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하나님이 세상에 자리를 마련하시다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우리는 흔히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묻습니다. 빛은 언제 생겼는가? 해보다 식물이 먼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창조의 여섯 날은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
아무것도 자리 잡지 못하고 생명이 살 수 없던 세계가 어떻게 질서와 생명으로 가득한 세계가 되었는가?
그 변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행동은 놀랍도록 차분합니다. 하나님은 무엇과 싸워 이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갈라놓으시고, 이름을 붙이시고, 생명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이 장의 끝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서 인간은 무엇을 하도록 세워지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내리신 마지막 판단, 「매우 좋았다」는 말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창조의 여섯 날은 단순한 사건 목록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문장들 속에 뚜렷한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 날(빛과 어둠, 낮과 밤을 구분)은 넷째 날(광명체, 낮과 밤을 다스림)과, 둘째 날(위의 물과 아래의 물, 하늘의 공간을 구분)은 다섯째 날(날짐승과 물속 생물, 하늘과 물에 번성)과, 셋째 날(땅과 바다와 초목, 마른 땅을 드러내고 식물을 냄)은 여섯째 날(땅의 생물과 사람, 땅에 생명이 살고 사람이 다스림)과 짝을 이룹니다. 첫째~셋째 날과 넷째~여섯째 날 사이에 나타나는 문학적 대응입니다. 각 날의 내용이 완전히 대칭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대응은 창조의 두 가지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살아갈 질서를 마련하시고, 그 질서 안에 생명을 가득 채우십니다.
또한 창조 이야기는 실제로 1장 끝에서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2:1–3에는 일곱째 날,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시며 그날을 복되게 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점은 여섯 날의 일들이 궁극적으로 끝없이 일하는 세계가 아니라 완성된 세계를 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완성에 이르기 전에, 본문은 아무런 질서도 갖추지 못한 처음의 땅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처음의 세계 — 어둠과 깊은 물 위에서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세기 1:1 · 본디새김
성경의 첫 문장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왜 세상을 만들기로 하셨는지,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두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양 끝을 함께 말함으로써 그 사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첫 문장은 이야기의 시선을 세계 전체로 넓힙니다.
땅은 형체가 없고 텅 비어 있었다. 어둠은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를 맴돌고 있었다.창세기 1:2 · 본디새김
뒤따르는 창조 이야기에서 땅은 구분된 공간을 얻고, 식물을 내고, 생명으로 채워집니다. 그런 다음의 모습과 비교하면 첫머리의 땅은 아직 생명이 살아갈 질서와 충만함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의 어둠과 깊은 물을 악하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그것들이 어둡고 깊고 구분되지 않았다고 말할 뿐, 악한 신이나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뒤에 어둠은 「밤」이라는 이름을 얻고, 모인 물은 「바다」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아직 빛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땅은 비어 있고 깊은 물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상황 밖에서 뒤늦게 나타나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첫 창조의 말씀이 들리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은 이미 물 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단어 베레시트를 독립된 시간 표현으로 이해하면 본디새김처럼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가 됩니다. 반면 뒤의 동사와 연결하여 읽으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시간절이 되고, 2절은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게 됩니다. 히브리어의 문법과 고대의 독법을 두고 논의가 있지만, 어느 한 구절의 문법만으로 창조 이전의 물질이 있었는지, 하나님이 무에서 창조하셨는지를 모두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문맥에 따라 영, 바람, 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읽는 길 외에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바람으로 읽는 길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맴돌고 있었다」(רָחַף)에 해당하는 동사는 신명기 32:11에서 독수리가 새끼들 위를 날며 맴도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창세기 1:2가 하나님의 영을 새의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 45:18도 창조의 뜻을 새롭게 비춥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시고 견고하게 세우신 분으로 소개되며,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도록 지으셨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첫째 날 — 빛보다 먼저 주목할 것은 구분이다
하나님이 말했다. 「빛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다.창세기 1:3 · 본디새김
「생겨라」와 「생겼다」가 서로 맞물립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는 어떤 저항이나 시행착오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부여된 권위입니다.
그런데 빛이 생겼다고 첫째 날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갈라놓았다.창세기 1:4 · 본디새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불렀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저녁이 되었고 아침이 되었다. 하루였다.창세기 1:5 · 본디새김
빛을 만드는 것과 낮을 만드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빛은 생겨난 것이지만, 낮은 빛이 어둠과 구분되면서 이름을 얻은 시간입니다. 창조는 어떤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존재가 세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도 정합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어둠도 이름을 얻습니다. 어둠 자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관계를 정돈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해와 달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넷째 날에 만들어집니다. 본문은 해가 없어도 빛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순서는 뒤에 등장하는 광명체들이 빛의 궁극적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세우신 낮과 밤의 질서 안에서 역할을 맡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문학적 효과를 냅니다.
처음에는 형체 없는 땅과 깊은 물이 있었지만, 이제 그 세계에는 첫 번째 날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이곳만 「첫째」라는 서수가 아니라 「하나」(אֶחָד)라는 기수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낮과 밤을 구분하신 뒤 처음으로 하나의 날이 세어집니다. 「저녁이 되었고 아침이 되었다」는 표현이 하루의 시작점을 어디에 두는지, 여기서 말하는 날이 현대의 24시간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여섯 번 반복되어 창조의 각 장면을 구분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1:1–3이 창세기의 시작을 의식적으로 되울리며 창조를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그 언어와 주제를 활용한 신학적 전개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자체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에 질서와 생명을 가져오는 모습을 충분히 보아야 합니다.
둘째 날 — 갈라놓음으로 공간을 만들다
첫째 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구분하셨다면, 둘째 날에는 물과 물 사이를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물 한가운데에 펼쳐진 막이 생겨라. 그 막이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기 1:6 · 본디새김
본문이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은 그 역할입니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하며, 하나님이 그것을 「하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는 다른 날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평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라는 문장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둘째 날의 창조물이 좋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날 하나님은 하늘 아래의 물을 모으시고 마른 땅을 드러내십니다. 둘째 날 시작된 물의 구분이 셋째 날에도 이어지는 셈입니다.
첫째 날의 빛과 어둠이 시간의 질서를 만들었다면, 둘째 날의 물과 물 사이에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아래에는 사람이 발을 딛고 살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셋째 날에 그 땅을 드러내십니다.
조금 더 깊이
「펼쳐진 막」에 해당하는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구조물을 가리킵니다. 고대의 하늘 이해와 관련하여 이를 단단한 궁창으로 보는 읽기가 있으며, 단순히 넓게 펼쳐진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읽기도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이 그것의 구체적인 재질과 두께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고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하늘과 물의 공간적 관계를 통해, 어떻게 구분되지 않았던 세계에 질서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째 날 — 땅이 드러나고, 땅이 생명을 내다
하나님이 말했다. 「하늘 아래의 물이 한곳으로 모여라. 마른 땅이 드러나라.」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9 · 본디새김
하나님이 마른 땅을 땅이라 불렀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불렀다. 하나님이 그것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창세기 1:10 · 본디새김
셋째 날에 일어나는 첫 번째 일은 무엇인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되고, 그에 맞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무질서했던 세계는 점차 알아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땅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른 땅이 있다는 것과 그 땅이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땅은 푸른 초목, 곧 씨를 맺는 풀과 씨가 든 열매를 저마다의 종류대로 맺는 과일나무를 땅 위에 돋게 하여라.」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11 · 본디새김
땅이 푸른 초목, 곧 저마다의 종류대로 씨를 맺는 풀과 저마다의 종류대로 씨가 든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었다. 하나님이 그것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창세기 1:12 · 본디새김
땅은 단순히 식물들이 놓이는 바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을 내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 활동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뒤에 땅의 생물들이 등장하는 여섯째 날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땅을 향해 살아 있는 것들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초목과 나무가 단지 생겨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씨를 맺고, 씨가 든 열매를 맺으며, 저마다의 종류대로 자라난다고 반복합니다.
이 표현은 식물이 자기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첫 번째 풀 한 포기와 첫 번째 나무 한 그루에 그치지 않습니다. 씨를 통해 다음 세대가 자라나는 세계를 만드십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갑니다. 지금까지는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부터는 생명이 어떻게 계속 이어질 수 있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식물에 대한 이런 세심한 서술은 뒤에 인간과 동물에게 먹거리가 주어지는 장면을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아직 땅의 동물과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먹고 살아갈 것을 먼저 마련하십니다.
생명은 준비되지 않은 세계에 내던져지지 않습니다. 땅이 드러나고, 그 땅이 먹거리를 낼 수 있게 된 뒤에 그곳에 살아갈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넷째 날 — 해와 달도 맡은 일이 있다
하나님이 말했다. 「낮과 밤 사이를 갈라놓도록 하늘의 펼쳐진 막에 광명체들이 생겨라. 그것들이 표징과 정해진 때와 날과 해를 위한 것이 되고,」창세기 1:14 · 본디새김
「하늘의 펼쳐진 막에서 땅을 비추는 광명체들이 되어라.」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15 · 본디새김
넷째 날은 첫째 날과 대응하지만, 단순히 빛을 더 많이 만드는 날이 아닙니다.
첫째 날에 이미 빛과 어둠이 구분되었습니다. 넷째 날에는 그 구분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광명체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특정한 때를 구분하는 역할도 합니다. 다만 창세기 1:14가 그 「정해진 때」를 오직 예배 절기로 한정하지는 않습니다.
낮과 밤이라는 구분에서 시작된 시간은 이제 날과 해를 헤아리고 정해진 때를 알아보는 질서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이 큰 광명체 둘, 곧 낮을 다스릴 큰 광명체와 밤을 다스릴 작은 광명체, 그리고 별들을 만들었다.창세기 1:16 · 본디새김
본문은 해와 달을 각각 해와 달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에서는 해와 달이 신격화되거나 신적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이처럼 이름 대신 기능으로 광명체들을 묘사하는 것은 의미 있게 읽힙니다. 해와 달도 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가 의도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피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로 보여 주는 관계는 분명합니다.
해와 달은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게 명령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본문은 이들에게도 「다스리는」 일을 맡깁니다. 큰 광명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광명체는 밤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 인간에게 주어지는 다스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광명체들이 자기보다 먼저 세워진 질서 속에서 다스리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보다 먼저 존재한 세계 안에서 다스리는 권한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광명체들은 그 권한이 창조주에게서 주어진 것임을 먼저 보여 주는 셈입니다.
다섯째 날 — 바다 괴물까지도 복을 받는 세계
다섯째 날에 이르면 창조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빛이 생기고 물이 갈라지며 땅이 드러났습니다. 초목이 자라고 광명체들이 하늘에 놓였습니다.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물은 살아 있는 것들의 떼로 우글거려라. 날짐승은 땅 위로, 하늘의 펼쳐진 막 앞을 가로질러 날아다녀라.」창세기 1:20 · 본디새김
「우글거려라」라는 말은 한두 마리의 생물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생명이 물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그립니다. 비어 있던 세계는 이제 움직이는 생명들로 붐비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괴물들과 물에 떼 지어 우글거리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저마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저마다의 종류대로 창조했다. 하나님이 그것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창세기 1:21 · 본디새김
바다 괴물은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크고 두려운 존재이더라도 창조주의 권한 밖에 있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합니다.
아직 인간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생물들과 하늘의 새들은 사람이 이용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좋다고 보신 창조물입니다.
이어서 이 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복을 주며 말했다. 「번식하고 많아져라. 바다의 물속을 가득 채워라. 날짐승은 땅에서 많아져라.」창세기 1:22 · 본디새김
셋째 날의 식물들은 씨를 통해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움직이는 생물들에게는 번성하라는 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인간 중심으로 읽기 쉽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은 인간이 등장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생명을 기뻐하시고, 그 생명이 풍성해지도록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도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기쁨과 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와 관련된 바다 괴물 이미지가 혼돈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모습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편 74:13에서는 하나님이 바다 괴물들의 머리를 깨뜨리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이사야 27:1에서도 바다의 괴물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묘사됩니다. 이 대목은 당시의 여러 창조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신들과 혼돈 세력 사이의 전투 장면과도 대조됩니다. 창세기 1장은 거대한 바다 짐승을 등장시키면서도 그것을 죽이는 대신 창조된 생물의 자리에 둡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동물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날 —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가
여섯째 날은 셋째 날과 비슷하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땅은 살아 있는 것들을 저마다의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땅의 들짐승을 저마다의 종류대로 내어라.」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24 · 본디새김
셋째 날 하나님이 땅에게 초목을 돋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땅은 식물을 내었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을 향해 살아 있는 것들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등장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집짐승과 온 땅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 · 본디새김
지금까지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향해 생겨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빛이 생기고, 물이 모이고, 땅이 식물을 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투의 변화가 주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창조는 새로운 장면으로 부각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인간의 특별한 능력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이성, 언어, 도덕적 판단, 영적인 교제 능력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그러한 능력들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형상」을 말하면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인간에게 맡겨지는 다스림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어떤 능력이나 성질을 포함하는지 본문만으로 모두 정할 수는 없지만, 그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지위와 인간이 수행할 역할을 분리하지 않은 채 제시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세계를 창조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특별한 권한을 받습니다.
한 사람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했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했다.창세기 1:27 · 본디새김
이 절은 앞뒤의 산문과 달리 세 줄이 서로를 되받는 시적인 구조를 지닙니다. 첫째 줄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줄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서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셋째 줄에서 예상 밖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앞에서는 「그를」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들을」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하나의 집합적 존재로 말하다가 그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본문은 남자에게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고, 여자에게는 그 형상을 간접적으로 나누어 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이룹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8절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향해 번성하고 땅을 채우며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의 권한은 남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는가를 묻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지위나 능력, 성별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다른 사람에게는 더 적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고 말할 근거가 이 절에는 없습니다.
「정복하여라」 — 강한 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했다. 「번식하고 많아져라. 땅을 채우고 그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 · 본디새김
여기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명령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들을 처음부터 「자연을 부드럽게 돌보아라」 정도로 바꾸어 읽는 것은 원문의 힘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실질적인 지배와 통치의 권한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살아갈 공간을 구분하시고, 땅이 먹거리를 내게 하시며, 생물들에게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드신 것들이 좋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인간은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뒤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받은 권한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권한이 아닙니다.
그 권한이 피조물의 무제한적인 파괴까지 허용하는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좋다고 판단하신 세계를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마음대로 대할 권한을 얻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이 긴장은 창세기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계속됩니다. 인간은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받았지만, 자신의 욕망대로 무엇이든 해도 되는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동산과 그 안에서 지켜야 할 명령이 등장합니다(창세기 2:15–17).
창세기 1장의 다스림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하지만, 인간을 창조주와 동일한 위치에 세우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우리」가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회중을 향해 말씀하신 것으로 읽기도 합니다. 열왕기상 22:19이나 욥기 1:6에는 하나님 앞에 하늘의 존재들이 모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자신의 숙고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후대의 기독교 신학에서 이 복수를 삼위일체와 연결해 읽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창세기 1:26의 복수형만으로 삼위일체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27절에서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의 주어와 동사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서술됩니다. 고대의 왕들이 자신의 형상을 세워 통치권이나 왕의 존재를 드러내던 관습은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 본문이 그 관습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모든 의미를 거기에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복하여라」에 해당하는 카바시(כָּבַשׁ)는 다른 문맥에서 땅을 복속시키거나 사람을 지배 아래 두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스려라」에 해당하는 라다(רָדָה)도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사용되는 강한 동사입니다. 시편 8편은 또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자리를 묻습니다. 하늘과 달과 별을 바라보는 시인은 그 광대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돌보시는지 질문합니다(시편 8:3–8). 그러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여섯째 날의 마지막 선물 — 하나님은 먹거리를 주신다
인간을 만드신 뒤 하나님의 첫 말씀은 번성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다음 말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말했다. 「보아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를 맺는 나무 열매가 달린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다. 그것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창세기 1:2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에서 땅과 식물에 대해 길게 설명한 이유를 다시 보게 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단순히 땅을 푸르게 장식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나타날 생명들의 먹거리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먹거리를 주지 않으십니다.
「또 땅의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모든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푸른 풀을 모두 먹거리로 주었다.」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30 · 본디새김
하나님은 살아 있는 것들을 단순히 존재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땅을 마련하시고, 생명이 이어지게 하시며, 먹거리를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먼저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는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자신이 먹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세계에서 옵니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의 권한과 인간의 의존성을 한 장면 안에 함께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인간에게는 씨 맺는 풀과 열매가 주어지고,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이 주어집니다. 이 때문에 이 장을 본래의 창조 세계가 생명을 죽여 먹지 않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해에는 본문의 목록이 뒷받침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29–30절 자체에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명시적인 금지가 나오지 않으므로, 이 두 절만으로 최초의 세계에 어떤 형태의 죽음도 없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는 홍수 이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먹거리로 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창세기 9:3). 이 장면을 1장의 식물성 먹거리 목록과 비교하면, 두 시대의 먹거리에 관한 하나님의 선언이 서로 다르게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매우 좋았다」 — 하나님이 바라보신 것은 전체였다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모든 것을 보니, 매우 좋았다. 저녁이 되었고 아침이 되었다. 여섯째 날이었다.창세기 1:31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그것이 좋다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각각의 창조물이 그때그때 하나님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기가 만든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빛 하나, 나무 하나, 생물 한 종류를 따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이루는 세계를 보십니다.
빛과 어둠이 구분되고, 땅과 바다가 자리를 얻고, 식물이 자라며, 생물들이 번성하고, 인간에게 역할과 먹거리가 주어집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질서와 관계를 이루며 함께 존재하는 세계를 하나님이 바라보십니다.
「매우 좋았다」는 판단은 그 전체를 향합니다.
인간은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평가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좋다고 판단된 빛과 땅과 초목과 생물들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는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그 세계의 질서 안에 새로운 역할을 지닌 존재가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더구나 마지막의 「매우 좋았다」는 판단은 인간의 능력이나 성취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이루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계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창조의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창세기 1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두 사실을 함께 지니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다스릴 권한이 있지만 창조주는 아니며, 다른 생물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특별한 책임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아직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나 감사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막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복과 명령을 받았으며, 먹거리를 선물받았습니다. 인간의 응답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침묵이 의미 있습니다.
창조의 선함은 인간이 올바르게 응답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세상을 만드시고, 먼저 좋다고 보시고, 먼저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은 멈추어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바라보십니다.
빛이 있고 어둠이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있고 마른 땅이 있습니다. 씨 맺는 식물이 자라고, 생물들이 움직이며, 남성과 여성이 그 세계 안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그분의 시선 안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형체가 없고 텅 비어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보십니다. 「매우 좋았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