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고레스의 명령과 귀환
성전의 물건들이 돌아오다
에스라서는 뜻밖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책의 이름이 된 에스라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장면도 없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무너진 고향을 바라보는 장면도 없습니다. 대신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 선포되고, 몇몇 사람이 길을 떠날 준비를 하며, 마지막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의 목록이 길게 이어집니다.
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책이 성전의 기물들을 세는 것으로 첫 장을 마칠까요?
이 장은 아직 성전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페르시아 왕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고레스의 원년,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일하심
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에, 예레미야의 입으로 나온 여호와야훼의 말이 이루어지도록 여호와야훼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일깨웠다. 고레스는 자기 왕국 전역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글로도 알렸다.에스라 1:1 · 본디새김
역사적으로 에스라서의 시작은 기원전 538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했고, 유다를 지배하던 제국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다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다윗 왕조의 통치도 중단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유다의 역사는 더 강한 제국들의 결정에 좌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역사를 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인 고레스조차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는 무엇을 이루시려는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지배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정해진 때가 지나면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다시 돌보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25:11–12; 29:10). 특히 예레미야 29:10은 바벨론의 칠십 년이 차면 여호와야훼가 백성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라서의 서술자는 고레스의 통치와 칙령을, 이미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야훼의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역대하 36:22–23을 읽으면 에스라 1:1–3과 거의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역대기는 고레스의 칙령으로 끝나고, 에스라서는 바로 그 칙령으로 시작합니다.
역대하의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백성의 유배를 이야기합니다. 그 역사는 왕들과 백성의 반복된 불순종, 예언자들의 경고를 거부한 결과로 설명됩니다(역대하 36:14–21). 그런데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이는 그 역사 끝에 고레스의 선포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사라진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왕을 통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칠십 년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부터 고레스의 칙령까지 정확히 이어지는 기간으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기원전 587/586년의 성전 파괴에서 기원전 538년 무렵까지는 칠십 년이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5장은 바벨론의 지배와 그 종말을, 29장은 유배민들을 향한 귀환의 약속을 다루고 있으므로, 예언의 시간적 범위를 성전 파괴 이후의 기간에만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 한 성전을 말하다
고레스가 선포한 칙령에는 흥미로운 대조가 들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땅의 모든 왕국을 나에게 주었고, 그가 나에게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기를 위한 집을 지을 일을 맡겼다.」에스라 1:2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에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신으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고레스가 자신의 왕권을 그분에게서 받았다고 말할 만큼 모든 왕국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곳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입니다.
제국의 관점에서는 수많은 속주 가운데 하나일 뿐인 유다가,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중심 무대가 됩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야훼를 믿는 사람이 되었을까?
고레스의 말은 마치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고레스의 개인적인 신앙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을 기록한 고대 왕실 비문인 ‘고레스 원통’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고레스를 선택하고 그에게 왕권을 주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또한 고레스가 여러 지역의 신상과 신전들을 회복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비문이 에스라 1장의 예루살렘 관련 칙령 자체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레스가 바벨론과 메소포타미아 일부 도시의 신상과 성소 복구를 자신의 통치 업적으로 내세웠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고레스의 칙령을 곧바로 그가 다른 신들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야훼만을 섬기게 되었다는 증거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사야 45:1–5도 비슷한 긴장을 보여줍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고레스를 자신의 일을 수행하도록 세운 인물로 부르시면서도, 고레스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레스가 여호와야훼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보다, 여호와야훼가 고레스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고레스에게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서의 서술자는 그 역사적 행동이 여호와야훼의 약속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설명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올라가라 — 3절
「너희 가운데 그의 온 백성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든,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을 지어라.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이다.」에스라 1:3 · 본디새김
물론 실제 귀환자들에게는 거주할 곳과 먹을거리, 안전한 생활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에스라 2장에서도 이들이 각자의 성읍에 정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장의 칙령은 그러한 생활의 회복보다 예배 장소의 회복을 앞세웁니다.
그들은 다시 독립 왕국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살아가는 백성이지만,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를 드러내는 중심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유배 이전 남유다의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칙령에서, 하나님은 단지 ‘유다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리십니다. 이 호칭은 칙령이 귀환할 백성을 역사적으로 여호와야훼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과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문장 구조상 예루살렘에 있는 분을 하나님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집’과 연결하여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2절에서는 하늘의 하나님으로 불리십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분을 예배하는 집이 다시 세워질 장소입니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 4절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구든 어디에 머물러 살든, 그곳 사람들은 은과 금과 재물과 가축으로 그를 도와주어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해 자원해서 바치는 예물도 함께 주어라.」에스라 1:4 · 본디새김
이 대목에서 「남아 있는 사람」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다소 열려 있습니다. 각 지역에 흩어져 남아 있는 유배민을 뜻할 수 있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귀환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면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이동하려면 물자와 가축이 필요합니다. 건축을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이처럼 매우 현실적인 준비가 포함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은과 금과 옷을 받아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출애굽기 12:35–36). 에스라 1장에서도 유배지에 머물던 백성이 은과 금과 재물을 지원받아 떠납니다.
두 사건의 역사적 상황은 다릅니다. 출애굽은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고, 에스라의 귀환은 페르시아 왕의 허락과 지원 아래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고레스의 귀환 칙령을 새로운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게 합니다. 다만 그 연결은 두 사건이 완전히 같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인도하시는 행동의 반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예수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연결하여 말씀하시고(요한복음 2:19–21),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세워지는 공동체를 말합니다(에베소서 2:21–22). 이것은 에스라 1장에 대한 직접 인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성전 주제가 신약에서 발전하는 방식입니다. 에스라 1장 자체의 관심은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실제적인 재건에 있습니다.
왕의 마음에서 백성의 마음으로
칙령이 끝나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뀝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가문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곧 하나님이 그 마음을 일깨운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집을 지으러 올라가려고 일어났다.에스라 1:5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고레스의 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돌아갈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두 곳에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
고레스의 마음이 움직이자 칙령이 나왔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움직이자 실제로 일어서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움직임은 돌아갈 길을 열고, 두 번째 움직임은 그 길을 걷게 합니다.
유배지에서 여러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은 조상들의 고향이었지만, 그곳의 실상은 폐허와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이미 바벨론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환이 허락되었다고 해서 누구나 당연히 길을 떠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누가 어떤 고민 끝에 귀환을 결정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일어난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마음을 일깨우신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일깨우시고, 사람들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단이 하나의 문장 안에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들 주변의 모든 사람은 자원해서 바친 모든 것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재물과 가축과 귀한 물품으로 그들에게 힘을 보탰다.에스라 1:6 · 본디새김
여기서 「힘을 보탰다」(חָזַק)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그들의 손을 강하게 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5절의 사람들은 일어나고, 6절의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그 일을 지원합니다. 물론 본문은 이들 모두가 동일한 신앙적 동기로 행동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행동이 함께 모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이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은 한 사람의 영웅적인 결단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움직임과 도움을 통해 준비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전에서 꺼낸 그릇들
이제 귀환자들의 준비가 끝났으니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갑자기 성전 기물들에 주목합니다.
고레스 왕은 여호와야훼의 집에 속한 기물들을 꺼냈다. 그것들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자기 신의 집에 두었던 것들이었다.에스라 1:7 · 본디새김
그 사이에는 예루살렘의 패배, 성전의 파괴, 유다 백성의 유배라는 오랜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열왕기하 24:13과 25:13–17은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과 기물들을 빼앗아 간 사실을 기록합니다. 당시 성전 기물들은 단순한 귀중품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예배를 위해 구별된 물건들이었고, 바벨론이 이것들을 가져간 것은 성전의 기능이 중단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정복자가 다른 나라 신전의 물건들을 빼앗아 자기 신의 신전에 두는 일은 정치적 승리의 종교적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이것들은 정복의 전리품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신전에 놓여 있던 기간에도 이 물건들의 소속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가 중단되었지만, 하나님께 속했던 것들의 역사가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예레미야 27:21–22와 연결하면 이 장면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에 남아 있던 기물들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지겠지만, 여호와야훼가 그것들을 돌보실 때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눈에 보이는 물건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드르닷과 세스바살 — 8절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재무관 미드르닷의 손을 거쳐 그것들을 꺼내어, 유다의 지도자 세스바살에게 세어 넘겼다.에스라 1:8 · 본디새김
성전 기물들은 아무렇게나 모아 운송한 물품이 아닙니다. 수량을 확인하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맡겨 넘길 대상입니다.
신학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행정적 절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물건들이 이제 바벨론의 보관 장소를 떠나 유다 사람의 손에 맡겨집니다.
왜 그릇의 수를 이렇게 자세히 기록할까? — 9–11절
9–10절에는 금 대야, 은 대야, 칼, 금 대접, 은 대접, 그 밖의 기물들이 하나하나 기록됩니다.
이 목록은 처음 읽기에 무미건조합니다. 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다가 갑자기 회계 장부처럼 변한 듯합니다.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추상적인 상실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건물은 무너졌고, 기물들은 옮겨졌으며, 예배의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회복도 추상적인 말로 끝날 수 없습니다.
기물 하나하나를 세는 기록은 과거의 상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하면서, 이제 그 물건들이 되돌아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성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실무적인 기록이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의 이전 역사와 앞으로 다시 시작될 예배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금과 은으로 된 기물은 모두 오천사백 개였다. 유배민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세스바살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올라갔다.에스라 1:11 · 본디새김
3절에서는 고레스가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는 그들이 올라가려고 일어났습니다. 11절에서는 실제로 유배민들이 올라갈 때 세스바살이 기물들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명령에서 준비로, 준비에서 이동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조금 더 깊이
세스바살의 정확한 신원은 이 장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스라 5:14–16에서는 고레스가 임명한 유다 총독으로 회고되며, 성전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언급됩니다. 한편 에스라 3장에서는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이끄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두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지도자들이었는지는 에스라서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스바살을 곧바로 스룹바벨의 다른 이름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9–10절에 기록된 품목별 수를 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0 + 1,000 + 29 + 30 + 410 + 1,000 = 2,499개. 그런데 11절의 총계는 5,400개입니다. 이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목록이 일부 품목만 기록했을 가능성이나 숫자 전승 과정의 변화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 주어진 본문만으로 어느 설명이 옳은지 결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숫자를 임의로 고치거나, 기록되지 않은 물건 2,901개가 있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세워지지 않은 집을 향하여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다시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이제 정치적인 칙령을 지나 사람들의 결단에 이르고, 마침내 실제로 운반할 수 있는 물건들의 형태를 띱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에스라서의 후반부를 향해 읽어가면 성전 건축이 방해를 받고, 공동체 내부에도 여러 문제가 드러납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기물들이 바벨론의 보관 장소에서 꺼내지고, 하나씩 수를 확인한 뒤 세스바살에게 넘겨집니다. 그것들은 성전에서 빼앗긴 물건들입니다.
이제 그 물건들을 가지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아직 성전은 없습니다. 제사도 다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 그릇들이 놓일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때 바벨론으로 옮겨졌던 것들이 이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에스라 1장은 무너진 집이 다시 세워진 장면이 아니라, 그 집에 속했던 것들이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