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이집트의 종살이
꺼지지 않는 불꽃과 함께하겠다는 이름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꽃이 아니라 가시덤불이었습니다. 불은 타오르는데 덤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광경이 모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양 떼를 몰고 가던 그는 방향을 돌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불꽃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장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불에 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일까요? 아니면 그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아신다는 사실일까요?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과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면서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모세를 그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모세가 보려고 방향을 돌렸을 때
특별한 일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3장은 모세가 양과 염소 떼를 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자기 장인인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과 염소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그 떼를 광야 저편으로 몰고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출애굽기 3:1 · 본디새김
모세가 이곳에 온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양 떼에게 먹일 것을 찾아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아직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술자는 이미 그곳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가시덤불 한가운데서 솟는 불꽃 속에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가시덤불이 불에 타고 있었지만 그 가시덤불은 타 없어지지 않았다.출애굽기 3:2 · 본디새김
바로 그것 때문에 모세가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모세의 움직임이었다
모세가 말했다. 「좀 방향을 돌려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어째서 가시덤불이 타 없어지지 않는 걸까?」출애굽기 3:3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그가 보려고 방향을 돌려 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가시덤불 한가운데서 그를 불러 말했다. 「모세야, 모세야.」 그가 말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출애굽기 3:4 · 본디새김
이 두 문장은 서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모세가 보려고 방향을 돌립니다. 그러자 여호와야훼는 모세가 방향을 돌리는 것을 보십니다.
모세는 불을 보려고 다가갔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에게 가시덤불은 풀어 보고 싶은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를 살피려는 순간,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의 대답은 그가 아직 부르신 분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부름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바로 모세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
하나님이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출애굽기 3:5 · 본디새김
모세는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단순히 신기한 현상을 구경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 장소가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평범한 광야의 한 장소를 거룩한 만남의 자리로 만듭니다.
신을 벗는 명령은 그 장소에 함부로 들어서지 말라는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상 속으로 가까이 오셨지만, 모세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낯선 광야에서 들려오는 조상들의 이름
또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가 두려워 자기 얼굴을 가렸다.출애굽기 3:6 · 본디새김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떠났고, 미디안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모세 개인의 현재 생활뿐 아니라 그가 속한 조상들의 역사까지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아직 듣지 못한 사명이 이미 그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모세는 더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불타는 가시덤불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단순히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룩하시기에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백성에게 자신이 가까이 가시겠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호렙과 시내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출애굽기 19:1–3; 신명기 5:2).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이야기에서 이 산이 차지할 역할은 분명합니다. 가시덤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억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덤불과 억압 속에서도 번성하는 이스라엘 사이에는 인상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가시덤불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해석은 이야기 전체에서 얻을 수 있는 상징적 읽기이지, 본문이 직접 밝힌 의미는 아닙니다. 2절에서 처음 등장한 분은 ‘여호와야훼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한 뒤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방식은 창세기 16장과 22장에서도 나타납니다. 본문은 사자와 하나님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야훼의 사자를 통해 나타난 현현을 이야기하다가, 가시덤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을 하나님 자신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모세가 만나는 분이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사자의 정체에 관한 후대의 신학적 설명을 본문에 곧바로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내려왔다」 — 하나님이 보신 고통
모세의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고통에서 출발한다
7절은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밝힙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을 부려 일시키는 자들 때문에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안다.」출애굽기 3: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출애굽기 2장의 마지막 두 절에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서술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그들을 보시고 아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그 사실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은 막연한 불행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억압하고 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고통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구원은 단순히 이집트를 떠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이집트의 손에서 구해 내려고, 또 그 땅에서 좋고 넓은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이끌어 올리려고 내려왔다.」출애굽기 3:8 · 본디새김
하나님의 계획은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첫 번째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두 번째는 해방 이후의 삶을 위한 약속입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노동의 짐을 지고 살던 이스라엘에게 넓은 땅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면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풍성한 생산물과 먹을거리가 있는 땅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젖은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꿀은 땅의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땅은 사람이 없는 빈 땅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장은 그 땅의 주민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만으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의 모든 윤리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려오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라고 하신다
「이제 가거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겠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출애굽기 3:10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이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과 모세를 보내심이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이루는 이야기 속에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권력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위험한 명령입니다. 그는 이미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장인의 양 떼를 치던 사람입니다. 이집트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었고, 미디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누구이기에」 — 모세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하나님은 모세의 자격을 설명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말했다. 「제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제가 누구이기에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출애굽기 3:11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파라오에게 가는 일입니다. 모세는 그 왕권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이제 그 권력 앞에 다시 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모세는 이전에 자기 형제들을 위해 나섰지만, 한 히브리 사람에게서 「누가 너를 우리 위에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출애굽기 2:14). 이제 하나님이 그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제기되었던 권위의 문제가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출애굽기 3:12 · 본디새김
하나님은 모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왕실에서 자랐으므로 이집트의 사정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미디안에서 목자로 지낸 경험이 앞으로 유용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모세의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입니다.
모세를 보내시는 분이 누구신가가, 모세 자신이 누구인가보다 먼저 제시됩니다.
일이 끝난 뒤에 확인할 수 있는 표징
보통 표징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일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 바로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해석이 갈립니다. 현재 눈앞에 있는 불타는 가시덤불이나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 산에서의 섬김을 표징으로 보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문장의 흐름에서 미래의 섬김이 중요하게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파라오를 위해 노동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물론 두 섬김은 같은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는 사람을 억압하는 강제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예배와 섬김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를 섬기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이미 그 산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그곳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을 모두 보여 주시지 않고, 그들이 마침내 어디에 서게 될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있을 대로 있겠다」 — 하나님의 이름
모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름인가, 권위인가
모세는 다시 질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말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여러분 조상들의 하나님이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제게 『그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출애굽기 3:13 · 본디새김
모세는 앞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본문에서 이름은 누군가를 구별하는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름을 묻는 것은 보내신 분이 어떤 분이며, 누구의 권위로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모세는 자기 권위로 그들을 이끌 수 없습니다. 앞서 자기 형제에게 권위를 의심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수행할 사명과 직접 관련됩니다.
에흐예 — 있다, 있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있을 대로 있겠다.」 또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에흐예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출애굽기 3:14 · 본디새김
모세에게 하나님은 먼저 자신이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분의 이름을 묻자 같은 동사를 반복하여 자신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받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앞으로 모세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나는 언제나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함께하겠다’라는 뜻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가 있을 대로 있겠다」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받지 않으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을 인간의 이해 속에 가두는 설명이 아니라, 앞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신뢰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에흐예와 여호와야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여러분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야훼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내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나를 기억할 이름이다.」출애굽기 3:15 · 본디새김
14절에는 ‘에흐예’가 나오고, 15절에는 ‘여호와야훼’가 나옵니다. 에흐예는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키며 사용하신 1인칭 형태입니다.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를 이름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단순히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속성으로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아무도 알 수 없는 낯선 존재로만 남아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조상들과 관계를 맺으셨고 약속을 주셨던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통해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약속하셨던 바로 그분임을 알게 됩니다.
이름은 잊지 않도록 주어진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정확하게 보존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고,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를 기억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일을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함께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이름은 모세만 알고 있을 비밀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달되어야 할 말씀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에흐예(הָיָה) 아셰르 에흐예입니다. 에흐예는 ‘있다’,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의 1인칭 단수 형태입니다. 문맥에 따라 현재의 존재나 지속, 미래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아셰르는 앞뒤 표현을 연결하는 관계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전통적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방향으로도 이해되었고, ‘나는 내가 있을 자로 있겠다’라는 미래 지향적인 의미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에고 에이미 호 온, 곧 ‘나는 존재하는 이다’라는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반면 본디새김의 「나는 내가 있을 대로 있겠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지닌 미래성과 자기 규정의 의미를 살립니다. 여기서 어느 한 해석만 완전히 옳고 다른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지속성을 강조하는 읽기, 앞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방식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해석 모두 본문에서 생각할 근거가 있습니다. 12절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에 사용된 ‘있겠다’가 바로 에흐예입니다. 따라서 14절의 이름 선언은 12절의 약속과 같은 동사로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יְהֹוָה)라는 이름과 ‘있다·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이에는 언어적 연관이 있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정확한 역사적 형성과 원래의 문법적 의미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가 반드시 ‘그는 존재하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단정하거나, 특정한 하나의 문법적 풀이만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목소리가 되다
모세 혼자가 아니라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여러분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야훼가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도,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행해진 일도 분명히 살폈다.」』」출애굽기 3:16 · 본디새김
장로들은 공동체를 대표하고 의사를 나누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장로들의 조직과 권한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모세가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서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 그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먼저 장로들과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네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이집트 왕에게 가거라. 너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저희를 만나셨습니다. 이제 부디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제물을 잡아 바치게 해 주십시오.』」출애굽기 3:18 · 본디새김
그는 이전에 한 히브리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의심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자신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있을지 염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로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살피신 것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16절의 「분명히 살폈다」는 말은 창세기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의 말과 연결됩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세기 50:24–25).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신다’는 표현에 같은 어근의 강조 구문이 사용됩니다.
요셉은 죽으면서 하나님이 자기 후손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백성을 분명히 살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에 남겨진 기대가 출애굽기의 새로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만 보시고 그들이 겪은 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당한 고통까지 함께 살피십니다.
왜 사흘 길을 가겠다고 말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최종 계획은 이집트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파라오에게 제시되는 요구는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두 말은 범위가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려면 파라오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노동과 시간을 자기 소유인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구는 종교적 활동을 위한 잠깐의 휴가 요청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삶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라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사흘 길을 가겠다는 요청을 처음부터 파라오를 속이기 위한 계략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사흘 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요청을 거짓말로 사용하라고 지시하셨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 요청이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이집트 탈출 계획을 모두 공개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우선 파라오에게 제시할 구체적인 요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해석자는 이 첫 요구와 최종적인 해방 약속의 차이를 인정하되, 본문이 밝히지 않은 의도까지 확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파라오의 손과 하나님의 손
하나님은 왕의 거절을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세와 장로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뒤,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강한 손이 아니고서는 이집트 왕이 너희를 가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출애굽기 3:19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 거절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모세를 보내십니다.
사람을 붙잡은 손보다 강한 손
「내가 내 손을 뻗어 이집트 한가운데서 행할 나의 모든 놀라운 일로 이집트를 치겠다. 그러고 나면 그가 너희를 보내 줄 것이다.」출애굽기 3:20 · 본디새김
앞서 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구해 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 설명하시면서 자신의 손을 뻗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손’은 힘과 권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자기 통제 아래 붙들어 두려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 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모세와 장로들은 왕에게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파라오의 선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예상 밖의 약속을 덧붙이십니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 백성에게 호의를 품게 하겠다. 너희가 떠날 때에 너희는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출애굽기 3:2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을 해 왔습니다. 자기들의 노동으로 이집트의 도시와 물자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떠날 때에는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창세기 15:14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종살이한 뒤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출애굽기의 구체적인 계획 속에 등장합니다.
「여자들은 저마다 자기 이웃 여자와 자기 집에 머무는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달라고 할 것이다.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아들들과 딸들의 몸에 걸쳐 줄 것이다. 이렇게 너희는 이집트를 약탈할 것이다.」출애굽기 3:2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억압받던 사람들이 억압하던 나라를 떠날 때 재물을 가지고 나오는 역전을 강조합니다. 정복한 쪽이 재물을 가져가는 전쟁의 언어가, 여기서는 종살이하던 백성이 떠나는 사건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이집트 가정을 습격하여 재산을 강탈한다는 뜻인지도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먼저 제시되는 행동은 여자들이 이웃 여자들과 집에 머무는 여자들에게 물건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 결과 재물이 이스라엘에게 넘어가는 상황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2:35–36에서는 실제로 이스라엘이 물건을 요구하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 요구에 응하는 일이 기록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신명기 15:12–15에서는 동족 종을 자유롭게 놓아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명령하며, 그 이유로 이스라엘 자신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과거의 해방 경험이 장차 다른 사람을 해방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 마지막에 아들들과 딸들이 등장하는가
이집트의 억압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위협했습니다. 사내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약속하시는 미래에는 아들들과 딸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부모가 지켜야 할 위험에 처한 존재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집트를 떠나면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몸에 걸칠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가 억압자의 통제 아래 머물지 않고 그 땅을 떠나게 된다는 그림입니다.
더구나 이 장면에서도 여자들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요구하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걸쳐 줍니다. 출애굽의 미래는 왕과 지도자들만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이웃 사이의 관계에서도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강한 손’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웨로 베야드 하자카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강한 손으로도 아니다’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이것을 ‘강한 손이 아니고서는’이라는 조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뻗으시어 이집트를 치신 뒤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보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강한 손으로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라는 방향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왕의 완강한 저항을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칠십인역은 ‘강한 손이 아니고서는’이라는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 자체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남습니다. 22절의 마지막에 사용된 말은 분명히 ‘약탈하다’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불편함을 피하려고 ‘약탈’이라는 말을 단순히 ‘선물을 받다’로 완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스라엘이 일한 모든 시간에 대한 정확한 임금을 계산하여 지급받는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임금의 액수나 보상 계산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맨발로 선 모세와 떠날 준비를 하는 아이들
처음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고 왜 타 없어지지 않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 이르면 그가 알아야 할 것은 가시덤불의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누군가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부르심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안에서 주어진 사건입니다.
이 장의 처음에는 한 사람이 신을 벗고 거룩한 땅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한 민족의 자녀들이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몸에 걸치고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놓여 있습니다.
두 장면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멉니다.
모세는 아직 파라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 지금 손에 쥐어진 것은 이스라엘을 구할 군대도, 파라오를 굴복시킬 정치적 권력도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그 약속이 주어진 장소는 왕궁도, 사람이 모인 광장도 아닙니다. 광야의 가시덤불 앞입니다.
불꽃은 타오르고 있지만 가시덤불은 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앞에서 신을 벗고 서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는 아직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셨습니다. 「나는 내가 있을 대로 있겠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