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6장 · 슬픈 노래와 바른 재판
장례 노래 속 생명의 초청
아모스 5장은 아직 살아 있는 나라를 위해 장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성읍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성문에서는 재판이 열리며, 성소에서는 절기와 제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이미 나라가 죽은 것처럼 애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두 절 뒤에 뜻밖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나를 찾고 살아라.」 이미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나라에, 하나님은 살아날 길을 말씀하십니다.
이 두 선언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까요?
한쪽에서는 멸망이 확정된 것처럼 노래하고,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생명을 선택하라고 부릅니다. 아모스는 이 긴장을 서둘러 해소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5장의 중심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외면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나라를 위해 부르는 장례 노래
아모스는 먼저 자신이 전할 말의 성격을 밝힙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내가 너희를 두고 애가로 부르는 이 말을 들어라.아모스 5:1 · 본디새김
「애가」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거나 재난을 슬퍼하며 부르는 노래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9:17–20에서는 곡하는 여자들을 불러 애가를 가르치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에스겔 27장은 두로를 위한 애가의 형식으로 멸망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애가를 부르는 대상은 이미 죽은 개인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앞으로 닥칠 심판을 이미 일어난 죽음처럼 노래합니다. 미래의 멸망을 현재의 장례식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부르는가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기 땅 위에 버려졌고, 그녀를 일으킬 이가 없다.아모스 5:2 · 본디새김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한 나라를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사야 37:22에서도 예루살렘은 「처녀 딸 시온」으로 묘사됩니다.
아직 생명과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여성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일으킬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쓰러진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이 차지하도록 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땅 위에서 이스라엘이 버려져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법한 곳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3절은 그 비극을 숫자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집안에서 천 명이 나가는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는 성읍에는 열 명만 남을 것이다.」아모스 5:3 · 본디새김
두 경우 모두 처음 수의 십분의 일만 남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힘이 거의 소진되는 파괴를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장례 노래가 끝나자마자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나가는」 사람들을 전투에 출전하는 병력으로 이해하면 군사적 패배의 이미지가 됩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나가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반드시 군대의 출정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를 찾고 살아라」 — 성소를 찾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집안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고 살아라.」아모스 5: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돌아서는 생명의 길이 여전히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이 함께 놓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곧바로 이상한 명령을 덧붙이십니다.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건너가지 마라. 길갈은 반드시 유배되고, 벧엘은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모스 5:5 · 본디새김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하며 방문하던 장소들은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브엘세바까지 등장하는가
벧엘과 길갈은 앞 장에서도 이스라엘의 종교 활동과 연결되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브엘세바가 추가됩니다.
브엘세바는 유다 남쪽에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 21:33에서는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창세기 26:23–25에서는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습니다. 창세기 46:1에서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립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브엘세바는 조상들의 신앙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했다면,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는 종교적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아모스 5:5는 「건너가지 마라」라는 표현으로 그 이동을 나타냅니다.
벧엘도, 길갈도, 브엘세바도 하나님을 찾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장소들에는 중요한 역사와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를 방문한다는 사실만으로 현재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길갈은 유배되고 벧엘은 재앙이 된다
길갈(גִּלְגָּל)이라는 이름과 유배된다는 동사가 비슷한 소리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찾아가던 길갈이 도리어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벧엘에서도 말의 의미가 뒤집힙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아웬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낱말은 재앙이나 고통, 헛됨, 악행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재앙과 헛됨의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15에서 벧엘을 풍자적으로 「벳아웬」과 연결하는 표현도 이와 통합니다.
6절은 다시 한번 생명의 초청을 반복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찾고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요셉 집안에 불처럼 들이닥쳐, 그 불이 삼켜 버리고 벧엘에는 끌 이가 없게 될 수 있다.아모스 5:6 · 본디새김
「요셉 집안」은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아간 성소조차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찾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의미할까요?
아모스는 곧바로 그 답을 보여 줍니다.
공의가 쓴쑥이 된 나라
공의를 쓴쑥으로 바꾸는 자들, 그들은 의를 땅에 내버렸다.아모스 5: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공의와 의를 저버린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과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쓴쑥으로 바뀐 공의
「공의」는 재판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일, 사람들의 권리를 공정하게 다루는 일, 공동체의 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일과 연결됩니다. 쓴쑥은 강한 쓴맛을 가진 식물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9:15에서도 쓴쑥은 괴로움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원래 공의는 억울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재판을 통해 억울함이 풀리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 잘못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 공의가 오히려 쓴맛이 되었습니다. 정당한 판결을 기대하며 재판의 자리로 간 사람이 더 깊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공의를 쓴쑥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공의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재판도 열리고, 판결도 내려집니다. 하지만 그 제도가 본래 해야 할 일과 반대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법과 재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불의입니다.
「의」는 올바름이나 의로움을 뜻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공의는 쓴맛으로 변했고, 의는 존중받지 못한 채 버려졌습니다.
질서를 뒤집는 인간과 밤낮을 바꾸시는 하나님
8절은 갑자기 하늘로 시선을 돌립니다.
키마와 크실을 만든 이, 깊은 어둠을 아침으로 바꾸고 낮을 밤으로 어둡게 한 이, 바닷물을 불러 땅 위에 쏟아 놓은 이, 그의 이름은 여호와야훼다.아모스 5:8 · 본디새김
두 절에는 「바꾼다」는 움직임이 공통으로 나타납니다. 7절에서 인간은 공의를 쓴쑥으로 바꿉니다. 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깊은 어둠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밤으로 어둡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권한을 이용하여 정의의 질서를 뒤틀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 앞에서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닷물을 불러 땅 위에 쏟아 놓은 이」라는 표현 역시 여호와야훼가 물의 움직임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9절은 그 권세가 인간의 요새와 강한 자에게까지 미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강한 자 위로 파멸이 번쩍 닥치게 하니, 파멸이 요새 위로 닥쳐온다.아모스 5:9 · 본디새김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공의를 마음대로 뒤틀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의 권력 자체를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밤과 낮, 별과 바다, 강한 자와 요새까지 모두 여호와야훼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그 잘못이 실제로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키마와 크실은 하늘의 별무리나 별자리 이름으로 이해됩니다. 전통적으로 플레이아데스와 오리온에 연결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대응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욥기 9:9와 38:31에도 두 이름이 함께 등장합니다. 9절의 히브리어는 다소 어렵습니다. 특히 파멸이 번쩍 닥친다고 옮긴 동사의 정확한 뉘앙스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요새의 파괴는 전체적인 뜻을 분명하게 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미움받는 성문
10절에서 장소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이를 미워하고, 진실을 말하는 이를 역겨워한다.아모스 5:10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히 성읍 안팎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거래하고,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며, 재판을 진행하는 공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룻기 4:1–12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기업 무를 권리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따라서 성문에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공적으로 말하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기능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지은 집이 아닌데, 왜 집을 빼앗기는가
11절에서는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난한 이를 짓밟고 그에게서 곡물을 부과금으로 거두는 까닭에,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들을 지었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탐스러운 포도밭들을 심었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아모스 5:11 · 본디새김
다듬은 돌로 지은 집은 상당한 자원과 노동이 들어가는 건물입니다. 탐스러운 포도밭 역시 오랜 시간 가꾸고 관리해야 하는 재산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성공의 이면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곡물을 거두는 일이 어떤 법적 제도 아래 이루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 「가난한 이를 짓밟고」라는 고발이 있으므로, 이 부과금은 정당한 공공 부담이라기보다 억압적인 수탈의 일부로 묘사됩니다.
가난한 사람의 노동으로 생산된 곡물이 권력자의 부를 늘리는 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지은 집에 살지 못하고, 자신들이 심은 포도밭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신명기 28:30, 39에서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선언된 저주와 연결됩니다. 집을 지어도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가꾸어도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아모스가 보여 주는 심판은 죄의 모습과 대응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과 삶을 짓밟아 자신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이 이룬 번영을 누리지 못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법을 무너뜨릴 때
12절은 고발의 내용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나는 너희의 반역이 많고 너희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안다. 의로운 이를 적대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 그들은 성문에서 궁핍한 이들의 송사를 물리쳤다.」아모스 5:12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성문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궁핍한 사람이 제기한 송사 자체가 물리쳐집니다.
재판의 기준이 진실과 공의가 아니라 돈과 권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면 성문은 더 이상 약한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장소가 됩니다.
분별 있는 사람마저 침묵하는 사회
13절은 뜻밖의 말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이는 그때에 잠잠할 것이다. 악한 때이기 때문이다.아모스 5:13 · 본디새김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읽기는 그 시대가 너무 악해져서 올바른 말을 하는 것조차 위험해졌다는 뜻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미움을 받고, 잘못을 지적하면 배척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분별 있는 사람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언제나 침묵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악한 시대의 현실을 묘사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침묵이 신중한 자기 보호인지, 더 이상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명확히 구별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고 수정할 수 있는 공적인 통로마저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다시 명령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뇌물」로 옮긴 히브리어 코페르(כֹּפֶר)는 본래 몸값이나 속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살인자의 목숨을 대신하는 대가를 받은 행위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을 적대하고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물리치는 문맥에서는 재판을 왜곡하는 금전적 대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선을 찾고 악을 찾지 마라」 —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의 실제 의미
14절은 앞의 「나를 찾고 살아라」라는 말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풀어냅니다.
너희가 살 수 있도록 선을 찾고 악을 찾지 마라. 그리하여 너희가 말한 대로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기를 바란다.아모스 5:14 · 본디새김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14절에서는 선을 찾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과 선을 찾는 것이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여기서 선은 추상적인 착한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그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성문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공정하게 다루며, 돈으로 재판을 왜곡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도 검토받아야 한다
「너희가 말한 대로」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고 말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실에서 안전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확신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술에 있는 신앙 고백과 그들의 실제 삶을 서로 마주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15절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워라. 어쩌면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이 요셉의 남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지도 모른다.아모스 5:15 · 본디새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마음속의 가치 판단이 공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배척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모스가 요구하는 선은 개인의 선한 의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어쩌면」이라는 말이 남기는 긴장
아모스는 공의를 세우면 반드시 모든 심판이 취소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죄가 깊어졌고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선다는 행동을 하나님의 은혜를 자동으로 얻어 내는 거래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은혜의 대상은 「요셉의 남은 이들」로 표현됩니다. 이는 앞에서 선언된 심각한 심판 이후에도 남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 남은 이들의 규모나 이후의 운명이 이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길을 택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는 다시 통곡이 들려옵니다.
성읍 전체로 번지는 장례의 소리
그러므로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주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광장에 통곡이 있고, 모든 거리에서 사람들이 『아, 아.』 하고 말할 것이다. 농부를 불러 애도하게 하고, 곡할 줄 아는 이들을 불러 통곡하게 할 것이다.」아모스 5:16 · 본디새김
아모스 5장의 처음에는 나라를 위한 애가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애가가 성읍 전체로 퍼집니다.
성읍 전체가 장례식장이 됩니다.
「모든 포도밭에도 통곡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한가운데를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아모스 5:17 · 본디새김
포도밭은 수확과 포도주, 기쁨과 잔치를 떠올리게 하는 곳입니다.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포도밭을 가꾸어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들었습니다(5:11). 이제 포도밭은 기쁨의 장소가 아니라 애도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이집트에 내려졌던 심판을 기억하던 이스라엘이 이제 자신의 한가운데로 지나가시는 여호와야훼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고 생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만남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장례 때 애가를 부르는 사람을 따로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은 예레미야 9:17–2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12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시며 심판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그 땅 가운데를 지나가신다는 표현과 심판의 상황에서 연결됩니다. 아모스가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강한 반전이 있습니다.
기다리던 여호와야훼의 날이 어둠이 되다
18절은 또 하나의 반전으로 시작합니다.
아, 여호와야훼의 날을 갈망하는 자들아. 여호와야훼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날은 어둠이며 빛이 아니다.아모스 5:18 · 본디새김
그들이 그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이 구절에 모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날이 자신들에게 좋은 날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동하시고, 적들을 무너뜨리시며, 자신들의 안전을 확증해 주실 날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잘못인가
문제는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기대하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자신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날이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확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소를 찾는 행동이 하나님을 찾는 일을 대신할 수 없듯이, 여호와야훼의 날을 갈망하는 마음도 여호와야훼께 순종하는 삶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자를 피했는데 곰이 기다리고 있다
19절은 그날의 모습을 하나의 이야기로 그립니다.
사람이 사자 앞에서 달아나다가 곰과 맞닥뜨리고, 집에 들어가 벽에 손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아모스 5:19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위험은 계속 모습을 바꿉니다. 첫 번째 위험은 들판에서 만나는 사자입니다. 두 번째 위험은 다른 맹수인 곰입니다. 세 번째 위험은 가장 안전해야 할 집 안에 숨어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를 통해 여호와야훼의 날에 임하는 심판이 인간의 계획이나 도피 수단으로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아니냐? 캄캄하여 아무 밝음도 없는 날이 아니냐?아모스 5:20 · 본디새김
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깊은 어둠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밤으로 어둡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제 그분의 날은 이스라엘에게 어둠이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종말에 관한 모든 가르침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아모스가 우선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자신의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심판의 날로 기대하면서도 자신의 불의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아모스는 그 기대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가장 직접적인 언어로 밝힙니다.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시는 예배
21절부터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절기들을 미워하고 내친다. 너희의 집회에서는 냄새를 맡지 않겠다.」아모스 5:2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절기와 희생 제물은 본래 율법에 규정된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명하신 예배를 거부하십니까?
문제가 제사 자체에 있는가
2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 화목 제물을 언급하십니다. 이것들은 레위기 1–3장에 규정된 주요 제사의 종류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고발을 구약의 제사 제도 자체가 원래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너희의」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23절에는 「네 노래들」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성문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미움받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곡물을 수탈하고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적대받고, 궁핍한 사람의 송사는 물리쳐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드리며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에 필요한 형식이 얼마나 완벽하게 갖추어졌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소리
「네 노래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내게서 치워라. 네 수금들의 가락도 나는 듣지 않겠다.」아모스 5:23 · 본디새김
아마도 그 노래와 연주는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시끄러운 소리」라고 부르십니다.
성문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악한 때에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서는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야 할 진실의 소리는 억눌렸지만, 자신들이 드리는 찬양의 소리는 가득했습니다.
아모스가 이 두 장면을 직접 짝지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0–13절과 21–23절을 함께 읽으면 강한 대조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는 더 아름다운 음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더 많은 제물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십니다.
공의가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공의가 물처럼 흘러내리게 하고, 의가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 · 본디새김
7절에서 이스라엘은 공의를 쓴쑥으로 바꾸었고 의를 땅에 내버렸습니다. 2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공의와 의가 물처럼 흘러내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쓴쑥으로 변했던 공의가 이제는 생명을 주는 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땅에 내버려졌던 의가 이제는 끊어지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되어야 합니다.
공의는 공동체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성문에서 재판이 열릴 때마다 정당한 판결이 내려져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그의 말이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특별한 날에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 흐르는 물처럼 공동체 전체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물은 왜 예배 거부의 대답이 되는가
제물과 음악은 성소 안에서 특정한 시간에 드려지는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물은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흐름은 특정한 건물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주변의 땅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공의가 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성소 안의 예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로 흘러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으로, 성문의 재판으로, 곡물을 거두는 경제 활동으로, 공동체의 모든 관계로 흘러가야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활동을 줄이고 사회 활동을 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과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5장은 이 말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 절은 훨씬 오래된 역사로 돌아가며, 이스라엘이 왜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렸는지 다시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르지 않는 시내」는 지속적으로 흐르거나 강한 흐름을 가진 시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조한 지역에는 비가 내리는 계절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에는 마르는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때에만 잠깐 흐르는 물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흐르는 물입니다.
광야에서의 제사와 스스로 만든 신의 별
25절은 다소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광야에서 마흔 해 동안 내게 희생 제물과 곡식 제물을 가져왔느냐?」아모스 5:2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광야에서 제물을 드린 일들을 실제로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24:5에서는 젊은이들이 번제와 화목 제물을 바쳤습니다. 레위기 9장에서는 아론이 제사를 드렸고, 민수기 7장에서는 지파 지도자들이 제단 봉헌을 위해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사가 없었다는 말인가, 제사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 구절에는 크게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광야에서의 제사가 이스라엘과 여호와야훼의 관계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어로 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호와야훼의 인도와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 관계는 단지 정해진 제물을 계속 바쳤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여호와야훼의 질문은 제사의 역사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제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이는 예레미야 7:22–23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출애굽의 역사에서 자신이 요구하신 핵심을 제사의 형식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일에 두십니다.
다른 읽기는 질문의 「내게」라는 표현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제물을 가져왔더라도 그것이 정말 여호와야훼께 드려진 것이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고(출애굽기 32장), 다른 신들과 연결되는 행동도 했습니다(민수기 25장). 따라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그 제사가 여호와야훼께 충실하게 드려졌다는 사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26절에 등장하는 우상과의 연결이 더욱 직접적입니다.
제물을 드렸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충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너희 왕 시쿠트」와 「키윤」은 누구인가
「너희는 너희 왕 시쿠트와 너희의 형상들인 키윤, 곧 스스로를 위해 만든 너희 신의 별을 짊어지고 갈 것이다.」아모스 5:26 · 본디새김
이 표현들은 고대 근동의 신적 존재나 천체 숭배와 관련된 명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너희 신의 별」이라는 표현은 천체와 연관된 숭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신을 가리키는지, 시쿠트와 키윤이 각각 독립된 신의 이름인지, 왕과 신상에 관한 표현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형상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적 형상에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25–26절은 단순히 제사 규정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성소로 가던 사람들이 유배길로 간다
27절에서 마지막 심판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를 다마스쿠스 너머로 유배시키겠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이다.아모스 5: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적 목적지를 찾아 이동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심판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땅을 떠나게 됩니다.
5절에서는 「길갈은 반드시 유배되고」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소가 유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유배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배 장소를 찾아가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삶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소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날을 기대했다는 사실도 유배의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에는 히브리어 본문의 「너희 왕」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읽는 방법이 있고, 이 표현을 특정한 신의 이름과 연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몰록의 장막과 라이판이라는 신의 별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의 표현을 곧바로 히브리어 본문의 모든 단어에 대한 확정적인 설명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짊어지고 갈 것이다」를 과거에 우상을 짊어지고 다녔던 행위에 대한 회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광야에서부터 이어진 잘못된 숭배의 역사가 강조됩니다. 반대로 본디새김처럼 앞으로 우상을 짊어지고 가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곧 이어지는 유배 선언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와 문맥상 두 읽기가 모두 논의될 수 있으므로 어느 한쪽만 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7:42–43에서 스데반은 아모스 5:25–27을 칠십인역에 가까운 형태로 직접 인용합니다. 그곳에서는 마지막 유배 장소가 「바벨론 너머」로 나타납니다. 이는 아모스의 「다마스쿠스 너머」와 다른 표현으로, 후대에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포로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 사례입니다.
결론 — 통곡이 흐르는 땅에 필요한 또 하나의 흐름
아모스 5장은 애가로 시작해 유배 선언으로 끝납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야훼는 심판을 선언하시는 가운데서도 생명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공의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삶은 그분이 원하시는 질서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러나 아모스 5장의 끝에서 이스라엘이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유배의 선언이 들립니다. 자신들이 만든 신의 형상을 짊어지고, 다마스쿠스 너머로 끌려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 어두운 장 전체의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물의 소리가 남아 있습니다.
쓴쑥으로 변한 공의가 다시 물처럼 흐르고, 땅에 버려진 의가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통곡은 광장과 거리와 포도밭에까지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요구하신 것은 그 통곡의 소리보다 오래 흐를 공의의 물줄기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