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테르기 (그리스어)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구원과 기념
죽음의 날이 기념일이 되기까지
에스테르기 9장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두 가지 모습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수산에서 오백 명이 죽고, 다음 날 삼백 명이 더 죽으며, 제국의 다른 지방에서도 만 오천 명이 죽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기쁨의 잔치를 열고,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눕니다. 그리고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떻게 이 두 모습이 하나의 축제를 이루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을 건너뛰고 9장을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들에게 승리한 이야기로만 읽으면, 본문이 가진 불편함을 지나치게 됩니다. 반대로 이 장의 폭력적인 장면만 바라보면, 책이 왜 마지막에 죽음의 숫자보다 쉼과 기억과 음식 나눔을 강조하는지도 놓치게 됩니다.
이 장은 유대인들의 승리로 시작하지만, 그 승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할 공동체의 절기로 바꾸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아무도 맞서지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야기는 아달월 열사흗날에 시작합니다.
이날은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고 정했던 날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의 명령도 이미 제국에 전달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날은 서로 반대되는 두 계획이 마주하는 날입니다.
하만의 계획에 따라 유대인들을 해치려던 사람들이 있었고, 새로운 왕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을 지킬 권한을 얻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유대 사람들에게 맞서던 자들이 멸망했다. 모두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맞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 · 본디새김
확실한 것은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던 세력이 이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태수들의 우두머리들과 통치자들과 왕의 서기관들도 모르드개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유대 사람들을 존중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3 · 본디새김
왕실의 권력이 누구를 지지하는지가 달라졌습니다.
앞서 하만은 왕의 높은 신임을 받고 있었고, 지방 관리들은 그가 발행한 명령을 시행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제 모르드개가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인물이 되었고, 지방 관리들은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관리들이 유대인들을 존중한다는 말은 그들이 모두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이 직접 밝히는 이유는 모르드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존중하는 행동에는 정치적인 권력 관계가 작용합니다.
두려움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민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9장은 이 불완전한 승리의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9:2의 ‘맞서지 못했다’는 말을 적대적인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유대인들의 적대자들이 그들을 제압하거나 저항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모든 죽음이 어떤 구체적인 전투 과정에서 발생했는지까지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먼저 무기를 들었는지, 각각의 장소에서 어떤 충돌이 일어났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만의 열 아들과 수산에서 일어난 죽음
이야기는 수산 도성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동합니다.
또 그 도시 안에서 유대 사람들은 남자 오백 명을 죽였고,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6 · 본디새김
이어서 하만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하만의 죽음은 이미 7장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9장에서는 그의 아들들까지 죽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하만은 처음부터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전체를 제거하려 했습니다(3:6). 그의 적의는 개인적인 갈등에서 시작해 한 민족의 멸망을 계획하는 데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하만의 계획이 완전히 좌절되는 과정의 일부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들들 각자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죄책을 본문 밖에서 상세하게 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왕조와 권력자들의 가문에서는 한 사람의 몰락이 그 집안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에스테르기는 하만의 가문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러한 고대 궁정의 세계 속에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이를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집단 처벌의 정당화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약탈도 했다
곧 유대 사람들의 원수이며 함므다다의 아들인 부가이오스 사람 하만의 열 아들도 죽였다. 또 그들은 약탈도 바로 그날에 했다. 수산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도 왕에게 보고되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10–11 · 본디새김
같은 장의 9:15–16에서는 약탈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오므로, 그리스어 본문 안에서도 서로 다른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리스어 에스테르기 9장 전체를 ‘유대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약탈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한 구절만 근거로 유대인들의 모든 행동이 재물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장은 유대인들의 생존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과 약탈의 문제를 독자가 마주하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하만의 아들들을 나열한 이름의 형태가 히브리어 본문과 다르고, 제시된 그리스어 인쇄 본문에서는 이름의 수와 「열 아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야기 자체가 하만의 아들들을 열 명이라고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약탈물에 손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은 유대인들이 첫날 수산에서 약탈했다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반복되는 ‘약탈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유대인들의 행동과 단순한 탐욕에 따른 약탈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그리스어 본문의 표현이 어떤 전승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는 이 장의 문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에스더는 왜 하루를 더 요청했는가?
수산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가 왕에게 보고됩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말했다. 「유대 사람들이 수산 도성에서 남자 오백 명을 죽였다. 그렇다면 주변 지방에서는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니 너는 또 무엇을 바라느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1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앞선 장들에서 반복되어 온 왕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더가 청하는 것은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에스더의 요청은 이전과 성격이 다릅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말했다. 「유대 사람들이 내일도 마찬가지로 행하여 하만의 열 아들을 매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13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은 아들들을 다시 매달다
왕은 하만의 아들들의 시신을 내주어 매달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날 죽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매달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매다는 행위는 패배와 수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만의 아들들이 죽은 뒤 그 시신까지 매달렸다는 장면은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던 하만 가문의 몰락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성경이 어떤 행위를 기록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모든 상황에서 따라야 할 도덕적 모범으로 제시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이 장에서는 에스더의 요청을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거나 칭찬하셨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유대인들의 생존과 원수들의 패배를 서술하는 고대 이야기의 일부로 읽을 수 있지만, 이를 곧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적에게 가해야 할 보편적인 처벌 방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수산과 다른 지방의 차이
결과적으로 수산에서는 열나흗날에도 삼백 명이 죽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날 아무것도 약탈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지방의 유대 사람들도 아달월 열사흗날에 모여 자신들을 지켰고, 적들 가운데 만 오천 명을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들 역시 약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산과 다른 지방의 차이는 이어지는 부림절 날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열사흗날에 충돌이 끝났고, 열나흗날에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산에서는 열나흗날에도 사건이 이어졌으므로, 열닷샛날이 기쁨의 날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은 수산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놀랐을 수도 있고, 그 규모를 강조하면서 다른 지방에서는 더 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감정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가 분노했거나 유대인들의 행동을 비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스더의 요청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수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가 필요했다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그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에스더가 분노에 사로잡혀 불필요한 복수를 계속하려 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우리는 에스더가 무엇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났는지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녀의 정확한 내적 동기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21:22–23에도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나무에 매다는 관습과 그 시신을 밤새 두지 말라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에스테르기 9장은 신명기의 규정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본문을 연결할 때도 공개적으로 매달린 시신이 수치와 형벌의 표지가 된다는 공통점을 확인하는 정도가 적절합니다. 여기서 만 오천 명이라는 숫자는 그리스어 본문의 숫자입니다. 히브리어 에스더기 9:16은 칠만 오천 명이라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전승이 전하는 숫자를 정확하게 구별하면서, 검증된 역사 통계인 것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
승리의 날보다 더 중요하게 기록된 '쉬는 날'
9장 중반에는 그동안의 폭력적인 사건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달 열나흗날에 쉬었고, 그날을 쉬는 날로 삼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17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언제 쉬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살았습니다. 왕이 발행한 문서 때문에 자신들과 가족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그날의 공격을 견디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쉬는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안식은 구약의 구원 이야기에서 중요한 주제다
신명기 12:10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변의 원수들에게서 벗어나 안식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 21:44도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사방의 원수들로부터 안식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에스테르기 9장은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쉼을 얻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안식은 단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가운데 공동체가 자기 삶을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어 에스테르기에서는 그 쉼이 곧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어집니다.
부림절은 적을 죽인 날을 되풀이해 기념하는 축제라기보다, 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쉬고 기뻐하게 된 날을 기억하는 축제로 제정됩니다.
다른 날짜를 지키는 하나의 공동체
9:19에서는 지방에 흩어진 유대 사람들과 도성에 사는 사람들의 축제 날짜가 구별됩니다. 지방의 유대 사람들은 열나흗날을 기쁜 날로 지키고,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열닷샛날도 기뻐하는 날로 지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경험은 하나의 공동체적 기념으로 묶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의 도성에만 모여 살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동일한 구원의 기억을 공유하는 방법이 바로 해마다 정해진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지역의 경험을 하나로 뭉개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민족으로서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사건을 축제로 바꾸어 기록한다
9:20에서 모르드개는 이 일들을 문서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그 문서를 보냅니다. 앞서 하만은 문서를 통해 유대인들의 죽음을 결정하려 했습니다. 이후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새로운 왕실 문서를 통해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지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문서는 성격이 다릅니다.
모르드개는 왕실의 행정 명령이 아니라 공동체가 앞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문서를 보냅니다.
이날들을 좋은 날로 정하고 아달월 열나흗날과 열닷샛날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1 · 본디새김
이날들에 유대 사람들이 원수들에게서 벗어나 쉬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에게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좋은 날로 바뀐 달인 아달월에는 그달 내내 혼인 잔치를 벌이며 즐겁고 좋은 날들을 보내고,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보내라고 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사건은 왕과 하만,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선택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일을 경험한 공동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가 중심이 됩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9:22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병렬로 제시됩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좋은 날로.
왕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들은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지나 살아남았습니다.
따라서 부림절의 기쁨은 현실을 부정하는 감정적인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생명을 빼앗길 뻔했던 사람들이 생존을 경험한 데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두려워했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기쁨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자신들이 기뻐하는지 설명하는 기억이 됩니다.
왜 ‘혼인 잔치’인가?
본디새김은 9:22에서 「혼인 잔치를 벌이며」라고 옮겼습니다.
본문은 혼인 잔치의 기쁨을 떠올리게 하는 축제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혼인 잔치는 고대 공동체에서 특별히 많은 사람이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뀐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적들의 위협이 사라진 뒤 사람들이 다시 함께 모이고, 음식을 먹고, 서로에게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 중심에 놓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명령은 그 기쁨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보내라는 명령
모르드개는 기쁨의 날을 지키면서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보내라고 합니다.
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포함됩니까?
본문은 직접적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살아남은 것은 일부 권력자들만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의 기쁨도 일부 부유한 사람들만 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잔치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잔치를 준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음식이 전달될 때, 공동체의 구원은 보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이 됩니다.
여기서 음식 나눔은 단순한 자선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몸으로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함께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기뻐한다.’
이 세 가지 고백이 음식 나눔 속에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와의 연결
신명기 16:11은 칠칠절을 지킬 때 자녀와 종들뿐 아니라 레위 사람과 나그네, 고아와 과부도 함께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6:14에서도 초막절의 기쁨에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합니다.
이 구절들이 부림절을 직접 예언하거나 에스테르기 9장이 그 규정을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과 기쁨이 공동체 안의 약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쳐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는 일은 자신의 풍요를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앞서 그리스어 본문에 첫날 수산의 약탈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후반부의 음식 나눔을 모든 폭력적 행동이 처음부터 완전히 순수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들은 모르드개가 보낸 문서를 받아들입니다. 절기는 이제 한 지도자의 제안에서 공동체가 함께 받아들이는 관습으로 발전합니다.
하만이 뽑은 제비가 축제의 이름이 되다
부림절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글에는 함므다다의 아들인 마케도니아 사람 하만이 그들을 없애 버리려고 결의를 세우고 제비를 뽑아 어떻게 그들과 싸웠는지,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4 · 본디새김
여기서 본문이 집중하는 것은 하만의 정확한 출신이 아니라 그가 제비를 뽑아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제비로 정한 날
하만은 자신에게 유리한 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3:7).
그는 유대인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죽음을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언제 그 일을 실행하면 좋을지만 정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테르기에서 바로 그 날짜가 뒤집힙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의 멸망을 위해 정했던 때가 그들의 구원을 기념하는 때가 됩니다. 하만이 자신의 승리를 위해 뽑은 제비가, 결국 그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축제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부림’이라는 이름의 의미
이 때문에 이날들은 제비를 따서 부림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말로 제비를 부림이라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과 그 일들 때문에 그들이 겪은 모든 일과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근거로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6 · 본디새김
축제의 이름을 ‘승리’나 ‘구원’이라고 새롭게 붙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히려 원수가 사용했던 ‘제비’를 축제의 이름으로 남깁니다.
사람들은 축제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들이 어떤 위협에 처해 있었는지를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그 이름은 구원받은 결과만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했던 상황까지 기억하게 합니다. 원수가 자기 뜻대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행위를 기억함으로써, 그가 실제로는 미래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리스어 에스테르기 9장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새로운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앞 장의 왕실 칙령은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명시했습니다(8:116, 118, 121). 그러나 9장의 축제 제정 부분은 사건의 전개와 공동체의 응답을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다만 책 전체의 신학적 문맥에서 보면, 하만이 날짜를 정하고 왕의 권력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했지만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라는 주제 안에서 읽힙니다.
잠언 16:33은 제비를 뽑는 인간의 행동과 여호와야훼의 주권을 함께 말합니다. 에스테르기 9장이 그 잠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제비를 통해 미래를 통제하려 한다고 해서 그 미래의 최종 결과까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하만은 날짜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짜가 어떤 의미로 기억될지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의 구원을 여러 세대의 기억으로 만들다
본문은 부림절이 단지 모르드개의 명령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날들을 정했다.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과 자기 후손들과 자기들에게 합류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일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결코 달리 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도시마다 가문마다 지방마다 지키는 기념일이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7 · 본디새김
이렇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공동체의 지속적인 기념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넘어섭니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함께 기억한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자신들이 왜 기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만의 명령을 들었고, 두려워했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그 일을 직접 겪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부모나 조부모의 경험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그들이 매년 같은 날을 지키도록 합니다. 공동체의 정체성은 각 개인이 직접 경험한 사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출애굽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12:26–27에서 자녀들이 유월절 예식의 의미를 물으면 부모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집들을 구해 주신 일을 설명해야 합니다. 신명기 6:20–25에서도 자녀가 율법의 의미를 물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이야기로 대답하도록 합니다.
부림절 역시 이런 공동체적 기억의 전통과 연결됩니다. 다만 유월절과 부림절의 역사적 배경과 제정 방식은 다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결부된 절기로 제시되고, 부림절은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유대인들이 살아남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제정됩니다.
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이 오늘 자신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계속 배우는 일입니다.
‘자기들에게 합류한 사람들’
9:27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대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들도 절기를 지키는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8:17에서 다른 민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할례를 받고 유대 사람처럼 살기 시작했다는 서술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9:27의 모든 합류자가 8:17의 사람들과 정확히 동일한 집단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어 에스테르기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삶과 기억에 참여하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56:3–7에서는 여호와야훼께 결합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의 상황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단지 혈통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주제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기억
9:28은 부림절이 세대에서 세대로 계속 지켜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건은 지나가지만 기억은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유지하는 방식은 단순히 기록을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해마다 날짜를 지키고,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는 행동을 통해 기억이 계속 살아 있게 합니다.
한 세대가 경험한 구원은 그 세대에서 끝나지만, 그 구원을 기억하는 공동체는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이 왜 살아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림절은 그러한 기억을 위한 날입니다.
마지막 말을 확정하는 사람은 에스더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다시 등장합니다.
아미나답의 딸인 에스더 왕후와 유대 사람 모르드개는 자기들이 한 모든 일과 부림에 관한 편지를 확정하는 내용을 기록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29 · 본디새김
그런데 이때 에스더는 더 이상 왕궁에 들어가 왕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젊은 여성이 아닙니다.
앞부분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2:10, 20).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고, 사람들에게 금식을 요청하며, 왕 앞에 나아가 자기 백성을 위해 간청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건강을 거슬러’ 세운 결의는 무엇인가?
모르드개와 에스더 왕후는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했고, 그때 자기들의 건강을 거슬러 자기들의 결의도 세웠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31 · 본디새김
확실한 것은 이 마지막 단락이 부림절을 지속적으로 지키겠다는 결의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가?
에스더는 말로 이를 영원히 확정했고, 이는 기억하도록 기록되었다.에스테르기 (그리스어) 9:32 · 본디새김
처음 에스더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왕 앞에서 자신이 유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 말했고, 그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감추어야 할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중간에는 생존을 위해 드러내야 할 진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생존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말했던 사람이었고, 이제 그 백성이 살아남은 일을 잊지 않도록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에스테르기 2:7과 2:15에서도 에스더의 아버지는 아미나답으로 소개됩니다. 히브리어 에스더기에서는 아비하일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9:31의 그리스어는 문법적으로 매끄럽지 않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읽기에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스스로에게 금식의 의무를 부과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앞서 에스더가 자신과 유대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했던 사건(4:16)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금식’이라는 명사를 명확하게 사용하지 않으며, 본문 자체의 구문도 불안정합니다. 따라서 부림절에는 반드시 건강을 해칠 정도의 금식이 요구되었다거나,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어떤 구체적인 금식 규정을 확정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편지였다
처음의 문서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왕의 권력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의 문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결정하는 공동체의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기념의 중심에 놓인 행동은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기뻐하고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죽음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전투를 지휘하셨다거나 죽은 사람들의 수를 정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는 전투가 있었고, 죽음이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두려운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죽은 사람들의 수를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에스더가 기념을 영원히 확정했고, 이는 기억하도록 기록되었다는 말로 끝납니다.
아달월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다시 모일 것입니다.
친구에게 음식을 보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며, 왜 이날을 기쁘게 지키는지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만이 뽑은 제비의 이름이 다시 불립니다.
부림.
한때 멸망을 예고하던 이름이,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나누는 기쁨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