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포위 속에서 울린 나팔
전쟁이 시작되기 전, 두 왕의 군대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유다 왕 아비야에게는 사십만 명의 군사가 있었고,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는 그 두 배인 팔십만 명이 있었습니다.
역대하 13장에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장면은 왕의 연설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주장은 입으로 먼저 선포되지만, 그 하나님을 실제로 의지하는 일은 자신들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위기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아비야의 연설은 신앙적으로 매우 바르게 들립니다. 하지만 열왕기상 15:3은 그가 아버지의 죄를 따라갔으며, 다윗처럼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리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유다가 승리한 것은 아비야가 의로운 왕이었기 때문일까요?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의 연설을 어디까지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승리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일까요?
두 배의 군대 앞에서 시작된 전쟁
아비야는 여로보암 왕 십팔 년째에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기간은 세 해였습니다.
2절에는 그의 어머니가 기브아 출신 우리엘의 딸 미가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는 아비야를 마아가의 아들이라고 했고(11:20–22), 열왕기상 15:2에서도 그의 어머니 이름이 마아가로 나옵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가야와 마아가가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이름이었거나, 이름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본문상의 차이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또 압살롬과 우리엘이라는 계보상의 관계를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관계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들만으로 정확한 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곧 전쟁으로 옮겨갑니다.
아비야는 선발된 사십만 명을 이끌고 전투를 시작했고, 여로보암은 팔십만 명을 거느리고 맞섰습니다. 이 숫자는 역대기 본문이 전하는 규모이며, 실제 병력의 정확한 수를 독립적으로 확인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수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르호보암이 왕국을 굳히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군사력을 강화했다면, 이번 장에서는 그의 아들이 훨씬 큰 군대와 직접 맞서게 됩니다. 아비야는 전투를 앞두고 에브라임 산지의 스마라임산에 올라갑니다.
그의 첫마디는 「내 말을 들어라」입니다.
아비야는 곧바로 전투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상대방에게 자신들이 누구이며, 누구를 거역하고 있는지 생각하라고 요구합니다.
그의 연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윗 왕조에 주어진 언약을 주장하고(5–7절), 북쪽의 예배와 남쪽의 예배를 대조하며(8–11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싸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2절). 자기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연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스마라임이라는 지명은 여호수아 18:22에서 베냐민 지파의 성읍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러나 역대하 13장의 스마라임산과 그 성읍의 정확한 관계 및 전투 장소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소금 언약」 — 왕권은 누구의 것인가
아비야는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면서 가장 먼저 다윗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소금 언약으로 다윗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었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하지 않느냐?」역대하 13:5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소금은 제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레위기 2:13은 곡식 제물에 소금을 빠뜨리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민수기 18:19에서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몫에 관해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소금이 쉽게 부패하지 않는 성질 때문에 지속성과 불변성을 상징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왜 이 표현을 사용했는지 그 상징의 모든 세부 사항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민수기 18:19와 역대하 13:5에서 모두 소금 언약이 지속적인 약속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아비야는 이 표현을 다윗 왕조에 적용합니다. 다윗 왕조에 대한 언약은 사무엘하 7:12–16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자손을 세우시고 그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89:28–37에서도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의 지속성이 강조됩니다.
다윗 왕조의 왕권은 단지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왕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에게서 왕권을 빼앗으려는 행동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도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로보암을 반역자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종이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자기 주인에게 반역했다.」역대하 13:6 · 본디새김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신하였다는 것은 열왕기상 11:26–28과 일치합니다. 그는 솔로몬의 통치 아래서 중요한 일을 맡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야의 설명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1:29–39에서는 예언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다스릴 왕권이 주어질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역대하 10:15는 왕국 분열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11:4에서는 하나님이 르호보암에게 북쪽 이스라엘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비야는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쪽 왕국의 성립에도 하나님의 판단이 작용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지속된다는 것과, 다윗의 후손이 언제나 이스라엘 전체를 실제로 지배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는 것과 그 약속을 자기 정치적 주장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아비야는 여로보암 곁에 쓸모없는 자들과 불량한 자들이 모였고, 르호보암이 젊고 마음이 여려 그들에게 맞서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역대하 12:13은 르호보암이 마흔한 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그가 문자 그대로 어린 나이였다는 설명은 앞선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젊고 마음이 여려서」라는 표현을 정치적으로 경험이 부족하고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미숙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남습니다.
역대하 10장에서 르호보암은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고 가혹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왕국을 잃은 이유는 단순히 마음이 여려 반역자에게 맞서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비야는 아버지의 책임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여로보암과 그 추종자들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 연설을 기록하면서도, 독자가 앞에서 읽은 르호보암의 실패를 지우지는 않습니다.
왕이 만든 제사장들과 하나님이 맡기신 제사장들
아비야는 이제 왕권 문제에서 예배 문제로 논점을 옮깁니다.
「이제 너희는 다윗의 아들들 손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왕국에 힘으로 맞서려 한다. 너희는 수가 많은 무리이고, 너희 곁에는 여로보암이 너희의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있다.」역대하 13:8 · 본디새김
다윗의 자손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그 왕권의 궁극적인 주인은 여호와야훼이시라는 주장입니다. 역대상 29:23은 솔로몬이 여호와야훼의 왕좌에 앉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다윗 왕조의 통치는 하나님에게서 위임받은 통치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왕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표한다는 말과 왕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아비야가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두 가지 문제는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과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들입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열왕기상 12:28–30). 북쪽 백성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비야는 이를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낸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인 아론의 자손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여러 땅의 백성들처럼 너희를 위해 제사장들을 세우지 않았느냐?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제사장으로 임명받으러 오는 자면 누구나 신도 아닌 것들의 제사장이 된다.」역대하 13:9 · 본디새김
누가 제사장이 될 자격을 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28–29장에서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맡기신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의식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절차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으로 임명받다」(מָלֵא)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본래 손을 채운다는 관용구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직분을 맡기기 위한 임명이나 성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출애굽기 29:9). 아비야가 문제 삼는 핵심은 그 임명 의식이 사람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기준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가 아니라 여로보암이 만든 종교 체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북쪽의 예배를 이렇게 비판한 다음, 남쪽의 예배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말하면 여호와야훼가 우리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들이고, 레위 사람들도 맡은 일을 하고 있다.」역대하 13:10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제사장들이 매일 수행하는 일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고, 향을 태우며, 정결한 상 위에 빵을 놓고, 금등잔대의 등잔에 불을 붙입니다.
이 행위들은 성막과 성전의 예배 규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침저녁의 번제는 출애굽기 29:38–42에, 등불과 그 관리에 관한 규정은 출애굽기 27:20–21에, 진설병에 관한 규정은 레위기 24:5–9에 나옵니다. 이 목록은 남쪽의 예배가 모세의 율법과 다윗·솔로몬 시대의 성전 질서를 이어받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맡긴 일을 지키고 있으나, 너희는 그를 버렸다」라는 말은 두 왕국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아비야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의 화려함이나 규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그대로 수행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정당성과 북쪽 금송아지 예배의 문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아비야가 「우리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이 유다 전체의 모든 행동에 대한 완전한 평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불과 앞 장에서 르호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렸다고 기록되었습니다(12:1). 또한 열왕기상 15:3은 아비야 자신도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아비야의 말은 남쪽 왕국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직분과 예배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근거가 있지만, 유다의 모든 사람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신실했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긴 연설은 마침내 한 문장으로 모입니다.
「보아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의 제사장들도, 너희를 향해 울릴 전쟁 나팔도 우리와 함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싸우지 마라. 너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역대하 13:12 · 본디새김
아비야는 자신과 싸우지 말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왕의 연설은 끝났지만, 상대방은 그 말을 듣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앞뒤에서 공격받을 때 들린 나팔 소리
여로보암은 아비야의 연설에 말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비야가 산 위에서 하나님과 언약과 예배를 이야기하는 동안, 여로보암은 실제 전투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우회시켜 유다의 뒤편에 매복 부대를 배치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돌아보니, 싸움이 앞뒤에서 그들에게 닥쳐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었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다.역대하 13:14 · 본디새김
이미 병력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상대방의 매복 전술까지 성공했습니다. 아비야가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고 계시다고 선언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처음부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이 드러나는 순간을 가장 불리한 상황 속에 배치합니다.
앞서 아비야는 제사장들이 자신들과 함께 있으며 전쟁 나팔도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나팔이 실제로 울립니다.
유다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유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를 때, 하나님이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쳤다.역대하 13:15 · 본디새김
여기서 서술의 주어가 바뀝니다.
본문은 정확히 어떤 군사적 현상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북쪽 군대의 진형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유다 군대가 어떤 경로로 반격했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전투의 결정적인 전환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아비야가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말한 것이 승리의 직접적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위된 유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동하셨다는 것이 본문의 결정적인 설명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10:2–10에서 하나님은 은나팔을 만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나팔은 회중을 모으고 진영을 움직이는 데 사용되었으며, 전쟁 때도 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특히 민수기 10:9에서는 이스라엘이 적에게 공격받을 때 나팔을 불면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어 적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대하 13장은 그 규례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제사장들이 전쟁의 순간에 나팔을 분다는 점에서 이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나팔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물건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소리가 적을 물리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여호수아 6장에서 여리고 성을 돌던 제사장들의 나팔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두 사건의 전개는 다릅니다. 여리고에서는 하나님이 구체적인 전투 방식을 먼저 명령하셨고, 이곳에서는 포위된 군대가 전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따라서 두 장면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제사장들의 나팔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합되는 주제적 연결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승리의 이유를 밝히는 한 문장
하나님의 개입 이후 전세는 완전히 바뀝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다를 피해 달아나고, 아비야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크게 공격합니다. 17절은 이스라엘의 선발된 병사 오십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언급한 병력과 마찬가지로 이 전사자의 정확한 수치를 독립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유다의 승리를 분명하게 말하지만, 전투의 참상을 아름다운 장면으로 꾸미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승리했다는 서술 옆에는 같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대규모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16절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방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와 같은 조상을 가진 이스라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아비야는 북쪽의 잘못된 예배를 비판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싸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할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승리를 형제의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호로 읽는 것은 본문의 복잡한 현실을 지워 버립니다.
18절은 이 전쟁의 결과와 원인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굴복했고 유다 자손들은 우세해졌다. 유다 자손들이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의지했기 때문이다.역대하 13:18 · 본디새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대었다는 뜻입니다. 18절은 승리의 이유를 아비야 왕 개인의 믿음에만 돌리지 않습니다. 유다 자손들이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말합니다.
아비야는 완전하게 하나님을 따랐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끄는 유다 공동체는 이 전투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왕이 다스리는 공동체의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응답이 왕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상 15:3–4를 함께 읽으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열왕기는 아비야가 아버지의 죄를 따라갔으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이 다윗을 생각하시어 예루살렘에 그의 자손을 이어 가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역대기는 그 왕에게 일어난 중요한 승리를 전하고, 열왕기는 그 왕의 신앙적 결함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두 기록은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두 기록을 억지로 동일하게 만들어 아비야가 사실은 완전히 의로운 왕이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아비야가 악한 왕이었으므로 그의 연설은 모두 위선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아비야는 옳은 신학적 주장을 할 수 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삶에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신실하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빼앗은 성읍들, 약해진 왕, 이어지는 왕조
전쟁에서 승리한 아비야는 여로보암을 추격하여 여러 성읍을 차지합니다.
19절에는 벧엘과 여사나와 에브라인, 그리고 그에 딸린 마을들이 등장합니다. 벧엘은 단순한 국경의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워 북쪽의 예배 중심으로 삼았던 장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열왕기상 12:28–33).
아비야는 연설에서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예배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제 그 예배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벧엘이 유다의 손에 넘어갑니다.
아비야가 벧엘을 차지한 뒤 그곳의 금송아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어떤 예배 개혁을 시행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복이 곧바로 벧엘의 우상 숭배를 완전히 종식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후 열왕기하 23:15에서는 요시야가 벧엘의 제단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벧엘의 정치적 지배와 예배의 역사가 아비야의 승리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여로보암은 아비야 시대에 다시 힘을 얻지 못했다. 여호와야훼가 그를 쳤고, 그는 죽었다.역대하 13:20 · 본디새김
이처럼 역대기 저자는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여로보암의 최후까지 미리 언급합니다.
반대로 21절은 아비야가 세력을 굳혔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아내 열네 명과 아들 스물두 명, 딸 열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승리 이후 왕실의 안정과 번성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러 아내를 둔 사실이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을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명기 17:17의 왕에 관한 규정은 오히려 왕이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본문은 아비야의 많은 혼인을 직접 비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22절에서는 아비야의 나머지 행적과 행실과 말들이 예언자 잇도의 해설 기록에 적혀 있다고 말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가운데 특정한 전쟁과 연설을 선택하여 자세하게 전했습니다.
아비야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오르고, 그 땅은 열 해 동안 평온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 자체가 이야기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 세대에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함께 기록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13:20을 여로보암이 아비야보다 먼저 죽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5:9에 따르면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오른 때는 여로보암의 통치 제20년이었습니다. 또 열왕기상 14:20은 여로보암이 모두 22년 동안 다스렸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열왕기의 연대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아비야의 통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살아 있었습니다. 역대하 13:20은 여로보암이 아비야에게 패한 뒤 힘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었다는 결과를 한데 모아 서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절에서 사용된 미드라시(מִדְרָשׁ)는 찾거나 살펴본다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역대하 24:27에서도 관련 기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이 말은 후대 유대교의 성경 해설 문헌을 뜻하는 미드라시와 어원적으로 연결되지만, 여기서 반드시 후대의 미드라시와 동일한 문학 형식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본문만으로는 잇도의 기록이 정확히 어떤 성격의 문헌이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왕의 연설보다 중요한 것
아비야의 연설은 길고 상세하지만, 승리의 이유를 설명하는 18절은 놀랄 만큼 짧습니다. 18절은 유다 자손들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우세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비야 개인의 의로움에 대한 평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지키시는 일과 유다 백성이 그분을 의지한 일이 강조됩니다.
다만 이 본문을 모든 전쟁이나 갈등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편이 반드시 군사적으로 승리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역대하 13장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전합니다. 이 사건의 승리를 다른 모든 전쟁의 승패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 군대는 앞뒤로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더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매복 작전까지 성공시켰습니다. 아비야가 산 위에서 외쳤던 긴 연설은 이미 끝난 뒤였습니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아비야는 전쟁 전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고 계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왕의 자신감이 아니라, 도망갈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사실은 산 위에서 울려 퍼진 왕의 연설보다,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울린 그 나팔 소리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