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테르기 (그리스어)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구원과 기념
모르드개가 마침내 꿈의 뜻을 알았을 때
에스테르기 마지막 장에는 두 종류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페르시아와 메대 왕들의 책입니다. 그 책에는 왕의 힘과 용맹, 나라의 부와 영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모르드개가 기억해 낸 꿈입니다. 그 꿈에는 서로 싸우는 두 용과 작은 샘에서 흘러나온 강, 그리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과 해가 등장합니다.
왕의 기록은 인간이 이룩한 권력의 크기를 말합니다. 모르드개의 꿈은 그 권력 아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말합니다.
그는 책의 시작에서 꿈을 꾸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했습니다(그리스어 에스테르기 1:111).
에스테르기 10장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엇을 하실지 예고하는 장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돌아보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이해하는 장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매 순간 자기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만의 계획을 처음부터 내다보지도 못했고, 왕의 결정이 어떻게 바뀔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모르드개는 흩어져 있던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 왕도, 자신도, 에스더도 아닌 하나님을 놓습니다.
왕의 힘은 책에 기록되고, 모르드개의 이름은 백성 가운데 남는다
10장은 왕의 행동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육지와 바다에 걸친 나라에 글을 내렸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 · 본디새김
그리스어의 중심 동사는 에그랍센(γράφω), 곧 ‘썼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썼는지 나타내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에스더기 10:1은 왕이 육지와 바다의 섬들에 조공이나 부역을 부과했다고 기록합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 형태에서도 조공을 가리키는 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이 따르는 문장을 왕이 나라 전체에 부과할 의무를 문서로 정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시된 그리스어 문면만으로 그 내용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부과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왕은 여전히 넓은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입니다.
하만이 죽었고 모르드개가 높아졌지만, 페르시아의 왕권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왕은 제국을 통치합니다.
보라, 그의 힘과 용맹과 그의 나라의 부와 영광은 기억되도록 페르시아와 메대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2 · 본디새김
고대 근동의 왕실에서는 왕의 업적을 비문이나 공식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왕권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통치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나라를 다스렸고, 어떤 일을 이루었으며,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에스테르기 역시 왕실 기록을 중요한 이야기 장치로 사용합니다. 모르드개의 충성이 기록으로 남았기 때문에 왕이 뒤늦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6:1–3).
모르드개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르다
그런데 3절에서 시선이 바뀝니다.
모르드개는 아닥사스다 왕 다음가는 자리에 있었고, 나라 안에서 큰 인물이었으며 유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사랑받으며 자기 행적을 자기 민족 전체에게 이야기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3 · 본디새김
왕에게서는 힘과 용맹, 부와 영광이 강조되었습니다. 모르드개에게서는 높은 지위와 함께 유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 언급됩니다.
모르드개의 이름은 제국 안에서 높아졌지만, 마지막에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관계는 자기 민족과의 관계입니다. 그가 왕에게서 얼마나 많은 권한을 받았는가만이 아니라, 그가 자기 백성 가운데 어떤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는지가 기록됩니다.
처음 모르드개는 궁정에서 일하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실에서 살아가지만 자기 백성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왕 다음가는 위치에 올랐지만, 여전히 ‘유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모르드개의 성공은 자기 백성을 떠나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간 성공이 아니라, 높은 지위를 얻은 뒤에도 자기 백성과의 관계 속에 남아 있는 성공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히브리어 에스더기의 결말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모르드개의 높은 지위와 자기 백성을 위한 그의 역할을 말하며 끝납니다.
그리스어 에스테르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모르드개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 전체의 뜻을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10:3의 마지막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어 텐 아고겐은 ‘행실’, ‘삶의 방식’, ‘살아온 과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행적을 민족 전체에 이야기했다고 옮깁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가 어떤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했는지, 무슨 내용을 연설했는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모르드개가 말했다. 「이 일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1 · 본디새김
모르드개는 어느 한 사건만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일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하만이 죽은 일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이야기 전체입니다.
꿈을 꾼 일, 왕의 암살 음모를 알린 일, 하만과 갈등하게 된 일, 유대인들이 멸망할 위험에 처한 일,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간 일, 왕의 명령이 바뀐 일, 그리고 백성이 살아남은 일입니다. 모르드개는 이 복잡한 사건들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일들에 관해 꾸었던 꿈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과연 그 내용 가운데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2 · 본디새김
사건이 끝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 꿈
그리스어 에스테르기의 첫 장에서 모르드개는 꿈을 꿉니다.
꿈에는 천둥과 지진, 큰 혼란이 나타납니다. 두 용이 싸우려고 나서고, 민족들이 모여 의로운 민족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 민족은 큰 고난에 빠져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작은 샘에서 큰 강이 흘러나오고, 빛과 해가 떠오르며, 낮은 사람들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꿈은 모르드개가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해 준 상세한 계획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지만, 여전히 자기 앞에 닥치는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사건이 지나간 뒤 그 꿈을 돌아보니,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실제 역사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듣고 곧바로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풍년과 흉년이 올 것이라고 풀이하고, 그에 대비할 방법까지 제시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자신이 꾼 꿈의 뜻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해석은 사건 이전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모르드개는 모든 일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지나온 뒤에야 그 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모르드개의 경험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나중에 그 고통의 이유가 완벽하게 설명될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테르기에서 모르드개는 특별한 꿈을 꾸었고, 책의 마지막에서 그 꿈을 해석합니다.
작은 샘이 강이 되었다 — 에스더의 참된 역할
모르드개는 꿈의 첫 번째 상징을 설명합니다.
「작은 샘이 강이 되었고, 빛과 해와 많은 물이 있었다. 그 강은 에스더이다. 왕이 그와 혼인하여 왕후로 삼았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3 · 본디새김
작은 샘은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강이 되면 많은 물을 품고 넓은 지역을 적실 수 있습니다.
왕후라는 지위보다 더 큰 의미
에스더는 처음부터 제국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페르시아 궁정에 들어온 유대인 여성이었고, 왕후가 되기 전에는 왕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삶이 바뀌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왕후가 된 뒤에도 그녀가 누리는 지위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왕의 허락 없이 함부로 그에게 나아갈 수 없었고, 자기 백성에 대한 왕의 명령을 스스로 철회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에스더는 왕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요청을 통해 유대인들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작은 샘이 강이 되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변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강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가?
멸망을 앞둔 민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 다음에 작은 샘에서 큰 강이 흘러나왔습니다(그리스어 에스테르기 1:108–109).
꿈속에서 강은 단순히 왕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백성의 부르짖음 뒤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르드개는 그 강이 에스더였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처음과 끝을 함께 읽으면, 에스더의 역할이 단순한 개인의 성공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녀는 백성이 부르짖는 위기 속에서 생존의 길을 여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에스더의 위대함은 자신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보다, 자신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빛과 해와 많은 물
모르드개는 강을 에스더라고 설명하지만, 빛과 해와 많은 물을 각각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응시켜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책의 첫머리에서 꿈의 배경은 어둠과 혼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강과 물, 빛과 해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이 변화는 유대인들이 위협에서 벗어나 삶을 되찾은 사건과 연결됩니다. 앞서 8:16은 유대 사람들에게 「빛과 기쁨」이 생겼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꿈 해석의 빛은 이미 이야기 속에서 사용된 구원의 언어를 다시 불러옵니다.
처음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어둠을 뒤로한 백성의 기쁨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작은 샘이 정확히 에스더의 어린 시절을 가리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강이 되었다는 것을 단순히 에스더가 왕후로 출세했다는 뜻으로만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모르드개가 직접 밝히는 것은 ‘그 강은 에스더’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작은 샘에서 강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그녀의 미약해 보이던 위치가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상징의 세부 사항 모두를 하나의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두 용은 왜 모르드개와 하만인가?
모르드개는 다음 상징을 설명합니다.
「두 용은 나와 하만이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4 · 본디새김
우리는 용이라는 상징을 보면 흔히 악한 존재부터 떠올립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두 용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꿈에서 두 용은 우선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을 나타냅니다.
용이라는 모습 자체가 두 사람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인물이 서로 충돌하고, 그 대립이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왜 두 사람의 갈등이 민족 전체의 위기로 커졌는가?
책의 이야기에서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르드개 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전체를 없애려고 했습니다(3:5–6).
하만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면서 민족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습니다. 꿈에서 두 용의 충돌에 이어 민족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타났던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민족들은 유대 사람들의 이름을 없애려고 한데 모인 자들이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5 · 본디새김
그들은 유대인 개인 몇 사람을 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대 민족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시편 83:4에서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민족으로서 없애고 그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말하는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에스테르기 10장은 유대인들에게 닥쳤던 위기가 단순한 사회적 차별이나 정치적 불이익이 아니라 민족의 존속을 위협하는 일이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민족들’을 모든 이방 민족과 그 구성원 전체가 악했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는 유대인들을 도운 페르시아 관리들도 등장하고, 유대인들의 삶에 참여한 이방인들도 등장합니다(8:17, 9:3). 따라서 꿈의 해석에서 언급하는 민족들은 유대인들을 없애려는 계획에 가담한 세력을 가리키는 이야기 속 표현입니다.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모르드개는 이제 꿈속에서 위협받던 민족이 누구였는지 설명합니다.
「내 민족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받은 이들, 곧 이스라엘이다. 주는 자기 백성을 구원했고, 주는 이 모든 재앙에서 우리를 건져 냈다. 하나님은 여러 민족 가운데서는 일어난 적이 없는 큰 표징들과 놀라운 일들을 행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6 · 본디새김
에스테르기 전체에서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유대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 안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마지막에 자기 민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유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제국 안에서 어떤 공동체로 존재하는지를 가리킵니다. 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오랜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에서 살아남은 사건을 하나의 정치적 승리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역사 안에 놓습니다.
부르짖음과 구원
백성이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순서는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와 매우 가깝습니다. 출애굽기 2:23–25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어 출애굽기 3:7–8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을 구하러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르드개의 말은 이 구원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어떤 표징과 놀라운 일이 있었는가?
그러나 에스테르기의 이야기에는 홍해가 갈라지거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장면이 없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기적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신들이 멸망할 위기에서 살아남은 사건 전체를 하나님의 큰 표징들과 놀라운 일들로 해석합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왕의 결정, 에스더의 간청, 모르드개의 권한, 제국에 전달된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 모든 일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봅니다.
에스더는 실제로 왕 앞에 나아가야 했고, 모르드개는 실제로 왕궁에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모르드개의 고백은 이러한 인간의 행동을 지우지 않으면서 그 사건의 궁극적인 의미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가 발견한 놀라움은 인간의 행동이 필요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능력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던 역사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제비는 하나였는가, 둘이었는가?
모르드개는 이제 뜻밖의 말을 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제비 둘을 만들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7 · 본디새김
앞서 부림절이라는 이름은 하만이 제비를 뽑았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되었습니다(9:24–26).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두 제비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하만의 제비와 하나님의 두 제비
하만은 날짜를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멸망시킬 날을 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마지막에 말하는 두 제비는 그보다 큰 차원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이 두 제비는 하나님 앞에서, 또 모든 민족에게 때와 시기와 심판의 날에 이르렀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8 · 본디새김
이것은 하만이 날짜를 정하려 했던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만은 자기 뜻대로 유대인들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마지막에 그 운명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만이 뽑은 제비는 그의 악한 계획을 실행할 날짜를 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반면 모르드개가 말하는 두 제비는 하나님의 백성과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맞이하게 되는 심판의 결과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하만이 두 개의 제비를 뽑았다거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두 제비를 직접 던지셨다는 사건을 본문에 추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제비라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을 설명하는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민족이 멸망하도록 정해졌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제비 하나와 모든 민족을 위한 제비 하나가 있다는 말을, 이스라엘은 모두 구원받고 나머지 모든 민족은 무조건 멸망한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처럼 모든 개인의 최종 운명을 자세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 제비들은 이야기 속에서 유대인들을 없애려던 세력과 살아남은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석하는 이미지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의 생존을 단순한 우연이나 제국의 정책 변화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판단하시고 행동하신 결과로 이해합니다.
다만 그 신앙 고백을 인간이 모든 민족의 운명을 자의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는 권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의 주체는 모르드개나 에스더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억하셨다
모르드개의 꿈 해석은 하나의 짧은 고백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했고, 자기 유산인 백성을 의롭게 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09 · 본디새김
앞서 모르드개는 자신이 꿈을 기억했다고 말했습니다(10:102).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에는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모르드개는 꿈을 기억했고, 그 꿈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백성을 잊고 계셨다가 갑자기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그들에게 세우신 약속과 관계를 따라 행동하신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
창세기 8:1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생물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홍수의 물이 줄어드는 일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사실을 떠올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분이 기억하시는 대상에게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멸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존재가 사라지는 결과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자기 유산인 백성’이라는 표현
모르드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유산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9:26, 29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야훼께서 큰 능력으로 구속하신 자기 백성, 자기 유산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편 28:9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기 유산에 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소유권에 대한 차가운 법적 개념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그 관계에 따라 돌보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유대인들은 왕의 명령 하나로 멸망할 수 있는 집단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유산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그들을 어떻게 분류했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했다’는 뜻
하만은 유대인들을 제국에 해로운 집단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발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유대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그들에게 내려졌던 악한 판단이 뒤집히고 그들의 정당함이 드러났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모든 유대인 개인의 모든 행동이 도덕적으로 완전했다는 선언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 9장에서 벌어진 각각의 전투와 처형, 약탈에 대해 아무런 검토 없이 모두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행동이라고 선언하는 구절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개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려던 불의한 계획 앞에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하심은 민족 전체가 생존할 권리를 부정당했던 상황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믿음은 인간이 저지른 악을 좋은 일이라고 부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악과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109의 「의롭게 했다」에는 에디카이오센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의롭다고 선언하거나, 정당함을 드러내거나, 권리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정당함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편에서 판단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부림절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날이다
모르드개의 마지막 해석은 부림절에 이릅니다.
「이날들, 곧 아달월 열나흗날과 같은 달 열닷샛날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대대로 영원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들이 될 것이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10 · 본디새김
앞서 부림절을 제정하는 문서에서는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보내며 즐겁게 지내라고 했습니다(9:22). 10장은 그 기쁨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잔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억하는 신앙적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스테르기의 유대인들은 제국의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도시와 지방에서 부림절을 지키도록 요청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모인다’는 표현은 흩어진 공동체들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기쁨은 단순히 정치적인 승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그분이 자신들을 기억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직접 위험을 겪었던 사람들만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손들도 자신들이 어떤 역사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인지 배우게 됩니다.
이런 기억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전통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2:14에서는 출애굽의 날을 대대로 기념하도록 명령합니다. 에스테르기에서는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살아남은 사건을 부림절로 기억합니다. 두 절기의 내용과 기원은 다르지만, 구원이 공동체의 기억과 예배적인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이 백성의 생존으로 나타났고, 백성의 기억은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모르드개의 꿈 해석이 부림절로 끝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한 절은 왜 번역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가?
그런데 책은 모르드개의 고백으로 곧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린 지 사 년째에, 자신이 제사장이며 레위 사람이라고 말한 도시테오스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앞에 실린 부림 편지를 가져왔다. 그들은 이 편지가 진본이며, 예루살렘에 사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리시마코스가 번역했다고 말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10:11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선 이야기의 사건을 계속 진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아닥사스다 왕도, 에스더도, 모르드개도 더 이상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시대에서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번역된 시대로 시선이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페르시아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이 문장은 페르시아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시대의 유대인들이 부림절 문서를 전하고 있었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어가 널리 사용되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다 땅뿐 아니라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살았으며, 히브리어뿐 아니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신앙과 역사에 관한 문서를 그리스어로 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직접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유대인들도 자기 백성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본’이라고 주장했다는 말
본문은 도시테오스와 그의 아들이 그 편지가 진본이며 리시마코스가 번역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만으로 실제 번역의 모든 과정과 문서의 역사적 진위가 독립적으로 검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도시테오스가 자신을 제사장이며 레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런 신분을 주장했다는 기록이지, 그 신분이 다른 자료로 입증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림절에 관한 문서는 단지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문서를 자신들의 공동체에 전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번역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문서의 신뢰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그리스어 에스테르기를 보존하고 읽었던 공동체가 부림절에 관한 기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그리스계 왕조에서 반복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 왕조의 여러 왕비가 사용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린 지 사 년째」라는 표현만으로 정확히 어느 왕과 왕비를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작은 샘과 마지막 편지
페르시아 왕들의 책은 제국의 힘과 부와 영광을 기억합니다. 부림절의 편지는 유대인들이 멸망할 위기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왕실의 역사와 하나님의 백성이 기억하는 역사가 서로 다른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번역 전승 기록은 그러한 기억이 한 시대와 한 언어 안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르드개는 그 강이 누구였는지 알게 됩니다.
에스더였습니다.
왕후가 되었지만 자기 백성을 잊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생명과 백성의 생명을 분리하지 않았던 사람, 왕 앞에서 죽음의 명령을 되돌려 달라고 간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드개는 그 모든 일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책은 모르드개의 고백에 이어 그 이야기를 담은 편지가 전해졌다는 기록을 남깁니다. 한때 모르드개 혼자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꿈은 이제 유대인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꿈의 뜻을 알지 못하던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아달월 열나흗날과 열닷샛날, 백성은 다시 하나님 앞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림절은 단지 하만이 실패한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유산인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모르드개의 꿈은 그렇게 끝내 그 뜻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이야기를 담은 부림의 편지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졌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