼개고 암소들을 여호와야훼에게 번제물로 바쳤다.사무엘상 6:14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언약궤를 실어 왔던 수레와 암소들이 이제 제사에 사용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운반의 도구가 예배의 재료가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15절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와 금 예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내려 큰 돌 위에 놓습니다. 언약궤는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마련한 수레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다시 맡겨집니다.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보고 돌아가다
블레셋 통치자들은 암소들이 어느 길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수레가 벳세메스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받고 제물을 바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설정한 시험은 끝났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앞서 재앙을 여호와야훼의 손과 연결했던 판단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이후 여호와야훼를 섬기기로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블레셋 통치자들은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벳세메스에 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벳세메스는 유다 지역의 성읍이며, 여호수아 21:16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읍 가운데 하나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끈 여호수아가 아닙니다. 벳세메스에 밭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되는 동명이인입니다. 레위기 1:3은 소 떼 가운데서 번제물을 바칠 경우 흠 없는 수컷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암소들이 번제물로 바쳐집니다. 본문은 그 차이를 따로 설명하거나 사람들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예외였는지, 율법의 일반 규정과 어긋난 행동이었는지까지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뒤이어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았다고 명시되지만, 번제 의식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집행했는지에 관한 세부 사항은 충분히 제공되지 않습니다.
다섯 성읍의 이름과 밭에 남은 돌
17–18절은 앞선 사건을 정리하는 듯한 기록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바친 금 종기들의 수와 각 성읍이 열거됩니다.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입니다. 금 쥐들은 다섯 통치자에게 속한 여러 성읍과 마을을 대표합니다.
처음에는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블레셋의 다섯 주요 성읍이 모두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특히 18절은 요새 성읍에서 성벽 없는 마을까지를 언급합니다. 재앙과 그에 대한 대응이 주요 통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다시 큰 돌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언약궤를 내려놓았던 큰 아벨이 여호수아의 밭에 남아 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큰 아벨」(אָבֵל)은 원문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아벨로 읽을 수 있는 형태를 전하지만, 칠십인역과 일부 본문 전승은 「큰 돌」에 해당하는 읽기를 보여 줍니다. 앞서 14–15절에서도 큰 돌이 언급되므로 두 표현을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큰 아벨」을 그대로 보존한 것처럼, 원문의 차이를 모두 제거하고 확정적인 하나의 지명이나 사물로 바꾸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는 해체되었습니다. 암소들은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블레셋 통치자들은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도착했던 장소는 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 기쁨의 장소가 슬픔의 장소로 바뀝니다.
기쁨으로 맞이한 사람들이 왜 심판을 받았는가
예상하지 못했던 심판
여호와야훼가 벳세메스 사람들을 쳤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궤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 가운데 칠십 명, 오만 명을 쳤다. 여호와야훼가 백성을 크게 쳤으므로 백성은 슬퍼하며 애도했다.사무엘상 6:19 · 본디새김
다만 히브리어 본문의 서술 자체는 그들이 언약궤를 대하는 행동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라보았다」와 「들여다보았다」 사이
13절에서는 벳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고 기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언약궤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벳세메스 사람들이 거룩한 언약궤를 함부로 살펴보거나 그 안을 들여다보아 거룩함을 침해했다는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단지 언약궤를 바라보았다고 기록한다는 사실을 유지하며, 정확히 어떤 행동이 문제였는지는 확정하지 않는 읽기입니다.
거룩한 물건을 다루는 데는 경계가 있었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본문은 민수기 4장입니다.
민수기 4:5–15에 따르면 진영이 이동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먼저 성소의 거룩한 물건들을 덮어야 했습니다. 그 뒤 그핫 자손이 그것들을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4:15는 그들이 거룩한 물건들을 만지면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민수기 4:20에서는 그 거룩한 것들을 잠깐이라도 보려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이 규정들은 언약궤를 포함한 지극히 거룩한 성소의 물건들을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거룩한 물건이었고, 그 접근과 운반에는 정해진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4장의 규정이 있다고 해서 벳세메스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자동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6장은 그들이 언약궤를 열었다거나 거룩한 물건을 직접 만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습니다.
칠십 명과 오만 명의 문제
본디새김은 「칠십 명, 오만 명」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때문에 두 숫자가 합산되는 관계인지, 서로 다른 집단을 설명하는 것인지, 본문 전승 과정에서 생긴 문제가 있는지 논의가 생깁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큰 심판을 받았고, 그로 인해 공동체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을 「실제로 오만 칠십 명이 죽었다」고 확정적인 역사적 수치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심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수치와 행동의 세부 사항을 구별하고 나면, 여전히 가장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왜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던 사람들에게 죽음이 닥쳤을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벳세메스에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심판받아 마땅한 악인이었다는 말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죽은 개개인의 행실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고, 왜 그 규모의 죽음이 발생해야 했는지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명하지도 않습니다. 독자가 느끼는 도덕적 어려움을 지워 버릴 만한 추가 정보는 본문에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도 언약궤가 자기 민족에게 속한 거룩한 물건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함부로 다룰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 땅에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가볍게 여겨질 수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독자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남깁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에서는 언약궤를 보았다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됩니다. 1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궤를 보다」라는 말에 전치사 베가 붙어 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19절을 단순히 멀리서 언약궤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궤를 가까이에서 살펴보거나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사람들이 언약궤의 뚜껑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대목에서 마소라 본문과 다른 형태를 전합니다. 여고니야의 아들들이 벳세메스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에 관해서도 본문 전승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벳세메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어겼다고 자신 있게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마소라 본문에는 실제로 이 두 숫자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숫자 사이에는 보통의 합계를 명확하게 표시하는 접속사가 없고, 작은 숫자가 큰 숫자보다 먼저 나옵니다. 고대 문헌인 『유대 고대사』 6권 1장 4절은 이 사건에서 죽은 사람을 칠십 명으로 기록합니다. 일부 히브리어 사본도 오만 명이라는 표현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칠십 명과 오만 명을 모두 전하는 오래된 본문 전승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가진 자료만으로 원래 기록된 숫자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벳세메스가 대규모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이지만, 그런 역사적 가능성만으로 어느 본문을 정본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블레셋 사람들의 두려움이 이스라엘에서도 나타나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큰 심판을 겪은 뒤 이렇게 말합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말했다. 「누가 여호와야훼, 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는 우리를 떠나 누구에게 올라갈 것인가?」사무엘상 6:20 · 본디새김
벳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능력이 있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인간이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다」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으로 서 있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거나 그분 앞에서 견딜 수 있는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는 우리를 떠나 누구에게 올라갈 것인가?」
앞 장의 블레셋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자신들 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벳세메스 사람들도 누가 그 궤를 받아 갈 수 있을지 묻습니다.
두려움의 성격은 완전히 같은가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과 벳세메스 사람들의 반응을 완전히 동일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강력한 신의 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반면 벳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야훼를 「이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한 인식이 직접 표현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처리할 방법을 찾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물론 그들의 결론 역시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말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인간에게 얼마나 엄중한 문제인지를 드러냅니다.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는 요청
마지막으로 벳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에 사자들을 보냅니다.
본문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이 요청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또는 벳세메스 사람들이 왜 하필 그 성읍을 선택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럇여아림은 유다 지역에 속한 성읍으로, 여호수아 15:9과 18:14에도 등장합니다.
6장은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는 실제 장면까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사자를 보내 요청하는 데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 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라는 이 질문은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은 산에 접근하는 경계를 정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임재는 백성에게 영광스러운 사건인 동시에 두려운 사건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그분께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24:3은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올라갈 수 있는가?」라고 묻고, 이어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합니다. 이사야 6:1–5에서도 예언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뒤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습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문제를 단순히 물리적인 접근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함과 인간의 상태에 관한 문제로 다룹니다.
맺음 — 곧장 돌아온 궤가 다시 떠나려 하다
처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가 그 궤를 받아 갈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이 사실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이스라엘이 그분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언약궤가 돌아갈 길은 열렸지만, 그 궤의 주인이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어떻게 서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장은 오늘날 어떤 종교적 물건을 잘못 만지면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또한 신앙인이 하나님께 기뻐하며 나아가는 것보다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관계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장은 언약궤가 돌아온 기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에 보낸 짧은 요청으로 끝납니다.
「내려와서 그 궤를 여러분에게로 가져 올라가십시오.」
언약궤는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벳세메스의 들판에서 시작된 기쁨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