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5–36장 · 이삭과 야곱

한 그릇의 죽과 장자의 미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나는 장에서 성경은 뜻밖에도 두 아들이 먹을 것을 두고 흥정하는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한쪽에는 백칠십오 년을 살고 만족한 가운데 죽은 아브라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당장의 허기를 견디지 못해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 버리는 에서가 있습니다. 두 장면 사이에는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과 이삭의 쌍둥이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25장의 중심에는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하나님이 주신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은 모든 사건을 시간순으로 배열하기보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무리한 다음, 이삭의 가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장의 계보와 죽음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 정리가 아닙니다. 이제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지를 독자에게 알려 주는 문학적 전환점입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725장 본문 읽기 →

많은 아들들 가운데 한 아들에게 이어지는 약속

창세기 25:1–6 본문 →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아내로 맞아들여 여섯 아들을 얻습니다. 이어서 욕산과 미디안에게서 나온 후손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7:4–6). 이제 그 약속은 이삭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서 갈라져 나온 여러 후손을 통해서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두라의 자손 가운데 미디안이라는 이름은 이후 성경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 머무는 곳이 미디안 땅이며(출애굽기 2:15), 훗날 이스라엘과 갈등을 겪는 미디안 사람들도 등장합니다(민수기 25장; 31장). 창세기의 이 짧은 계보는 뒤에 나오는 여러 민족이 아브라함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아들의 이름을 나열한 직후,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그들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창세기 25:5 · 본디새김

창세기 17:19–21에서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언약은 이삭과 세우겠다고 구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신의 소유를 넘기는 장면은 그 구별과 나란히 놓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도 선물을 주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이삭에게서 떨어져 동쪽 땅으로 가도록 했습니다(25:6).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 역시 그의 참된 후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계속 추적할 언약의 계보는 이삭에게로 이어집니다.

이삭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형제들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도, 특별한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위치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출생 순서에 자동으로 종속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그두라가 낳은 아들들의 출생 시점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25:1이 앞선 이야기 다음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아들이 사라가 죽은 뒤에 태어났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출생의 연대보다 아브라함의 여러 후손과 이삭의 위치를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 — 소유한 땅보다 큰 약속

창세기 25:7–11 본문 →

아브라함은 백칠십오 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아브라함은 좋은 노년을 누리고, 늙고 만족한 가운데 숨을 거두고 죽었다. 그는 자기 겨레에게로 모아졌다.창세기 25:8 · 본디새김

본문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오래 살았다는 사실보다 그의 삶이 만족스러운 마침에 이르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며, 좋은 노년을 누리고 묻힐 것이다. (창세기 15:15의 내용)

아브라함의 마지막은 그 약속에 부합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면, 이 만족은 모든 약속이 눈앞에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14–17; 17:8). 그러나 아브라함이 죽을 때 그가 그 땅에서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곳으로 성경이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구입한 막벨라의 밭과 굴입니다(23:17–20).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를 막벨라 굴에 묻었다. 그 굴은 마므레 앞에 있는, 소할의 아들인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었다.창세기 25:9 · 본디새김

이미 23장에서 소유권을 확보하는 과정을 길게 설명했는데, 여기서도 밭의 주인과 위치를 되풀이합니다. 이는 막벨라 굴이 아브라함이 정당하게 구입한 장소였음을 다시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실현되는 것을 보는 삶이 아니라, 약속의 일부를 경험하면서 나머지를 후손에게 맡기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일찍이 하갈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을 떠났습니다(21:14–21). 그 뒤로 이삭과 이스마엘이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관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었다. 이삭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 곁에 살았다.창세기 25:11 · 본디새김

아브라함의 생애가 끝나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편 「자기 겨레에게로 모아졌다」는 표현은 매장과 구별됩니다. 아브라함이 겨레에게로 모아졌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실제 장례는 그다음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스마엘에게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됩니다(25:17). 이것은 죽은 사람이 앞서 죽은 자기 겨레에게 합류한다는 고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구체적인 사후 세계의 모습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25장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한 뒤에야 이삭의 결혼과 쌍둥이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이삭은 예순 살에 쌍둥이를 얻었으므로(25:26),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은 이미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죽음을 먼저 기록했다고 해서 쌍둥이의 탄생이 그 뒤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 —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이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 25:12–18 본문 →

아브라함의 장례에 이스마엘이 등장한 직후, 성경은 그의 계보를 소개합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열두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에 관하여 말씀하셨을 때 이미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열두 우두머리를 낳게 하며,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창세기 17:20의 내용)

이스마엘은 언약 계보의 중심인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창세기 16장과 21장의 하갈 이야기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고(16:7–13), 광야에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으며(21:17),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18).

하나님이 이삭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마지막에는 그의 거주 범위가 기록됩니다. 그는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이어지는 지역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25:18).

마지막 표현인 「자기의 모든 형제들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는 앞서 이스마엘에 관하여 주어진 말씀(16:12)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에는 그들 앞에, 또는 맞은편에 있다는 공간적 의미가 있으며, 문맥에 따라 대립 관계를 암시한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25:18은 먼저 그의 후손들의 거주 범위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것만으로 모든 형제와 끊임없이 적대했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마엘의 계보가 끝나면 성경은 다시 이삭에게 돌아옵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이미 열두 아들과 열두 부족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야기를 이어 갈 이삭은 아직 자녀가 없습니다.

이제 독자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이어받은 이삭에게는 왜 자녀가 없습니까?

이십 년의 기다림과 태중에서 시작된 다툼

창세기 25:19–26 본문 →

이삭의 이야기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내력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창세기 25:19 · 본디새김

창세기의 「내력」이라는 표제는 보통 그 사람에게서 이어져 나오는 가족과 후손의 이야기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삭의 이야기 역시 그에게서 태어날 자녀들의 문제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출산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삭은 마흔 살에 리브가와 결혼했지만,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는 예순 살이었습니다(25:20, 26). 두 나이의 차이는 이십 년입니다. 사라에게 자녀가 없었던 것처럼 리브가에게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으므로 아내를 위해 여호와야훼에게 간청했다. 여호와야훼가 그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다.창세기 25:21 · 본디새김

이삭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언약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자녀의 탄생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도 기다림이 있었고, 아내의 불임을 두고 하나님께 간청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응답을 받은 뒤에도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리브가의 뱃속에서 서로 거세게 부딪쳤다. 리브가가 말했다. 「이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처지인가?」 그는 여호와야훼에게 물으러 갔다.창세기 25:22 · 본디새김

그에게 이 임신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큽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말했다. 「두 민족이 네 배 속에 있고, 두 백성이 네 태에서 갈라져 나올 것이다. 한 백성은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세기 25:23 · 본디새김

앞으로 이스라엘과 에돔이라는 두 민족으로 이어질 역사가 이미 이 형제의 관계 속에 예고되어 있습니다(창세기 36장). 고대 가족 안에서 먼저 태어난 아들은 일반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일반적인 서열이 뒤집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쌍둥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로 대조됩니다.

에서는 먼저 태어납니다. 그의 몸은 붉고 털이 많습니다. 뒤이어 야곱이 나오는데,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습니다.

출생 순서는 분명해졌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평온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삭이 여호와야훼께 간청하자 여호와야훼가 그 간청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한 어근의 반복으로 연결한 것입니다. 또한 「아내를 위해」에 해당하는 레노카흐 이슈토는 아내를 위하여 간청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아내와 마주한 자리에서 기도했다는 공간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자세로 기도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이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처지인가?」라는 이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뜻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라마 제 아노키에는 「왜」, 「이것」, 「나」가 들어 있지만, 구체적인 서술 내용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리브가가 왜 이런 임신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묻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 있는 의미까지 묻는 절박한 탄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5:23의 말씀은 우선 두 민족에 관한 신탁입니다. 따라서 에서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야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훗날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그 앞에 일곱 번 몸을 굽힙니다(33:3). 말라기 1:2–3은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바울은 로마서 9:10–13에서 두 아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논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5:23에 대한 후대 성경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자체에서는 먼저 리브가에게 주어진 두 민족의 신탁과 그 뒤에 펼쳐지는 가족의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이 구절 하나로 에서와 야곱 각 개인의 궁극적인 구원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두 아들, 갈라진 부모의 사랑

창세기 25:27–28 본문 →

두 아이가 자란 뒤, 성경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자랐다. 에서는 사냥에 능숙한 사람, 들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순박한 사람, 천막에서 사는 사람이었다.창세기 25:27 · 본디새김

「순박한」(⁨תָּם⁩)이라는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온전함이나 흠 없음이라는 뜻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욥기 1:1에서 욥을 묘사할 때도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곳에서는 우선 활동적인 사냥꾼 에서와 구별되는 야곱의 생활 방식과 성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뒤이어 야곱이 형에게 제안하는 거래를 보면, 그를 아무 계산도 하지 않는 순진한 사람으로 읽기도 어렵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사냥한 고기를 이삭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세기 25:28 · 본디새김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설명됩니다. 반면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하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앞서 리브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므로, 그 약속 때문에 야곱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추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정확합니다.

아버지는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고, 장의 마지막에는 바로 음식이 형제 관계를 뒤흔드는 도구가 됩니다. 훗날 창세기 27장에서도 이삭의 식욕과 에서의 사냥, 그리고 야곱을 향한 리브가의 행동이 한데 얽히면서 가족의 갈등이 폭발합니다.

하나님은 두 민족의 미래를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들은 가족은 하나 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갈라진 가정에서 두 아들의 경쟁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붉은 것, 이 붉은 것」 — 미래를 거래하는 두 형제

창세기 25:29–34 본문 →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일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에서는 들에서 돌아왔고 몹시 지쳐 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다. 「붉은 것, 이 붉은 것 좀 먹여 줘. 내가 지쳤거든.」 그래서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 불렀다.창세기 25:30 · 본디새김

에서는 음식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색깔을 두 번 외칩니다. 「붉은 것, 이 붉은 것」이라는 반복은 그의 절박함과 관심이 온통 눈앞의 음식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정말 뜻밖인 사람은 에서보다 야곱입니다.

야곱이 말했다. 「형의 맏아들 권리를 지금 내게 팔아요.」창세기 25:31 · 본디새김

야곱이 요구한 것은 지금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물건이 아니라 앞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맏아들의 지위와 권리입니다.

에서가 말했다. 「봐,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야?」창세기 25:32 · 본디새김

이 판단은 눈앞의 필요와 미래의 가치를 비교하는 그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야곱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야곱이 말했다. 「지금 내게 맹세해요.」 에서는 그에게 맹세하고 자기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았다.창세기 25:33 · 본디새김

31절과 33절에서 반복되는 「지금」은 거래를 즉시 확정하려는 야곱의 요구를 강조합니다. 그는 형이 배부른 다음 마음을 바꾸지 못하도록, 현재의 허기를 거래가 성립하는 순간으로 만듭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왜 그것을 원했는지,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 거래를 제안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형이 동생을 섬길 미래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야곱에게 형의 곤경을 이용할 권리를 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미래를 약속하셨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미래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야곱은 장자권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으로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형의 절박한 상황을 거래의 기회로 삼은 사람으로도 읽어야 합니다. 야곱이 거래를 제안했지만, 맹세하고 권리를 판 사람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에서가 업신여긴 것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즈콩 죽을 주었다. 에서는 먹고 마시고 일어나 떠났다. 에서는 맏아들 권리를 업신여겼다.창세기 25:34 · 본디새김

그가 맹세한 일을 곱씹었다거나, 자신이 잃은 것을 걱정했다거나, 후회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꾼은 그의 행동을 기록한 뒤 분명한 평가를 내립니다.

에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권리를 어쩔 수 없이 빼앗긴 사람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눈앞의 음식에 비해 맏아들 권리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것을 팔았습니다.

본문은 그가 허기를 느꼈다는 사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장의 허기를 이유로 자신이 지닌 미래의 권리를 하찮게 여긴 태도에 있습니다.

한편 야곱은 미래의 권리를 얻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이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의 계산 사이에서 전개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고(25:25), 이제 붉은 음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에돔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훗날 신명기 21:15–17에는 맏아들에게 두 몫의 상속분을 인정하는 규정도 나옵니다. 다만 그 후대의 규정을 이삭의 가족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에서의 장자권에 어떤 재산과 권리가 정확히 포함되어 있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도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에서가 실제로 죽기 직전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지쳐 있었다고 말할 뿐,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게 생겼다」는 것은 에서 자신의 말입니다. 특히 본문이 말하는 장자권과 훗날 이삭이 주려는 축복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27:36에서 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을 가져갔고 이제는 자신의 복까지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두 사건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또한 25장의 거래가 하나님의 언약을 법적으로 이전하는 행위였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12:16–17은 에서가 한 끼 음식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합니다. 거기서는 거룩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경고하는 사례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25:34의 마지막 평가가 후대 성경에서 더욱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

창세기 25:1–34 본문 →

문제는 고통이나 결핍이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가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미래를 너무 가볍게 여겼고, 다른 한 사람은 미래를 자기 손으로 움켜쥐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보다 먼저 약속하시지만,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침내 야곱은 형에게 빵과 렌즈콩 죽을 내어 줍니다.

에서는 먹었습니다. 마셨습니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이야기는 그가 무엇을 먹었는지보다 무엇을 가볍게 여겼는지를 기록하며 끝납니다.

붉은 죽은 그의 허기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 한 끼를 위해 맹세로 넘겨준 권리는 다시 그릇에 담아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는 배를 채우고 떠났지만, 그가 남겨 두고 떠난 것의 무게는 이야기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