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소돔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창세기 19장은 한 가족이 멸망하는 도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구원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질문은 소돔이 얼마나 악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세상을 심판하시는가? 그리고 그 세상에서 구출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이야기는 소돔의 성문에서 시작해 롯의 동굴에서 끝납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오려 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누가 안전한 곳에 있는지, 누구의 손에 생명이 달려 있는지가 반복해서 바뀝니다.
성문에 앉아 있는 롯 — 도시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
저녁에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맞으러 갔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창세기 19:1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아브라함이 맞이한 세 방문객 가운데 두 사람이 이제 소돔에 도착합니다. 19장은 그들을 처음부터 천사라고 밝힙니다.
성문은 고대 도시에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인 동시에 거래와 공적인 논의, 다툼을 해결하는 일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롯이 이제 소돔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그가 정식 재판관이나 도시의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롯은 물이 풍부한 요단 들판을 보고 그곳을 선택했습니다. 처음에는 소돔 가까이에 천막을 쳤지만(13:12), 나중에는 소돔에 사는 사람이 되었고(14:12), 이제는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땅은 점차 그의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롯이 말했습니다. 「주인어른들, 부디 이 종의 집에 들러 밤을 묵고 발을 씻으십시오. 아침 일찍 일어나 가시던 길을 가시면 됩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밤을 묵겠다.」창세기 19:2 · 두루새김
고대 도시의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고 지나가는 열린 공간입니다. 여행자가 그곳에 머물 수는 있지만, 보호받을 집 안과는 다릅니다.
롯은 그들에게 간절히 거듭 권합니다. 그가 단순히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소돔의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곧이어 일어나는 사건은 그 도시의 광장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위험했을지를 보여줍니다.
롯은 손님들을 위해 잔칫상을 차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굽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반죽을 부풀리는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롯은 좋은 주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 그가 속한 도시와 그의 가정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문밖의 군중 —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폭력
방문객들이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소돔의 남자들이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본문은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성 곳곳에서 모두 몰려왔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특정한 몇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대표할 만큼 널리 퍼진 집단의 행동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야기의 강조점은 폭력이 도시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롯을 불러 말했습니다. 「오늘 밤 네 집에 온 남자들은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데리고 나와라. 우리가 그들과 억지로 잠자리를 같이하겠다.」창세기 19:5 · 두루새김
이것은 서로 동의한 성관계가 아니라 강제적인 집단 성폭력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낯선 방문객의 뜻이나 존엄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모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성적인 행위는 바로 그 폭력을 실행하는 수단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돔의 죄를 단순히 동성 간의 성적 행위로만 설명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돔의 악을 이해할 때 롯의 대응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롯이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부디 이런 악한 일을 하지 마십시오.」창세기 19:7 · 두루새김
이 호칭은 롯이 소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같은 공동체에 속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제게는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 두 딸이 있습니다. 제가 두 딸을 여러분에게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그들에게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십시오. 다만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제 지붕 아래로 들어온 손님들이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9:8 · 두루새김
당시에는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롯은 「이들은 제 지붕 아래로 들어온 손님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무를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문화적 배경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손님에게 폭력을 가하려는 군중을 악하다고 부르면서, 같은 군중에게 자기 딸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본문은 이 제안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롯을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롯은 악을 알아보고 그것을 막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악을 허용하려 합니다.
이때 군중의 반응은 더욱 거칠어집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비켜라!」 또 말했습니다. 「이놈이 나그네로 살러 들어와서는 재판관 노릇을 하는구나! 이제 저들보다 너를 더 심하게 해치겠다.」 그들은 롯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문을 부수려고 다가왔습니다.창세기 19:9 · 두루새김
롯은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을 만큼 그 도시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지만, 주민들은 그에게 자기들과 동등하게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소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그 행동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롯에게는 재판관 노릇을 하지 말라고 비난합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로움과 공정한 판단을 행하는 길을 말씀하셨다면(18:19), 여기서는 자기들의 악을 지적하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소돔의 문제는 단순히 몇 가지 금지된 행동을 저질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힘을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고, 그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까지 폭력으로 억누르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잠자리를 같이하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יָדַע), 알다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실을 안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문맥에 따라 성관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롯은 그들의 행동을 악한 일이라고 규정하고, 대신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 없는 자기 딸들을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집을 에워싸고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명령하며, 거절당하자 폭력을 행사합니다.
손을 뻗어 끌어들이다 — 뒤바뀌는 보호자의 자리
군중이 문을 부수려는 순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쪽이 갑자기 바뀝니다.
그러자 집 안에 있던 두 사람이 손을 뻗어 롯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습니다.창세기 19:10 · 두루새김
롯은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집이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집의 문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방문객들이 오히려 그를 구합니다.
보호받는 사람이 보호자가 되고, 보호하려던 사람은 구출받는 사람이 됩니다.
두 사람은 문간에 있던 남자들을 어린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모두 앞이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 남자들은 입구를 찾느라 지쳤습니다.창세기 19:11 · 두루새김
소돔 사람들은 폭력을 행사하려는 뜻이 꺾여서 멈춘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구를 찾지 못해 지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합니다.
이 지점에서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먼 곳에서 내려진 일방적인 선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자는 이미 그 도시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목격했습니다.
떠나라는 경고와 꾸물거리는 롯 — 구원받는 사람의 뜻밖의 모습
방문객들은 이제 자신들이 맡은 일을 밝힙니다.
「우리가 이곳을 멸망시킬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커졌고, 여호와야훼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셨다.」창세기 19:13 · 두루새김
그런데 이 심판의 선언에는 뜻밖의 명령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롯에게 성 안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임박했지만, 그 가족들에게는 아직 떠날 기회가 주어집니다.
롯은 밖으로 나가 자기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여호와야훼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려 하신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창세기 19:14 · 두루새김
새벽이 밝자 천사들이 그를 재촉합니다. 앞서 사위들이 이미 결혼한 사람들인지 약혼자들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그들은 롯과 함께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은 즉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롯이 머뭇거리자 두 사람은 롯과 아내와 두 딸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롯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롯을 데리고 나가 성 밖에 두었습니다.창세기 19:16 · 두루새김
롯은 하나님의 경고를 직접 들었습니다. 도시가 곧 멸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사위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롯이 구원받는 결정적인 순간에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가 재빨리 순종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선택을 했고,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도 머뭇거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롯을 멸망하는 성과 함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롯의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 위험을 완벽하게 벗어난 성공담이 아닙니다.
구출받은 사람조차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내신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농담을 한다고」라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차하크(צָחַק), 웃다·장난하다 계열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앞 장에서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사라가 웃었습니다(18:12). 이제 소돔에서는 멸망에 대한 경고가 농담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사라의 경우 하나님은 약속을 다시 확인하셨지만, 사위들의 경우 경고를 무시한 결과 그들이 도시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산으로 피하라, 그러나 작은 성으로 가겠습니다 — 구원 이후에도 남아 있는 두려움
롯의 가족이 성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명령합니다.
그들이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목숨을 건지려면 달아나라. 뒤를 돌아보지 말고 들판 어디에도 멈추지 마라. 휩쓸려 죽지 않도록 산으로 피하여라.」창세기 19:17 · 두루새김
그러나 롯은 또다시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입니다.
「주님은 이 종을 좋게 보시고 큰 은혜를 베풀어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산까지 피할 수 없습니다. 재앙이 저를 따라잡아 죽게 될까 두렵습니다.」창세기 19:19 · 두루새김
그래서 가까운 작은 성으로 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롯이 내세우는 이유는 그 성이 가깝고 작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요청도 받아들이십니다.
그가 롯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도 네 청대로 해 주겠다. 네가 말한 성은 뒤엎지 않겠다.」창세기 19:21 · 두루새김
아브라함은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성 전체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롯은 자신이 피할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 성을 살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소알에 의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서둘러 그곳으로 피하여라. 네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성의 이름을 소알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19:22 · 두루새김
이야기 속에서 심판을 실행하는 일이 롯의 피난 완료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를 살려 두기로 하셨기에 그가 안전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심판이 시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롯이 소알에 도착했을 때 해가 떠오릅니다. 밤중에 시작된 소돔의 폭력이 새벽의 피난으로 이어지고, 이제 아침 햇빛 아래서 심판이 시작됩니다.
유황과 불, 그리고 돌아본 아내 — 사라지는 들판의 세계
여호와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여호와야훼께로부터 내려왔습니다.창세기 19:24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성들과 온 들판을 뒤엎으셨습니다. 성에 살던 모든 사람과 땅에서 자라던 식물도 모두 없애 버리셨습니다.창세기 19:25 · 두루새김
창세기 13장에서 롯이 처음 바라본 요단 들판은 물이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동산에 비유되었습니다(13:10).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을 풍성하게 유지할 것 같던 곳이 이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롯의 아내는 남편 뒤에서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기 19:26 · 두루새김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왜 뒤돌아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가 이미 주어졌고, 그가 그 경고와 어긋나는 행동을 했으며, 그 결과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 밖으로의 이동은 실제 구출의 시작이었지만, 그들의 여정에는 여전히 위험과 순종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단순히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를 두 번 사용합니다. 이 반복을 근거로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등장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심판을 내리신 분과 그 심판의 근원이 모두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마의 연기와 아브라함의 기억 — 심판의 현장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이야기는 갑자기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는 전날 하나님과 대화했던 장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들판을 내려다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와 들판 전체를 내려다보니, 그 땅에서 짙은 연기가 커다란 가마의 연기처럼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창세기 19:28 · 두루새김
본문은 그가 그 순간 롯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독자에게 보이는 것은 전날 성의 운명을 두고 간청했던 사람이 이제 연기 솟는 땅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요청했던 것은 의로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성 전체를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은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간청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들판의 성들을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습니다. 롯이 살던 성들을 뒤엎으면서, 롯을 그 파괴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9:29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기억하셨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잊고 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셨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창세기 8장 1절에서도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 안의 생물들을 기억하셨다는 말씀 뒤에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관계와 약속에 따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본문은 아브라함의 간청 하나만이 롯을 구출한 유일한 이유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16절에서 하나님이 롯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두 표현을 함께 보면, 롯의 구출은 하나님의 자비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간청한 일이 성의 멸망으로 끝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잊으신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멸망한 성의 연기를 보여준 다음,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은 또다시 독자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산 위의 동굴 — 소돔에서 나왔지만 두려움은 남았다
롯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소알을 떠납니다.
롯은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 두 딸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살았습니다. 롯과 두 딸은 동굴에서 지냈습니다.창세기 19:30 · 두루새김
그는 산까지 도망치면 재앙이 자신을 따라잡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성으로 피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작은 성에서 사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의 생명은 지켜졌지만, 그는 여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가 왜 소알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롯은 풍요로워 보이는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에 천막을 쳤고, 나중에는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남은 거처는 산속 동굴입니다.
그가 선택했던 풍요와 안정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동굴이 온전한 회복의 장소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우리와 잠자리를 같이할 남자가 이 땅에는 없어.」창세기 19:31 · 두루새김
중요한 것은 그들의 판단이 실제로 모든 남자가 사라졌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두 딸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자,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자식을 얻어 후손을 이어 가자.」창세기 19:32 · 두루새김
그들은 아버지에 의해 성폭력의 위험에 내몰릴 뻔했고, 도시의 멸망을 겪었으며, 어머니를 잃고 동굴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두 딸의 행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성경은 그들의 마음 상태나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밝히는 직접적인 동기는 후손을 이어 가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이 땅」의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 주변의 파괴된 지역을 가리키는지, 자신들이 고립되어 사는 산악 지역을 가리키는지, 더 넓게 세상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알지 못했다 — 이야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단어
동굴의 사건은 두 번 반복됩니다.
그날 밤 두 딸은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큰딸이 들어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롯은 딸이 눕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했습니다. 「어젯밤에는 내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했어. 오늘 밤에도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자. 이번에는 네가 들어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해.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자식을 얻어 후손을 이어 가자.」 그날 밤에도 두 딸은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작은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롯은 딸이 눕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창세기 19:33–35 · 두루새김
이것은 롯이 그 행위를 알고 동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알아차리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두 딸의 행동을 단순히 가문을 이어 가려는 희생적인 행동으로 미화할 수 없습니다. 후손을 얻으려는 목적이 다른 사람의 뜻과 몸을 무시하는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소돔의 군중은 롯의 집에 찾아온 남자들과 억지로 잠자리를 같이하려 했습니다. 롯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딸들을 대신 내주려고 했습니다. 이제 동굴에서는 두 딸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뒤 그와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각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의도와 상황은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의 뜻과 몸을 존중하지 않는 성적 행위가 등장합니다.
소돔이라는 도시는 멸망했지만,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문제는 살아남은 가족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그는 군중에게 무엇이 악한 일인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에게 상황을 판단하거나 거부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협하던 도시에서 살아남았지만, 동굴 안에서 벌어진 일은 알지 못한 채 자녀들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 대목을 롯에게 내려진 특별한 형벌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이 롯의 이전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롯의 가족에게는 살아남은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삶을 자동으로 올바르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알지 못했습니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는 앞서 소돔 사람들이 방문객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겠다고 요구했을 때 사용한 동사와 같습니다. 원문에서는 19장 5절의 군중이 방문객들을 성적으로 「알겠다」고 요구합니다. 8절에서도 원문은 롯의 딸들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동사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모두 성적 행위와 연결된 장면에 등장합니다.
모압과 벤암미 — 불편한 가족사에서 시작된 두 민족
창세기 19장은 두 아들의 출생으로 끝납니다.
큰딸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모압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압 사람들의 조상입니다.창세기 19:37 · 두루새김
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이름을 벤암미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암몬 사람들의 조상입니다.창세기 19:38 · 두루새김
모압과 암몬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웃 민족입니다. 이들은 때로 이스라엘과 갈등하고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습니다. 민수기 22–25장과 사사기 11장 같은 본문에서 그러한 긴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원 이야기를 이스라엘과 두 이웃 민족 사이의 긴장을 반영하는 이야기로 읽을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9장의 이야기가 오로지 두 민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사실은 모압과 암몬이 롯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이므로, 이들은 이스라엘의 조상과 친족 관계로 연결됩니다.
신명기 2장 9절과 1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압과 암몬을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땅을 롯의 자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룻기는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지고 다윗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룻 4:13–22).
이러한 후대의 본문들을 함께 보면, 창세기 19장의 기원 이야기를 근거로 모압과 암몬의 모든 후손에게 영구적인 도덕적 죄책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계는 언제나 아름답고 모범적인 사건들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심각하게 비뚤어진 관계와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도 다음 세대가 태어납니다.
성경은 그러한 출생의 경위를 숨기지 않으면서, 그 후손들의 역사를 계속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모압(מוֹאָב)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아버지에게서」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다만 이름의 역사적 뿌리가 실제로 그것에서 비롯되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벤암미는 「내 겨레의 아들」 또는 「내 친족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 연기가 솟는 들판과 산속의 동굴
창세기 19장은 멸망하는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살아남음을 완성된 행복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악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롯을 소돔의 멸망에서 건져 냈지만, 그 가족의 남은 이야기는 구출된 인간에게 여전히 얼마나 많은 문제가 남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자비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잘못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먼 곳에서 짙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들판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에 롯은 그 파괴 한가운데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이 도착한 곳은 새로운 집이 아니라 산속 동굴입니다.
장 마지막에는 모압과 벤암미라는 두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제 앞으로 이어질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어둡고 복잡합니다.
창세기는 그 어둠을 감추지 않은 채 두 민족의 시작을 기록합니다.
한 도시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시작되는 장소는, 풍요로운 소돔의 성문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숨어 들어간 산속 동굴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