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때와 하나님의 일

위로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일으켜 주는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는 사람들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코헬렛은 이 광경을 보며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위로하는 이가 없었다」는 같은 사실을 두 번 말합니다.

이 반복이 전도서 4장을 여는 열쇠입니다.

고통 자체도 괴롭지만,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못하는 현실은 더욱 참혹합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이미 죽은 사람이 낫다고 말할 만큼 깊은 탄식을 쏟아 냅니다.

그런데 장의 중간에 이르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자 다른 사람이 그를 일으켜 줍니다. 둘이 함께 누워 추위를 견디고, 누군가 공격해 오면 나란히 맞섭니다. 처음에는 위로할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는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으켜 줍니다.

이 변화는 우연한 장면 전환이 아닙니다. 전도서 4장은 인간의 삶을 무너뜨리는 여러 현실을 살펴보면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묻습니다.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 서로 시기하는 이웃, 홀로 재물을 모으는 사람, 서로 일으켜 주는 동료, 충고를 듣지 않는 왕,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까지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한 가지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그 힘을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에서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은가?

전도서 4장은 그 질문에 단순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보여 주면서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왕조차 언젠가 잊히고 외면당한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하나님의 집 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4장 본문 읽기 →

눈물은 있는데 위로하는 사람은 없다

전도서 4:1–3 본문 →

나는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거기에는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위로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는 힘이 있었고,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위로하는 이가 없었다.전도서 4: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코헬렛은 재판의 자리와 정의의 자리에 악이 있는 현실을 발견했습니다(3:16). 이번에는 그 불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남기는지 살펴봅니다.

그가 먼저 보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눈물입니다.

그는 부당한 제도나 잘못된 판결의 원리를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불의가 실제 사람의 삶에 남긴 흔적을 바라봅니다. 그 흔적이 눈물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한 가지 대조가 등장합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위로하는 이가 없지만,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는 힘이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데 그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코헬렛은 「위로하는 이가 없었다」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발견한 고통이 두 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억압 자체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누군가가 가진 힘 때문에 삶이 짓눌립니다. 둘째는 그 고통을 나누거나 덜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로는 억압을 곧바로 끝낼 수 있는 정치적·법적 해결책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코헬렛이 그 부재를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한 힘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코헬렛은 왜 이 현실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이미 죽은 이들을 아직도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 칭찬했다. 그러나 그 둘보다 더 나은 이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이,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 이다.전도서 4:2–3 · 본디새김

그러나 이 말을 모든 삶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판단이나 죽음을 선택하라는 권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코헬렛은 눈앞에서 목격한 억압의 현실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합니다. 3절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낫다고 하는 이유를 명시합니다.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 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죽음 자체가 좋은 상태라는 주장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목격하고 감당해야 하는 악이 얼마나 심각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구약에서 낯선 표현이 아닙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묻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합니다(욥기 3:3–13). 예레미야도 자신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예레미야 20:14–18). 이 말들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서둘러 좋은 의미를 찾아 주는 대신, 그 현실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 드러냅니다.

코헬렛 역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인내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위로받았다고 보고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신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현재 일어나는 악을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헬렛은 그 불의를 해소하는 설명을 서둘러 제시하지 않고, 그 아래서 흐르는 눈물을 독자 앞에 남겨 둡니다.

억압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의 고통이 언젠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가 울고 있으며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곧바로 또 다른 인간관계의 문제로 시선을 옮깁니다. 이번에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행동이 아니라,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겨나는 수고와 경쟁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힘」을 뜻하는 코아흐는 능력이나 세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억압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쪽에 있는지 보여 줍니다. 「위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나함입니다. 슬픔을 위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달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이사야 40:1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에도 등장합니다. 또한 예레미야애가 1:2에서는 예루살렘이 고통받으면서도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탄식에 사용됩니다. 전도서의 장면은 특히 예레미야애가와 가깝습니다. 고통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함께 감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이기려고 수고하는 사람과 두 손을 접어 버린 사람

전도서 4:4–6 본문 →

나는 모든 수고와 모든 일솜씨가 사람이 제 이웃을 시기하는 데서 나옴을 보았다. 이것도 입김이며 바람을 뒤쫓는 일이다.전도서 4:4 · 본디새김

여기서 코헬렛은 인간의 노동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핍니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일합니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기술을 익힙니다. 그런데 그 수고에는 또 다른 동기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얻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기서는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사람이 이웃을 시기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솜씨를 발휘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뛰어난 수고와 솜씨가 이웃의 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만으로 시기의 방향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는 중요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시기 때문에 일하든, 잘한 일 때문에 시기를 받든, 사람의 성취가 서로를 기쁘게 하기보다 경쟁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눌렀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성취를 바라보는 마음이 수고의 의미를 뒤흔듭니다.

물론 코헬렛이 관찰한 모든 노동이 실제로 시기심에서 비롯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코헬렛의 표현은 경쟁에 물든 인간의 수고를 강하게 드러내는 관찰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뜻밖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리석은 이는 팔짱을 끼고 제 살을 먹는다.전도서 4:5 · 본디새김

시기 때문에 수고하는 사람을 비판했으니, 코헬렛은 일을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이 더 지혜롭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팔짱을 낀 사람은 수고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코헬렛은 그가 「제 살을 먹는다」고 말합니다. 자기 살을 먹는다는 표현은 생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결국 자신을 해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잠언 6:9–11에 나오는 게으름에 대한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코헬렛은 시기심에 이끌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말하는가? 6절에 세 번째 길이 등장합니다.

한 줌의 쉼이 두 손 가득한 수고와 바람을 뒤쫓는 일보다 낫다.전도서 4:6 · 본디새김

5절의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손입니다. 6절의 두 손 가득한 수고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사이에 한 줌의 쉼이 등장합니다.

두 손에 가득 채우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계속 경쟁하고 불안해한다면, 그 수고가 반드시 더 좋은 삶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한 줌밖에 없어도 그 안에 쉼이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가난 자체가 행복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5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자기 삶을 해칠 수 있음을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코헬렛이 찾는 것은 수고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수고가 사람을 삼켜 버리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이러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곧바로 보여 줍니다. 그 사람에게는 두 손 가득한 재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킨아는 시기나 질투, 경쟁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의 읽기에서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자신도 더 많이 얻으려는 경쟁심이 노동의 동력이 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그것을 본 이웃이 질투하게 됩니다. 칠십인역 역시 시기와 이웃의 관계를 표현하지만, 어느 쪽이 시기의 주체인지 명쾌하게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6절의 「쉼」(히브리어 나하트)은 쉼이나 평온함을 나타내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끝없는 수고와 대비됩니다.

재물은 끝없이 쌓이는데, 곁에는 아무도 없다

전도서 4:7–8 본문 →

한 사람이 있는데, 곁에 다른 이는 없다. 그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다.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고, 또 그의 눈은 재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를 위해 수고하며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이것도 입김이며 괴로운 일이다.전도서 4:8 · 본디새김

코헬렛은 한 사람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곁에는 다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과 그와 함께할 두 번째 사람을 대비합니다. 그는 혼자이며, 그와 함께할 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수고에는 끝이 없는데, 그의 눈은 재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일해도 끝이 나지 않고, 아무리 많이 얻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재물이 늘어나는 만큼 수고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혼자 있는 사람의 마음속 질문을 독자 앞에 드러냅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그토록 일하는가?

그에게는 수고의 결과를 함께 나눌 가까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 결과를 기쁘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재물을 얻기 위해 살아가지만, 그 재물을 누리는 삶은 계속 뒤로 미룹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일하는데, 정작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자신에게 좋은 것을 빼앗고 있습니다.

앞의 4–6절에서는 이웃과의 경쟁이 수고의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함께할 사람이 없는데도 멈추지 않는 축적이 문제입니다. 경쟁하는 사람은 이웃을 넘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홀로 재물을 쌓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수고를 나눌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이 상태를 「입김이며 괴로운 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정말 부족한 것은 재물일까? 본문은 그가 이미 재물을 얻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족한 것은 오히려 함께할 사람과 자신의 수고를 누리는 능력입니다.

이제 코헬렛은 그에게 없었던 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는 한 사람을 나타내는 에하드와 두 번째 사람을 뜻하는 셰니를 대비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과 친족은 재산을 이어받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과 보호,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도움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들과 형제가 없다는 표현은 가까운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그가 모든 사람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거나, 결혼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가족을 버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의 고립과 끝없는 노동입니다.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 — 둘이 하나보다 나은 이유

전도서 4:9–12 본문 →

둘이 하나보다 낫다. 그들의 수고에 좋은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전도서 4:9 · 본디새김

8절에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곁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려면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둘이 하나보다 나은 이유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함께 수고하는 일입니다. 일을 나누어 할 수도 있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보상」이 반드시 돈이나 재산만을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함께하는 관계가 위기 속에서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지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장면은 넘어짐입니다.

그들이 넘어지면 한 사람이 제 동료를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있는 이는 넘어졌을 때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이가 없으니 가련하다.전도서 4:10 · 본디새김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넘어집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사람은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야 합니다. 다치거나 힘이 없어 일어날 수 없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자신을 일으켜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는 억압받는 이들이 울고 있지만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누군가 넘어졌을 때 그를 일으켜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구절에 같은 히브리어 표현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장면은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추위입니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다. 그러나 하나라면 어떻게 따뜻해지겠는가?전도서 4: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결혼생활과 연결되지만, 본문이 결혼한 부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추운 밤에 두 사람이 가까이 누워 체온을 나누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행자나 동료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함께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는 손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추위를 견디게 하는 몸의 온기가 등장합니다.

어떤 때에는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됩니다.

세 번째 장면은 공격을 받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홀로 있는 이를 제압하면, 둘은 그에게 맞선다. 세 겹으로 꼰 줄은 빨리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12 · 본디새김

혼자 있는 사람은 공격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혼자 맞서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서 코헬렛은 둘이 함께하면 반드시 공격자를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함께할 때 저항할 힘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에는 세 겹으로 꼰 줄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있었고, 이어서 두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세 가닥이 함께 꼬인 줄입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과 남편과 아내라는 세 존재를 가리키는 비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세 가닥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해석은 후대의 적용으로는 가능하지만, 이 구절의 본래 의미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연결된 존재들이 함께할 때 얻는 힘입니다.

함께 수고하고,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추우면 온기를 나누고, 공격받으면 함께 맞섭니다. 좋은 관계는 서로에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행동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이러한 관계가 사회의 모든 불의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억압의 구조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를 일으켜 주는 관계는 고립과 무력함에 대한 실제적인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코헬렛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서로 돕는 사람이 힘을 얻는다면,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는 왕은 얼마나 강할까?

가난한 젊은이와 늙은 왕 —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전도서 4:13–16 본문 →

가난하고 지혜로운 젊은이가 더는 경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낫다.전도서 4:13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왕은 젊은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갖고 있고, 오랜 경험과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가난한 젊은이가 그 왕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젊음 자체가 언제나 노년보다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왕은 어리석고, 젊은이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나 경험의 부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왕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의 곁에 신하와 조언자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왕에게 지혜를 더해 주지 못합니다. 코헬렛은 왕권 자체가 지혜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는데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전도서 4:14 · 본디새김

감옥에서 왕위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극적인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과 이어지는 두 절에는 문법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해 아래를 걸어 다니는 살아 있는 모든 이가 그를 대신하여 설 두 번째 젊은이와 함께하는 것을 보았다.전도서 4:15 · 본디새김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두 번째 젊은이」가 앞에서 말한 가난한 젊은이인지 그 뒤를 이을 또 다른 후계자인지, 16절의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세 사람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으로 재구성하기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흐름을 따라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흐름은 왕이 교체되고, 백성의 지지가 새로운 인물에게 향하지만, 그러한 지지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의 수, 곧 그가 앞에 섰던 그 모든 이의 수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뒤에 오는 이들은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이것도 입김이며 바람을 뒤쫓는 일이다.전도서 4:16 · 본디새김

그는 이전의 왕보다 지혜로울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뒤에 오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합니다. 권력을 얻는 사람도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지지를 영원히 보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코헬렛이 보여 주는 것은 권력의 변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13절에서 그는 분명히 가난하고 지혜로운 젊은이가 낫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더 나은 통치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권력과 인기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왕은 높은 자리에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코헬렛은 장소를 바꿉니다. 왕궁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은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이 무엇이든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에서 직접 설명되지 않는 가능한 배경일 뿐입니다. 열왕기상 12:6–14에서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조언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자란 사람들의 조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4장의 왕을 반드시 르호보암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는 왕의 이름이나 특정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14절은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인물의 처지와 왕권의 교체가 압축되어 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높은 지위를 얻은 장면(창세기 41:14, 39–44)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집트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파라오 아래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요셉의 이야기를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의 첫 번째 읽기에서는 늙은 왕과 그를 대신할 젊은이라는 두 인물의 교체가 강조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늙은 왕을 대신한 젊은이도 결국 새로운 젊은이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연속적인 권력 교체가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 제물을 바치기보다 들으라

전도서 4:17 본문 →

하나님의 집에 갈 때에는 네 발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이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는 들으러 가까이 가거라. 그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전도서 4:17 · 본디새김

지금까지 코헬렛은 주로 자신이 본 것과 생각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독자를 직접 향해 명령합니다.

그가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먼저 제물의 종류나 양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발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신의 행동을 신중하게 살피라는 경고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제물을 바치는 행동과 듣는 행동의 대비입니다. 히브리어 샤마(⁨שָׁמַע⁩)는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문맥에 따라 주의 깊게 듣고 그 말에 응답하거나 순종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코헬렛은 장의 처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기 행동이 악한 줄도 모르면서 제물을 바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1절의 억압자와 17절의 어리석은 예배자가 반드시 같은 사람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는 문제를 이 두 장면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자신의 종교적 행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태도를 놓치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다만 히브리어 마지막 문장은 「자신들이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 외에, 악을 피하거나 바르게 행동할 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읽기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13절의 어리석은 왕은 더 이상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17절의 어리석은 예배자는 제물을 바치지만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왕궁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종교적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공통으로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가르침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고해도 듣지 않는다면, 그 곁에 사람이 많아도 지혜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많은 제물을 바쳐도 듣지 않는다면, 종교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감출 수 있습니다.

전도서 4장은 하나님이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즉시 구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억압을 허락하셨는지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신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장의 마지막은 인간을 하나님의 집 앞으로 데려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서에는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보다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번제와 희생 제물보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1:11–17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이 많은 제물을 바치면서 악한 행동을 계속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악을 그치고 정의를 구하며 억압받는 사람을 바로잡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신명기 10:17–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46:7–9는 여호와야훼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전도서 4장의 마지막 구절에 직접 쓰인 모든 내용을 넘어서는 정경적 연결이지만, 장의 시작에 등장한 억압과 마지막에 등장한 듣는 태도를 함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인다면, 억압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지 못한 척하면서 제물만 드리는 태도를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문 앞에서

전도서 4:1–17 본문 →

전도서 4장에는 여러 종류의 힘이 등장합니다. 억압자의 힘은 눈물을 만들어 냅니다. 끝없이 축적하는 사람은 고립되어 있고, 왕은 권력이 있어도 충고를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둘이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힘이 다르게 사용됩니다.

문제는 힘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입니다.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힘과 다른 사람을 일으켜 주는 힘은 다릅니다. 인간은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고통받을 때 그를 홀로 남겨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의 장면이 오래 남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으로 걸어갑니다.

그는 제물을 바치려고 왔을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 앞에서 「네 발을 조심하여라」라는 코헬렛의 경고를 듣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잠시 뒤에 두고, 자신이 어떤 태도로 그곳에 들어가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를 보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서 4장은 모든 눈물이 닦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억압이 끝났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받는 사람 곁에 아무도 없었던 세상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주는 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 문 앞에서,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이 하려던 말보다 먼저 들어야 할 말이 있음을 깨닫도록 부름받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