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이집트의 종살이

물에서 건져진 아이와 끝나지 않은 세월

출애굽기 2장은 한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서 시작하여, 한 민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끝납니다.

이 장에서 ‘본다’는 일은 단순한 관찰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았으며, 그것을 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이야기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실패하고, 떠납니다. 그 모든 일이 지나간 뒤에야 본문은 하나님도 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72장 본문 읽기 →

죽음의 강가에 놓인 작은 바구니

출애굽기 2:1–4 본문 →

이름도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

출애굽기 1장은 파라오가 태어나는 사내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그 명령 아래에서 한 가족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여 줍니다.

레위 집안의 한 남자가 가서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출애굽기 2:1 · 본디새김

첫 문장은 매우 평범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합니다. 이어 여자가 임신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일은 더 이상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해졌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6:20에 이르면 아버지는 아므람, 어머니는 요게벳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단지 레위 집안의 남자와 여자입니다.

아이에게도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될 사람을 처음부터 위대한 지도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목숨을 위협받는 아기입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자는 아이가 고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두었다.출애굽기 2:2 · 본디새김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생명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한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보고 그가 좋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파라오에게 이 아이는 제거해야 할 히브리 사내아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는 보호해야 할 소중한 생명입니다.

성경은 그 석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울 때 어떻게 했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발각될 위험을 어떻게 피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라는 시간은 독자가 그 위험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이는 자라고, 울음소리는 커지고, 숨기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작은 바구니가 노아의 방주와 만나다

더는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여자는 아이를 위해 파피루스 바구니를 가져다가 역청과 타르를 발랐다. 그 안에 아이를 넣고 나일강 가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출애굽기 2:3 · 본디새김

바로 그 강은 파라오가 사내아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한 나일강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강물에 아무렇게나 떠내려 보내지 않습니다. 본문은 바구니를 「나일강 가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단순히 아이를 운명에 맡긴 것이 아닙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바구니를 준비하고, 아이가 놓일 자리까지 정했습니다.

아이를 지키려면 숨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를 자기 곁에서 떠나보내는 방식으로 아이를 살리려 합니다.

바구니를 준비하는 것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구니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누나는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고 멀찍이 서 있었다.출애굽기 2:4 · 본디새김

본문은 누나가 처음부터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보려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아직 아이가 살아남을 것인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고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입니다. 좋다, 아름답다, 훌륭하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판단하실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창세기 1:10, 12, 18, 21, 25). 물론 이 표현만으로 어머니가 아이의 장래에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알아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지식을 어머니에게 부여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리키는 읽기도 가능하고, 아이가 건강하고 온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와 모세의 어머니가 만든 바구니는 크기도 재료도 다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는 모두 물을 막을 수 있도록 준비한 용기에 생명을 넣어 보존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습니다(창세기 6:14–16). 모세의 어머니에게는 그러한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된다는 사실은 두 이야기 사이에 의미 있는 문학적 연결을 만들어 냅니다.

파라오의 집에서 이루어진 뜻밖의 구원

출애굽기 2:5–10 본문 →

아이를 알아보고도 불쌍히 여긴 사람

이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려고 나일강으로 내려왔다. 그의 시녀들은 나일강 가를 걷고 있었다. 파라오의 딸은 갈대 사이에 있는 바구니를 보고 자기 여종을 보내 그 바구니를 가져오게 했다.출애굽기 2:5 · 본디새김

사내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한 바로 그 왕의 가족입니다. 아이를 가장 위험하게 만들었던 권력의 집안에서 나온 사람이 그 아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이 바구니를 열고 아이를 보니,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불쌍히 여겨 말했다. 「이 아이는 히브리 사람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구나.」출애굽기 2:6 · 본디새김

본문은 그가 어떤 근거로 아이의 정체를 알아보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불쌍히 여겼다는 말과 히브리 아이라고 알아보았다는 말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장면의 반전은 파라오의 권력이 무너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의 권력이 여전히 강력한 상황에서도 왕의 명령과 다른 선택이 그 집안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작은 거대한 결단의 선언이 아니라,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한 불쌍히 여김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뜻밖의 경로

이제 멀리서 지켜보던 누나가 움직입니다.

아이의 누나가 파라오의 딸에게 말했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자들 가운데서 유모 한 사람을 불러 드려, 공주님을 위해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출애굽기 2:7 · 본디새김

누나는 자기 어머니를 곧바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여자들 가운데 유모 한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를 돌보는 목적을 「공주님을 위해」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이제 아이를 기르는 일은 파라오의 딸이 원하는 일을 돕는 것이 됩니다.

공주는 허락합니다. 그리고 누나는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옵니다.

파라오의 딸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 나를 위해 젖을 먹여라. 내가 네 품삯을 주겠다.」 여자는 아이를 데려가 젖을 먹였다.출애굽기 2:9 · 본디새김

아이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던 어머니가, 그 아이를 빼앗으려 했던 왕의 집안으로부터 아이를 기르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물론 이것이 어머니가 아이를 완전히 되찾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가 자란 뒤에는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가야 했습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세 여인의 행동이 이어지면서 한 아이가 살아남습니다.

본문은 이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구출 작전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파라오의 딸이 등장할 것을 어머니나 누나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본문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과,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판단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행동을 직접 지시하셨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책 전체에서 이 아이가 맡게 될 역할을 생각하면, 독자는 이 생존이 훗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되는지 알게 됩니다.

지금은 그저 한 아이가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물에서 끌어냈다’는 이름을 가진 아이

아이가 자라자 여자는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고, 아이는 그 딸의 아들이 되었다. 파라오의 딸은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부르며 말했다. 「내가 이 아이를 물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10 · 본디새김

그의 이름에는 자신이 살아남았던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전에 먼저 누군가에 의해 구해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는 일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이 이름은 특별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2장 안에서 모세는 아직 누구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먼저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모세의 이름은 모셰입니다. 파라오의 딸이 ‘끌어냈다’고 말할 때 사용되는 동사는 마샤, 물에서 건져 내다·끌어내다에서 나온 메시티후, 내가 그를 끌어냈다입니다. 본문은 이 둘의 소리를 연결하여 이름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이 모세라는 이름의 역사적 어원을 완전히 확정하는 설명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집트어의 이름 형성과 연결해서 이해할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고통을 본 모세, 그러나 거절당한 모세

출애굽기 2:11–15 본문 →

궁전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다

10절과 11절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무렵 모세가 자라서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 그들이 지는 노동의 짐을 보았다. 그는 이집트 남자 한 사람이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히브리 남자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출애굽기 2:11 · 본디새김

본문은 모세가 궁전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나이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파라오의 딸의 아들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말한 직후, 그가 히브리 사람들을 자기 형제들로 바라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출생과 민족적 정체성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다만 그 사실을 언제, 누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11절에는 ‘형제’라는 말이 두 번 사용됩니다. 이 반복은 모세가 폭력을 당하는 히브리 남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은 익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형제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본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폭행이 아닙니다. 본문은 먼저 그가 형제들이 지는 「노동의 짐」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통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집트의 강제 노동 체계 안에 있었습니다.

왜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는가

모세는 이쪽저쪽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숨겼다.출애굽기 2:12 · 본디새김

모세가 학대받는 히브리 남자에게 연민이나 분노를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앞 문맥에서 그가 형제들의 노동의 짐을 보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동기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을 곧바로 하나님이 승인하신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단순히 이유 없는 폭력으로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먼저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남자를 때리는 것을 보았고, 그다음 행동했습니다.

모세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법은 또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형제에게서 돌아온 뜻밖의 질문

다음 날 모세는 또다시 나갑니다.

다음 날 모세가 나가 보니 히브리 남자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했다. 「왜 네 동료를 때리느냐?」출애굽기 2:13 · 본디새김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어느 민족이 어느 민족을 때리는가만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기 동료를 때리는 히브리 남자에게도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모세의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누가 너를 우리 위에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그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일 생각이냐?」 모세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정말 그 일이 알려졌구나.」출애굽기 2:14 · 본디새김

모세는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모세에게 그런 판단을 내릴 권한이 있는지 묻습니다.

본문은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 형제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통치자나 재판관으로 세워졌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가 전날 저지른 살인 때문에 그의 권위는 더욱 의심받습니다.

이 사람의 반응을 모든 히브리인이 모세를 거부했다는 증거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 사람의 발언을 전할 뿐입니다.

그리고 파라오가 이 일을 듣고 그를 죽이려 하자,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 달아납니다.

형제들을 위해 나갔지만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다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갔다가 결국 그들 곁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행위는 억압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형제들 사이의 다툼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모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그들을 이끌 권한을 갖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이 문제는 이후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에서는 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때 물에서 건져져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 되었던 사람이 이제 파라오를 피해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디안 땅의 우물 곁에 앉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렇다면 이 모든 경험이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나그네의 삶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나그네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될 수 있고, 자기 힘으로 형제들을 구하려다 실패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은 이런 목적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일이 하나님의 훈련이었다고 선언하지 않고,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이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모든 행동과 실패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성공의 단계로 바꿔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다시 시작된 삶

출애굽기 2:16–22 본문 →

이번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구해 주다

모세가 미디안에 도착한 뒤 처음 하는 행동은 우물 곁에 앉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이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9장에서는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납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도 낯선 땅에 온 한 남자가 우물가에서 여자들을 만나고, 그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모세는 가족의 명령을 받고 배우자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뒤 목숨을 지키려고 도망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물가에서 마주한 것은 평화로운 만남이 아니라 또 다른 불의입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 일곱이 아버지의 양과 염소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물을 길어 구유를 채웁니다.

목자들이 와서 그 여자들을 쫓아냈다. 모세가 일어나 그 여자들을 구해 주고 그들의 양과 염소 떼에게 물을 먹였다.출애굽기 2:17 · 본디새김

모세는 앞서 형제를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여자들을 괴롭히는 목자들에게 맞서 그들을 구해 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살인이나 시신을 숨기는 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이는 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모세가 목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맞섰는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들이 쫓겨나는 상황을 막고, 그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끝까지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모세가 이전 행동을 반성하여 완전히 달라졌다는 증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내면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장면 모두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는 상황에서 시작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다릅니다.

모세는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이집트인으로 본다

여자들이 돌아오자 아버지 르우엘은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이유를 묻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이집트 남자 한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정말로 우리를 위해 물을 길어 주고, 양과 염소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출애굽기 2:19 · 본디새김

앞서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을 자기 형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여자들의 눈에는 이집트 남자로 보였습니다. 왜 그를 이집트 남자로 알아보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모세는 한 가지 소속만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형제이지만 그들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실에서 자랐지만 파라오는 그를 죽이려 합니다. 이제 미디안에 와서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곳에서도 처음에는 낯선 이집트 남자입니다.

이 소속의 문제는 잠시 뒤 아들의 이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낯선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르우엘

여자들의 설명을 들은 르우엘은 묻습니다.

그가 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어째서 그 사람을 두고 왔느냐? 그를 불러 빵을 먹게 하여라.」출애굽기 2:20 · 본디새김

그는 앞서 히브리 사람을 도우려다가 거부당했고, 이집트에서 달아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에서는 여자들을 도운 일이 한 가정의 식탁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관계를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낯선 사람을 집으로 받아들이는 첫 행동이 됩니다.

이어 모세는 그 사람과 함께 살기로 하고, 르우엘은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아내로 줍니다.

모세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해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나그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름

십보라가 아들을 낳자 모세는 아이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는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22 · 본디새김

모세는 아들을 낳았고, 가정을 이루었고, 미디안에서 살 곳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이 낯선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낯선 땅에 거주하는 나그네로 소개했습니다(창세기 23:4). 야곱 역시 자신의 삶을 나그네로 지낸 세월로 표현했습니다(창세기 47:9).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고, 종살이를 하며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5:13).

이스라엘은 이집트 안에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모세는 이집트 밖에서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백성의 처지와 모세의 처지는 서로 다르지만, 두 이야기에는 자기 삶의 자리를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디안의 생활은 모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이스라엘의 종살이를 끝내 주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에서는 딸들의 아버지가 르우엘이라고 불리지만, 출애굽기 3:1에서는 모세의 장인이 이드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두 이름을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이름이나 호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두 인물을 한 집안의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려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이 죽었으나 종살이는 끝나지 않았다

출애굽기 2:23 본문 →

모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백성에게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22절과 23절 사이에도 긴 시간이 흐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이집트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종살이 때문에 신음하며 부르짖었다. 그들이 종살이 때문에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 올라갔다.출애굽기 2:23 · 본디새김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죽이려 했던 왕이 죽었으므로 그를 위협했던 상황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왕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줄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억압은 한 왕의 개인적인 악의만으로 유지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죽은 뒤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통치가 끝났다고 해서 그 아래에서 만들어진 억압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본문은 다시 모세 개인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시선을 돌립니다.

앞선 장면들은 한 아이의 생존, 한 사람의 행동, 한 가족의 형성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독자는 여전히 이집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모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정교한 기도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살이 때문에 신음하고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통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셨고, 기억하셨고, 보셨고, 아셨다

출애굽기 2:24–25 본문 →

이야기를 완전히 바꾸는 네 가지 동사

출애굽기 2장의 마지막 두 절은 매우 짧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을 들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기 언약을 기억했다.출애굽기 2:24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보았다. 하나님은 알았다.출애굽기 2:25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네 가지 동사가 이어집니다.

듣다, 기억하다, 보다, 알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은 각 문장에서 ‘하나님’이라는 주어를 반복합니다. 앞서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오던 서술이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께 집중됩니다.

듣다 — 고통이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지 않다

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올라갔다고 말했습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을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고통받는 백성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위로 올라갑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특별히 의로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충분한 믿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살이 때문에 신음하는 백성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기억하다 — 잊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는 뜻인가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말을 보통 잊어버린 것을 다시 떠올리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종종 그분이 맺으신 관계나 약속을 따라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 안의 생물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바람이 땅 위에 불게 하시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0:22에서는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다고 말한 다음,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임신하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도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그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 사이에 여전히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창세기 15:5–7, 17:7–8). 그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졌습니다(창세기 26:3–4, 28:13–15).

특히 아브라함에게는 후손들이 낯선 땅에서 종살이하고 괴롭힘을 당할 것이지만, 그들을 억압하는 민족을 심판하신 뒤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5:13–14). 그러므로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출애굽기 이야기를 창세기의 약속과 다시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은 하나님이 약속을 잊으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 모세가 본 것을 하나님도 보신다

11절에서 모세는 자기 형제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2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니다.

모세는 보았지만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고통은 실제였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첫 행동은 살인과 도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셨다는 말은 아직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알다 — 무엇을 아셨는가

「하나님은 알았다」. 아주 짧고, 이상할 만큼 열린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아셨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앞 문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처지를 아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언약 백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상황을 돌아보셨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일반적인 신학적 선언으로만 읽으면, 본문이 놓인 자리를 지나치기 쉽습니다. 여기서 ‘알다’는 말은 바로 앞에 놓인 이스라엘의 신음, 하나님이 기억하신 언약, 하나님이 보신 백성과 이어집니다.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7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아픔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장의 마지막 문장들은 앞으로 이어질 그 말씀의 문을 열어 놓습니다.

하지만 2장 자체는 여기서 멈춥니다.

하나님은 아직 모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번역에서도 이 대목의 본문을 읽는 방식에 차이가 나타납니다. 칠십인역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지셨다는 방향으로 표현하고, 라틴어 불가타역은 그들을 아셨다는 의미로 옮깁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 자체는 ‘알다’ 뒤에 목적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이 「하나님은 알았다」라고 옮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름과 물,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침묵

출애굽기 2:1–25 본문 →

첫 번째 이름은 구원받은 경험을 기억합니다. 두 번째 이름은 낯선 땅에 머물러야 하는 처지를 기억합니다. 두 이름 사이에는 모세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준비를 마쳤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알고 계시다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구원의 중심에는 모세라는 뛰어난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관심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장에서 생명을 지킨 사람들은 실제로 행동했습니다. 어머니는 바구니를 만들었고, 누나는 도움을 구했으며, 파라오의 딸은 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스라엘 전체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 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아직 어떤 구원의 길도 펼쳐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처음의 바구니와 마지막의 부르짖음을 함께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한 아이는 나일강 가의 갈대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의 누나는 멀찍이 서서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누나도, 곁에서 그들을 건져 줄 공주도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보았다. 하나님은 알았다.」

무엇이 언제 일어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은 긴 세월의 신음소리와, 그 신음을 들으시고 백성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