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한 아이에게 웃음을, 다른 아이에게 물을
창세기 21장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들의 탄생으로 시작합니다. 사라는 마침내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웃음을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잔치 뒤에 또 다른 아들이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스마엘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자라고,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함께 광야를 헤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웃음소리가 다른 아이의 목숨을 염려하는 울음소리로 바뀝니다.
여기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약속의 후손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관심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우물을 두고 다투다가 언약을 맺는 사건입니다. 얼핏 보면 앞의 가족 이야기와 관계없는 부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메마른 땅에서 물을 확보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하갈은 생존을 위한 물을 발견하고, 아브라함은 앞으로 살아갈 땅에서 우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정해진 때에 —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
여호와야훼는 말한 대로 사라를 돌보았다. 여호와야훼는 말한 것을 사라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었다.창세기 21:1 · 본디새김
그런데 성경은 이삭의 출생을 극적인 묘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호와야훼가 하신 일을 두 번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사라를 돌보셨다는 말은 그를 불쌍히 바라보셨다는 감정의 표현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하신 약속을 실제 사건으로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도 사라가 아들을 낳은 때가 「하나님이 그에게 말한 정해진 때」였다고 밝힙니다. 17장 21절에서 하나님은 다음 해 정해진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 14절에서는 내년 이맘때 돌아오겠다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라의 이름도 반복됩니다. 1절에서는 두 번, 2절과 3절에서도 그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마침내 후계자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 자신에게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두려움 때문에 아비멜렉의 집으로 데려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라가 직접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베풉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징입니다(17:10–12). 그러므로 이삭의 할례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었다는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그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백 살입니다.
본문이 그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출생의 특별함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서 아브라함은 백 살 된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때 의문을 품었던 나이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진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웃음을 주셨구나 — 웃음의 의미가 바뀝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웃음 이야기를 거듭 들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17:17). 사라도 늙은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약속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18:12).
사라가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웃음을 주셨구나. 듣는 사람마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창세기 21:6 · 본디새김
처음에 사라에게 웃음은 약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실제로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그의 말은 이삭의 이름을 풀어 주는 동시에, 약속의 성취가 가져온 기쁨을 공동체적인 기쁨으로 확장합니다.
사라가 또 말했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이들에게 젖을 먹입니다』 하고 말했겠는가? 내가 그의 노년에 아들을 낳았으니 말이다.」창세기 21:7 · 본디새김
18장에서 그는 달거리가 끊긴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이제 그 몸으로 아이를 낳고 젖을 먹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추상적인 선언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라의 일상 속에서 아이를 품고 먹이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기쁨에서 다음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에 담긴 웃음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순간, 또 다른 아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축하가 아니라 갈등을 불러옵니다.
또 다른 아들의 웃음 — 기쁨이 상속 문제로 바뀝니다
이삭이 자라 젖을 떼게 되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엽니다.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창세기 21:9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라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곧 이삭과 함께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창세기 21:10 · 본디새김
그는 하갈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이삭은 「내 아들, 곧 이삭」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의 웃음을 보고 실제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요구가 향하는 곳은 명확합니다. 두 아들 사이의 상속 관계를 끊으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반응은 사라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때문에 그 말을 몹시 괴롭게 여겼다.창세기 21:11 · 본디새김
사라에게는 「이 여종의 아들」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들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두 아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이 짧은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 소년과 네 여종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사라가 네게 하는 말을 모두 들어라. 이삭에게서 난 이들이 네 후손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12 · 본디새김
이삭이 약속된 언약 계보를 이어갈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여종의 아들도 내가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그도 네 후손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13 · 본디새김
12절에서 이삭의 후손이 특별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13절에서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명시하십니다. 이것은 혈통과 언약 계승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특별한 약속을 이어 가시지만, 이스마엘의 미래도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으로 확대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실제로 그들이 겪는 위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장면에서 바로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메차헤크(צָחַק)는 앞에서 이삭의 이름과 사라의 웃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 어근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그가 이삭을 조롱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놀거나 즐거워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황과 동사의 용례에 비추어 조롱이나 부적절한 장난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이 떨어진 광야 — 약속을 받은 아들이 죽음 앞에 놓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그는 빵과 물이 든 가죽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엘을 맡겨 내보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이 실제로 받은 것은 빵과 한 부대의 물입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를 헤맵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졌다. 하갈은 아이를 덤불 하나 아래에 내던졌다.창세기 21:15 · 본디새김
「내던졌다」(שָׁלַךְ)라는 표현은 하갈이 아이를 버리고 싶어 했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아이가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고 설명합니다.
하갈은 가서 활을 한 번 쏠 거리만큼 멀리 떨어진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않겠어.」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창세기 21:16 · 본디새김
그러나 그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아이의 맞은편에 앉습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고, 완전히 떠날 수도 없는 거리입니다.
이 장면에는 창세기 16장에서 이미 광야를 경험했던 하갈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때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샘 곁에서 여호와야훼의 사자를 만났습니다(16:6–7).
이번에는 스스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내보내졌습니다.
그때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이제는 태어난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갈은 아들의 생명을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사라에게는 아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함께 웃을 것입니다.
하갈에게는 이미 태어난 아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그는 홀로 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의 시선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6장 16절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여든여섯 살이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는 백 살이었습니다(21:5). 따라서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은 약 열네 살이었으며, 이삭이 젖을 뗀 뒤에 벌어진 이 사건에서는 그보다 더 성장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다만 정확한 나이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와 「소년」이라는 표현을 오늘날의 어린 영아를 가리키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갈이 그를 어떻게 이동시켰는지에 관한 세부적인 장면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내던졌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는 강하게 던지거나 내버려 두는 동사가 사용되지만, 이 행동의 정서적 의미는 이어지는 하갈의 말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 이름에 담긴 약속
하나님이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그녀에게 말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그곳에 있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창세기 21:17 · 본디새김
바로 앞 절에서 목소리를 높여 운 사람은 하갈입니다. 그런데 17절은 하나님이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마엘이 정확히 어떤 소리를 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6장 11절에서 여호와야훼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의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어머니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이제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광야에서 다시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소년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소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언약의 계보를 이어갈 사람으로 선택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물도 없이 광야의 덤불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소년을 들어 올려라. 네 손으로 그를 단단히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18 · 본디새김
하갈은 조금 전 아이를 덤불 아래에 내려놓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감정을 추스르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이미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생명을 다시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그 아이를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자 그녀가 물이 있는 우물을 보았다. 그녀는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우고 소년에게 마시게 했다.창세기 21:19 · 본디새김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갈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갈에게 보였던 것은 죽어 가는 아들과 물이 떨어진 가죽부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여시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물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소년을 살리시지만, 하갈을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가 다시 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길을 여십니다.
이후 이야기는 빠르게 시간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소년과 함께했고 소년은 자랐다. 그는 광야에 살며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창세기 21:20 · 본디새김
8절에서 이삭이 자랐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 이스마엘도 자랐다고 말합니다. 두 아들의 삶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모두 성장합니다. 이어서 어머니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에게 아내를 얻어 줍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가고, 성장하고, 자기 가족을 이루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하나님의 넓은 돌보심은 이 장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다시 찾아옵니다 — 두려움 대신 신뢰를 요구하는 왕
21장 후반부에서는 새로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그 무렵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지휘관 피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창세기 21:22 · 본디새김
이 말은 앞 장의 사건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라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0:11).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아비멜렉은 그 말씀에 따라 사라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기서 나와 내 자손과 내 후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두고 내게 맹세하여라. 내가 네게 호의를 베푼 대로, 너도 나에게, 그리고 네가 나그네로 지낸 이 땅에 호의를 베풀어라.」창세기 21:23 · 본디새김
이전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여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앞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안전이 아닙니다. 자신과 아들, 그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신뢰 관계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아브라함도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친절하게 지내자는 인사보다 무게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충실한 행동을 약속하자는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큰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신뢰를 쌓아 가는 일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그들의 권리를 무시할 특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맹세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문제가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우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아비멜렉에게 따집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그 사실을 몰랐고, 아브라함도 이전에 알려 주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앞 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이 정직을 요구하고, 아브라함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말합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추측이나 속임 대신, 실제로 발생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려 합니다.
그 결과는 언약의 체결로 이어집니다.
우물 하나와 어린 암양 일곱 마리 — 나그네가 살아갈 자리를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양과 염소와 소를 아비멜렉에게 주고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세워 놓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의미를 묻자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제 손에서 받으십시오. 제가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창세기 21:30 · 본디새김
이 행동은 우물에 대한 분쟁을 단순히 말로 끝내지 않고, 양쪽이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표시를 남기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게브와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일이 사람과 가축의 생존에 직접 연결됩니다. 특히 아브라함처럼 가축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사람에게 우물은 단순한 편의 시설이 아닙니다. 계속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직 그 땅의 영구적인 소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현재 그는 다른 사람들의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일상에는 여전히 갈등과 협의가 있습니다. 그는 우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상대방과 언약을 맺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표시를 남깁니다.
이것은 약속을 믿는 삶과 현실의 책임 있는 행동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다.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했기 때문이다.창세기 21:31 · 본디새김
이야기는 어린 암양 일곱 마리와 두 사람의 맹세를 나란히 배치하여 지명에 담긴 말의 울림을 살립니다. 다만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명명의 이유는 두 사람이 맹세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의 우물과 언약의 우물 — 같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보호
하갈은 집에서 쫓겨난 여종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살릴 물조차 찾지 못합니다. 그에게 물은 당장 생명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종들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우물을 팠고, 이제 그 우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에게 물은 앞으로 그 땅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기반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각각의 삶을 돌보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우물을 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서는 직접적인 계시가 아니라 대화와 맹세와 증거를 통해 분쟁이 해결됩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한다고 해서 두 우물이 같은 우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브엘세바라는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물과 관련된 문제를 겪고, 각각 살아갈 길을 얻게 된다는 문학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브엘세바는 우물을 뜻하는 브에르와 ‘일곱’을 뜻하는 셰바가 결합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맹세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도 같은 자음 계열을 공유합니다. 14절에서 하갈은 이미 「브엘세바 광야」를 헤맸다고 기록됩니다. 그런데 31절에서는 그 장소가 브엘세바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서술자가 독자에게 이미 익숙한 지명을 앞에서 사용하고, 뒤에 그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갈이 광야를 헤맸을 때 이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 — 오래 머물지만 여전히 나그네인 사람
아비멜렉과 피골이 떠난 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 한 그루를 심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 한 그루를 심고, 거기서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다.창세기 21:33 · 본디새김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행동과 다릅니다. 나무가 자라고 그늘을 드리우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행동은 아브라함이 그곳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장에는 시간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정해진 때, 아이가 자라는 시간, 다음 세대의 미래, 오랫동안 이어질 언약, 나무가 자라는 시간입니다. 그 모든 시간의 이야기 끝에서 아브라함은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아브라함의 상태를 뜻밖의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지냈다.창세기 21:34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우물을 확보했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으며, 나무까지 심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면서도 아직 그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생애보다 더 긴 시간을 향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자신보다 오래 지속될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부릅니다.
맺음말 —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사이에서
사라의 웃음이 진실한 기쁨이라고 해서 하갈의 울음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언약의 계승자입니다.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해진 때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돌보심은 사람들이 버려졌다고 느끼는 자리에도 미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 한 그루를 심습니다. 그곳은 하갈이 물을 찾아 헤매었던 광야와도 연결되는 땅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기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나무가 자라는 동안 이삭도 자라고, 광야에서는 이스마엘도 자랍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미래는 그들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