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금방패가 청동 방패로 바뀐 날
왕은 살아남았습니다. 예루살렘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갈 때면 이전처럼 호위병들이 방패를 들고 나와 그를 호위했습니다. 왕궁의 의식은 계속되었고, 왕위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호위병들이 들고 있는 방패가 더 이상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 왕 시삭이 솔로몬의 금방패들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은 그것들을 대신하여 청동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역대하 12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 가운데서 왕과 백성을 살려 주셨는데, 왜 그들은 모든 것을 회복하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재앙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던 르호보암을, 역대기는 왜 마지막에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할까요?
왕국이 강해졌을 때 일어난 일
12장은 르호보암이 위기에 빠진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된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르호보암은 왕권을 굳히고 강해지자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버렸다. 온 이스라엘도 그와 함께 율법을 버렸다.역대하 12: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르호보암은 요새 성읍을 강화하고 왕위 계승을 준비했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유다 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제 왕국은 어느 정도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르호보암이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버립니다.
이것을 르호보암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본문은 그의 내면에 어떤 생각이 생겼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정치적 안정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이 함께 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르호보암의 행동은 단순한 무지보다는 자신이 따라야 할 기준으로부터의 이탈로 묘사됩니다.
더구나 왕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을 따르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북쪽 왕국의 모든 주민이 그와 함께 같은 행동을 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남쪽 왕국의 백성도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왕의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 왕 오 년째에 이집트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역대하 12:2 · 본디새김
역대기 저자는 이집트의 침입을 단순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유다의 불신실함과 직접 연결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신의를 저버렸다」(מָעַל)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대한 배반을 나타냅니다. 1절의 율법을 버린 행위가 2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향한 신의를 저버린 행위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3절은 시삭의 군대를 상세히 묘사합니다. 병거 천이백 대, 기병 육만 명,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병력이 이집트에서 올라왔습니다. 룹 사람들과 숙기 사람들, 구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삭은 유다의 요새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왔다.역대하 12:4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 르호보암이 그토록 공들여 강화했던 요새 성읍들입니다. 지휘관을 세우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고, 성읍들을 튼튼하게 만들었지만 시삭의 진격을 막아 내지는 못했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방패와 창이 있었고, 요새와 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다스릴 때 따라야 할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갖추었지만, 왕국을 어떤 질서 안에서 다스려야 하는지는 놓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삭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쇼셴크 1세와 연결됩니다.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는 쇼셴크의 서아시아 군사 원정을 기념하는 부조와 여러 지역의 지명을 새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기록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약탈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의 원정 기록과 역대기가 전하는 예루살렘의 사건은 이 점에서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나도 너희를 버려두었다」
시삭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가까워졌을 때, 유다의 지도자들은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예배나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시삭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다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지도자들은 수도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때 예언자 스마야가 찾아옵니다.
스마야는 이미 르호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인물입니다.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그는 북쪽 형제들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전했습니다(11:2–4). 이제 같은 예언자가 전혀 다른 말씀을 가져옵니다.
예언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시삭을 피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와서 말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나도 너희를 시삭의 손에 버려두었다.』」역대하 12:5 · 본디새김
그런데 두 행동은 정확히 같은 의미의 버림이 아닙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그분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그들이 시삭의 손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백성의 버림은 언약에 대한 배반이었고, 하나님의 버려두심은 그 배반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왕은 자신을 낮추며 말했다. 「여호와야훼는 의롭습니다.」역대하 12: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의롭습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라는 신앙 명제를 반복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심판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특히 6절에서는 지도자들이 왕보다 먼저 언급됩니다. 앞에서 왕과 온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렸듯이, 이제는 지도자들과 왕이 함께 자신을 낮춥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공동체적인 일이었다면, 심판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동도 공동체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멸망시키지 않으시지만, 모든 것을 돌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이 자신을 낮추자, 다시 스마야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임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이 자신을 낮춘 것을 보자, 스마야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이 임했다. 「그들이 자신을 낮추었으니 내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들에게 얼마간 구원을 주겠다. 내 격노가 시삭의 손을 통해 예루살렘에 쏟아지지는 않을 것이다.」역대하 12:7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율법을 버린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낮추자 그 새로운 행동에도 응답하십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기계적인 운명처럼 진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판단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판단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낮출 때 멸망의 범위를 제한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섬기는 것과 여러 땅의 왕국들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역대하 12:8 · 본디새김
하나님은 백성을 살려 주시지만, 시삭의 지배와 그에 따른 손실까지 없애 주지는 않으십니다. 유다는 멸망은 피하되 외국 왕에게 종속되는 처지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2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런 백성이 이제 다시 이집트 왕에게 종속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물론 역대하 12장은 유다 전체가 이집트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외국 왕의 지배 아래 놓이는 정치적 종속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기억을 가진 백성에게 이집트 왕을 섬겨야 하는 현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신명기 28:47–48에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결과로 적들을 섬기게 되는 상황이 언약의 저주 가운데 묘사됩니다. 역대하 12:8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적국을 섬기는 일을 대비한다는 점에서 같은 언약적 주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선택이 모든 섬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다른 왕국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겪게 될 종속을 통해 자신들이 버린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멸망을 막습니다. 그러나 그 자비가 언제나 불순종의 결과를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얼마간 구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킴아트 리플레타입니다. 여기서 킴아트는 적은 정도를 나타낼 수도 있고 짧은 시간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제한된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곧 피할 길을 마련하시겠다는 시간적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문맥만으로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금방패 대신 청동 방패가 남았다
이제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옮겨갑니다.
이집트 왕 시삭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에 있는 보물을 가져갔다. 모든 것을 가져갔다.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들도 가져갔다.역대하 12:9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집과 왕궁이라는 두 장소가 나란히 나옵니다. 성전과 왕궁은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건물들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윗 왕조의 권력을 나타내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갔다」라는 짧은 문장은 손실의 규모를 강조합니다. 이를 성전과 왕궁의 모든 물건이 빠짐없이 사라졌다는 정확한 물품 목록으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왕국의 귀중한 재물이 광범위하게 빼앗겼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솔로몬은 금으로 된 큰 방패와 작은 방패들을 만들어 레바논 숲 궁에 두었습니다(역대하 9:15–16). 이 방패들은 왕실이 지닌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번영을 묘사하는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금방패들이, 이제 그의 아들 시대에는 이집트 왕의 전리품이 됩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고, 왕궁과 성전, 요새와 보물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유산을 온전하게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아버지의 영광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왕이 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그것들 대신 청동 방패들을 만들어 왕궁 입구를 지키는 호위병들의 지휘관들에게 맡겼다.역대하 12:10 · 본디새김
금방패는 솔로몬 시대의 풍요를 드러냈습니다. 청동 방패는 그와 같은 영광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르호보암 시대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왕이 여호와야훼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호위병들이 와서 그 방패들을 들었고, 다시 호위병들의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역대하 12:11 · 본디새김
왕실의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왕이 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행렬도 계속됩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자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그에게서 돌아섰고, 여호와야훼는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유다에도 좋은 일들이 있었다.역대하 12:12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낮춘 것을 보시고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서술자는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합니다.
「유다에도 좋은 일들이 있었다」라는 말은 재앙을 당한 나라에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를 거부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저버렸고 심판을 받았지만, 모든 것이 악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본문은 그 좋은 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자비가 같은 역사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청동은 무기를 만드는 데도 사용되는 유용한 금속입니다. 따라서 청동 방패가 금방패보다 반드시 군사적으로 열등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방패의 실전 성능이 아니라 금과 청동이 나타내는 왕실의 부와 위상입니다. 이 장면을 왕이 과거의 영광을 가장하려 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문은 그가 사람들을 속이려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청동 방패를 만든 이유도 왕실 의식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는지, 실용적인 필요 때문이었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낮추었지만, 마음은 정하지 않았다
13절부터는 르호보암의 통치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르호보암 왕은 예루살렘에서 세력을 굳히고 다스렸다. 르호보암은 마흔한 살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일곱 해 동안 다스렸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이름을 두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택한 성읍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여자 나아마였다.역대하 12:13 · 본디새김
예루살렘이 특별한 곳인 이유는 르호보암이 그곳을 수도로 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성읍은 왕국이 분열되기 전부터 이스라엘 전체와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남쪽 왕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라는 표현 속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성읍을 다스리는 르호보암에 대해, 저자는 곧바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는 악을 행했다. 여호와야훼를 찾기로 마음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역대하 12:14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쟁을 중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삭의 공격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었고,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의 태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일시적인 반응과 삶을 이끄는 지속적인 방향 사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12장에서 르호보암은 분명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행동이었고 하나님도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전체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의 삶을 지속적으로 이끄는 원칙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입니다.
그는 왕국을 굳게 세웠지만,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굳게 세우지 않았습니다.
앞 장에서 북쪽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을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왔던 장면(11:16)도 이 평가와 대조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겠다는 결단으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왕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찾는 장소이지만, 성전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르호보암은 왕실의 호위를 받으며 성전에 들어갔지만, 그의 통치 전체는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삶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역대하 7:14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그분을 찾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반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남습니다.
15절은 르호보암의 행적에 관해 예언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기록을 언급합니다. 이어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줄곧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1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중단된 출정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특정한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두 왕국 사이의 적대 관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5절은 지속적인 전쟁 상태를 기록하지만, 구체적인 전투의 시기나 횟수까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왕국의 분열은 르호보암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르호보암은 죽어 다윗 성에 묻혔고, 그의 아들 아비야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의 왕위는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물려받은 왕국은 이미 둘로 나뉘어 있었고, 솔로몬이 남긴 보물 가운데 중요한 부분도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외형적으로 계속되었지만, 저자가 남긴 마지막 평가는 정치적 생존보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낮추었을 때 멸망을 막으셨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금방패를 돌려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이 자신을 낮춘 행동이었습니다. 저자가 르호보암의 삶을 마무리하며 묻는 것은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역대하 12장은 모든 고난을 개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해석하라고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장에서 시삭의 침공과 유다의 불신실함 사이의 관계는 예언자 스마야를 통해 특별히 밝혀진 것입니다. 오늘의 모든 재난에 그와 같은 원인을 임의로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왕의 성전 행렬로 돌아갑니다.
왕이 여호와야훼의 집에 들어가려 하면 호위병들이 나와 방패를 듭니다. 왕이 지나가면 그들은 방패를 다시 가져가 보관합니다. 모든 것이 익숙한 절차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이제 금방패가 아닙니다.
금방패는 시삭에게 빼앗겼고, 르호보암이 새로 만든 청동 방패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방패들은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이전의 영광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왕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었고,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물음은 방패를 어떤 금속으로 만들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 성전으로 들어가는 왕이, 과연 하나님을 찾기로 자기 마음을 정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