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때와 하나님의 일
많이 말하고 많이 가졌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많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약속하고,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집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거두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평생 재물을 모읍니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것을 얻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 재물을 잃고, 빈손으로 삶을 마칩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고, 다른 하나는 재산을 쌓는 세상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뜻밖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말로 자신의 미래를 확보하려 하고, 다른 사람은 재물로 자신의 미래를 확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다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재물이 많다고 삶을 자기 뜻대로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말하고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능력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기쁘게 누리는 능력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코헬렛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조심하고, 제물을 바치기보다 먼저 들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제 그 권고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자신이 말한 것은 어떻게 책임져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장은 말의 문제에서 시작해 권력과 재물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에는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춥니다.
그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다
네 입으로 성급히 말하지 말고,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말을 내놓으려고 서두르지 않게 하여라.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으니, 네 말을 적게 하여라.전도서 5:1 · 본디새김
그런데 그가 경고하는 것은 단순히 말의 양이 아닙니다. 「성급히」 말하는 태도입니다. 입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이 충분히 숙고하지 않는 상태를 경계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말을 쏟아 내는 것입니다.
입은 실제로 말을 내놓는 기관이고, 마음은 그 말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코헬렛은 겉으로 표현되는 말뿐 아니라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내적인 태도까지 살피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인간의 말을 듣지 못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대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땅에 속한 존재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일부를 경험하고, 제한된 지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과 동일한 위치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길게 기도하는 일이 언제나 잘못이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시편에는 길고 간절한 기도가 많이 등장합니다. 시편 22편처럼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끈질기게 호소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전도서가 경계하는 것은 긴 기도 자체보다, 숙고 없이 말을 쏟아 내거나 많은 말로 자신의 경건함과 요청을 확실하게 만들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의 양이 진실함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일이 많으면 꿈이 오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이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전도서 5:2 · 본디새김
사람이 많은 일에 몰두하면 꿈에도 그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그 말 속에서 어리석음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모든 꿈이 반드시 과로 때문에 생긴다는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이용한 지혜의 비유입니다.
꿈이 많다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많다고 반드시 더 지혜로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가보다, 누구 앞에서 말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성급하게 말을 꺼내는 일이 단순한 말실수보다 더 중대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5:8–9에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는 사실이 하늘과 땅의 차이로 표현됩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상황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서 인간의 판단을 절대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2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일이 많음과 꿈, 말이 많음과 어리석은 목소리 사이의 대응을 만듭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꿈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통로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37장과 41장에는 중요한 꿈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꿈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많은 활동과 마음의 분주함에서 비롯된 꿈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다시 거둘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서원할 때에는 그것을 이행하기를 미루지 마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이들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서원한 것을 이행하여라.전도서 5:3 · 본디새김
서원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율법에서 서원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서원했다면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민수기 30:2는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서원하거나 맹세했으면 자기 말을 어기지 말고 입에서 나온 대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명기 23:21–23도 서원한 것을 갚는 일을 미루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서원하지 않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전도서의 권고도 그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무조건 더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약속했다면 실제로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서원을 하는 순간에는 사람이 열정적이고 진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 말에 책임지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서원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전도서 5: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서원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원이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서원하지 않아도 되지만, 서원했다면 그 약속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진실함을 보여 주기 위해 반드시 거창한 약속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책임질 수 있는 말을 진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 입이 네 몸을 죄짓게 하지 마라. 사자 앞에서 「그것은 실수였습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어찌하여 하나님이 네 목소리 때문에 노하여 네 손이 한 일을 망치겠느냐?전도서 5:5 · 본디새김
입으로 서원했는데, 그 말을 지키지 않으면 몸이 죄를 짓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코헬렛은 말과 행동을 따로 떨어진 영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말로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려면 실제 행동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행동으로 책임질 의사가 없는 말을 반복하면 그 말이 죄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라는 표현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나 잘못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 자신이 한 서원을 단순한 실수였다고 주장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물론 실제로 잘못된 서원을 했을 때 어떻게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이 구절은 모든 약속을 내용과 관계없이 무조건 실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나중에 편리한 변명으로 책임을 피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 변명을 듣는 「사자」는 하나님의 천사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성전에서 서원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중심 문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을 나중에 아무 책임도 없는 말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입에서 나왔지만, 그 말의 결과는 손으로 이루어 놓은 일에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자신의 삶과 수고에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경고입니다.
물론 오늘날 어떤 사람의 사업이 실패하거나 재산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서원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코헬렛은 하나님의 심판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을 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해석하는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꿈이 많으면 입김도 많고 말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전도서 5:6 · 본디새김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꿈과 입김 같은 것들, 많은 말이 어떤 인과관계로 연결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꿈이 많고 말이 많은 곳에 헛된 것도 많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앞서 말한 꿈과 어리석은 말의 관계를 다시 묶어 경고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명령은 분명합니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 말의 무게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약속하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신중하게 말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기보다, 자신이 한 말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하나님 앞에서의 말에 관한 권고를 마친 뒤 갑자기 지방의 행정과 재판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높이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높은 자들 위에 더 높은 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받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자」로 옮긴 히브리어는 「그 사자」 또는 「그 전달자」라는 뜻입니다. 말라기 2:7에서는 제사장을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사자라고 부르므로, 성전의 제사장이나 종교적 담당자를 떠올릴 근거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읽기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사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은 자 위에 더 높은 자가 있다 — 권력의 그늘
어느 지방에서 가난한 이가 억압받고 공정과 정의가 빼앗기는 것을 보더라도, 그 일에 놀라지 마라. 높은 자 위에서 더 높은 자가 지켜보고, 그들 위에도 높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전도서 5: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집에서 들려오던 경고는 이제 지방의 행정 조직으로 옮겨 갑니다.
「빼앗긴다」는 표현에서 정의가 단순히 실수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공정한 판단이 누군가의 행위 때문에 침해당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그런 일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는 것이 당연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으면 본문이 지닌 비판적인 성격을 놓치게 됩니다. 코헬렛은 이 상황을 억압과 정의의 박탈이라는 말로 묘사합니다. 그것을 좋은 일이나 정당한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놀라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그 뒤에 등장하는 권력의 구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낮은 지위의 사람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있고, 그 위에도 다시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독과 통제의 구조로 읽는 것입니다. 낮은 관리가 부당한 일을 하더라도 그보다 높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며, 다시 그 위의 높은 권력이 존재합니다.
두 번째는 착취와 부패가 위계 전체에 퍼져 있는 구조로 읽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관리가 있고, 그 관리 위에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문맥에서 보면 두 번째 읽기를 고려할 이유가 있습니다. 코헬렛은 이미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억압과 정의의 박탈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자들이 반드시 모두 부패했다고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회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개인 한 사람의 힘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계의 관계와 제도 속에서 작동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현실을 이해하려면 한 사람의 악한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통제하는 권력의 구조도 보아야 합니다.
땅에서 나는 이익은 모두에게 돌아가고, 왕도 밭에서 나는 것으로 섬김을 받는다.전도서 5: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문장 구조를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모두에게」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앞에서 언급된 여러 단계의 권력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왕도 밭에서 나는 것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문장은 왕이 경작지의 산물에 의존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왕이 경작지를 잘 돌보거나 농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방향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8절을 모든 사람에게 농업의 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선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억압 장면과 연결하면 오히려 높은 권력자들도 밭에서 생산된 것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강조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높은 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왕은 그 위계의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왕도 땅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밭을 경작하고, 누군가는 그 생산물을 통해 생활하며, 누군가는 그 위에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코헬렛은 이 관계가 항상 공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권력의 높이가 곧 도덕적인 우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도 먹어야 하고, 왕도 밭의 산물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이제 코헬렛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마음을 살핍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지켜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감시하거나 주시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감시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감독인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감시인지는 동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8절에서 「섬김을 받는다」로 옮겨진 표현은 섬기거나 일한다는 동사의 수동적·재귀적 형태이므로, 왕과 밭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재물이 늘어나도 만족은 늘어나지 않는다
돈을 사랑하는 이는 돈으로 만족하지 않고, 풍요를 사랑하는 이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도 입김이다.전도서 5:9 · 본디새김
코헬렛은 돈이 전혀 쓸모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돈은 물건을 얻고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데 실제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돈을 소유하는 일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이」는 돈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 수단을 넘어, 계속해서 더 많이 얻어야 하는 대상이 된 사람입니다.
왜 그런 사람은 만족하지 않습니까? 돈이 조금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돈을 얻을수록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되는 욕망의 구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만족하다」(שָׂבַע)에 해당하는 낱말은 배부르거나 충분히 채워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물의 증가는 반드시 충족감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재물이 늘어날수록 만족도 반드시 그만큼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이 늘어나면 그것을 먹는 이들도 늘어난다. 그 주인에게는 제 눈으로 보는 것 말고 무슨 이득이 있는가?전도서 5:10 · 본디새김
재산이 커지면 그것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 종들, 일꾼들과 다양한 관계자들이 그 재산을 통해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정확히 「그것을 먹는 이들」인지 본문은 열거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재산의 소유와 재산의 향유 사이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일과 그 재산에서 실제로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일하는 이의 잠은 적게 먹든 많이 먹든 달다. 그러나 부자의 배부름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전도서 5:11 · 본디새김
한 사람은 노동자입니다. 그는 하루 동안 일을 했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듭니다. 다른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코헬렛은 매우 단순한 대비를 통해 재물이 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잠입니다.
잠은 사람이 마음대로 명령할 수 없는 활동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원할 때마다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부자의 배부름」은 풍부한 음식으로 인한 포만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재산이 많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과식 때문이라고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재산에 대한 염려나 관리의 부담과 연결하여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가 항상 잘 자고 모든 부자가 불면에 시달린다는 보편적인 통계가 아닙니다. 코헬렛은 두 사람의 모습을 대비하여 소유의 크기가 삶의 평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더 많이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는 늘어날 수 있어도 그것을 누리는 능력은 함께 늘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코헬렛은 재물이 단순히 만족을 주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소유자에게 직접 해가 되는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평생 쌓아 둔 재물이 빈손으로 끝나는 순간
해 아래에서 내가 본 심한 불행이 있다. 간직한 재물이 그 주인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전도서 5:12 · 본디새김
코헬렛은 재물 자체를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본래 인간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고 늘리는 일에 삶 전체가 묶이면, 그 재물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이 잘못되어 그 재물이 사라졌다. 그는 아들을 낳았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전도서 5:13 · 본디새김
여기서 정확히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업상의 실패일 수도 있고, 다른 형태의 재난이나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그 사람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재산을 잃는 문제는 그 사람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라졌다면 물려줄 것도 없어집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문장에서 「그」가 아버지를 가리키는지 아들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아들이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재물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것처럼, 왔던 그대로 벌거벗은 채 다시 떠나간다. 자기 수고로 얻은 것 가운데 아무것도 손에 들고 가져가지 않는다.전도서 5:14 · 본디새김
태어날 때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옷도, 재산도, 자신이 이룬 업적도 없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삶을 마칠 때에도 자기 수고로 얻은 재산을 손에 들고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은 욥기 1:21과 연결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뒤 어머니의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으며 다시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에서 인간의 생명은 소유와 분리되어 바라보입니다.
앞에서는 재물이 사라져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기 수고의 결과를 손에 들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손은 사람이 일하고 재물을 붙잡는 데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 손은 마지막에 비어 있습니다.
평생 많은 것을 쥐려고 했던 손이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것도 심한 불행이다. 온 그대로 그렇게 떠나간다. 바람을 위해 수고해서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전도서 5:15 · 본디새김
「바람을 위해 수고한다」는 표현은 얻으려는 것이 실제로 오래 붙잡을 수 있는 결과가 되지 못한다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재물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간직하고 지키려던 노력이 결국 그에게 영구적인 이익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는 사는 내내 어둠 속에서 먹고 몹시 괴로워하며, 병과 분노를 겪는다.전도서 5:16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어둠 속에서 먹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불을 켜지 않은 장소에서 식사한다는 뜻으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둠은 그가 살아가는 괴로운 상태를 묘사하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먹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활동은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 활동에 기쁨이 없습니다.
재산이 많지 않은 노동자는 달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했고, 마침내 재물을 잃은 뒤에도 고통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코헬렛이 전하려는 결론은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코헬렛은 뜻밖에도 재물과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삶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재물뿐 아니라 누릴 능력도 주신다
보아라, 나는 이것이 좋고 알맞다고 보았다. 사람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삶의 날수만큼 사는 동안,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전도서 5:17 · 본디새김
앞의 사람은 재산을 간직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고하면서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이 모든 재물을 소유하거나 모든 성취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애 안에서 수고하며 그 수고의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적절하다고 평가합니다.
코헬렛은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사람은 자기 생애가 얼마나 길지 완전히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생애 안에서 실제로 일하고 먹고 마시며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몫」입니다.
여기서 몫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차지해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또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든 재물과 재산을 주고, 그것에서 먹고 제 몫을 받으며 자기 수고 가운데 기뻐할 능력도 준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전도서 5:18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선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재물과 재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누릴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거나 잃을까 걱정하면서 현재 가진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수고의 결과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코헬렛은 그 차이를 인간의 노력이나 성격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릴 능력도 주신다고 말합니다. 「능력도 준」(שָׁלַט)으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어떤 사람에게 권한이나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재산을 받는 것과 그 재산을 누릴 능력을 받는 것이 구별된다는 사실은 이 장 전체의 관찰을 새롭게 비춥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재산이 늘어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부자는 배부름 때문에 잠들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간직한 재산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재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능력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재산의 규모를 하나님의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거절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명기 8:17–18에서는 이스라엘이 풍요로워질 때 자기 힘과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 재물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능력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의 수고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18절에서 코헬렛은 분명히 「자기 수고 가운데 기뻐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라 해서 그것을 누리는 모든 조건까지 자신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삶의 날들을 많이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를 마음의 기쁨에 몰두하게 하기 때문이다.전도서 5:19 · 본디새김
코헬렛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과거의 기억을 잃게 하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삶의 날들을 많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날들을 끊임없이 헤아리거나 자신의 생애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재산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 이미 지나간 날들이 얼마나 아쉬운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대신 지금 누리는 기쁨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뒤따르는 「기쁨에 몰두하게 한다」는 하나님이 그를 기쁨에 몰두하게 하신다는 뜻으로도, 그 기쁨에 응답하신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기쁨 사이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날들이 있고, 그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코헬렛은 그 기쁨을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능력도 준」은 이 문맥에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받은 재산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19절에서 「기쁨에 몰두하게 한다」로 옮긴 마아네는 이 문맥에서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쁨으로 바쁘게 하거나 몰두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의 기쁨에 응답하시거나 그 기쁨을 채워 주신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부자와 기쁘게 먹는 사람
전도서 5장에는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 코헬렛은 하나님 앞에서 말을 적게 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만으로 기쁨의 모든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말을 신중하게 하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는 수고하며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7절에서 코헬렛은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고 정의가 빼앗기는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에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는 것과 그 재산을 얻거나 사용하는 모든 행위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누리는 일까지 재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밤이 깊어 갑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이 마지막에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삶의 날들을 끊임없이 헤아리는 대신, 지금 주어진 수고와 기쁨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의 손에는 자기가 일해서 얻은 것이 있고, 그 앞에는 먹고 마실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코헬렛은 그 평범한 기쁨을 「자기 수고 가운데 기뻐할 능력도 준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