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끝인사

누구를 받아들이고 밀어내는가

교회가 진리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올바른 가르침을 알고,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믿음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삼서는 조금 뜻밖의 자리에서 이 질문을 다룹니다. 누군가가 먼 길을 걸어 교회에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짧은 편지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이오는 낯선 형제들을 돕는 사람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그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내쫓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여러 사람과 진리 자체에게서 좋은 증언을 받는 사람입니다.

장로는 디오드레베가 무엇을 믿는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부터 말합니다. 그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길을 떠난 형제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나선 사람들입니다.

한쪽에는 자기 자리를 앞세우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이오는 그 사이에서 누구의 길을 열어 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삼서는 바로 그 선택을 두고 쓰인 편지입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가

요한삼서 1:1–4 본문 →

장로는 가이오를 두고 「사랑하는」이라는 표현을 쓰고, 곧바로 「나는 그를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장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장로」라고만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편지는 사도 요한과 연결되어 왔지만, 본문 자체는 저자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직책을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가이오를 깊이 아끼며, 여러 신앙 공동체의 형제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그대, 그대의 마음이 잘되어 가는 그대로, 그대가 모든 면에서 잘되고 건강하기를 나는 빕니다.요한삼서 1:2 · 본디새김

장로는 가이오의 내면이 잘되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그가 모든 면에서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도와 소망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신앙이 좋으면 반드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장로가 가이오의 내면을 아는 것은 형제들이 찾아와 그에 관해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걷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3절의 「그대의 진리」는 가이오에게만 속한 별도의 진리가 아니라, 그가 받아들인 진리가 그의 삶에 실제로 드러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단지 마음속에 간직하거나 입으로 고백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걷는다는 표현은 하루의 행동뿐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방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이오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자기 신앙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보다 그가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통해 증언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걷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나에게는 없습니다.요한삼서 1:4 · 본디새김

「내 자녀들」은 장로가 신앙 안에서 돌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을 모두 직접 회심시켰다는 뜻까지 본문에서 확인되지는 않지만, 단순한 감독과 관리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장로의 가장 큰 기쁨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충성하는지, 자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가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장로는 다른 사람의 신실한 삶을 기뻐하고, 뒤에 등장할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으뜸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이 공동체를 무엇을 위해 대하는지 드러냅니다.

그런데 가이오의 삶에서 진리가 어떻게 나타났다는 것일까요? 장로는 추상적인 미덕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가 낯선 사람들에게 행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낯선 사람이 형제가 되는 자리

요한삼서 1:5–8 본문 →

사랑하는 그대, 그대는 형제들, 그것도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직하게 해내고 있습니다.요한삼서 1:5 · 본디새김

가이오가 도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같은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이었지만, 그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혈연도, 오래된 우정도,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들을 이어 주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공동의 믿음입니다.

그 형제들은 장로가 있는 교회에 돌아가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했습니다. 3절에서 그들이 증언한 것은 「그대의 진리」였는데, 6절에서는 「그대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두 증언은 서로 다른 미덕을 칭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걷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그가 보여 준 사랑입니다.

장로는 이어서 그들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도와 떠나보내라고 권합니다. 떠나보내는 일은 작별 인사에 그치지 않고, 여행자들이 다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정확히 무엇을 제공해야 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지만, 7–8절을 보면 실제적인 지원이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기준 아래에서는 지원받는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가, 장래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이름을 위해 일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길을 나섰고, 이방 사람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이 절에 직접 적혀 있지 않지만, 요한서신의 문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한일서 3:23은 하나님의 계명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일로 설명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이방 사람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은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이방 사람들은 단순히 비유대인 전체라기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환대는 길을 떠난 형제들의 활동을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위한 동역자가 되도록 이런 이들을 맞아들여 떠받쳐야 합니다.요한삼서 1:8 · 본디새김

장로는 가이오 개인에게만 착한 일을 계속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이라는 말로 그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책임을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한다」는 말에는 의무의 뜻이 담겨 있어, 환대는 특별히 관대한 사람만 선택해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공동의 믿음이 만들어 내는 책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의 결과는 예상보다 큽니다. 가이오는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고, 그들이 어디까지 여행했는지도 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맞이하고 다음 여정을 도왔다는 이유로 「진리를 위한 동역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의 필요에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형제들의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세계에도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은 있었습니다. 창세기 18:1–8에서 아브라함은 방문객들에게 물과 음식과 쉴 자리를 제공합니다. 요한삼서는 그러한 환대에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동기를 더합니다. 8절의 「마땅히 해야 한다」는 그리스어 오페일로멘(ὀφείλω)으로, ‘우리에게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40–42에서 자신이 보내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된다고 가르치셨고,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작은 행동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일서 3:16–18은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에서 형제를 사랑할 책임을 이끌어 내며, 궁핍한 형제를 외면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요한복음 13:34–35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한편 초기 교회 문헌인 《디다케》 11–12장은 떠돌아다니는 교사와 사도들을 환대하도록 하면서도, 가르침과 행동을 분별하고 금전적 요구를 경계하도록 합니다. 이런 환대가 실제 공동체의 중요한 과제였음을 보여 주는 비교 자료이지만, 요한삼서의 바로 그 공동체 상황을 설명하는 문서는 아닙니다.

그리고 요한삼서에는 그 환대를 가로막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요한삼서 1:9–10 본문 →

내가 교회에 무엇인가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요한삼서 1:9 · 본디새김

9절은 편지의 분위기를 갑자기 바꿉니다.

가이오의 사랑과 형제들의 증언 뒤에, 장로가 다른 교회 공동체와 맺고 있는 갈등이 드러납니다. 장로가 이전에 교회에 썼다는 글이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 편지였는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서신과 관계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장로는 디오드레베를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공동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설명이 아니라, 그의 행동 뒤에 있는 지위에 대한 애착을 문제 삼는 말입니다. 가이오는 다른 사람들의 길을 열어 주고 낯선 형제들을 받아들이지만, 디오드레베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거치지 않고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10절에서 장로는 그의 행동을 차례로 열거합니다. 그는 장로와 그 일행을 악한 말로 헐뜯고, 찾아오는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막고,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습니다.

처음에는 말로 관계를 훼손합니다. 다음에는 자신이 환대를 거부합니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환대할 자유까지 빼앗습니다. 마지막에는 공동체에 속할 자리를 박탈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라는 표현이 보여 주듯, 디오드레베의 문제는 개인적인 불친절이나 사소한 성격상의 결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태도를 공동체 전체에 강요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오드레베는 왜 그 형제들을 거절했을까요? 본문은 그가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다고 설명하지만, 그 밖의 동기와 사건의 전체 경위를 자세히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의 행동을 개인적 권위 다툼과 관련하여 읽는 견해와, 공동체가 외부의 교사들을 경계하던 상황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교리적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장로는 디오드레베가 형제들을 거절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악한 말로 헐뜯고 다른 사람들까지 억압하며 공동체에서 내쫓는 행동을 문제 삼습니다.

요한이서 7–11절은 예수님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요한삼서는 진리를 위해 일하는 형제들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두 편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해야 하며, 바로 그 진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문제는 누구를,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가에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책망은 공동체의 질서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서를 세우고 사람을 분별할 권한이 자기중심적인 지배의 도구로 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 행동은 공동체가 함께 섬겨야 할 일을 가로막습니다.

조금 더 깊이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은 그리스어 필로프로테우온(φιλοπρωτεύω)으로, ‘첫째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표현입니다.

무엇을 본받을 것인가

요한삼서 1:11–12 본문 →

장로는 디오드레베를 책망한 뒤 곧바로 가이오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삼서 1:11 · 본디새김

이 권면은 앞의 갈등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입니다. 가이오의 공동체에는 형제들을 맞아들이는 사람과 쫓아내는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본보기가 있습니다. 믿음은 가르침을 듣는 것뿐 아니라 눈앞의 행동을 보며 배우는 일이기도 해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악한 행동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라는 말은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속할 자격을 얻는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일서 4:7–8에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며,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의 특징으로 제시됩니다. 요한삼서 역시 행동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도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일서 4:12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장하면서 사랑을 거스르는 삶을 지속한다면, 그 주장은 심각한 의문 앞에 놓입니다.

높은 지위,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 자신이 가진 가르침의 권위가 하나님을 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요? 장로는 가이오에게 그보다 먼저 행동의 열매를 보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두에게서, 그리고 진리 자체에게서 증언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삼서 1:12 · 본디새김

장로는 데메드리오의 직책이나 능력, 업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증언을 받고 있는지 말합니다. 3절에서는 형제들이 가이오의 진리를, 6절에서는 그의 사랑을 증언했고, 이제 12절에서는 데메드리오를 향한 증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리 자체」가 증언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진리가 실제로 말을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데메드리오에 대한 좋은 평가가 단순한 평판이나 개인적 호의에만 근거하지 않고, 그의 삶이 공동체가 믿고 전하는 진리에 부합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여기에 자신의 증언을 덧붙이며,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가이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데메드리오가 이 편지를 직접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가이오에게 소개될 필요가 있는 여행자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은 그의 역할을 확정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악한 본보기를 피하라는 권면 바로 뒤에 좋은 증언을 받는 사람의 이름이 놓였다는 점입니다. 디오드레베의 행동을 흉내 내지 말라는 권면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누구도 이 편지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장황하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난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증언입니다.

진리는 단지 사람들이 서로 좋게 평가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고백한다는 주장 역시 삶과 무관하게 참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장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백한 진리와 살아 내는 삶이 서로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진리’와 ‘참되다’가 같은 어근으로 연결되어 있어, 진리 자체의 증언과 장로의 참된 증언이 서로 호응합니다.

먹과 갈대 펜으로 다 쓸 수 없는 것

요한삼서 1:13–15 본문 →

편지는 예상보다 갑작스럽게 끝납니다.

나는 그대에게 쓸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먹과 갈대 펜으로 그대에게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요한삼서 1:13 · 본디새김
그리고 곧 그대를 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요한삼서 1:14 · 본디새김

이 결말은 요한이서 12절과 매우 비슷합니다. 두 편지 모두 글로 전달하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직접 만나는 일을 기대하며 마무리합니다.

요한삼서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그러진 데 있습니다. 누군가는 찾아온 사람들을 거절하고, 다른 사람들을 헐뜯으며, 그들을 받아들인 이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장로는 직접 가면 디오드레베의 행동을 짚어 말하겠다고 했고, 가이오와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공동체의 잘못을 덮어 두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실제 만남과 관계의 자리에서 이어 가려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친구들이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친구들에게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문안해 주십시오.요한삼서 1:15 · 본디새김

앞에서 쓰던 「형제들」과 달리, 여기서는 「친구들」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은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입니다. 장로는 공동체의 사람들을 익명의 집단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과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디오드레베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습니다. 장로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문안하라고 합니다.

평화는 갈등이 없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쫓아내는 행동을 바로잡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서 관계를 이어 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5: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관계를 친구라는 말로 설명하십니다. 요한삼서가 그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우정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인 연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일하는가

요한삼서 1:1–15 본문 →

요한삼서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길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나 십자가, 부활에 관한 상세한 논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편지의 중심에 계십니다. 형제들이 길을 떠난 이유가 「그 이름을 위하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공동체를 정당화하는 이름으로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동체가 아무런 분별 없이 누구에게나 권위와 영향력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로 자신도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동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며,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물음은 누가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권한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진리를 섬기는 데 쓰이는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 쓰이는가입니다. 가이오는 길을 떠난 형제들을 직접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걸음을 도왔습니다. 작은 일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장로는 그것을 진리를 위한 동역이라고 불렀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장로는 모든 친구에게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문안하라고 합니다. 갈등과 거절과 추방의 이야기를 지나, 편지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 이름들 가운데 가이오가 있습니다. 장로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 낯선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으뜸이 되기를 원했고, 누군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가이오는 그 길 위에 선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삼서가 남기는 장면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 곁에서, 다른 이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