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4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동생 대신 노예로 남겠다는 형

요셉의 형제들이 이집트를 떠납니다. 곡식 자루는 가득 차 있고, 지난번에 붙잡혔던 시므온도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했던 베냐민이 무사히 함께 있습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은잔 하나를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오래전의 사건이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들은 동생을 노예로 만들고 자신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에는 베냐민을 이집트에 남겨 두고 자신들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은잔이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잔을 훔쳤느냐가 아닙니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의 자유와 자신의 자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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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에 숨겨진 은잔 — 다시 만들어진 위기

창세기 44:1–5 본문 →

곡식과 은, 그리고 막내의 자루

요셉은 지난번처럼 형제들에게 곡식을 충분히 주고, 그들이 낸 은도 돌려 넣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내 잔, 곧 은잔은 막내의 자루 입구에 그가 곡식을 사려고 낸 은과 함께 넣어라.」 그는 요셉이 말한 대로 했다.창세기 44:2 · 본디새김

독자는 처음부터 베냐민이 은잔을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관리인이 요셉의 지시에 따라 그의 자루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 행동을 형제들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뒤이어 형제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요셉이 이러한 계획을 세운 내면의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형제들을 시험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베냐민에게 실제로 부당한 혐의를 씌웠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요셉의 거짓 고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인 문제가 없는 행동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요셉의 내면과 행동을 모두 정당화하는 해설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왜 여러분은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까?」

그들이 성읍을 나와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요셉이 자기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나 저 사람들을 뒤쫓아라. 그들을 따라잡거든 이렇게 말하여라. 『왜 여러분은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까?』」창세기 44:4 · 본디새김

형제들은 요셉의 잔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잔을 훔쳐 환대를 배신했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 말 자체는 형제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래전에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습니다(창세기 37:12–17). 그런데 형들은 그를 붙잡아 구덩이에 넣었고, 결국 팔아넘겼습니다. 동생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

현재의 혐의는 거짓이지만, 과거의 행동에는 그 고발이 떠올리게 하는 도덕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구별이 뒤에 나오는 유다의 고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은잔은 정말 점을 치는 도구였는가

「『이것은 제 주인께서 마시는 데 쓰시는 잔이 아닙니까? 주인께서는 그것으로 틀림없이 점도 치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하여 악을 행했습니다.』」창세기 44:5 · 본디새김

고대 근동에는 액체나 그 표면의 무늬 등을 통해 징조를 알아보려는 점술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잔을 점술과 연결하는 표현 자체가 당시 세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요셉이 실제로 점술을 행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은잔으로 점을 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관리인이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요셉 자신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44:15). 그러나 그것 역시 형제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지를 이용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앞서 요셉은 꿈풀이가 하나님께 속한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습니다(창세기 40:8; 41:16).

따라서 점술에 관한 이 발언을 요셉의 실제 종교 행위에 대한 확정적인 기록으로 삼기보다는, 그가 이집트의 강력한 통치자라는 인상을 형제들에게 주는 장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사하는 사람이 단순히 높은 관리일 뿐 아니라, 감추어진 일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은잔이 발견된 순간, 형제들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창세기 44:6–13 본문 →

자신의 결백을 확신한 사람들

관리인이 형제들을 따라잡아 은잔을 훔쳤다고 고발하자, 그들은 강하게 부인합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자루 입구에서 발견한 은도 가나안 땅에서 나리께 도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가 나리의 주인 집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창세기 44:8 · 본디새김

그런 사람들이 이제 주인의 은잔을 훔쳤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자기들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위험한 약속까지 합니다.

「나리의 종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든 그 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저희도 나리의 노예가 되겠습니다.」창세기 44:9 · 본디새김

하지만 여기서 관리인은 그 조건을 바꿉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말한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그 잔이 발견되는 사람은 제 노예가 되고, 나머지 여러분은 책임을 면할 것입니다.」창세기 44:10 · 본디새김

이렇게 되면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혐의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한 사람을 남겨 두고 떠날 수 있습니다.

맏이에서 막내까지

그는 맏이부터 수색을 시작하여 막내를 끝으로 수색을 마쳤다. 그 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창세기 44:12 · 본디새김

독자는 결과를 알고 있으므로 이 순서가 긴장을 높이는 장치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모릅니다. 앞선 자루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을수록 자신들의 결백이 확인되고 있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옷을 찢었다. 각자 자기 나귀에 짐을 싣고 성읍으로 돌아갔다.창세기 44:13 · 본디새김

관리인은 잔이 발견된 사람만 노예가 되고 나머지는 책임을 면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자신들이 무죄라고 주장하며 베냐민을 남겨 두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는 첫 번째 순간은 유다의 긴 연설이 아니라, 은잔이 발견된 직후 모두 함께 성읍으로 돌아가는 행동입니다. 아직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베냐민만 남겨 두고 떠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옷을 찢는 행위는 슬픔과 충격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르우벤은 요셉이 구덩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옷을 찢었습니다(37:29). 뒤이어 야곱도 요셉이 죽었다고 믿고 옷을 찢었습니다(37:34). 이번에는 형제들 모두가 옷을 찢습니다.

모두가 노예가 되겠다는 유다, 한 사람만 남기겠다는 요셉

창세기 44:14–17 본문 →

다시 엎드린 형제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들어갔을 때, 요셉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창세기 44:14 · 본디새김

앞서 곡식을 사러 처음 왔을 때도, 다시 이집트에 왔을 때도 그들은 요셉에게 절했습니다. 이전에는 식량을 구하거나 선물을 바치기 위해 절했습니다. 지금은 심각한 혐의를 받고 돌아와 엎드립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특별히 유다를 먼저 언급합니다.

앞에서는 열 형제 또는 형제들 전체가 이야기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유다가 앞으로 나섭니다. 이 장의 후반부는 거의 전부 유다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가 이 사건에서 어떤 책임을 지려 하는지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리의 종들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꾸짖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한 이 짓이 무엇이냐? 나 같은 사람은 틀림없이 점을 친다는 것을 몰랐느냐?」창세기 44:15 · 본디새김

그의 말은 은잔을 훔쳤다는 고발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들의 결백을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말했다. 「나리께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겠으며, 어떻게 저희가 죄 없음을 밝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리의 종들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 보십시오. 저희도, 잔이 발견된 사람도 모두 나리의 노예입니다.」창세기 44:16 · 본디새김

독자는 유다와 형제들이 은잔을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가 「하나님께서 … 죄를 찾아내셨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실제로 잔을 훔쳤다고 자백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루에서 발견된 물건은 그 사람의 죄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삶에는 아직 밝혀져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요셉이 제시한 마지막 선택

유다는 모두가 노예로 남겠다고 합니다. 그는 베냐민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요셉이 말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다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 잔이 발견된 사람, 그 사람만 내 노예가 될 것이다.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 올라가라.」창세기 44:17 · 본디새김

요셉이 팔려 갔을 때 형들은 동생을 잃은 채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제는 베냐민을 잃은 채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집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요셉이 그 길을 직접 열어 줍니다.

요셉은 평안히 돌아가라고 하지만, 유다는 동생 없이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평안일 수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가지 가능성은 오래전에 요셉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의 애원을 외면한 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42:21–22). 다른 가능성은 유다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면서, 죄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찾아내셨다’고 합니다. 이 반복은 독자에게 두 가지 서로 다른 발견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리의 종들의 죄를 찾아내셨습니다」라는 말은 유다가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은잔을 발견되게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잔은 요셉이 넣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창세기 44:18–29 본문 →

고발에 맞서는 대신 이야기를 시작하다

유다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부디 들어 주십시오, 나리. 나리의 종인 제가 나리께 직접 말씀 한마디 드리게 해 주십시오. 나리의 종인 제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4:18 · 본디새김

유다는 자신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상대가 파라오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분노를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합니다.

유다는 베냐민이 잔을 훔치지 않았다고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관리인이 어떻게 자루를 수색했는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가족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있고, 막내아들이 있으며, 그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법적인 혐의에서 시선을 돌려, 그 혐의에 따라 처벌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나리께 말씀드렸습니다. 『저희에게는 늙으신 아버지와 그분이 노년에 얻으신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의 형은 죽었고, 그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으로는 그 아이만 홀로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사랑하십니다.』」창세기 44:20 · 본디새김

창세기 37장에서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는 가족 사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아버지가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베냐민을 잃는 일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지를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자신이 받아야 할 사랑과 경쟁시키지 않고, 자신이 보호해야 할 관계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요셉이 죽었다고 믿고 있다

유다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자 나리의 종인 제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아 준 것을 너희도 알고 있다.』」창세기 44:27 · 본디새김
「『하나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 애가 틀림없이 찢겨 버렸다고 말했고, 지금까지 그 애를 보지 못했다.』」창세기 44:28 · 본디새김

여기서 ‘내 아내’는 문맥상 라헬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에는 가족 안에 존재했던 불균형한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말을 수정하거나 항의하지 않고 요셉에게 그대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유다가 이 말을 전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요셉입니다.

유다는 이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집트 통치자에게 아버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래전에 아버지를 속여 요셉이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제 살아 있는 요셉 앞에서 아버지가 그를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과거의 거짓말이 현재의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연설 속에서 되풀이되는 아버지

유다의 긴 연설은 대부분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사건을 다시 들려줍니다.

유다는 사건을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들을 아버지의 처지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나이와 두려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아들을 잃었을 때 닥칠 결과입니다.

유다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질문을 향해 모아 갑니다.

베냐민을 이곳에 남겨 두고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아버지의 목숨이 그 애의 목숨에 매여 있으므로」

창세기 44:30–32 본문 →

서로에게 묶여 있는 생명

「이제 제가 나리의 종인 제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 그 애가 저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의 목숨이 그 애의 목숨에 매여 있으므로,」창세기 44:30 · 본디새김

유다는 아버지와 베냐민의 관계를 단순한 애착이나 선호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라지면 아버지의 삶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애가 없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리의 종들인 저희가 백발이 된 나리의 종, 저희 아버지를 슬픔 속에 스올로 내려가시게 할 것입니다.」창세기 44:31 · 본디새김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다는 베냐민을 남겨 두고 돌아가는 행동이 중립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집트 법정에서 책임을 면한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져야 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제시한 평안과 유다가 생각하는 평안

17절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 올라가라.」

형제들 자신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너진다면 그들의 귀환을 평안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유다는 자기 혼자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과 가족이 함께 평안해지는 것이 같은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한 다음,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약속을 꺼냅니다.

「나리의 종인 제가 아버지께 그 애를 보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그 애를 아버지께 데려오지 못하면, 저는 평생 아버지께 죄를 진 사람으로 남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창세기 44:32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유다는 베냐민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43:9). 이제 그 약속이 실제로 시험받는 순간이 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앞선 22절에는 베냐민이 아버지를 떠나면 누가 죽는지를 둘러싼 문법적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의 주어를 이어 베냐민에게 위험이 닥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고, 문맥에 따라 아버지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0–31절에서는 유다의 강조점이 분명합니다.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제가 그 애 대신 노예로 남게 해 주십시오」

창세기 44:33–34 본문 →

마침내 드러난 유다의 선택

유다는 자신의 연설을 결론으로 이끕니다.

「그러니 이제 나리의 종인 제가 그 애 대신 나리의 노예로 남게 해 주십시오. 그 애는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창세기 44:33 · 본디새김

창세기 37:26–27에서 유다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는 대신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동생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합니다.

과거에 유다는 동생을 내어주고 자신의 자유를 지켰습니다.

지금 유다는 자신의 자유를 내어주고 동생을 지키려 합니다.

유다가 달라졌다는 가장 강한 증거는 자신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선택을 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희생정신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베냐민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할 때 아버지에게 닥칠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맺은 관계와 자신이 맡은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행동입니다.

이는 자신이 없더라도 아버지가 베냐민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려는 선택입니다. 그는 자신이 잃게 될 자유보다 아버지가 잃게 될 아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질문

유다는 이렇게 말하며 연설을 끝냅니다.

「그 애가 저와 함께 있지 않은데, 제가 어떻게 아버지께 올라가겠습니까? 아버지께 닥칠 불행을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창세기 44:34 · 본디새김

그는 노예가 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보는 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슬픔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막아야 할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유다의 변화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창세기 44장에 이르러 유다의 변화는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앞서 창세기 38장에서도 유다는 자신의 행동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는 다말에게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로 맡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물건들이 증거로 제시되자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 여자가 나보다 의롭다.」 (창세기 38:26의 뜻)

이 사건과 창세기 44장을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말과의 사건이 유다의 내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유다가 자신의 책임을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8장에서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인정합니다.

43장에서는 베냐민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합니다.

44장에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놓겠다고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책임을 약속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유다는 이제 세 번째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관리인은 형제들에게 ‘선을 악으로 갚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표현에서도 악을 선의 자리에 놓는다는 뜻으로 같은 전치사가 사용됩니다. 두 구절의 표현이 동일한 문법적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같은 낱말이 서로 다른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은 의미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 고발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동생 대신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는 요청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신함의 이미지는 창세기 22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순간, 그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들 대신 번제로 바칩니다(22:13). 창세기 22장에서는 숫양이 이삭 대신 제물로 바쳐집니다. 창세기 44장에서는 유다가 베냐민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이 창세기 44:33을 직접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이나 명시적인 예언의 성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행동을 둘러싼 주제적·유형론적 읽기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질문은 오래전 창세기 37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뒤, 르우벤은 구덩이로 돌아왔다가 요셉이 사라진 것을 보고 말합니다. 「아이가 없구나.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창세기 37:30의 뜻) 37장에서 르우벤이 돌아왔을 때 요셉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44장에서 유다는 아직 베냐민을 지킬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복은 마음의 변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창세기 44:1–34 본문 →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놓습니다.

물론 여기서 무조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유다가 노예로 남겠다고 한 것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선택입니다. 그가 감당하려는 책임과 가족의 역사, 베냐민에게 씌워진 부당한 혐의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관계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근거로 이 이야기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의 제안이 의미 있는 이유는 누군가 그에게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지켜야 할 관계를 위해 스스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4장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요셉의 집입니다.

형제들에게는 자유롭게 떠날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제 유다는 다시 동생 없이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동생 없이 돌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44장은 바로 그 말에서 멈춥니다.

요셉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요청을 받아들였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베냐민 역시 아직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오래전에 동생을 노예로 팔았던 형이 이제 동생 대신 노예로 남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형에게 팔려 왔던 요셉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