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3장 · 되찾은 성전

자기 몸조차 다스리지 못한 왕

마카베오기 하권 9장에는 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과 마지막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정말 달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이 두려워지자 자신이 그동안 무시했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의 마음속을 직접 보여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말과 행동,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마지막 편지를 나란히 놓아 독자가 판단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관심은 안티오코스가 얼마나 진실하게 회개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왕이,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조차 결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무엇이 드러나는가?

이 장의 이야기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움직임이 반복됩니다.

왕은 도시들을 지배하고 바다와 산을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늘의 별들에도 손을 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땅바닥에 떨어져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가야 했습니다.

왕이 지닌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이 본래 어디까지 미칠 수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왕

마카베오기 하권 9:1–4 본문 →

유대 사람들과 관계없는 패배를 그들에게 되갚으려 하다

9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 지역에서 시작합니다.

안티오코스는 페르세폴리스에 들어가 신전을 약탈하고 도시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면서 실패하고, 수치스럽게 물러납니다.

안티오코스의 탐욕과 폭력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지역의 신전도 약탈하려 했습니다. 신전의 재물은 왕이 차지할 수 있는 부의 원천이었고, 지역 주민들의 의사보다 왕의 힘이 우선한다고 여겼습니다.

3절에서 그가 엑바타나에 있을 때 니카노르와 티모테오스의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앞 장에서 유다의 군대가 거둔 승리들이 왕에게 보고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분노합니다.

4절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패배시킨 페르시아 지역 사람들에게 당한 수모까지 유대 사람들에게 되갚으려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페르세폴리스 주민들이 왕을 물리친 일에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에게는 그런 구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수모를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욕당한 위신을 회복하려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교만한 권력은 자신이 겪은 수치를 다른 사람들을 처벌할 이유로 바꾸어 버립니다.

왕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지만, 심판도 그와 함께하고 있다

그는 격분하여, 자기를 쫓아낸 자들에게 당한 수모까지 유대 사람들에게 되갚으려 했다. 그래서 마부에게 쉬지 않고 수레를 몰아 여정을 끝내라고 명령했다. 하늘에서 오는 심판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교만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에 도착하면 예루살렘을 유대 사람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마카베오기 하권 9: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그에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아니라,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의 시체로 채워야 할 장소가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심판을 집행하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 자신이 이미 심판 아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왕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일을 빨리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서두르는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야기에서 왕은 계속 명령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일을 결정하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은 다니엘서의 제국 환상들과도 이어집니다. 다니엘서 8장 23–25절과 11장 29–45절에는 거룩한 것을 침범하고 자신을 높이는 강력한 통치자가 등장합니다. 그 통치자는 역사 속에서 큰 힘을 행사하지만, 자신의 최후까지 스스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이제 왕에게 그 사실이 자기 몸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바다와 산을 다스리려던 사람이 땅에 떨어지다

마카베오기 하권 9:5–10 본문 →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자기 몸속도 알 수 없는 왕

그러나 모든 것을 살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고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재앙으로 그를 쳤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가라앉힐 수 없는 내장의 아픔과 몸속의 극심한 고통이 그를 사로잡았다.마카베오기 하권 9:5 · 본디새김

왕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군대를 파견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는 분으로 등장하시지만, 왕을 덮친 재앙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장악하려던 왕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조차 장악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온갖 기괴한 재앙으로 다른 사람들의 내장을 괴롭혔던 그에게는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다.마카베오기 하권 9:6 · 본디새김

저자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과 이제 자신이 겪는 고통을 대응시킵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상응하는 심판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일이 자신의 운명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이 장에서 안티오코스에게 내리는 심판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질병이나 신체적 고통이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벌이라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명령은 계속되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왕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교만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더 강하게 드러내며 길을 재촉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수레는 왕의 의지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차게 달리던 수레에서 왕이 떨어지고, 온몸이 심하게 뒤틀립니다.

이제 그는 자기 발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가 됩니다.

왕은 수레를 더 빠르게 몰라고 명령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사람들이 들것에 실어 나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가 통제하려던 것은 여정의 속도였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능력조차 잃었습니다.

산을 저울에 달 수 있다고 여겼던 사람

사람의 분수를 넘는 교만 때문에 바다의 물결에도 맞설 수 있다고 여기고 높은 산봉우리들도 저울에 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땅바닥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뚜렷이 드러내 보였다.마카베오기 하권 9:8 · 본디새김

바다와 산은 고대 세계에서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거대한 자연의 영역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러한 대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묘사됩니다.

시편 89편 9절에서는 하나님이 성난 바다를 다스리시고 그 물결을 잠잠하게 하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십니다. 이사야 40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의 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리시고 산들을 저울에 다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능력을 자신에게도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자신에게 신적인 위엄이 있다고 여겼던 왕이, 이제 자신의 무력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나타낼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몰락 자체가 참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던 사람이 땅에 떨어졌을 때, 드러난 것은 왕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구도 왕의 몸을 견디지 못하다

9–10절에서 왕의 몸은 더욱 참혹하게 무너집니다.

구더기가 들끓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군대가 고통받습니다. 앞서 왕은 다른 사람들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의 육체가 무너지는 동안 왕실의 위엄도 함께 무너집니다.

고대의 왕은 화려한 의복과 행렬, 수행원들의 시중을 통해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왕의 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무도 그를 실어 나르지 못합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의 별들에 손을 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조차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높은 곳을 향한 교만이 극단적인 고립으로 끝납니다.

왕은 많은 사람을 지배했지만, 그 지배가 자신의 육체를 죽음에서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시편 49편 6–12절에서 재물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기하는 질문과도 이어집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사람이 자기 생명을 영원히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내장」은 상징적인 마음이 아니라 실제 몸속 장기를 가리킵니다. 지혜서 11장 16절은 이 원리를 간결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바로 그것으로 징벌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나타난 자, 현현한 자라는 의미와 관련되며, 그의 주화에는 「왕 안티오코스, 현현한 신」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명문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깨달음

마카베오기 하권 9:11–12 본문 →

그제야 교만을 거두기 시작하다

11절에서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제야 그는 꺾여서 그 큰 교만을 거두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며 깨달음에 이르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순간 더욱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마카베오기 하권 9:11 · 본디새김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시작했다」입니다. 저자는 이 순간 왕이 완전하게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제 자신의 상태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조차 견디지 못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교만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마카베오기 하권 9:12 · 본디새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과 자신을 같은 위치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고백입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 때문에 흐려졌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자기 권력이 줄어들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애초에 자신이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회개인가, 두려움인가

그렇다면 이 고백을 진정한 회개로 보아야 할까요?

첫째, 본문은 왕에게 실제로 어떤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교만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본문은 그 변화가 곧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으로 이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13절에서 저자는 그를 여전히 부정적인 말로 부르며, 그가 서원한 주가 더 이상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표현만을 근거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회복의 기회가 없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안티오코스라는 특정한 박해자의 마지막을 심판의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지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깨달음이 시작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이러한 심리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저자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고백의 말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독자는 그 말이 이어지는 서원과 편지에서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서 4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위대한 왕권을 자랑하다가 낮아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복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반면 마카베오기 하권 9장의 안티오코스는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만 결국 죽습니다. 두 본문은 모두 자신을 높이는 왕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낮아진다는 공통된 구조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9:13–18 본문 →

파괴하려던 도시를 자유로운 도시로

13–17절에서 안티오코스는 네 가지 방향으로 자신의 이전 행동을 뒤집는 약속을 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왕은 본래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 사람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도시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둘째, 유대 사람들을 아테네 사람들과 동등하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그 시민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말은 유대 사람들의 지위를 높이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확히 어떤 시민권이나 제도적 권리가 주어지는지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4장에서 예루살렘의 일부 지도자들은 헬라식 제도와 생활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왕의 권력에 의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율법과 공동체의 질서가 훼손되었습니다.

한때 왕의 정책에 순응하는 수단이었던 헬라식 지위가 이제 왕이 유대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내세우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약탈한 사람이 성전을 꾸미겠다고 하다

셋째, 안티오코스는 자신이 약탈한 성전을 복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성전을 아름다운 봉헌물들로 꾸미고, 빼앗은 기물들을 여러 배로 돌려주고,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자신의 수입에서 부담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빼앗은 것에 대해 보상하고 앞으로의 예배가 유지되도록 재정까지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5장 15–16절에서 왕이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기물들을 빼앗아 간 사건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왕이 이전에 행했던 일이 잘못되었음을 적어도 행동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약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6절은 약속의 내용이지, 실행된 사건의 보고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은 결국 죽었고, 성전의 정화와 예배 회복은 다음 장에서 유다와 그의 동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이 되겠다는 왕의 약속

넷째 약속은 가장 극적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자신도 유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권능을 알리겠다고 했다.마카베오기 하권 9:17 · 본디새김

한때 유대 사람들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율법을 버리도록 강요했던 왕이, 이제 자신이 그들의 신앙 공동체에 속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이전 정책을 가장 극단적으로 뒤집는 선언입니다.

왕이 약속한 것들은 대부분 자기 권력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일들입니다. 도시를 자유롭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고, 성전의 재정을 지원하는 일은 모두 왕권과 연결됩니다.

그는 여전히 왕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유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권능을 알리겠다는 마지막 약속은 개인의 신앙적인 변화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 역시 아직 미래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도와 서원 뒤에도 고통이 그치지 않다

그러나 고통은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처지에 희망을 잃고 유대 사람들에게 아래에 적힌 편지를 썼다. 애원의 형식을 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마카베오기 하권 9:1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왕이 신앙적인 말을 했으므로 당연히 병이 나아야 한다는 기대를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고백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본문의 판단은 더 제한적이고 분명합니다. 왕이 아무리 많은 것을 서원해도 그가 직면한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진심이었는지에 대한 심리적 판단보다, 그가 한 말과 실제로 일어난 결과 사이의 간격이 강조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자유로운」은 이 문맥에서는 왕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도시의 지위를 가리키는 정치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안티오코스가 어떤 구체적인 행정적·법적 권리를 부여하려 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서원과 편지 사이에 있는 거리

마카베오기 하권 9:19–27 본문 →

유대 사람들을 선량한 시민이라고 부르는 왕

9장 후반부에는 안티오코스가 유대 사람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실려 있습니다.

「왕이자 사령관인 안티오코스가 선량한 유대 시민들에게 많은 인사를 전하며, 건강하고 잘 지내기를 바라오.」마카베오기 하권 9:19 · 본디새김

이 인사 자체는 고대 그리스어 편지에서 사용되는 관례적인 형식에 속합니다. 보내는 사람이 자신을 밝히고, 받는 사람들을 부르며,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율법을 탄압하고 그들을 죽이려 했던 왕이 이제 그들을 선량한 시민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왕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은 그들의 충성과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희망이 없다는 서술과 희망이 있다는 편지

18절에서 저자는 왕이 자기 처지에 희망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편지에서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처지에 희망을 잃어서가 아니오. 나는 이 병에서 벗어나리라는 큰 희망을 품고 있소.」마카베오기 하권 9:22 · 본디새김

여기서는 서술자의 시점과 왕이 편지에서 제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왕이 편지에서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가 실제로 병에서 나을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아직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강조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그의 내면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정을 알리려 합니다. 바로 후계자를 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왕이 완전히 무력해졌다는 인상을 준다면, 제국 안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병이 회복될 희망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후계자를 미리 세우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오히려 왕의 실제 위기와 그가 공식적으로 보여 주려는 모습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21절에서 왕은 유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 준 존경과 호의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6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 간청하며 요청하오. 공동으로 또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를 기억하여, 저마다 나와 내 아들에게 품고 있는 호의를 지켜 주시오.」마카베오기 하권 9:26 · 본디새김

하지만 앞에서 독자들이 보아 온 것은 왕의 은혜가 아니라 그의 박해입니다. 성전의 약탈, 율법을 버리라는 강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왕이 자신의 통치 기간에 어떤 정치적 혜택을 제공한 일이 있었을 가능성까지 본문이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왕의 편지는 자신이 베푼 은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술자는 그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이 편지에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한 피해를 언급하는 대신 자신이 베푼 혜택을 기억해 달라고 말합니다.

앞선 서원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왕은 성전과 유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유대 사람들에게 보내는 정치적 문서입니다. 그곳에서 왕은 자기 왕가에 계속 충성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문서는 서로 다른 청중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에 성전 복구 약속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원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두 문서를 연달아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왕의 태도 변화를 쉽게 이상화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왕이 가장 염려한 것은 제국의 미래였다

23–25절에서 편지의 중심 내용이 드러납니다.

왕은 아버지가 윗지방으로 출정할 때 후계자를 지명했던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지명했다고 알립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라 안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국경의 다른 통치자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자기 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단순히 개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왕조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왕은 더 이상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어 통치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유대 사람들의 호의를 확보하여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은 아들에게도 아래 적힌 내용을 써 보냈다고 말합니다. 27절에서 그는 자신의 아들이 유대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도 정치적인 호의와 충성의 관계 속에서 제시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의 마지막 공식 문서에서는 자신이 속한 왕조의 지속을 위해 행동합니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후계 문제를 책임 있게 처리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본문은 편지를 통해 왕의 관심이 여전히 왕조와 정치적 질서에 강하게 묶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과, 그 깨달음에 따라 삶의 방향을 실제로 바꾸는 일은 구별됩니다.

그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판단하려면 그 말을 넘어서는 삶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에게는 더 이상 그 삶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낯선 땅에서 끝난 왕의 생애

마카베오기 하권 9:28–29 본문 →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일이 그에게 돌아오다

이렇게 그 살인자이며 모독자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했던 것과 같은 최악의 고통을 겪고, 낯선 땅의 산속에서 더없이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쳤다.마카베오기 하권 9:28 · 본디새김

저자는 그의 생애 전체를 심판의 관점에서 요약합니다. 왕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방식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 그의 삶을 드러내는 결말이 됩니다.

특히 「낯선 땅」이라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왕은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 도시들을 장악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자신이 지배하려 했던 예루살렘에서도, 자신의 왕궁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유대 사람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계획한 공동묘지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이것이 4절의 선언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왕의 시신을 옮기는 사람

29절에서는 왕과 함께 자란 빌립이 그의 시신을 옮겼다고 기록합니다.

빌립은 그 시신을 옮기지만, 그 자신도 안티오코스의 아들을 두려워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로메토르에게로 달아납니다. 왕의 죽음은 제국에 평안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후계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정치적 불안이 시작됩니다.

왕은 편지에서 후계자를 미리 정하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29절은 적어도 빌립에게는 그 기대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왕은 자신의 생애를 지배할 수 없었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모든 일을 결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안티오코스의 죽음은 마카베오기 상권 6장 1–16절에서도 기록됩니다. 상권에서는 왕이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에 있는 부유한 신전을 약탈하려다가 실패하고,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군사적 패배와 성전 회복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깊은 실망과 근심으로 병들어 죽어 갑니다. 특히 상권 6장 12–13절에서는 왕이 예루살렘에서 저질렀던 악행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그 때문이라고 인정합니다. 상권은 왕의 내면적인 근심과 후회의 고백을 상대적으로 자세히 전합니다. 반면 하권 9장은 그의 육체적 고통과 교만의 붕괴, 서원과 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자체의 1장 13–17절에는 다른 전승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기록에서는 안티오코스가 나네아 신전의 재물을 차지하려다가 제사장들의 계략에 빠져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9장의 죽음 서술과 동일한 사건 전개로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 기록을 억지로 하나의 시간 순서에 맞추어 조화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장소에서 어떤 질병이나 사건으로 죽었는지는 이 본문들만으로 하나의 확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9장에 기록된 왕의 신체적 증상을 특정한 질병으로 진단하거나, 모든 장면을 역사적으로 그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는 증거를 넘어섭니다.

결국 왕에게 남은 것은

마카베오기 하권 9:1–29 본문 →

안티오코스의 근본적인 잘못은 단순히 잔인하고 탐욕스러웠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잔인함과 탐욕의 바탕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다시 분명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왕은 지금까지 파괴하려던 것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진정한 관계 회복으로 이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왕이 고통을 겪는 장면을 읽으며 그가 당한 일을 단순히 즐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본문이 비판하는 태도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장의 심판은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권력에 대한 판단으로 읽어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는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행렬도, 그가 약속했던 예루살렘의 파괴도 없습니다. 빌립이 왕의 시신을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바다의 물결을 다스리고 산들을 저울에 달 수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몸을 옮기는 일조차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왕이, 마침내 자기 몸조차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장은 그 적막한 장면에서 인간의 권력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인간이 끝내 넘을 수 없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 주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