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여긴 사람들

창세기 20장에는 뜻밖의 역할 역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것이라고 여겼던 이방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사람이 이방 왕에게 잘못을 꾸짖음받고, 그 왕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브라함을 예언자라고 부르시며, 그가 왕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일어납니다.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 그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라는 다른 남자의 집으로 데려가집니다.

독자는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의 두려움과 잘못된 선택으로 위태로워질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사람의 잘못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920장 본문 읽기 →

이 사람은 제 누이입니다 — 다시 등장한 아브라함의 두려움

창세기 20:1–2 본문 →

아브라함은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 살았고, 그라르에서는 나그네로 지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두고 「이 사람은 제 누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라르 왕 아비멜렉은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왔습니다.창세기 20:2 · 두루새김

이 말은 독자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창세기 12장 10–20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도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파라오는 사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고, 하나님이 파라오의 집안에 재앙을 내리신 뒤에야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라르에서 같은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누구보다 지켜야 할 사람은 사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선택 때문에 오히려 그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본문은 사라가 스스로 아비멜렉의 집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사라는 낯선 땅에 사는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그가 사라를 데려온 목적이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본문은 그 절차와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라가 자기 남편과 떨어져 왕의 집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첫 번째 전환은 아브라함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서시는 일로 시작됩니다.

올바른 민족까지 죽이시겠습니까 —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방 왕

창세기 20:3–5 본문 →

밤이 되자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아비멜렉에게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데려온 여자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창세기 20:3 · 두루새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을 어떻게 소개했든, 그 말이 사라의 혼인 관계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 올바른 민족까지 죽이시겠습니까?」창세기 20:4 · 두루새김

이 질문은 18장의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8장 25절에서 아브라함은 온 땅을 재판하시는 분이 공정한 판단을 행하지 않으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간청했고, 아비멜렉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을 부당하게 심판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에 기대어 말합니다.

「그 사람이 제게 『이 사람은 제 누이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도 『그 사람과 저는 남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나쁜 뜻을 품지 않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채 이 일을 했습니다.」창세기 20:5 · 두루새김

「나쁜 뜻을 품지 않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채」라는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의도와 실제 행동 모두에서 고의적인 잘못이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말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데는 이야기 안에서 근거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사라를 데려온 과정 전체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비멜렉이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와 혼인 관계를 맺으려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네가 나쁜 뜻을 품지 않고 이 일을 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 죄를 막으시는 하나님

창세기 20:6–7 본문 →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쁜 뜻을 품지 않고 이 일을 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나다. 그래서 네가 그 여자에게 손대지 못하게 했다.」창세기 20:6 · 두루새김

아비멜렉이 사라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의 의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사라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떤 수단으로 막으셨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보호하셨습니다.

동시에 아비멜렉도 보호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죄에 빠질 위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막으시고,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미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일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시는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주어라. 그는 예언자다.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니,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돌려주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아라.」창세기 20:7 · 두루새김

아비멜렉이 모르고 사라를 데려왔다는 사실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처음에 아비멜렉은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도 사라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몰라서 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비멜렉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을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 때문에 아비멜렉은 큰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올바르게 판단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언자라는 이름을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옳다는 보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잘못을 옳은 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며 예언자로 불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행동에 대해 꾸지람을 받아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 뒤집히는 아브라함의 판단

창세기 20:8–11 본문 →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신하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 주자, 신하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창세기 20:8 · 두루새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가 네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와 내 나라에 큰 죄를 불러왔느냐? 네가 내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창세기 20:9 · 두루새김

이 장면에서 아비멜렉이 사용한 「큰 죄」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선택은 다른 사람과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곳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창세기 20:11 · 두루새김

아브라함은 그라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을 좌우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내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그라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근거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드러난 실제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린 행동은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그라르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용한 속임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전혀 근거 없는 생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낯선 땅에서 사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약한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아비멜렉은 실제로 사라를 데려갈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브라함의 판단을 사실로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대목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도덕성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아비멜렉에게도 말씀하시고, 그가 나쁜 뜻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며,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의 예상 속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닙니다.

사라는 실제로 제 누이이기도 합니다 — 사실을 말했지만 진실을 숨긴 사람

창세기 20:12–13 본문 →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밝힙니다.

「사라는 실제로 제 누이이기도 합니다. 사라와 저는 아버지가 같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사라가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창세기 20:12 · 두루새김

아비멜렉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라에게 남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는 사실은 말하면서,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은 숨겼습니다. 그는 사실의 일부를 말함으로써 상대방이 전체 상황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떤 말이 사실이라고 해서 그 말이 반드시 상대방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알아야 할 핵심을 일부러 감추고, 그 결과 상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도록 이끈다면 그 말은 사실의 모습을 갖추고도 속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바로 그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은 이것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내린 선택이 아니었음을 밝혀 줍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이곳저곳 다니게 하셨을 때, 저는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이렇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어디를 가든 나와 남매 사이라고 말해 주세요.』」창세기 20:13 · 두루새김

자신의 안전을 위한 행동을 아내가 자신에게 베풀어야 할 도움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살아남으려고 세운 계획에 사라가 어떻게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사라가 그 요청에 어떤 마음으로 동의했는지, 거절할 여지가 있었는지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라가 스스로 모든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가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설명을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이곳저곳 다니게 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을 낯선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아브라함이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게 하셨다는 사실이 그가 선택한 모든 생존 방법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의도를 밝히지만, 그 선택 때문에 사라와 아비멜렉이 위험에 놓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 사과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그의 말은 사과보다 해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아비멜렉의 다음 행동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의 「이곳저곳 다니게 하셨을 때」(⁨תָּעָה⁩)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복수형입니다. 그 주어인 엘로힘도 형태상 복수이기 때문에 ‘신들이’라는 읽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0장의 전체 문맥에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법적 특징만으로 아브라함이 여러 신을 믿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라를 돌려주고 그의 정당함을 밝히다 — 관계를 회복하려는 아비멜렉

창세기 20:14–16 본문 →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줍니다.

그런데 단순히 돌려보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양과 염소와 소,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땅 가운데 좋은 곳에서 살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 땅이 네 앞에 있다.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살아라.」창세기 20:15 · 두루새김

그의 행동은 아브라함의 예상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그는 이미 아브라함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적대하는 관계를 계속 키우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은 1,000을 네 형제에게 주었다. 이것은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네 명예를 지켜 주는 표시다. 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았다.」창세기 20:16 · 두루새김

본문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주었으며, 재산을 제공하고, 사라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당한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라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왕의 사람들에게 데려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분을 둘러싼 속임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냈고, 그 결과 가장 직접적인 위험에 놓인 사람도 사라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해결하는 대화에서는 대부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말을 주고받습니다.

이야기는 사라가 어떤 일을 경험했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거의 들려주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아비멜렉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겪은 불안이나 위험까지 없었던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아비멜렉의 공개적인 조치는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보상하는 일을 넘어 사라의 지위를 회복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춘 채 누이라는 이름으로 데려가졌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그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사라를 돌려주면서도, 그 남자를 다시 형제라고 부릅니다.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남매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회복의 장면에서도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는 은의 무게나 화폐 단위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서 히브리어 케수트 에나임은 말 그대로 ‘눈의 가림’ 또는 ‘눈을 덮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당시 어떤 관용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는 아비멜렉이 제공한 은이 사라의 명예를 보호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개적인 보상이라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건을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보상 또는 체면 회복의 조치라는 이해입니다. 어느 쪽이든 뒤따르는 문장이 사라에게 잘못이 없음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다만 마지막 문장의 문법과 정확한 의미에도 해석상 어려움이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완전히 확립된 법적 절차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네 형제」라는 호칭은 그가 아브라함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앞서 사용된 속임의 표현을 일부러 되짚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 호칭의 말투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가 기도하자 —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

창세기 20:17 본문 →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아브라함은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자 종들을 고치셨고, 그 여자들은 아이를 낳았습니다.창세기 20:17 · 두루새김

하나님이 7절에서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자격이 있는 이유는 그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의 기도는 잘못으로 인해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 포함됩니다.

자기 생명을 보호하려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던 아브라함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가 잘못을 직접 고백하거나 회개했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완전한 회개의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이 이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3). 그런데 이 장에서는 아브라함 때문에 이방의 왕과 그의 집안이 위험해집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의 집안에 회복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닫혔던 태가 열리다 — 사라의 출산을 앞둔 마지막 장면

창세기 20:18 본문 →

마지막 절은 아비멜렉의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전에 여호와야훼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막아 두셨던 것입니다.창세기 20:18 · 두루새김

사라는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고 달거리가 끊긴 사람이었습니다(18:11). 그런데 하나님은 다음 장에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기 직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모든 상황을 올바르게 다스렸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판단이 실패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셨기 때문에 지켜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태가 닫혔다는 표현은 출산이나 임신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모든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막아 두셨던 것입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아비멜렉 자신이 어떤 몸의 질환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여자들이 즉시 출산했는지, 출산할 수 있는 상태가 회복되었다는 뜻인지는 사건의 시간 경과가 제시되지 않으므로 자세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맺음말 — 아브라함보다 먼저 행동하신 하나님

창세기 20:1–18 본문 →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기도하고 아비멜렉의 집안이 고침받는 일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회복의 과정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사람에게 신실하시면서도,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다른 사람에게 불공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큰 재산을 받았다는 사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라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집안을 고치시고, 아이를 낳지 못했던 여자들이 다시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그렇게 창세기 20장의 마지막에 생명의 길이 다시 열립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는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던 사라의 출산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사라를 아브라함의 아내로 아셨고,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라르에서 시작된 위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의 잘못된 말이 만들어 낸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이 진실을 밝히시고, 생명을 지키시며, 약속이 이어질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