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때와 하나님의 일
모든 것을 가졌지만 누리지 못하는 삶
어떤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재산도 있고, 사회적인 명예도 있으며,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가 애써 모은 재산은 다른 사람이 사용합니다. 자신의 삶에는 만족이 없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코헬렛은 이러한 삶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지고도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얻은 것입니까?
앞 장에서 코헬렛은 재물과 재산뿐 아니라 그것을 누릴 능력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말의 반대편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누릴 능력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탐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재산에 이어 자녀의 수와 수명까지 생각합니다.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이천 년을 산다고 해도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지혜롭고 사회에서 처신할 줄 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마침내 코헬렛은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전도서 6장은 좋은 것을 소유하는 일과 좋은 삶을 살아가는 일 사이의 거리를 끝까지 추적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누릴 수 없다
해 아래에서 내가 본 불행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무겁게 닥치는 불행이다.전도서 6: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무겁게 닥치는」으로 옮긴 히브리어 라바(רַב)는 크거나 많다는 뜻을 지닙니다. 따라서 이 불행이 사람에게 매우 무겁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 널리 나타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코헬렛은 이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재물과 재산과 영예를 주어, 그가 바라는 모든 것 가운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에서 먹을 능력을 주지 않아 낯선 사람이 그것을 먹는다. 이것은 입김이며 심한 병이다.전도서 6:2 · 본디새김
이 사람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명예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재물과 재산은 물질적인 풍요를 나타내고, 영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위와 관계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음식물을 입에 넣는 행동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재산으로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을 실제로 누리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왜 누리지 못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나빠서인지, 재산을 사용할 기회를 잃어서인지, 다른 사정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코헬렛은 하나님을 두 번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재물과 재산과 영예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누릴 능력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불행을 구체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단순히 욕심이 많거나 감사할 줄 몰라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욕구를 비판하지만, 모든 고통의 책임을 고통받는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단순히 풍요를 보장해 주시는 분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재물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에게 언제나 기쁨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요로운 조건과 만족스러운 삶 사이에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모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어서 그 간격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사실이 등장합니다.
「낯선 사람이 그것을 먹는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데, 그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립니다.
그에게 없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코헬렛은 이 상태를 「입김이며 심한 병」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상태 자체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강한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재산을 가지면 해결될까요? 본문은 이미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자녀를 낳거나 더 오래 살아가면 어떨까요?
조금 더 깊이
「낯선 사람」은 낯선 사람이나 외부인을 가리킵니다. 반드시 다른 민족의 침략자나 특정한 신분의 사람을 뜻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재물의 주인과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심한 병」은 반드시 의학적으로 진단되는 질환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지혜 전통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잠언은 성실하게 일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삶의 유익을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욥기는 의로운 사람이 심각한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전도서 6장은 그 문제를 풍요로운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백 명의 자녀와 이천 년의 생애도 채워 주지 못하는 것
나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식 백 명을 낳고 여러 해를 살아, 그 삶의 날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자신은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묻히지도 못한다면, 죽은 채 태어난 아이가 그 사람보다 낫다.」전도서 6: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비교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많은 자녀와 긴 수명은 일반적으로 복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백 명의 자녀와 긴 생애는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풍요를 극단적으로 확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그 사람의 삶에 두 가지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는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묻히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재산에 관한 2절의 문제를 생애 전체로 확대합니다. 재산이 많아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온 날이 많아도 그 날들에서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중요한 가족적·사회적 책임이었습니다. 적절한 매장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수치와 버림받음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왜 묻히지 못하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더욱 뜻밖의 비교를 제시합니다.
죽은 채 태어난 아이가 그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코헬렛이 아이의 죽음을 좋은 사건이라고 찬양하거나,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아이의 존재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만족 없는 생애의 비참함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두 상황을 비교합니다.
그 아이는 입김으로 와서 어둠 속으로 가고, 그 이름은 어둠 속에 덮이기 때문이다. 또 그 아이는 해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이 아이에게는 그 사람보다 더 큰 쉼이 있다.전도서 6:4–5 · 본디새김
여기서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는 일과 연결됩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오랫동안 살아간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채 태어난 아이는 그러한 삶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그 아이에게 더 큰 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상상한 장수한 사람은 많은 날을 살아갔지만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죽은 채 태어난 아이는 그 긴 세월 동안 겪었을 불만족과 수고를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확정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여기서 「쉼」은 살아 있는 동안의 끝없는 불만족과 대조되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그 사람이 천 년을 두 번 산다 해도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전도서 6:6 · 본디새김
이천 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도 만족 없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더구나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 죽음이라는 공통의 한계 앞에 섭니다.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표현은 앞에서 사람과 짐승 모두가 흙먼지로 돌아간다고 한 관찰(3:19–20)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장수한 사람과 죽은 채 태어난 아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들의 경험이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애의 길이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삶에서 누린 좋은 것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와, 그 삶을 얼마나 좋은 것으로 누렸는가는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재산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많습니다.
자녀는 백 명입니다.
수명은 이천 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에 만족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조금 더 깊이
시편 127:3–5는 자녀를 여호와야훼가 주신 유산으로 노래하고, 신명기 5:33은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과 오래 사는 복을 연결합니다. 자녀가 백 명이라는 숫자는 실제 어느 인물의 가족관계를 기록하기보다, 많은 자녀를 둔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극한까지 늘려 놓는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 22:18–19에서는 여호야김 왕이 합당한 애도와 장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백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들이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쉼」으로 옮긴 히브리어 나하트는 쉼이나 평온함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그 아이가 죽음 이후에 어떤 의식적 평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5:27에서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코헬렛이 상상하는 이천 년은 그보다도 두 배 이상 긴 생애입니다.
입을 위해 수고하지만,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제 입을 위한 것이지만, 그래도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전도서 6:7 · 본디새김
입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욕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늘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습니다. 배가 부르면 잠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집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는 음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고, 현재의 조건보다 나은 상황을 원하며, 아직 갖지 못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따라서 코헬렛의 말은 모든 욕망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이라기보다, 인간의 욕구가 물질적인 충족만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는 관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 앞부분에 등장한 부자의 모습이 새롭게 이해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없어서라기보다, 소유와 만족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이에게 어리석은 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살아 있는 이들 앞에서 처신할 줄 아는 가난한 이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전도서 6:8 · 본디새김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없는 욕구의 문제까지 해결해 줍니까? 이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앞에서 그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빛이 어둠보다 나은 것처럼 유익하다고 인정했습니다(2:13).
두 번째 질문의 가난한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처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유하지 않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살아가는 지혜를 지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지혜나 처신의 능력만으로 삶의 모든 결핍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욕구가 떠도는 것보다 낫다. 이것도 입김이며 바람을 뒤쫓는 일이다.전도서 6:9 · 본디새김
「눈으로 보는 것」은 지금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욕구가 떠도는 것」은 마음이 계속해서 다른 것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지금 주어진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가 계속 다른 곳으로 떠돌면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조차 충분히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더 많이 얻는 것보다, 이미 주어진 좋은 것을 실제로 누리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이 격언 뒤에도 곧바로 「이것도 입김이며 바람을 뒤쫓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눈앞의 것을 누리는 태도가 낫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라는 권고가 모든 현실에서 충분한 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만족의 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인간의 한계 자체를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는 어디에서 옵니까?
조금 더 깊이
「욕구」에 해당하는 자리에 히브리어 네페시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생명, 사람 자신, 목숨, 욕구 등을 가리킵니다. 흔히 「영혼」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육체와 분리된 영적인 실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2절에서는 사람이 바라는 것을 나타내며, 3절에서는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주체를 가리킵니다. 7절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되고, 9절에서는 계속 떠도는 욕구로 등장합니다. 9절의 「욕구가 떠도는 것」은 문자적으로 욕구나 마음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을 단순히 소유한 물건으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과 끊임없이 다른 곳을 향하는 욕구를 대비하는 넓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미 이름이 불린 사람 — 자기보다 강한 이와 다툴 수 없다
존재하게 된 것은 이미 그 이름이 불려 있고, 그가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이와 다툴 수 없다.전도서 6: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전도서 6장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식별하거나, 그 존재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행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이름을 미리 정하셨으며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도 전부 변경할 수 없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해석은 가능하지만, 본문이 반드시 그 정도의 결정론을 말한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름이 불렸다」는 표현은 이미 존재하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 「그가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다」가 그 방향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사람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이와 다툴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보다 강한 이」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이 재물과 그것을 누릴 능력을 주신다고 말했으므로 문맥상 가능한 읽기입니다. 반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현실, 예를 들어 죽음이나 자신을 압도하는 조건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보다 강한 현실이 있습니다.
입김을 늘리는 말들이 많으니, 사람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전도서 6:11 · 본디새김
여기서 「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드바림(דָּבָר)은 말뿐 아니라 일이나 사건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말이 많아질수록 입김 같은 것이 늘어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덧없음을 더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말들」로 읽으면 바로 앞의 「다툴 수 없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고 수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한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코헬렛은 모든 논쟁과 질문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자체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따지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말의 힘으로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19–20에서는 사람이 동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창세기에서 흙을 뜻하는 말과 연결되는 인간의 이름을 떠올리게 합니다(창 2:7). 그러나 전도서 6:10이 창세기의 아담이라는 특정 인물을 직접 지칭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이」는 자음 본문인 케티브의 셰핫타키프는 정관사가 붙은 형태이고, 케레의 셰타키프는 정관사가 없는 형태로, 둘 다 더 강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어떤 특정한 상대와의 다툼을 말하는지, 인간보다 강한 존재 앞에서의 일반적인 한계를 말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남습니다. 11절은 욥기 9:2–4의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욥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하나님과 다투려는 사람이 그분의 수많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뒤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따라서 하나님보다 약하다는 사실이 모든 질문을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좋은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사람이 입김 같은 삶의 날들을 그림자처럼 보내는 동안, 무엇이 그에게 좋은지 누가 아는가? 그 뒤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사람에게 알려 주겠는가?전도서 6:12 · 본디새김
전도서 6장은 두 개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재산을 모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를 많이 낳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오래 살면 더 많은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이 살펴본 현실은 그러한 기대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누가 아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아무런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일반적으로 유익한지 판단할 수 있고,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의 모든 조건과 결과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판단의 모든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뒤」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 이후에 일어날 미래의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을 반드시 죽음 이후 개인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해 아래에서」라는 말이 이어지므로, 인간이 떠난 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재산을 남겨 둘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용될지 모두 알지 못합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지만 그들의 미래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날들
전도서 6장은 풍요로운 한 사람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거의 모두 가졌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누구도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자신의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코헬렛이 발견한 것은 인간의 소유와 지식이 모두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유와 누림은 같지 않습니다.
좋은 삶을 찾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는지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마지막에 코헬렛은 사람의 생애를 그림자에 비유합니다.
그림자는 눈앞에 나타납니다.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자리를 옮기며, 마침내 사라집니다.
사람의 생애도 그렇게 지나갑니다.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을 수는 있지만, 손안에 오래 간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자는 지금 그곳에 있습니다.
코헬렛은 그 지나가는 삶 앞에서 마지막 질문을 남깁니다.
그 짧은 날들 동안, 사람에게 참으로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