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전쟁은 무엇을 허락하고 무엇을 금하는가
전쟁을 앞둔 군대가 모여 있습니다.
적군에게는 말과 병거가 있고, 이스라엘보다 많은 군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나아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과 함께 가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예상과 다릅니다.
군대의 관리들이 앞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새집을 짓고 아직 그 집을 봉헌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포도밭을 심고 아직 그 수확물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약혼하고 아직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내려지는 명령은 싸울 준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전쟁이 두려운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군대가 왜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낼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싸우시겠다고 하셨다면, 오히려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장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앞둔 사람들에게 전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런데 장의 중간에 이르면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항복한 성읍의 주민은 강제 노동을 해야 하고, 저항한 성읍에서는 모든 남자를 죽이며 여자와 아이들과 재산을 전리품으로 취하라고 명령합니다. 가나안의 특정 민족들에 대해서는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말라는 더욱 극단적인 명령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뜻밖의 규정이 나옵니다.
성을 포위하더라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베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병사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는 명령과 적국 주민의 생명을 빼앗으라는 명령이 나란히 놓입니다. 성읍을 파괴하는 전쟁을 허용하면서도 열매를 맺는 나무의 파괴는 금지합니다.
신명기 20장은 전쟁을 아름답게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에 나설 때 누구를 신뢰해야 하며,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고, 무엇을 파괴할 수 있으며,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다루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에 나타나는 폭력은 오늘의 독자에게 중대한 윤리적 질문을 남깁니다.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이 먼저 보아야 할 것
적의 수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1절은 이스라엘이 전쟁터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설명합니다.
「당신이 원수들과 싸우러 나가서 말과 병거와 당신보다 많은 백성을 보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리신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0:1 · 본디새김
말과 병거는 고대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자원이었습니다. 특히 병거를 운용하는 적군은 보병 중심의 군대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이 본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적군이 많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고, 말과 병거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이스라엘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모세는 여호와야훼를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신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올리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자신들이 이집트의 군사력을 능가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기억을 전쟁터의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이 적의 말과 병거를 볼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무기가 얼마나 부족한지가 아니라, 이전에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왜 제사장이 군대 앞에 서는가
「여러분이 싸움에 가까이 다가가면, 제사장은 다가와 백성에게 말해야 합니다.」신명기 20:2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별도로 군대 지휘관들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는 백성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말이 군사적인 전략이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원수들과 싸우러 다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들 앞에서 떨지 마십시오.』」신명기 20:3 · 본디새김
비슷한 명령이 반복되면서 전쟁을 앞둔 사람들의 여러 감정이 드러납니다. 신명기는 군대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합니다.
「『여호와야훼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원수들과 싸워 여러분을 구하시려고 여러분과 함께 가시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0:4 · 본디새김
출애굽기 14:13–14에서도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며,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신명기 1:30에서도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회고합니다. 이미 출애굽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행동을 앞으로의 전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스라엘 병사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단락은 어떤 사람이 전쟁에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약속과 개별 병사의 죽음 가능성은 본문 안에서 함께 존재합니다.
신명기 1:41–44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거슬러 싸우러 올라갔다가 패배합니다. 모세는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으므로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전쟁을 원한다고 해서 여호와야훼께서 반드시 그 전쟁을 지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가 그들의 모든 군사적 판단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신명기 안에서 여호와야훼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하는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
새집을 지은 사람은 왜 돌아가야 하는가
5절에서 관리들이 백성에게 말합니다.
「관리들은 백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새집을 짓고 아직 그 집을 봉헌하지 않은 남자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죽고 다른 남자가 그 집을 봉헌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0:5 · 본디새김
여기서 전쟁은 단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오래 준비한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집을 지었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 하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아갈 날들을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 기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포도밭을 심었지만 아직 열매를 누리지 못한 사람
「『또 포도밭을 심고 아직 그 수확물을 일상용으로 쓰지 않은 남자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죽고 다른 남자가 그 수확물을 일상용으로 쓰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0:6 · 본디새김
포도밭은 심었다고 곧바로 충분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오늘 수고하여 내일의 기쁨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그 기다림을 끝내 버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병사의 삶을 단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력이나 군사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밭이 있고, 기다리는 수확이 있으며,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약혼한 사람은 왜 돌아가야 하는가
「『또 여자와 약혼하고 아직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은 남자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죽고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0:7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약혼은 단순한 연애 관계와 달리 법적인 구속력을 지닌 관계였습니다. 신명기 22:23–27에서도 약혼한 여자의 지위가 특별히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실제로 아내를 맞아들여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집을 지었지만 아직 그 집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포도밭을 심었지만 아직 수확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약혼했지만 아직 혼인 생활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세 경우 모두 어떤 일을 시작했지만 그 결실을 누리기 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준비하고 기다려 온 생활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 삶을 전쟁의 필요보다 언제나 뒤에 놓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집으로 돌아가 그 생활을 시작하도록 합니다.
신명기 24:5도 이와 관련된 규정을 제시합니다. 새로 아내를 맞아들인 사람은 일 년 동안 군대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며 아내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20:7은 혼인 생활이 시작되기 전의 사람을 다루고, 24:5은 이미 결혼한 사람의 첫해를 다룹니다. 두 규정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전쟁이나 국가적 의무가 혼인 생활의 시작을 무조건 압도하지 않도록 합니다.
세 가지 면제 규정이 신명기 28장에서 뒤집힌다
신명기 28:30에서는 언약을 어긴 결과로 찾아올 재앙을 설명하면서 같은 세 가지 삶의 영역을 언급합니다.
여자와 약혼하지만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차지하게 됩니다.
집을 짓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합니다.
포도밭을 심지만 그 결실을 누리지 못합니다.
20장에서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정한 사람들을 전쟁에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28장에서는 그들이 누리지 못하게 된 삶이 언약의 저주를 설명하는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전쟁에서 죽거나 나라가 무너지면 사람은 단순히 자기 재산을 잃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준비했던 생활과 기대하던 미래를 잃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지켜야 할 삶이란, 결국 사람이 집에서 살고, 자기가 심은 열매를 먹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전쟁은 그 삶 자체가 아닙니다.
신명기 8:7–10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설명하면서, 그 땅에서 먹고 배부르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6:10–12에서도 이스라엘이 자신이 짓지 않은 집에 살고, 자신이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나무를 누리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본문들과 20:5–7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의 삶이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고 적을 물리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두려운 사람도 돌아가라
8절은 앞의 세 사례와 성격이 다릅니다.
「관리들은 이어서 백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두려워하고 마음이 약한 남자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자기 형제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녹아내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0:8 · 본디새김
이 구절의 「마음이 녹아내리다」라는 표현은 신명기 1:28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가 백성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3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실제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3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며 전쟁에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8절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을 무조건 전장에 남겨 두기보다 돌아가게 합니다. 물론 그 이유는 다른 병사들의 마음까지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군사적인 고려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두려운 사람의 심리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제도라고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9절에서는 이러한 절차가 모두 끝난 뒤에야 군대 지휘관들이 백성의 선두에 세워집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군대를 조직하지만, 그 조직에 앞서 누가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구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봉헌하다」는 어떤 것을 처음 사용하거나 그 사용을 시작하면서 구별하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건물의 공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새집을 생활의 공간으로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상용으로 쓰지」는 원래 거룩한 상태와 일반적인 상태를 구별하는 말과 관련되며, 이 문맥에서는 포도밭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19:23–25에서는 새로 심은 과일나무의 열매를 처음 몇 해 동안 먹지 못하게 하고, 이후 정해진 절차를 거쳐 먹도록 합니다. 신명기 20:6은 그 연도나 의식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포도밭을 심은 뒤 정확히 몇 년이 지났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의 성읍에 먼저 평화를 제안하라 — 그러나 그것은 어떤 평화인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제안해야 하는 것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이 어떤 성읍과 싸우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 성읍에 평화를 제안하십시오.」신명기 20:10 · 본디새김
이 구절만 보면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평화를 먼저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반드시 다음 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 성읍이 당신에게 평화로 응답하고 당신에게 성문을 열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은 당신을 위한 강제 노동자가 되어 당신을 섬겨야 합니다.」신명기 20:11 · 본디새김
여기서 제안되는 평화는 두 공동체가 대등한 관계에서 맺는 평화조약이 아닙니다. 성읍이 이스라엘에게 성문을 열고 복종하는 조건의 평화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금을 납부하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정도로 약화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강제적인 노동과 섬김을 명시합니다.
그 성읍의 사람들은 전쟁으로 죽임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지만, 자유로운 정치적 지위와 노동의 자유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 대신 종속을 받아들이는 평화입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읍이 저항하면 이스라엘은 포위 공격을 해야 합니다. 13절은 여호와야훼께서 그 성읍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신 뒤의 처분을 명령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당신의 손에 넘겨주시면, 그 성읍의 모든 남자를 칼날로 쳐 죽이십시오.」신명기 20:13 · 본디새김
「다만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과 그 성읍에 있는 모든 것, 곧 그 성읍의 모든 전리품은 당신을 위해 약탈하십시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원수들의 전리품을 먹으십시오.」신명기 20:14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적군의 전투력을 무력화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성읍 주민 전체의 삶을 뒤바꾸는 명령입니다. 고대 전쟁이라는 배경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배경이 본문에 나타난 폭력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을 살려 둔다고 해서 이 규정을 오늘날의 의미에서 인도적인 전쟁법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남더라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는 말은 본문에 없습니다. 21:10–14에서는 전쟁 포로 가운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경우가 따로 규정됩니다. 그 법 역시 전쟁으로 포로가 된 여성이 승리한 남성의 권력 아래 놓이는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이 규정은 어떤 성읍들에 적용되는가
「당신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이 민족들의 성읍에 속하지 않는 모든 성읍에는 이렇게 하십시오.」신명기 20:15 · 본디새김
이 구절 때문에 10–14절의 평화 제안과 전쟁 규정이 정확히 어디까지 적용되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한 가지 읽기는 10–14절 전체가 멀리 떨어진 성읍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 제안부터 항복 후의 강제 노동, 저항 후의 처벌까지 모두 가나안의 특정 민족들에게 속하지 않은 성읍에 적용됩니다.
다른 읽기는 10절의 평화 제안이 적의 성읍 일반에 먼저 적용되고, 항복을 거부했을 때의 처분만 그 성읍의 위치와 소속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가나안의 성읍도 항복할 기회를 받을 수 있지만, 항복하지 않을 때에는 16–18절의 특별한 규정이 적용됩니다.
여호수아 11:19은 기브온 사람들을 제외한 성읍들이 이스라엘과 평화를 맺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가나안의 성읍에 대해서도 평화 여부가 중요한 문제였다는 읽기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호수아 9장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평화를 얻는 과정에는 자신들이 멀리서 왔다고 속이는 일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가나안의 모든 성읍에도 동일한 항복 조건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20:15의 문장도 「이렇게 하십시오」가 앞의 절차 가운데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본문 자체가 완전히 확정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택하더라도 다음 단락에서는 가나안의 특정 민족들에 관한 훨씬 강경한 명령이 등장합니다.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 — 피할 수 없는 본문의 어려움
멀리 있는 성읍과 가나안의 성읍은 다르게 취급된다
16절은 명확한 대조로 시작합니다.
「다만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이 백성들의 성읍에서는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신명기 20:16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항복한 성읍의 주민을 강제 노동자로 삼고, 저항한 성읍에서는 남자들을 죽이되 여자들과 아이들은 전리품으로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들,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대로 진멸하십시오.」신명기 20:17 · 본디새김
이 본문은 특정 민족들의 완전한 파괴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이는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행한 모든 역겨운 일을 그대로 하도록 여러분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여러분이 여호와야훼 여러분의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20:18 · 본디새김
신명기 7:1–6에서도 가나안 민족들과 언약을 맺거나 혼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위험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12:29–31은 그 민족들이 자기 신들에게 행한 일을 따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자녀를 불살라 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본문이 어떤 이유를 제시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날의 독자에게 모든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의 윤리적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공동체가 다른 종교적 관습을 가르칠 위험이 있다는 사실과,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결론 사이에는 중대한 도덕적 문제가 남습니다.
특히 본문은 개별적인 사람의 실제 행위를 심사하여 그가 다른 신을 섬기도록 가르쳤는지 구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민족과 성읍이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단순히 악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형벌을 내리는 법으로 설명하면,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본문의 특징이 사라집니다.
여호수아서에는 살아남은 가나안 사람들도 있다
여호수아 2장과 6장에서 라합은 여리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기를 요청합니다. 여호수아 6:22–25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 살아남았다고 전합니다.
여호수아 9장에서는 기브온 사람들이 속임수를 사용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임당하지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노동하는 지위에 놓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가나안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이 실제 정복 서술에서 동일한 운명을 맞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라합의 구출이나 기브온 사람들의 생존을 근거로 신명기 20장의 진멸 명령이 본래부터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회개하고 살아남을 기회를 보장하는 규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보편적 절차는 20:16–18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명기 20:16–18은 현대의 국가나 종교 공동체가 다른 민족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할 권한을 부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특정한 언약적·역사적 상황에서 주어진 것으로 제시됩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전쟁이나 종교적 갈등에 직접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독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도록 하신다는 본문의 신학적 설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 목적을 위해 이러한 폭력이 명령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0장 자체는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신약의 가르침은 이 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신명기 20장의 전쟁 규정을 곧바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전쟁의 원칙이라고 옮길 수는 없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복음 5:43–48). 또 겟세마네에서 칼을 사용한 제자에게 칼을 제자리에 꽂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26:52).
이것들은 신명기 20장을 직접 인용한 말씀은 아니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원수와 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가르침을 사용하여 신명기 20장의 명령이 실제로는 폭력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다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진멸하다」는 어떤 것을 일반적인 사용에서 떼어 내어 특별히 구별하거나 금지된 대상으로 삼는 뜻과 관련되며, 전쟁 문맥에서는 완전한 파괴나 멸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을 문자 그대로 죽이라는 명령으로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묘사할 때 사용하던 완전한 파괴의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을까요? 문자적인 읽기에는 강한 근거가 있습니다. 16절은 살려 두지 말라고 직접 명령하고, 17절은 진멸하라고 반복합니다. 여호수아 6:21은 여리고에서 남녀노소를 죽였다고 서술합니다. 반면 여호수아서의 정복 서술 전체를 살펴보면, 어떤 지역에서 모든 주민을 진멸했다고 묘사한 뒤에도 같은 민족들이 계속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11:21–23은 여호수아가 아낙 사람들을 제거하고 땅을 차지했다고 서술하지만, 여호수아 15:13–14에서는 갈렙이 헤브론에서 아낙의 자손들을 쫓아내는 장면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사기 1장에서도 여러 가나안 주민이 계속 살아남아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서술은 전쟁의 완전한 승리나 파괴를 표현하는 언어가 실제 모든 주민의 절멸을 뜻하는지 질문하게 합니다. 실제 정복이 얼마나 완전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와, 신명기 20장이 어떤 행동을 명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복 서술에 과장된 승리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20:16–17의 명령이 단순한 비유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모든 주민이 죽임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본문에 나타난 집단적 살해 명령의 윤리적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 중에도 열매 맺는 나무를 베지 말라
왜 성을 포위하면서 나무를 보호해야 하는가
19절은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성읍을 점령하기 위해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습니다. 포위전에서는 성벽을 공격할 시설을 만들기 위해 목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모든 나무를 마음대로 베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당신이 어떤 성읍과 싸워 그곳을 점령하려고 여러 날 동안 포위할 때, 도끼를 휘둘러 그곳의 나무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 나무에서 먹을 것을 얻으니, 그 나무를 베지 마십시오. 들의 나무가 사람이라도 되어, 당신을 피해 포위된 곳으로 들어가겠습니까?」신명기 20:19 · 본디새김
군대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지역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를 베어 버리면 당장의 군사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 그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은 사라집니다.
나무는 단지 공격에 사용할 목재가 아니라 사람의 생계를 지속시키는 자원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베어도 되는가
「다만 먹을 것을 내는 나무가 아니라고 당신이 아는 나무만 훼손하고 베어도 됩니다. 그 나무로 당신과 전쟁을 벌이는 성읍을 공격할 공성 시설을 쌓으십시오. 그 성읍이 함락될 때까지 그렇게 하십시오.」신명기 20:20 · 본디새김
군사적인 필요를 인정하되,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자원의 사용에 구별을 두는 명령입니다. 이 규정의 특징은 전쟁의 목적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사용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에 제한을 둔다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는 특정 민족의 생명을 전부 없애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나무가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람과 나무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반적인 윤리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쟁 규정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나무를 보호하는 규정이 존재한다고 해서 앞의 진멸 명령이 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세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할 권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명령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마지막 문장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특히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키 하아담 에츠 하사데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문장의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본디새김처럼 반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사람이라도 되어서 전쟁의 상대가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전쟁의 대상으로 취급하여 베어 버리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른 읽기는 이 표현을 사람의 생명이 들의 나무에 의존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바로 앞의 「당신은 그 나무에서 먹을 것을 얻으니」라는 설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문장 끝의 「포위된 곳으로 들어가겠습니까」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어떻게 연결할지도 해석의 문제로 남습니다. 두 읽기 가운데 어느 쪽이 원문의 의도인지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나무를 함부로 파괴하지 말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맺음 —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지켜야 할 삶이란, 결국 사람이 집에서 살고, 자기가 심은 열매를 먹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이 전쟁의 폭력을 모두 제한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보편적으로 보호하는 규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병사가 자기 집과 포도밭과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받는 동안, 적의 성읍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그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긴장을 해소하는 설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에 한 가지 구체적인 금지 명령을 남깁니다. 「당신은 그 나무에서 먹을 것을 얻으니, 그 나무를 베지 마십시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읍도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끼를 든 사람 앞에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나무를 벨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그 힘을 사용하는 데 한계를 둡니다. 성읍을 공격할 수 있어도, 열매 맺는 나무까지 베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도끼는 열매 맺는 나무 앞에 멈추어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