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이스라엘을 향한 고발

예배하면서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아모스 4장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벧엘과 길갈을 찾아가 제물을 바칩니다. 정해진 때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감사 제물과 자원 제물을 드립니다. 자신들이 드리는 제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까지 합니다.

아모스 4장의 중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본문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백성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차례로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4장 본문 읽기 →

사마리아의 부유한 사람들을 암소라고 부르다

아모스 4:1–3 본문 →

4장은 뜻밖의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을 들어라,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궁핍한 이들을 짓밟으며, 자기 주인들에게 「우리가 마시도록 가져와요.」 하고 말하는 자들아.아모스 4:1 · 본디새김

바산은 요단강 동쪽의 비옥한 목초지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신명기 32:14는 바산의 가축을 풍요로운 먹거리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시편 22:12에서도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바산의 암소들」이라는 표현에는 잘 먹고 살찐 가축의 모습이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 암소들은 누구인가

히브리어 본문은 여성 복수형으로 이들을 부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성들을 직접 겨냥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기 주인들에게」라는 호칭은 그들의 남편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반드시 남편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그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는 행동에도, 자신들의 즐거움을 요구하는 행동에도 그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이 표현을 여성의 외모나 몸집을 조롱하는 말로만 이해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아모스의 비판은 외모가 아니라,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도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태도를 향합니다.

이 사람들이 직접 가난한 사람을 짓밟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억압에 가담했다는 뜻입니까? 본문은 억압의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모스가 문제 삼는 것은 풍요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얻은 풍요를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고 하신 맹세

주 여호와야훼가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했다. 「보아라, 너희에게 날들이 닥쳐온다. 너희는 갈고리로 들려 가고, 너희 가운데 남은 자들은 낚싯바늘로 들려 갈 것이다.」아모스 4:2 · 본디새김

하나님의 거룩함은 이스라엘이 제물을 바치는 제단과 의식에서만 관련되는 성질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행동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억압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풍요로운 목초지의 가축처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갈고리와 낚싯바늘에 걸려 끌려가는 존재가 됩니다.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 끌려가게 된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3절에서는 그들이 성벽의 뚫린 틈들을 통해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상적인 성문으로 당당하게 드나드는 모습이 아닙니다. 무너진 성벽의 틈으로 사람들이 각자 앞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입니다.

사마리아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던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도시의 성벽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짓밟던 사람들에게 심판이 선언된 뒤, 본문은 갑자기 예배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갈고리와 낚싯바늘이 실제 포로를 끌고 가는 구체적인 도구를 가리키는지, 포로로 끌려가는 처지를 표현하는 비유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하르몬」은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특정 지명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다른 뜻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몸을 내던질 것이다」라는 표현 역시 히브리어의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아 해석에 어려움이 남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나 최종 목적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벧엘로 와서 범죄하여라」 — 하나님이 비꼬시는 예배

아모스 4:4–5 본문 →

4절은 아모스서에서 가장 날카로운 반어적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벧엘로 와서 범죄하여라. 길갈에서 더욱 범죄하여라. 아침마다 너희의 희생 제물을, 사흘마다 너희의 십일조를 가져와라.」아모스 4:4 · 본디새김

이것은 실제로 죄를 더 지으라는 권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행하는 종교 활동이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도리어 범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반어입니다.

왜 벧엘과 길갈인가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열왕기상 12:28–33에 따르면 여로보암 1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고 제단과 절기를 마련했습니다.

길갈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여호수아 4–5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뒤 진을 치고 할례와 유월절을 행했던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다만 아모스가 언급하는 길갈을 여호수아 시대의 바로 그 장소와 지리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길갈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역사적·종교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장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하며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방문을 범죄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본문은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에 드나드는 행위 자체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생활의 성격을 문제 삼습니다. 본문의 「사흘마다」는 히브리어 표현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짧은 간격으로 반복되는 열심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를 반드시 실제 십일조 제도가 사흘 간격으로 운영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 제물을 드리면서 무엇을 감사하는가

「누룩 든 것으로 감사 제물을 태워 바쳐라. 자원 제물을 선포하고 알려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이런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5 · 본디새김

그들은 제물을 드리는 것에는 열심이었지만,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는 삶에서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진실성은 우리가 그 예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감사와 헌신의 행위가 불의를 덮어 주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4–5절은 이어지는 6–11절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벧엘로 와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다섯 번이나 그들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 장소로 돌아가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11은 제단에서 불살라 바치는 곡식 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7:13은 감사의 친교 제물을 바칠 때 누룩 든 빵도 함께 가져오도록 합니다. 따라서 아모스 4:5의 누룩 든 제물은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태워 바쳤는가에 따라 제의 규정과의 관계를 다르게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단순히 누룩을 사용한 데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 다섯 번의 경고

아모스 4:6–11 본문 →

6절부터 문체가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백성의 행동을 비꼬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차례로 회상하십니다.

첫 번째 경고: 먹을 것이 없어 깨끗해진 이 (4:6)

「나는 또 너희의 모든 성읍에서 너희의 이를 깨끗하게 했고, 너희의 모든 곳에서 빵이 모자라게 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6 · 본디새김

「이를 깨끗하게 했다」는 말은 처음 읽으면 좋은 일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빵이 모자라게 했다」는 표현이 그 의미를 뒤집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음식물이 묻을 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근을 표현하는 신랄한 반어입니다.

풍요로운 사마리아의 사람들이 앞에서 「우리가 마시도록 가져와요」라고 요구하던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 공급받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는 모든 성읍에 먹을 것이 부족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한 지역의 우연한 흉작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식량 부족을 겪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경고: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은 마르다 (4:7–8)

두 번째 재앙은 가뭄입니다.

「나는 또 추수까지 아직 석 달이 남았을 때 너희에게 비를 주지 않았다. 한 성읍에는 비를 내렸지만, 다른 성읍에는 내리지 않았다. 한 밭에는 비가 내렸지만,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은 말라 버렸다.」아모스 4:7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농업은 계절에 따라 내리는 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특히 곡식이 자라는 시기에 비가 부족하면 수확에 심각한 타격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추수까지 석 달이 남았다는 시간 표시는 농사가 아직 비에 의존하는 시기에 비가 끊겼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같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를 얻었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이 경작하던 땅이 메말라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여기서 비를 받은 밭의 주인이 의롭고 비를 받지 못한 밭의 주인이 악했다는 뜻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구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두세 성읍이 물을 마시러 한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갔지만, 넉넉히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8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배를 위해서도 이동하고, 생존을 위해서도 이동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경고: 풍성했던 동산이 메뚜기의 먹이가 되다 (4:9)

9절에서는 식량 부족의 이미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마름병과 누렇게 뜨는 병으로 너희를 쳤다. 너희의 수많은 동산과 포도밭, 너희의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메뚜기가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9 · 본디새김

곡식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꾸어 온 여러 농작물이 손상되는 것입니다. 특히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오랜 시간 돌보고 가꾸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메뚜기가 이러한 나무들을 먹어 치운다는 말은 당장의 수확뿐 아니라 오랜 노동의 결과가 파괴되는 모습도 떠올리게 합니다.

가뭄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메뚜기는 땅에 이미 자라고 있던 것을 없애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농업의 두 방향, 곧 하늘에서 받는 비와 땅에서 거두는 열매가 모두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경고: 이집트에서 겪었던 재앙을 다시 겪다 (4:10)

네 번째 경고에서 재앙은 농경지에서 사람들의 생명과 군대로 옮겨 갑니다.

「나는 이집트에서처럼 너희 가운데 역병을 보냈다. 너희의 젊은이들을 칼로 죽였고, 그와 함께 너희의 말들이 사로잡혔다. 너희 진영의 악취가 너희 콧속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10 · 본디새김

출애굽의 역사에서 이집트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셨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재앙 가운데서 구출되어 나온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같은 재앙을 경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을 구출하신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역전입니다.

젊은이들은 공동체의 미래를 이어 갈 세대이자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말은 군사력과 관련된 중요한 자원입니다. 이 둘의 상실은 나라의 생명력과 방어력이 함께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의 피해는 멀리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에서는 마실 것을 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악취가 그들의 콧속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 경고: 불 속에서 겨우 건져 낸 나무토막 (4:11)

마지막 경고에서는 재앙의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었듯이, 내가 너희 가운데 일부를 뒤엎었다. 너희는 불타는 데서 건져 낸 불붙은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아모스 4:11 · 본디새김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를 떠올리게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뒤엎어진 성읍들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파괴를 경험했다고 말씀합니다.

나무토막은 불 속에 있었습니다. 거의 타 버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타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불 속에서 건져 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는 파괴와 보존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거의 멸망할 정도의 심각한 재앙을 겪었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곧바로 완전한 회복의 약속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이 겨우 살아남은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의 재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겪은 재앙을 단순히 불행한 사건들의 모음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 사건들을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 안에서 해석하십니다. 그들이 겪은 어려움은 우연히 나열된 사건들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경고의 역할을 합니다.

아모스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가뭄과 질병, 전쟁과 자연재해를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4장의 해석은 예언자가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오늘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아모스가 받은 것과 같은 직접적인 해석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을 모든 고난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일반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고 궁핍한 사람을 짓밟던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그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재앙을 겪어도 사람이 반드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모스 4장이 인간에 대해 보여 주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고통이 자동으로 회개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전의 삶을 더욱 고집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 반복되는 「그런데도」라는 말은 바로 그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한 번의 경고가 끝날 때마다 독자는 다음 장면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다섯 번 모두 무너집니다. 그리하여 11절의 마지막 반복이 끝난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문장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전혀 다른 선언이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마름병과 누렇게 뜨는 병은 농작물을 해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28:22에도 작물에 닥치는 재앙과 관련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9절의 「수많은 동산과 포도밭」은 히브리어 문장 구조상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많은 동산과 포도밭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여러 번 치셨다는 뜻으로 앞의 동사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반복되는 재앙과 광범위한 피해가 강조된다는 점은 같습니다. 10절의 장면은 신명기 28:27, 60에서 이집트의 질병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임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특별한 구원의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이 이후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레위기 26:14–33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거스르면 농작물의 실패, 질병, 전쟁, 땅의 황폐함 같은 재앙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특히 레위기 26:23–24는 징계를 겪으면서도 돌아서지 않는 백성에게 더 큰 심판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4장은 그러한 언약의 경고를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적 재앙에 적용하여 다시 들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4장의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와 5장의 「나를 찾아라」는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장소를 얼마나 자주 방문하는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야훼 자신을 찾고 그분의 뜻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라」 — 예배의 초청이 아닌 심판의 대면

아모스 4:12 본문 →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이렇게 하겠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 일을 할 것이니,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라, 이스라엘아.」아모스 4:12 · 본디새김

「이렇게 하겠다」, 「이 일을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행동이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방식 자체가 이 선언의 긴장감을 높입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재앙이 올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의 두 얼굴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예배나 경건한 만남에 대한 초청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4장의 문맥에서는 이 말이 단순한 예배 초청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그들의 불의가 드러나고 심판이 선언되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나러 오시는 일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여전히 「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은 낯선 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선포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히브리어에는 「이렇게」와 「이것」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사용됩니다. 이 말이 앞에서 회상한 재앙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재앙들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여호와야훼가 이미 행하신 일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여호와야훼가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으신 채 다가올 심판을 엄숙하게 선언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 앞으로 있을 심판의 위협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지시어가 가리키는 대상을 하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야훼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산에 내려오셨고, 백성은 그분의 거룩함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엄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을 빚고 새벽을 어둠으로 만드시는 분

아모스 4:13 본문 →

보아라, 산들을 빚고 바람을 창조하며, 사람에게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리고, 새벽을 어둠으로 만들며, 땅의 높은 곳들을 밟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이다.아모스 4:13 · 본디새김

아모스 4장의 마지막은 재앙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선언으로 끝납니다.

바로 앞에서 여호와야훼는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은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설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산과 보이지 않는 바람

산은 크고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움직임과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대조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둘 모두의 창조주로 선포되십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은 비가 내리지 않는 일과 농작물의 파괴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은 그런 자연의 질서가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자연을 지으신 분이 바로 이스라엘이 만나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생각도 감추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생각」이 누구의 생각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 자신의 생각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여호와야훼는 사람이 품고 있는 생각까지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어 표현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든, 그 생각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벽을 어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새벽은 밤이 끝나고 날이 밝아 오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새벽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새벽을 어둠으로 만드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이것은 자연의 시간과 빛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동시에 앞의 심판 선언과 함께 읽으면, 이스라엘이 당연하게 기대하던 안전과 번영도 뒤집힐 수 있다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새벽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둠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풍요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근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성벽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성벽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가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신다고 말합니다. 높은 곳은 인간에게 위엄과 안전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높은 곳들 위를 밟고 지나가십니다.

그분의 권세는 산보다 높고, 그분의 행동을 막아 설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의 생각」을 여호와야훼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가리킨다고 읽는 경우 앞 장의 아모스 3:7에서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신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새벽을 어둠으로」 만드신다는 표현을 특정한 일식이나 천문 현상의 예언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빛과 어둠까지도 여호와야훼의 권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 누구를 만나러 가고 있는가

아모스 4:1–13 본문 →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행동의 횟수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면, 사람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더욱 확신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이키라고 하시는 삶에서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4장은 하나님의 인내를 끝없는 심판 유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경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경고를 거부한 결과 마침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선언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아모스는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다시 벧엘로 갔는지, 어떤 제물을 준비했는지,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만나야 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산을 빚고 바람을 창조하신 분 앞에 서야 합니다.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또 하나의 종교 행사가 아니라, 그동안 돌아오기를 거부했던 바로 그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벧엘의 제단도, 길갈의 제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새벽을 어둠으로 만드시고 땅의 높은 곳들을 밟으시는 여호와야훼가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