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5–20장 · 압살롬의 반란

왕의 귀환과 갈라진 나라

사무엘하 19장에서 다윗은 마침내 왕의 자리로 돌아갈 길을 얻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무너졌고, 다윗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왕으로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왕을 왕좌에 돌려놓는 일과 갈라진 백성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났던 때의 관계를 그대로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은 죽었고, 부하들은 상처받았으며, 사울 집안과의 오래된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반란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다시 왕의 신하가 되어야 하고, 왕을 끝까지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충성이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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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군사들이 패배자처럼 돌아오다

사무엘하 19:1–9 본문 →

이 장은 다윗의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몸을 떨며 성문 위 다락방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사무엘하 19:1 · 본디새김

그의 말에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자신의 왕권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이라는 말은 실현할 수 없는 바람입니다. 이미 일어난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이 말의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생존을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날의 승리는 온 백성에게 애도로 바뀌었다. 그날 백성은 왕이 자기 아들 때문에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9:3 · 본디새김

전쟁의 결과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군대는 여전히 승리했고, 압살롬의 반란은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날 백성은 전쟁에서 달아나 수치를 당한 사람들이 몰래 들어오듯이 성읍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사무엘하 19:4 · 본디새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승리가 왕에게는 슬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슬픔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에게는 또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압살롬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자신과 가족들이 어떤 위험에 놓였을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왕이 아들의 죽음만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희생과 충성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왕의 개인적인 슬픔이 공동체 전체의 감정과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요압의 책망은 옳은가

요압은 왕을 찾아와 격렬하게 말합니다.

요압이 집 안으로 왕을 찾아와 말했다. 「왕께서는 오늘 왕의 목숨과 왕의 아들딸들의 목숨과 아내들의 목숨과 후궁들의 목숨을 구해 낸 모든 종의 얼굴에 수치를 안기셨습니다.」사무엘하 19:6 · 본디새김

그는 다윗이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게 한 사람이 요압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지금 왕에게 다른 사람들을 보라고 요구합니다.

왕과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 군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다윗뿐 아니라 그의 다른 가족들도 위험에 처했을 수 있습니다.

「왕을 미워하는 자들은 사랑하시고 왕을 사랑하는 자들은 미워하신 것입니다. 오늘 왕께서는 지휘관들과 종들이 왕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저는 알았습니다. 압살롬이 살아 있고 저희가 오늘 모두 죽었다면, 오히려 왕께서는 그것을 좋게 여기셨을 것입니다.」사무엘하 19:7 · 본디새김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 말이며, 다윗의 마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질책입니다. 다윗이 다른 군사들의 죽음을 바랐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왕의 행동이 군사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기 위해 과장된 대조를 사용합니다.

게다가 8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왕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왕 곁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조언인 동시에 강한 압박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죽인 바로 그 지휘관에게서, 이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멈추고 왕으로서 행동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이 장면의 비극은 어느 한쪽이 모든 면에서 옳거나 그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다윗의 슬픔은 진실하지만, 그 슬픔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압이 제기한 문제는 중요하지만, 그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까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락방에서 성문으로

요압은 다윗에게 「일어나 나가셔서 종들의 마음을 달래는 말씀을 하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19:8).

전투는 끝났습니다. 이제 왕에게 필요한 것은 명령을 내리는 능력보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는 일입니다.

왕은 일어나 성문에 앉았다. 사람들은 온 백성에게 「왕께서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하고 알렸다. 온 백성이 왕 앞으로 나왔다. 한편 이스라엘은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달아난 상태였다.사무엘하 19:9 · 본디새김

다윗은 아들의 죽음을 듣고 성문 위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슬픔에 잠길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공적인 판단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는 슬픔을 안은 채 왕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왕은 자기 아들을 위해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운 백성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 두 관계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을 돌아오게 하자던 사람들보다 유다가 늦다

사무엘하 19:10–15 본문 →

전쟁이 끝났지만 다윗은 아직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흩어졌고,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서는 다윗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쟁이 벌어집니다.

온 백성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서로 논쟁하며 말했다. 「왕께서는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셨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소. 그런데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 이 땅에서 달아나셨소.」사무엘하 19:10 · 본디새김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이룬 일들은 압살롬을 지지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에는 자신들의 책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쫓아냈을 때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그를 지지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이 자신들을 구했던 역사를 다시 말하면서 왕을 돌아오게 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 위에 세운 압살롬은 전쟁에서 죽었소. 그런데 이제 왕을 돌아오시게 하는 일에 왜 당신들은 잠자코 있소?」사무엘하 19:11 · 본디새김

이 대화는 왕권의 회복이 군사적 승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다시 왕으로 돌아가려면 백성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합니다.

왜 다윗은 유다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는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서 다윗의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도, 정작 유다의 장로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유다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어째서 너희는 왕을 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맨 마지막이 되려 하느냐?』」 온 이스라엘의 말은 왕이 머무는 집에까지 이르러 있었다.사무엘하 19:12 · 본디새김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입니다. 유다는 그의 가장 가까운 혈연적·지역적 기반입니다.

그 이유는 직접 설명되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유다 땅의 헤브론에서 반란을 선포했고(15:10), 유다 내부에서도 압살롬을 지지한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다윗의 귀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심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배경 설명이지, 서술자가 밝힌 확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다윗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혈연관계를 강조합니다.

「『너희는 내 형제다. 너희는 내 뼈요 내 살이다. 그런데 어째서 너희는 왕을 돌아오게 하는 데 맨 마지막이 되려 하느냐?』」사무엘하 19:1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사무엘하 5:1에서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헤브론으로 와서 다윗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 자신들이 그의 뼈와 살이라고 말하며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다윗이 유다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합니다.

과거에는 온 이스라엘이 다윗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왕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지파를 향해 그 관계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아마사를 요압 대신 세우겠다는 약속

다윗은 아마사에게도 중요한 제안을 합니다.

「아마사에게는 이렇게 말하라. 『너는 내 뼈요 내 살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언제나 내 앞에서 군대 지휘관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하시고 더한 일도 하시기를 바란다.』」사무엘하 19:14 · 본디새김

아마사는 압살롬이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지휘관으로 세웠던 사람입니다(17:25). 다윗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세력의 핵심 인물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아마사를 적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새 질서에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요압을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다윗이 왜 요압을 교체하려는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유다의 반란 가담자들을 포용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문맥에서 가능한 해석이지만 어느 하나만을 결정적인 동기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처럼 돌아온 유다

다윗은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처럼 돌려놓았다. 그들은 왕에게 말을 전했다. 「왕께서는 모든 종과 함께 돌아오십시오.」사무엘하 19:15 · 본디새김

사무엘하 15:6에서는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이제 다윗의 귀환을 앞두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이 한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의 불만을 이용해 다윗의 왕권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친족관계를 강조하고 이전의 적에게 지위를 약속함으로써 왕권을 회복하려 합니다. 다만 다윗의 설득이 순수한 화해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적 계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차이가 장의 마지막에서 폭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마음을 돌린 동사의 주어는 명시되어 있지 않아 다윗으로 볼 수도 있고, 아마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다윗을 주어로 읽었습니다.

요단강가에 먼저 나온 시므이 —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용서받는 것

사무엘하 19:16–24 본문 →

왕이 요단강으로 돌아오자 유다 사람들이 길갈로 나와 그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시므이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던 날 그를 저주하고 돌을 던졌던 베냐민 사람입니다(16:5–13). 그와 함께 베냐민 사람 천 명이 오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이 숫자들은 왕을 맞이하는 일이 개인적인 인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자신이 베냐민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 주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이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권의 회복 과정에서 베냐민 지역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베냐민은 사울이 속했던 지파이며, 다윗과 사울 집안의 관계에는 오래된 갈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립니다.

그가 왕에게 말했다. 「저의 주께서는 제게 죄를 돌리지 마십시오. 제 주인이신 왕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던 날, 왕의 종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사무엘하 19:20 · 본디새김

앞서 그는 다윗의 몰락이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 심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왕의 형편이 바뀌자 그의 말도 바뀐 것입니다.

21절에서 그는 자신이 「요셉의 온 집안에서 맨 먼저」 왕을 맞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왕의 귀환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제시합니다.

아비새는 다시 칼을 요구한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나섭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나서서 말했다. 「시므이는 이 일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이를 저주했습니다.」사무엘하 19:22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서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던 날의 상황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그때도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했고, 다윗은 말렸습니다(16:9–10).

그러나 다윗은 이번에도 거절합니다.

다윗이 말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나와 너희가 무슨 상관이기에 오늘 너희는 나를 가로막는 자가 되려 하느냐? 오늘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죽임을 당해서야 되겠느냐? 오늘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사무엘하 19:23 · 본디새김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다윗이 왕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날, 누군가를 죽이는 일로 왕권을 확인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시 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왕의 권력을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날을 이전의 적들을 처벌하는 날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적어도 시므이에게는 살 길을 열어 줍니다. 그는 시므이에게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일과 그 잘못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다윗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공정하게 행동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곧 므비보셋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이 진심 어린 회개인지,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판단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 가능성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시므이의 내면이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집안은 시므이 자신의 정확한 족보를 가리킨다기보다, 유다와 구별되는 북쪽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를 넓게 부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요셉의 이름이 북쪽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 — 왕이 돌아왔지만, 빼앗긴 것을 돌려받지는 못한다

사무엘하 19:25–31 본문 →

므비보셋은 사울의 자손이며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이전에 요나단과 맺은 관계를 기억하여 그에게 사울 집안의 땅을 돌려주고 왕의 식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사무엘하 9장).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떠났을 때,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그가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 왕조의 왕권을 되찾으려 한다고 고발했습니다(16:3). 다윗은 그 고발을 듣고 므비보셋의 재산 전부를 시바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므비보셋이 직접 왕 앞에 나타납니다.

사울의 자손 므비보셋도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온 날까지 발을 손질하지 않았고, 콧수염도 손질하지 않았으며, 옷도 빨지 않았다.사무엘하 19:25 · 본디새김

이런 모습은 슬픔과 애도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왕의 몰락을 기뻐하며 왕권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시바의 주장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가 왕을 맞으러 예루살렘에 왔을 때, 왕이 그에게 말했다. 「므비보셋아, 어째서 너는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사무엘하 19:26 · 본디새김

다윗은 므비보셋이 함께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전히 문제 삼고 있습니다. 시바의 고발을 완전히 잊거나 철회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제 주인이신 왕이시여, 제 종이 저를 속였습니다. 왕의 종인 저는 『내가 탈 나귀에 안장을 얹어 그것을 타고 왕과 함께 가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왕의 종인 저는 다리를 절기 때문입니다.」사무엘하 19:27 · 본디새김

당시 시바는 안장을 얹은 나귀 두 마리와 많은 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왔습니다. 다윗은 시바에게 므비보셋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고, 시바는 그가 예루살렘에 남아 사울 왕조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시바는 므비보셋을 이동할 수 없게 만들고, 그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배신으로 설명한 셈입니다. 그러나 서술자는 시바의 고발과 므비보셋의 해명 가운데 어느 쪽이 완전히 사실인지 직접 판정하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제 주인이신 왕께 왕의 종을 모함했습니다. 제 주인이신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하십시오.」사무엘하 19:28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다윗의 판단 능력에 대한 높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다윗이 앞서 시바의 말만 듣고 재산을 넘겨주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므비보셋이 왕을 하나님의 사자와 같다고 부른다고 해서, 다윗의 실제 판단이 언제나 하나님처럼 정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이 원래 사울 집안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다윗의 은혜로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 집안의 후손인 그에게 생존과 생활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자신에게 더 요구할 권리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뜻밖에 차갑습니다.

왕이 그에게 말했다. 「어째서 네 말을 더 늘어놓느냐? 내가 말한다. 너와 시바는 그 밭을 나누어 가져라.」사무엘하 19:30 · 본디새김

두 사람의 주장을 검증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재산을 나누어 가지라는 명령으로 문제를 끝냅니다.

절반씩 나누는 것이 공정한 판결일까

그보다 분명한 것은 왕이 누구의 진술이 옳은지 공개적으로 판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므비보셋이 모함당했다면 시바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므비보셋이 실제로 배신했다면 그에 따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느 쪽도 분명하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왕권 회복을 위한 정치적 안정이 개별적인 정의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피해가 바로잡히지는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고발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지 못한 채 남아 있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므비보셋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

므비보셋이 왕에게 말했다. 「그가 전부 가져가게 하십시오. 제 주인이신 왕께서 평안히 왕의 집으로 돌아오셨으니 말입니다.」사무엘하 19:31 · 본디새김

그는 왕이 평안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재산보다 앞에 놓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지만, 그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므비보셋은 그런 왕에게 여전히 충성을 표현합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언제나 공정하게 대했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한쪽에서는 다윗이 앞서 시바에게 재산 전부를 넘긴 판결을 수정하여 양쪽에 절반씩 주었다고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사무엘하 9장에서 정해진 원래의 관계, 곧 므비보셋이 땅의 소유자이고 시바가 그 땅을 경작하며 소출을 얻는 관계를 다시 확인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토지의 소유권과 소출을 정확히 어떻게 나누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재산의 소유권을 정확히 절반씩 나누었는지, 기존의 경작 관계를 회복하려 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시바와 그 집안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고 타협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시바는 앞서 베냐민 사람들과 함께 왕을 맞으러 왔으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을 거느린 인물입니다. 왕이 이미 내렸던 결정을 완전히 철회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주장을 모두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다윗이 지혜롭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 판결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가 어떤 특정한 정치적 계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의를 행했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므비보셋의 「그가 전부 가져가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깊은 충성의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재산보다 다윗의 생존과 귀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상처받은 사람의 체념이나 서운함이 담겨 있다고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말을 더 듣지 않으려 하자, 재산을 모두 가져가도 좋다고 대답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므비보셋의 감정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을 순수한 기쁨으로만 확정하거나 반대로 냉소적인 항의로만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르실래 — 보상을 받지 않고도 왕을 끝까지 돕는 사람

사무엘하 19:32–40 본문 →

이제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등장합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했을 때 음식과 필요한 물품을 가져왔던 세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17:27–29). 그때의 도움은 결과를 알고 선택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실제로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제공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돌아갈 길을 얻자 바르실래는 왕을 요단강까지 배웅하러 옵니다.

본문은 그가 여든 살이며 재산이 매우 많은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왕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마음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을 먹일 수 있는 자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와 함께 건너가시오. 내가 예루살렘에서 그대를 내 곁에 두고 먹을 것을 대 주겠소.」사무엘하 19:34 · 본디새김

왕 곁에서 먹고 지내는 것은 왕실의 보호와 호의를 받는 삶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가 자신을 도왔던 것처럼 이제 자신이 바르실래의 남은 삶을 돌보려 합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바르실래가 왕에게 말했다. 「제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습니까?」사무엘하 19:35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나이와 몸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왕궁의 풍성한 음식과 음악은 많은 사람에게 큰 보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보상을 받기 위해 왕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부디 왕의 종을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제 성읍에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죽게 해 주십시오. 여기 왕의 종 김함이 있습니다. 그가 제 주인이신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고, 왕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그에게 해 주십시오.」사무엘하 19:38 · 본디새김

바르실래에게 중요한 것은 왕궁에서 높은 대접을 받는 일보다 자신이 살아온 고향에서 생을 마치는 일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그 호의를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몫을 김함에게 넘겨주다

바르실래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다른 사람에게 이어 주려 합니다. 그는 보상을 사양하지만, 왕의 호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윗도 그 뜻을 받아들입니다. 김함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고, 바르실래가 바라는 일을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므비보셋은 재산에 관한 문제에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왕이 평안히 돌아온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바르실래는 왕이 제안하는 혜택을 자신이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연결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처지에 있지만, 왕과의 관계를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회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면 다윗은 므비보셋에게는 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바르실래에게는 그가 원하는 바를 물으며 받아들입니다. 두 관계의 사정이 다르므로 단순히 다윗이 한 사람만 편애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방식이 각 장면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요단강에서 나눈 입맞춤

40절에서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축복합니다. 왕은 돌아가고, 바르실래는 자기 처소로 돌아갑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성을 요구하거나 보상을 계산하며 다투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보답하려 하며, 바르실래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응답합니다.

이것은 왕권을 둘러싼 많은 갈등 속에서 드물게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관계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를 붙잡지 않습니다. 바르실래도 왕의 호의를 이용해 더 큰 권력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왕을 향한 충성이나 은혜가 반드시 왕 곁에 머무는 것으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만남 뒤에, 본문은 가장 거친 갈등을 배치합니다.

조금 더 깊이

김함이 바르실래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이 장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를 바르실래의 아들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저 「왕의 종 김함」으로 소개됩니다.

왕을 누가 데려올 권리가 있는가

사무엘하 19:41–44 본문 →

다윗은 길갈에 도착합니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 함께 왕을 강 건너로 옮깁니다. 왕이 돌아오는 행렬입니다.

그런데 곧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와서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왕에게 와서 말했다. 「어째서 저희 형제인 유다 사람들이 왕을 빼돌려, 왕과 왕의 집안과 다윗의 모든 사람을 함께 요단강 건너로 데려갔습니까?」사무엘하 19:42 · 본디새김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은 왕이 누구에게 더 가까운가를 놓고 다툽니다.

유다의 주장 — 왕은 우리의 친족이다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왕께서는 우리와 가까운 친족이시기 때문이오. 그런데 왜 이 일 때문에 당신들이 화를 내시오? 우리가 왕께 얻어먹기라도 했소? 우리에게 무슨 선물이 주어지기라도 했소?」사무엘하 19:43 · 본디새김

다윗은 실제로 유다 지파 출신입니다. 그를 맞이하는 일에서 유다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지파들이 배제되었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윗을 자신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귀환을 먼저 제안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왕을 실제로 맞이하는 중요한 행사에서 유다 사람들이 주도권을 차지하자 자신들이 무시당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장 — 왕에게는 우리의 몫이 더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왕에 대한 몫이 우리에게는 열 몫이오. 다윗에 대해서도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큰 몫을 갖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하찮게 여겼소? 우리 왕을 돌아오시게 하자는 말을 우리가 먼저 하지 않았소?」 그러나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거셌다.사무엘하 19:44 · 본디새김

여기서 「열 몫」은 여러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 왕권에 대해 가진 권리를 주장하는 말입니다. 유다가 하나의 지파라면, 자신들은 더 많은 지파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왕을 맞이하는 일에 더 큰 권리가 있다는 논리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돌아와 온 이스라엘을 다시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누가 왕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 더 큰 공로를 인정받을 것인가라는 경쟁으로 바뀝니다. 왕이 누구의 왕인가를 묻는 대신, 누가 왕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를 다투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의 불길함

누가 옳은지 판결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양보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유다 사람들의 말이 더 거셌다는 사실만 남깁니다.

앞에서 유다 사람들의 마음은 한 사람의 마음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된 마음이 온 이스라엘의 화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유다 내부의 결속은 강해졌지만, 그것이 다른 지파들과의 관계에서는 새로운 대립의 원인이 됩니다.

한 집단이 내부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언제나 더 큰 공동체의 화합을 뜻하지 않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참여와 자존심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의 권리가 무시당했다고 항의하지만, 그들 역시 왕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는가라는 경쟁의 언어로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왕을 빼돌려」입니다. 이것은 사무엘하 15:6에서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같은 어근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반란이 무너지고 다윗이 돌아오는 순간, 이번에는 유다 사람들이 왕을 훔쳤다는 비난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이라는 숫자를 통해 자신들이 유다보다 더 큰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장에서 세바의 반란이 일어납니다(사무엘하 20:1–2). 따라서 19장의 마지막 논쟁은 단순히 감정이 상한 말다툼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맺음 — 강을 건넌 왕, 갈라진 마음들

사무엘하 19:1–44 본문 →

왕이 돌아오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가 다시 드러나는 길입니다. 정치적 중심이 하나가 된다고 해서 그 중심을 둘러싼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돌아오는 것은 왕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입니다.

이 장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등장하여 다윗의 모든 판단을 승인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내린 모든 정치적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일 수 있지만, 여전히 잘못 판단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왕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백성의 마음 사이에는 아직 건너지 못한 강이 남아 있습니다.

사무엘하 19장은 그 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는지 대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것은 화해의 축복도, 왕의 감사 인사도 아닙니다. 서로 자신이 왕에게 더 큰 몫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격렬한 말소리입니다.

다윗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