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포로가 된 소년들

이름을 바꾸어도 마음은 바꾸지 못합니다

다니엘서는 패배로 시작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 왕 여호야김이 그의 손에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던 기물들까지 빼앗겨 바벨론 신전의 보물 창고에 들어갑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한 나라의 신전에서 빼앗은 물건을 정복자의 신전에 보관하는 행위는 승리한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보다 강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보다 약하신가요? 하나님의 백성이 패배했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도 끝난 것인가요?

그런데 다니엘서는 첫 두 절에서 독자의 시선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유다 왕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긴 분은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을 넘기시고(2절), 다니엘이 호의를 얻게 하시며(9절), 네 소년에게 지혜를 주십니다(17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장면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빼앗긴 성전의 기물과 바벨론으로 끌려간 소년들

다니엘 1:1–7 본문 →

패배한 나라의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주가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집에 있던 기물 일부를 그의 손에 넘겼다. 느부갓네살은 그 기물들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 신의 집으로 가져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들여놓았다.다니엘 1:2 · 본디새김

눈에 보이는 역사에서는 바벨론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곧 바벨론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선언이 느부갓네살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25:8–11은 바벨론의 침공을 유다의 오랜 불순종에 대한 심판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과 제국의 폭력이 선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바벨론을 가리키는 데 굳이 이 오래된 지명을 사용하면 창세기 11:2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정착하여 성읍과 탑을 세우고,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며 흩어짐을 피하려 했던 곳이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로 읽는다면, 바벨론은 단순히 한 시대의 강대국을 넘어 인간이 권력과 문명을 통해 스스로를 높이려는 오래된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는 바벨론의 권세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권세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지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물건만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3절에서 왕은 아스브나스에게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출신 소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집에 있던 귀중한 기물들을 가져갔고, 이제 유다 사회의 미래를 이끌 수 있었을 젊은 인재들까지 자기 왕궁으로 데려갑니다.

소년들을 선발하는 기준은 까다롭습니다. 외모에 흠이 없어야 하고, 용모가 좋아야 하며, 지혜와 지식과 이해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왕궁에서 일할 능력이 이미 있는 사람들입니다.

첫째, 칼데아 사람들의 글과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이 자라면서 사용하던 언어와 문화만으로는 더 이상 공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지식 체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둘째,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음식을 먹는 혜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과 교육이 왕의 공급과 관리 아래 놓인다는 뜻입니다.

셋째, 세 해 동안 양육과 교육을 받은 뒤 왕 앞에서 일하게 됩니다. 왕궁은 이들을 장기적으로 길러 왕국의 관리로 활용하려 합니다.

소년들은 자신의 고향도, 왕도, 생활 환경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어떤 언어를 배울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일할지까지 다른 나라의 왕이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바꾸는 일은 이 변화의 절정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

6절은 네 소년의 원래 이름을 소개합니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이 이름들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재판하신다는 뜻을, 하나냐는 여호와야훼의 은혜를, 미사엘은 하나님과 견줄 이가 누구냐는 물음을, 아사랴는 여호와야훼의 도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환관장은 네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고 기억하는지와 관계됩니다. 왕궁은 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어 바벨론의 질서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부여합니다.

환관장이 새 이름들을 붙인 직후인 8절에서, 이야기는 다시 「다니엘」이라고 부릅니다. 11절에서는 네 사람의 원래 이름이 반복되고, 19절에서는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들이 인정받는 장면에서도 히브리 이름들이 사용됩니다.

바벨론의 관리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지만, 이야기의 서술자는 그들의 이전 이름을 버리지 않습니다.

제국은 그들을 새롭게 부를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은 사건의 시점을 「유다 왕 여호야김의 통치 삼 년째」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25:1과 46:2은 바벨론이 서아시아의 지배권을 장악하던 중요한 시기를 여호야김 통치 사 년째와 연결합니다. 이 차이는 왕의 즉위년을 통치 첫해로 계산했는지, 그다음 해부터 계산했는지에 따른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 설명만으로 다니엘 1:1의 포위 사건의 정확한 시점과 규모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연대 표기와 실제 침공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논의가 남아 있는 부분입니다.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이름들은 바벨론의 언어와 종교적 세계에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각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그 안에 담긴 신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으므로, 모든 이름의 뜻을 하나씩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이 붙여 준 이름과 자신이 마음에 둔 것

다니엘 1:8–10 본문 →

7절과 8절을 이어 주는 하나의 동사

7절은 환관장이 네 소년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 달라고 환관장에게 요청했다.다니엘 1:8 · 본디새김

한국어로 읽으면 서로 다른 행동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두 절이 같은 동사로 이어집니다. 7절에서는 환관장이 소년들에게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8절에서는 다니엘이 자기 마음에 어떤 결심을 두었습니다.

왕궁은 다니엘에게 새 이름을 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바벨론의 글을 배우게 할 수도 있고, 왕의 음식이 그의 식탁에 오르도록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마음에 무엇을 둘 것인지는 그가 결정합니다.

남이 그에게 붙이는 이름과, 그가 마음에 두는 결심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다니엘이 새 이름을 거부했다거나 바벨론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교육을 받으며 왕궁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경계를 긋는 지점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입니다.

왕의 음식은 왜 더럽히는가

왕이 제공하는 좋은 음식과 포도주가 왜 다니엘에게 더러운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음식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니엘 자신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문제로 판단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은 먼저 요청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협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게 했다.다니엘 1:9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서 2절에서 주가 여호야김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는 서술과 연결됩니다. 같은 ‘주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왕국의 운명에 관여하실 뿐 아니라, 포로로 끌려온 한 소년과 바벨론 관리 사이의 관계에도 관여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문제가 즉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말했다. 「나는 내 주군이신 왕을 두려워한다.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신 분이 왕이시다. 어찌 왕께서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 소년들보다 수척한 것을 보시게 하겠느냐? 그러면 너희가 내 목을 왕 앞에서 위태롭게 할 것이다.」다니엘 1:10 · 본디새김

그도 왕의 명령 아래 놓인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켜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자기 신앙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양심만 생각하지 않고, 그 결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의 처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의 음식이 더럽히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율법이 금하는 음식과 관련되었다는 이해입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어떤 고기가 제공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마련되고 조리되는지를 다니엘이 확인하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우상숭배와의 관계입니다. 왕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이나 포도주가 바벨론의 신들에게 바쳐지는 의식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그것을 먹는 행위가 다니엘에게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 왕의 식탁에 참여하는 일이 바벨론 왕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그의 질서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징적 행위였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다만 어느 한 가지가 이유였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특히 포도주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모든 사람에게 금지된 음료가 아니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금지된 고기를 피한 이야기로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열흘의 시험 — 믿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가

다니엘 1:11–16 본문 →

환관장의 우려를 들은 다니엘은 감독관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부디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해 주십시오.」다니엘 1:12 · 본디새김

먼저 다니엘은 자신과 친구들을 「당신의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감독관의 관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무기한으로 특별 대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뒤 저희 모습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모습을 보시고, 보신 대로 당신의 종들을 대하십시오.」다니엘 1:13 · 본디새김

환관장은 왕이 소년들의 얼굴을 보고 수척하다고 판단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바로 그 얼굴을 비교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듣고, 그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앙적 결심은 분명하지만, 실행하는 방식은 신중합니다.

왜 채소와 물인가

본문에서 채소와 물이 중요한 까닭은 건강에 가장 좋은 식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피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열흘이 지난 뒤, 네 소년의 모습은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고 살도 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감독관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 대신 채소를 계속 제공하게 됩니다.

그의 선택으로 감독관이 감당해야 할 위험도 줄어들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적 경계를 지키려는 결심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의 두려움과 위험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은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 왕궁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유다의 성전 기물은 이미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그들의 손에 있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채소」는 현대의 잎채소만을 뜻한다고 좁히기는 어렵고, 곡물과 콩류 등을 포함한 식물성 먹거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를 현대 영양학에 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채소와 물만 먹으면 열흘 만에 누구나 더 건강해진다는 뜻도 아니고, 왕의 음식이 실제로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의 글을 배웠지만, 지혜는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다니엘 1:17–20 본문 →

열흘의 시험이 끝나고 이야기는 다시 세 해의 교육 과정으로 돌아갑니다.

17절은 다니엘 1장에서 세 번째로 하나님의 행동을 직접 서술합니다.

이 네 소년에게 하나님은 온갖 글과 지혜에 관한 지식과 통찰력을 주었다. 다니엘은 온갖 환상과 꿈을 이해했다.다니엘 1:17 · 본디새김

왕은 무엇을 가르칠지 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이해하고 활용할 지혜를 주셨습니다.

바벨론은 배움의 장소가 되었지만, 지혜의 근원은 바벨론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가 아닌 곳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문화의 지식을 익힐 수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식의 근원과 자신의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을 그 사회의 권력에 넘겨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서는 신앙과 배움을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이 바벨론의 교육이라는 현실 속에서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에게만 따로 주어진 능력

17절은 네 소년 모두에게 지식과 통찰력이 주어졌다고 말한 뒤, 다니엘에 대해서는 한 가지 능력을 덧붙입니다. 「다니엘은 온갖 환상과 꿈을 이해했다.」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꾼 꿈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때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이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이 대목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도 떠올리게 합니다. 요셉 역시 고향을 떠나 외국 권력 아래 놓였으며, 하나님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도록 하셨습니다(창 39:21). 이후 요셉은 이집트 왕의 꿈을 해석하며 그 지혜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밝힙니다(창 41:15–16).

두 이야기의 상황과 세부 전개는 다르지만, 낯선 나라의 권력 아래 놓인 사람이 하나님에게 받은 지혜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주제가 이어집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의 학문을 익히지만, 꿈과 환상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왕의 교육에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시험의 판단자는 왕입니다

교육 기간이 끝나자 환관장은 소년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려갑니다.

왕은 그들과 대화합니다. 왕이 그들에게 질문하며 그들의 지혜와 분별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네 사람이 다른 모든 소년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왕의 식탁에서 특별한 공급을 받는 일을 거절했던 사람들이, 결국 왕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인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느부갓네살은 소년들의 교육과 생활을 모두 결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배우게 할지, 무엇을 먹게 할지, 어떤 일을 하게 할지를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왕이 소년들에게 지혜를 묻고, 그들의 탁월함을 인정합니다.

왕궁으로 끌려온 소년들이 이제 왕궁에서 필요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에게 반드시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신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서는 뒤이어 믿음 때문에 죽음의 위협에 놓이는 이야기들도 들려줍니다. 이 장에서 드러나는 것은 충성에 대한 자동적인 보상이 아니라, 포로들의 처지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일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은 그들의 지혜를 바벨론 왕국의 점술사와 주술사에 견줍니다. 이 비교는 네 소년이 점술이나 주술을 행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왕이 지혜와 분별을 구하기 위해 의존하던 전문가들보다 네 사람이 더 뛰어났다는 평가입니다. 「열 배」라는 표현도 그들이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정확히 열 배의 성과를 냈다는 통계적 진술이라기보다, 현저하게 뛰어났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레스 왕 첫해까지 — 마지막 한 절이 바꾸는 시야

다니엘 1:21 본문 →

다니엘 1장은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끝납니다.

네 소년이 왕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로 끝나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갑자기 먼 훗날을 가리킵니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첫해까지 남아 있었다.다니엘 1:21 · 본디새김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다니엘서의 첫 장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끝에서는 바벨론의 지배가 끝난 뒤의 시대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 절 안에서 긴 세월이 지나갑니다.

다니엘에게 바벨론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마지막 절에서 그 나라의 끝을 이미 바라봅니다.

왕은 달라졌습니다. 지배하는 제국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시대를 지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1절에서 무너진 것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독립이었습니다. 21절에서 사라진 것은 예루살렘을 굴복시켰던 바벨론의 지배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1은 다니엘이 그해에 죽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다니엘 10:1은 고레스 왕 삼 년째의 사건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1:21은 다니엘 생애의 끝을 알려 주려는 문장이라기보다, 그가 얼마나 오랜 역사적 변화를 지나왔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 1:1에서 고레스 왕 첫해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칙령이 등장하는 장면과도 맞닿습니다. 다니엘 1장이 포로 생활의 시작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절은 포로 생활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시점까지 시선을 넓힙니다.

맺음 — 왕궁의 두 이름

다니엘 1:1–21 본문 →

다니엘 1장에는 두 종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의 환관장이 붙여 준 이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서술자가 계속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네 소년이 그 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누구였는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어려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미 패배했고, 이미 빼앗겼으며, 이미 낯선 권력 아래 놓인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호의와 지혜까지 바벨론 왕이 독점하지는 못했습니다. 나라의 왕권은 넘어갔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넘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에게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고 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매일의 식탁을 정하고, 세 해의 교육을 마친 뒤 어떤 일을 맡길지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왕궁의 한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지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결심이 왕을 몰아내지도 않았고,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소년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낯선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세 해가 지나 왕이 소년들을 불러 세웠을 때, 그 앞에 선 네 사람은 바벨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을 다시 원래 이름으로 부릅니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그들은 바벨론의 왕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은 바벨론의 왕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