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한 아이에게 웃음을, 다른 아이에게 물을
창세기 21장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들의 탄생으로 시작합니다. 사라는 마침내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자신을 웃게 해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잔치 뒤에 또 다른 아들이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스마엘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자라고,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함께 광야를 헤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웃음소리가 다른 아이의 목숨을 염려하는 울음소리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약속의 후손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관심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우물을 두고 다투다가 언약을 맺는 사건입니다. 얼핏 보면 앞의 가족 이야기와 관계없는 부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메마른 땅에서 물을 확보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하갈은 살아남기 위한 물을 발견하고, 아브라함은 앞으로 살아갈 땅에서 우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정해진 때에 —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
여호와야훼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라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창세기 21:1 · 두루새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건이 마침내 일어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사라를 돌보셨다는 말은 그를 불쌍히 바라보셨다는 감정의 표현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하신 약속을 실제 사건으로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도 사라가 아들을 낳은 때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다고 밝힙니다. 17장 21절에서 하나님은 다음 해 정해진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 14절에서는 내년 이맘때 돌아오겠다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라의 이름도 반복됩니다. 1절에서는 두 번, 2절과 3절에서도 그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마침내 뒤를 이을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 자신에게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두려움 때문에 아비멜렉의 집으로 데려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라가 직접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베풉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시입니다(17:10–12). 그러므로 이삭의 할례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었다는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그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100살입니다. 본문이 그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출생의 특별함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서 아브라함은 100살 된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때 의문을 품었던 나이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진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해 주셨구나 — 웃음의 의미가 바뀝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츠하크(יִצְחָק)로, ‘그가 웃는다’라는 뜻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17:17). 사라도 늙은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약속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18:12).
사라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해 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모두 나와 함께 웃겠지.」창세기 21:6 · 두루새김
여기서 달라진 것은 웃음의 이유입니다.
처음에 사라에게 웃음은 약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실제로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그의 말은 이삭의 이름을 풀어 주는 동시에, 약속이 이루어지면서 얻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넓혀 갑니다.
사라가 또 말했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게 되리라고 말할 수 있었겠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늙은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구나!」창세기 21:7 · 두루새김
18장에서 그는 달거리가 끊긴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이제 그 몸으로 아이를 낳고 젖을 먹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말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라의 일상 속에서 아이를 품고 먹이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기쁨에서 다음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에 담긴 웃음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순간, 또 다른 아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축하가 아니라 갈등을 불러옵니다.
또 다른 아들의 웃음 — 기쁨이 상속 문제로 바뀝니다
이삭이 자라 젖을 떼게 되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엽니다.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창세기 21:9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로 소개됩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라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입니다.
다만 사라의 다음 말은 분명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이 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 주세요.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재산을 물려받아서는 안 돼요.」창세기 21:10 · 두루새김
사라가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상속 문제입니다.
그는 하갈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이 종과 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이삭은 「내 아들 이삭」이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반응은 사라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에 관한 이 말 때문에 몹시 괴로웠습니다.창세기 21:11 · 두루새김
사라에게는 「이 종의 아들」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일을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년과 네 여자 종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사라가 네게 하는 말을 모두 들어라. 이삭에게서 태어날 자손들이 네 후손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12 · 두루새김
이삭이 약속된 언약의 계보를 이어갈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 종의 아들에게서도 한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그도 네 후손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13 · 두루새김
12절에서 이삭의 후손이 특별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13절에서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것은 혈통과 언약을 이어가는 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특별한 약속을 이어 가시지만, 이스마엘의 미래도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통까지 무조건 옳게 여기셨다는 뜻으로 넓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실제로 그들이 겪는 위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장면에서 바로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가 이삭을 조롱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놀거나 즐거워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황과 그 동사가 쓰이는 다른 예에 비추어 조롱이나 부적절한 장난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이 떨어진 광야 — 약속을 받은 아들이 죽음 앞에 놓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그는 빵과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 이스마엘을 맡겨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 이스마엘에게서도 한 민족이 나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이 실제로 받은 것은 빵과 가죽 주머니 하나에 담긴 물입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를 헤맵니다.
가죽 주머니의 물이 다 떨어지자, 하갈은 아이를 덤불 하나 아래에 내던졌습니다.창세기 21:15 · 두루새김
「내던졌습니다」라는 표현은 하갈이 아이를 버리고 싶어 했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아이가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고 설명합니다.
하갈은 활로 쏜 화살이 날아갈 거리만큼 멀리 떨어진 맞은편에 가서 앉았습니다. 「아이가 죽는 모습은 보지 않겠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맞은편에 앉아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창세기 21:16 · 두루새김
그러나 그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아이의 맞은편에 앉습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고, 완전히 떠날 수도 없는 거리입니다.
이 장면에는 창세기 16장에서 이미 광야를 경험했던 하갈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때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샘 곁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습니다(16:6–7).
이번에는 스스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내보내졌습니다.
그때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이제는 태어난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갈은 아들의 생명을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사라에게는 아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함께 웃을 것입니다.
하갈에게는 이미 태어난 아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그는 홀로 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의 시선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6장 16절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86살이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는 100살이었습니다(21:5). 따라서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은 약 열네 살이었으며, 이삭이 젖을 뗀 뒤에 벌어진 이 사건에서는 그보다 더 성장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다만 정확한 나이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 이름에 담긴 약속
하나님께서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말했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 있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창세기 21:17 · 두루새김
바로 앞 절에서 소리 높여 운 사람은 하갈입니다. 그런데 17절은 하나님이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마엘이 정확히 어떤 소리를 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언약의 계보를 이어갈 사람으로 선택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물도 없이 광야의 덤불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소년을 들어 올리고 네 손으로 단단히 붙들어라. 내가 그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창세기 21:18 · 두루새김
하갈은 조금 전 아이를 덤불 아래에 내려놓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감정을 추스르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이미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생명을 다시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그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주시자, 하갈은 물이 있는 우물을 보았습니다. 하갈은 가서 가죽 주머니에 물을 채우고 소년에게 마시게 했습니다.창세기 21:19 · 두루새김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갈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갈에게 보였던 것은 죽어 가는 아들과 물이 떨어진 가죽 주머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시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물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소년을 살리시지만, 하갈을 가만히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가 다시 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년과 함께하셨고, 소년은 자랐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며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창세기 21:20 · 두루새김
8절에서 이삭이 자랐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 이스마엘도 자랐다고 말합니다. 두 아들의 삶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모두 성장합니다. 이어서 어머니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와 그와 결혼시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가고, 성장하고, 자기 가족을 이루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삭이 약속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 이삭에게만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하나님의 넓은 돌보심은 이 장에서 서로 맞서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쉬마엘로, ‘하나님이 들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창세기 16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광야에서 다시 현실이 됩니다.
아비멜렉이 다시 찾아옵니다 — 두려움 대신 신뢰를 요구하는 왕
21장 후반부에서는 새로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그 무렵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를 이끄는 피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시는구나.」창세기 21:22 · 두루새김
아브라함은 그라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0:11).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아비멜렉은 그 말씀에 따라 사라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나와 내 자손과 그 뒤를 이을 후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두고 내게 맹세하여라. 내가 너를 잘 대해 준 것처럼, 너도 나와 네가 나그네로 지내 온 이 땅을 잘 대해 주어라.」창세기 21:23 · 두루새김
이전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여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앞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청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아브라함을 잘 대해 주었으니 아브라함도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친절하게 지내자는 인사보다 무게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충실한 행동을 약속하자는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큰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신뢰를 쌓아 가는 일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그들의 권리를 무시할 특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맹세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문제가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우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아비멜렉에게 따집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그 사실을 몰랐고, 아브라함도 이전에 알려 주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앞 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이 정직을 요구하고, 아브라함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말합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추측이나 속임 대신, 실제로 발생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려 합니다.
우물 하나와 어린 암양 일곱 마리 — 나그네가 살아갈 자리를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양과 염소와 소를 아비멜렉에게 주고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세워 놓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의미를 묻자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제게서 받으십시오. 제가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로 삼으려는 것입니다.」창세기 21:30 · 두루새김
이 행동은 우물을 둘러싼 다툼을 단순히 말로 끝내지 않고, 양쪽이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표시를 남기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게브와 같은 메마른 지역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일이 사람과 가축의 생존에 직접 연결됩니다.
특히 아브라함처럼 가축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사람에게 우물은 단순히 편리하게 쓰는 시설이 아닙니다. 계속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현재 그는 다른 사람들의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갈 자리를 확보하는 현실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일상에는 여전히 갈등과 의논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그곳에서 맹세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21:31 · 두루새김
이야기는 어린 암양 일곱 마리와 두 사람의 맹세를 나란히 배치하여 지명에 담긴 말의 울림을 살립니다. 다만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두 사람이 맹세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의 우물과 언약의 우물 — 같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보호
하갈은 집에서 쫓겨난 여자 종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살릴 물조차 찾지 못합니다. 그에게 물은 당장 생명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종들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우물을 팠고, 이제 그 우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에게 물은 앞으로 그 땅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기반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각각의 삶을 돌보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말하고,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우물을 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는 일이 아니라 대화와 맹세와 증거를 통해 다툼이 해결됩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한다고 해서 두 우물이 같은 우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브엘세바라는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물과 관련된 문제를 겪고, 각각 살아갈 길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의 연결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에서 하갈은 이미 「브엘세바 광야」를 헤맸다고 기록됩니다. 그런데 31절에서는 그 장소가 브엘세바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독자에게 이미 익숙한 지명을 앞에서 사용하고, 뒤에 그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 — 오래 머물지만 여전히 나그네인 사람
아비멜렉과 피골이 떠난 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라는 나무를 한 그루 심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라는 나무를 한 그루 심고, 그곳에서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21:33 · 두루새김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행동과 다릅니다. 나무가 자라고 그늘을 드리우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행동은 아브라함이 그곳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장에는 시간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정해진 때, 아이가 자라는 시간, 다음 세대의 미래, 오랫동안 이어질 언약, 나무가 자라는 시간입니다. 그 모든 시간의 이야기 끝에서 아브라함은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아브라함의 상태를 뜻밖의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지냈습니다.창세기 21:34 · 두루새김
그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아직 그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삭은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큰 민족이 이미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물을 확보했지만 약속된 땅 전체를 소유한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삶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생애보다 더 긴 시간을 향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자신보다 오래 지속될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부릅니다.
맺음말 —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사이에서
사라의 웃음이 진실한 기쁨이라고 해서 하갈의 울음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언약을 이어갈 사람입니다.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해진 때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돌보심은 사람들이 버려졌다고 느끼는 자리에도 미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위성류라는 나무를 한 그루 심습니다. 그곳은 하갈이 물을 찾아 헤매었던 광야와도 연결되는 땅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기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나무가 자라는 동안 이삭도 자라고, 광야에서는 이스마엘도 자랍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미래는 그들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