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죽은 사람과 힘없는 사람의 몫

들판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죽임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살인자는 달아났고, 죽은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 모세는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을 불러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들판으로 나가 거리를 재야 합니다. 어린 암소를 골짜기로 데려가고, 정해진 의식을 행한 뒤 자기 손을 씻어야 합니다.

그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살인자를 알고 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성읍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살인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 죽음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도 시신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된 사람입니다. 그의 시신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시신을 밤새 그대로 두지 말고 반드시 그날 묻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사이에는 전쟁 포로가 된 여자,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맏아들, 부모에게 거역하는 아들에 관한 규정이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매우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모두 다른 사람의 결정에 크게 좌우되는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21장은 그런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 결정에 어떤 절차와 제한이 필요한지를 규정합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621장 본문 읽기 →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 사람 — 살인자가 없으면 책임도 없는가

신명기 21:1–9 본문 →

들판의 시신은 누구의 문제가 되는가

1절은 뜻밖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차지하라고 주시는 땅에서, 죽임당한 사람이 들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누가 그를 쳐 죽였는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신명기 21:1 · 본디새김

이 상황은 앞 장의 전쟁이나 전투에 관한 명령과 다릅니다. 전쟁터에서 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명기 19장에서는 고의적인 살인과 우연한 사고를 구별하고, 증언과 조사를 통해 책임을 가리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절차를 시작할 만한 용의자조차 없습니다.

시신은 있는데 살인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나가서 그 죽임당한 사람에게서 둘레의 성읍들까지 거리를 재야 합니다.」신명기 21:2 · 본디새김

본문은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에게 사건과 관련된 의식을 수행할 책임을 부여합니다. 이는 범죄 혐의를 그들에게 돌리는 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범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들 가까이에서 일어난 살인의 흔적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죽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그 죽음에 대한 의식을 맡습니다.

왜 일한 적 없는 어린 암소를 데려오는가

「그 죽임당한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일에 부려진 적이 없고 멍에를 메고 끌어 본 적도 없는 어린 암소를 데려와야 합니다.」신명기 21:3 · 본디새김

보통 소는 밭을 갈거나 짐을 끄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에 사용되는 암소는 그런 일에 부려진 적이 없어야 합니다.

「그 성읍의 장로들은 그 어린 암소를 경작되지도 씨가 뿌려지지도 않는, 물이 늘 흐르는 골짜기로 데리고 내려가서, 거기 골짜기에서 그 어린 암소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신명기 21:4 · 본디새김

일하지 않은 암소와 경작되지 않은 땅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이 어떤 상징을 갖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상적인 농경 활동과 구별된 짐승과 장소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의식은 일반적인 제사와도 다릅니다.

본문은 성소의 제단이나 피를 뿌리는 절차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린 암소는 골짜기에서 목이 꺾입니다. 그렇다고 이 암소가 살인자 대신 형벌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의식의 자세한 상징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죽은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가 실제적인 비용과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손을 씻는 것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6절에서 장로들은 목이 꺾인 어린 암소 위에서 손을 씻습니다.

「그들은 응답하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은 이 피를 흘리지 않았고, 우리의 눈은 보지 않았습니다.』」신명기 21:7 · 본디새김

손은 살인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과 연결됩니다. 눈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알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범인이 아니며, 누가 죽였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언합니다.

본문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해 주십시오. 무고한 피를 흘린 책임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그 피 흘림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신명기 21:8 · 본디새김

자신들이 살인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일과, 공동체 안에서 흘려진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이 해결되기를 구하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장로들은 직접적인 살인의 책임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 살인으로 발생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 죽음이 공동체와 무관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의 속량을 다시 언급하게 하시는가

이곳은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속량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내세웁니다.

이 기도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완전히 깨끗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속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속량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께 공동체를 위해 속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실제 살인자가 무죄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속죄의 대상은 그 피 흘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 남아 있는 책임입니다.

범죄자를 찾아 처벌하는 일과 공동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다루는 일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규정은 전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후자를 포기하지 않도록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눈에 올바른 일」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여호와야훼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행함으로써 당신 가운데서 무고한 피를 흘린 책임을 없애십시오.」신명기 21:9 · 본디새김

7절에서는 장로들이 자신들의 눈이 살인 사건을 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장로들이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살인 사건도 여호와야훼의 눈에 올바른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정의는 언제나 모든 사실을 완전히 밝혀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공동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골짜기를 가리키는 원문은 나할 에탄입니다. 나할은 골짜기나 하천을, 에탄은 강함이나 지속성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이 늘 흐르는 골짜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험하고 거친 골짜기로 이해합니다(칠십인역 신명기 21:4). 이 경우 물의 지속적인 흐름보다 지형의 거칠고 단단한 상태가 강조됩니다. 원문의 정확한 지형적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4절이 직접 밝히는 또 한 가지 조건은 그곳이 경작되거나 씨가 뿌려지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 포로가 된 여자 — 승리한 사람의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신명기 21:10–14 본문 →

전쟁에서 포로를 사로잡은 남자

10절은 전쟁의 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모세는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에게 적의 성읍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명령했습니다. 이제는 그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사람 가운데 한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포로들 가운데 모습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 당신의 아내로 삼으려 한다면,」신명기 21:11 · 본디새김

여기서 모든 행동의 주체는 남자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고, 여자는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본문은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 그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여자는 이미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기 고향과 가족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권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왜 바로 아내로 삼을 수 없는가

12–13절은 남자가 따라야 할 절차를 제시합니다.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여자는 머리를 밀고 손톱을 잘라야 합니다.

「그 여자는 포로로 잡힐 때 입었던 옷을 벗고 당신의 집에 머물며 한 달 동안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 뒤에 당신은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으며, 그 여자는 당신의 아내가 됩니다.」신명기 21:13 · 본디새김

남자는 여자를 보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즉시 성적인 관계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 사이에 여러 행동과 한 달의 애도 기간을 둡니다.

남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여자는 동시에 가족과 고향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포로가 보이지만, 본문은 그 여자에게 먼저 울어야 할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한 달의 애도가 충분한 보호인가

그렇다고 이 규정이 여자의 동의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자가 한 달 동안 애도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난 뒤 혼인을 거부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13절에서 혼인과 동침의 주체는 여전히 남자입니다.

고대의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어떤 제한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관계 자체가 평등하거나 자발적이라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신명기 21장은 전자를 보여 주지만 후자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은 남자의 마음이 달라진 경우를 다룹니다.

「당신이 그 여자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를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결코 그 여자를 돈을 받고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 여자를 종으로 부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 여자를 욕보였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14 · 본디새김

이 규정은 남자가 여자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없도록 합니다. 전쟁에서 사로잡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다시 팔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내로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남자는 그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에서 그녀의 지위와 삶에 깊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물건처럼 팔거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금지됩니다.

남자의 마음이 여자를 향해 움직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차지할 수 있는 사회에서, 그 마음이 떠났다는 이유로 그녀를 다시 물건처럼 처분할 권리까지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다음 단락에서는 같은 문제가 한 가정 안의 상속 문제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머리를 미는 일은 구약에서 애도와 관련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욥기 1:20에서는 욥이 자녀들의 죽음과 재산의 상실을 겪은 뒤 머리를 밉니다. 그러므로 포로 여성의 머리를 미는 행동도 애도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손톱에 어떤 행위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를 손톱을 자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손톱을 자르지 않고 자라게 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행동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머리와 손톱에 관한 절차 전체를 확정적으로 어떤 정결 의식이나 아름다움을 없애는 행위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실제로 전쟁 중에 죽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녀가 부모와 영원히 헤어졌을 수도 있고,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14절의 「욕보였기 때문입니다」는 낮추거나 굴욕을 주는 행위, 특히 문맥에 따라 성적인 관계에서 상대를 욕되게 하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앞의 동침과 혼인에 이어 사용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맏아들 — 아버지의 사랑이 상속권을 바꿀 수 있는가

신명기 21:15–17 본문 →

사랑하는 아내와 미워하는 아내

15절은 한 남자에게 아내가 둘 있는 경우를 전제합니다.

「어떤 남자에게 아내가 둘 있는데 하나는 사랑받고 다른 하나는 미움받으며, 사랑받는 아내와 미움받는 아내가 그에게 아들들을 낳았고 맏아들이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이라면,」신명기 21:15 · 본디새김

여기서 「사랑받다」와 「미움받다」는 히브리어 아하브(⁨אָהַב⁩)와 사네(⁨שָׂנֵא⁩)에서 온 표현입니다.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사랑과 적대적인 증오를 대조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한쪽이 더 사랑받고 다른 한쪽이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9:30–31에서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 21장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미움받는 아내에게서 맏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아내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을 맏아들로 삼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맏아들의 권리는 아버지의 감정에 달려 있지 않다

「그 남자는 자기 소유를 아들들에게 상속하는 날에,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인 맏아들을 제쳐 두고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에게 맏아들의 지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21:16 · 본디새김

본문이 금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편애가 법적인 권리를 바꾸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한 아내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이유로 다른 아내에게서 태어난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을 맏아들로 인정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에서 두 배의 몫을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이며, 맏아들의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17 · 본디새김

여기서 맏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른 아들들의 두 배에 해당하는 상속 몫입니다. 「기력의 시작」이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생식 능력을 통해 처음 태어난 아들이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49:3에서 야곱은 르우벤을 자신의 맏아들이자 기력의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남자는 아버지이고, 재산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재산을 자녀에게 나누어 주는 순간에도 따라야 할 규정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족 이야기와 연결하면 무엇이 보이는가

이 규정을 읽으면 야곱의 가족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창세기 29:30). 그러나 맏아들 르우벤은 레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29:32). 이 점에서 신명기 21장이 제시하는 상황은 야곱의 가정과 매우 비슷합니다.

역대상 5:1–2은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일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를 잃고, 그 권리가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명기 21장을 근거로 구약 전체에서 맏아들의 권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규정이 직접 다루는 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내와 미워하는 아내를 차별하여 맏아들의 지위를 임의로 바꾸려는 경우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편애입니다.

왜 상속법에서 아내의 감정을 언급하는가

특히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이 누구에게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느 아내에게 기울어 있는지도 아들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를 잃는다면,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정으로 손해를 입게 됩니다. 모세는 그 일을 금지합니다.

10–14절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끌렸다가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될 때에도, 그녀를 팔거나 종으로 부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5–17절에서는 아버지가 한 아내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아내의 아들에게서 정해진 상속 몫을 빼앗지 못하도록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다르게 주어질 수 있지만, 아들에게 주어진 권리까지 그 사랑의 크기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에서는 가족 안의 권한이 훨씬 더 무거운 문제로 이어집니다.

고집을 부리며 거역하는 아들 — 가족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신명기 21:18–21 본문 →

이 아들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인가

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남자에게 고집을 부리며 거역하는 아들이 있어, 아버지의 말도 어머니의 말도 듣지 않고 그들이 그를 징계해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신명기 21:18 · 본디새김

본문은 아들을 「고집을 부리며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완고하게 자기 뜻을 고집하며 권위에 저항하는 아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렇게 구체적인 나이나 단발적인 행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이미 징계했지만 그 아들이 계속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모든 어린아이에 대한 규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복적인 거역과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아들이 반드시 성인이라는 결론도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정확한 나이는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들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를 붙잡아 그가 사는 곳의 성문으로, 그의 성읍 장로들에게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신명기 21:19 · 본디새김

본문은 아버지 혼자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들을 직접 죽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공적인 재판과 판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신명기 19:12에서도 고의적인 살인자를 처리하는 과정에 성읍 장로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가족 내부의 문제도 성문으로 옮겨집니다.

「그들은 그의 성읍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아들은 고집을 부리며 거역하고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자이며 술꾼입니다.』」신명기 21:20 · 본디새김

따라서 이 법이 부모에게 자기 마음대로 자녀를 처형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절차가 현대적인 의미에서 아들에게 충분한 재판상의 권리와 방어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장로들이 어떤 증거를 조사해야 하는지, 아들이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진술할 수 있는지, 고발이 거짓일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족 내부의 권한이 공적인 공동체의 절차와 연결된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왜 이렇게 엄격한 형벌을 명령하는가

21절은 매우 가혹합니다.

「그의 성읍의 모든 남자가 그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당신 가운데서 악을 없애십시오.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신명기 21:21 · 본디새김

이것은 상징적인 훈계가 아니라 실제 사형 명령입니다.

현대 독자에게 이 규정은 중대한 윤리적 어려움을 남깁니다. 부모에게 반복적으로 거역하고 무절제하게 생활했다는 이유로 아들을 죽이는 형벌은 오늘날의 법적·도덕적 기준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그 사실과 현대 독자가 이 법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앞의 맏아들 규정과 나란히 놓인 이유

15–17절에서는 아버지가 맏아들의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빼앗지 못하도록 합니다. 18–21절에서는 아들이 부모의 권위에 지속적으로 거역하는 경우를 다룹니다.

앞의 규정은 부모의 권한을 제한합니다.

뒤의 규정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를 강조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는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뜻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관계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상속에는 정해진 권리가 있고, 중대한 거역에는 공동체의 절차가 개입합니다.

가족도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법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방탕한 자」는 무절제하게 소비하거나 낭비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으며, 술꾼과 나란히 사용되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일에 탐닉하는 사람으로 좁혀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17:7과 19:19에서도 「당신 가운데서 악을 없애십시오」라는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우상숭배나 거짓 증언과 같은 중대한 악행을 다루었습니다. 이제 가족 안에서 반복적으로 부모에게 거역하며 방탕하게 살아가는 아들의 행동도 공동체가 제거해야 할 악으로 규정됩니다. 여기에는 부모의 권위가 개인적인 감정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사회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 나타납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살아가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신명기 5:16). 이를 단순히 아들을 실제로 죽이려는 규정이 아니라 부모가 훈계할 때 사용하는 과장된 경고였다고 설명할 근거는 본문 자체에 없습니다. 또한 이 법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실제로 얼마나 자주 집행되었는지도 이 구절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집행 사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처음부터 실행되지 않는 상징적인 법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처형된 사람의 시신도 밤새 매달아 두지 말라

신명기 21:22–23 본문 →

사형과 나무에 매다는 행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2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을 죄를 지어 처형되고 당신이 그를 나무에 매달 경우에는,」신명기 21:22 · 본디새김

따라서 이 규정은 나무에 매다는 행위를 반드시 사형 집행 방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를 전제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의 시신이 나무 위에서 밤을 지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날 그를 묻으십시오. 매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당신의 땅을 부정하게 만들지 마십시오.」신명기 21:23 · 본디새김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그의 시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매달아 둘지 결정할 권한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권한에 한계를 둡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형벌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몸을 처리하는 방식도 하나님의 명령 아래 놓입니다.

「매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말

매달린 시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든, 하나님에 대한 모욕과 관련되든, 그 시신을 무기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왜 시신을 그대로 두면 땅이 부정해지는가

여기서 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만납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죽임당한 사람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 피 흘림에 대한 책임을 해결해야 합니다. 23절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땅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처형된 사람의 시신이 밤새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경우 모두 죽음과 땅의 상태가 연결됩니다. 민수기 35:33–34은 피 흘림이 땅을 더럽힌다고 설명하며, 이스라엘 가운데 여호와야훼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그 이유와 연결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어지는 질문 — 죄와 수치, 그리고 죽은 자의 몸

갈라디아서 3:13에서 바울은 신명기 21:23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율법의 저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적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와 어떤 관계에 놓이셨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연결은 신약의 중요한 해석이지만, 신명기 21장의 원래 규정을 예수의 십자가만을 직접 예고하는 문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 법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형 집행 이후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다음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떻게 새롭게 읽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21:1–14에서는 사울 집안의 피 흘림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임당하고, 그들의 시신이 오랫동안 외부에 놓이는 일이 등장합니다. 리스바는 그 시신들을 지키고, 이후 다윗은 그들의 뼈를 모아 장사하도록 합니다. 그 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간구를 들으셨다고 기록됩니다.

이 이야기를 신명기 21장의 규정을 그대로 실행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신이 오랫동안 방치되는 상황이 등장하므로 법의 규정과 실제 서술 사이의 긴장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죽은 사람의 몸이 공동체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나무」는 살아 있는 나무뿐 아니라 나무로 만든 기둥이나 형틀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8:29에서는 아이 왕의 시신이 저녁까지 나무에 매달렸다가 해 질 무렵 내려집니다. 여호수아 10:26–27에서도 다섯 왕이 죽임당한 뒤 나무에 매달리고, 해 질 때 그 시신들이 내려집니다. 23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킬라트 엘로힘 탈루이입니다. 직역하면 매달린 사람과 하나님의 저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매달린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저주를 받았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나무에 매달린 시신은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표시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에 매달린 시신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나 저주와 관련된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사람의 몸을 공개적으로 매달아 두는 행위가 하나님의 존엄과 관계된 문제를 일으킨다는 의미가 됩니다. 히브리어의 명사 연결만으로 저주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하나님을 향한 모욕을 뜻하는지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본디새김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가능한 읽기이지만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맺음 — 들판에 남겨진 사람과 나무에서 내려오는 사람

신명기 21:1–23 본문 →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신명기 21장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21장은 개인의 감정과 권한, 공동체의 책임과 형벌이 모두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규정 아래 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규정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힘없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규정은 실제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하거나 보호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다른 규정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허용합니다. 따라서 이 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인간 존엄이나 인권을 일관되게 선언하는 문서로 읽는 것은 본문의 실제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께 속죄를 구합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장의 마지막에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죄를 지었는지 판결이 내려졌고, 그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신을 그대로 두고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날 반드시 묻으라고 명령합니다.

들판에 쓰러진 사람을 위해서는 장로들이 나가야 합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몸을 내려 묻어야 합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나무에 매달린 시신은 내려와야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땅에는 그 시신을 밤새 그대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