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8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눈이 어두워진 야곱이 본 것

야곱은 이제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졌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 손자들을 가까이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 가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동을 합니다.

그는 요셉의 두 아들에게 복을 빌면서 두 손을 엇갈려 놓습니다. 오른손은 맏아들 므낫세가 아니라 동생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손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대답합니다. 「안다, 내 아들아, 안다.」

왜 야곱은 그렇게 했을까요?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두 손자의 앞날을 예고하는 일일까요?

창세기 48장은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면서, 그 복이 인간이 정해 놓은 순서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장의 깊이는 형보다 동생이 더 큰 복을 받았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평생 복을 얻으려고 애썼던 야곱이 이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며 그 복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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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야곱이 다시 꺼낸 약속

창세기 48:1–7 본문 →

병든 아버지 앞에 두 아들을 데려온 요셉

47장에서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의 시신을 조상들의 무덤에 묻어 달라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48장은 그 뒤에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자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찾아옵니다. 야곱의 죽음은 이제 한 세대의 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조상들의 약속을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지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은 요셉의 성공이나 손자들의 장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래전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다. 「엘 샤다이께서 가나안 땅의 루스에서 내게 나타나 내게 복을 주셨다.」창세기 48:3 · 본디새김

루스는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창세기 28:19; 35:6).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나중에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에게서 다시 복을 받았습니다. 특히 야곱이 이어서 전하는 말씀은 창세기 35:9–12와 가깝습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네게 자손이 생기게 하고 너를 번성하게 하여 여러 민족의 무리가 되게 하겠다. 네 뒤를 이을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영원한 소유지로 주겠다.』」창세기 48:4 · 본디새김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는 요셉의 두 아들은 가나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났습니다(창세기 41:50–52). 어머니 아스낫 역시 이집트 제사장의 딸입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아이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요?

야곱은 바로 그 문제에 대답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아들이 될 것이다」

5절에서 야곱은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찾아 이집트에 오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두 아들은 내 아들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아들이 될 것이다.」창세기 48:5 · 본디새김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혈통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이제 가족의 상속과 가계에서는 야곱의 아들로 인정됩니다. 이것을 입양에 해당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은 야곱의 첫째와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자신의 맏아들들과 동등한 가계상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로만 가계를 잇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을 통해 각각의 가계를 이루게 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훗날 별개의 지파로 등장합니다. 특히 가나안 땅의 분배에서 두 지파는 각각 상속받을 몫을 가집니다(여호수아 16–17장).

결과적으로 요셉의 가계는 형제들에 비해 두 몫을 받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역대상 5:1–2는 후대에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일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가 요셉의 아들들에게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창세기 35:22의 사건과 연결된 후대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8장 자체에서 야곱은 르우벤을 벌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성과 땅을 이야기하고, 그 약속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요셉의 두 아들을 세웁니다.

야곱의 선언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재산을 더 주는 일인 동시에, 이집트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조상들의 약속을 이어받는 가계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야곱은 6절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이후에 요셉에게 태어나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은 요셉의 자녀로 남고, 상속에서는 형들의 이름 아래 포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손자에게 부여한 지위가 일반적인 가족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상속과 관련된 특별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야곱은 5절에서 두 아이의 이름을 「에브라임과 므낫세」 순서로 말합니다. 출생 순서는 므낫세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직 손을 얹지도 않았는데 동생 에브라임을 먼저 부릅니다.

뒤에 일어날 손의 교차가 이 선언에서부터 조용히 예고되는 셈입니다.

왜 갑자기 라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7절에서 야곱은 갑자기 라헬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밧단에서 돌아올 때 라헬이 가나안 땅을 지나는 길에 내 곁에서 죽었다.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아직 얼마간 길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를 거기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묻었다.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다.」창세기 48:7 · 본디새김

지금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상속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래전에 죽은 라헬의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자녀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라헬의 죽음이 언급된다는 사실은, 이 가족의 새로운 시작에 오래된 상실의 기억이 함께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더욱이 라헬은 조상들의 공동묘지인 막벨라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길에서 그녀를 묻어야 했습니다.

이 점은 야곱이 앞 장에서 자신을 조상들의 무덤에 묻어 달라고 했던 부탁과도 대비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면서도, 오랫동안 사랑했던 아내가 길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어지고 있지만, 그 약속을 받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는 상실과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야곱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려는 복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가진 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억까지 안고 살아온 사람이 전하는 복입니다.

조금 더 깊이

라헬은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또한 그녀는 야곱에게 벧엘에서 다시 약속이 주어진 뒤,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창세기 35:16–20).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라헬의 죽음은 가까이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48장에서도 야곱은 그 약속을 먼저 기억하고 곧이어 라헬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라헬은 요셉에게 두 손자를 보지 못한 채 죽은 어머니입니다. 이제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라헬의 죽음을 보상하기 위해 두 손자를 입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동기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다시 보게 된 아들과 처음 품에 안는 손자들

창세기 48:8–12 본문 →

「이들은 누구냐?」

8절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보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냐?」창세기 48:8 · 본디새김

이미 앞에서 그 아이들의 이름을 말했던 야곱이 왜 다시 누구냐고 묻는 것일까요? 야곱의 시력 문제를 설명하는 문맥 속에서, 질문과 대답은 손자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제게 주신 제 아들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말했다. 「그들을 내게 좀 데려다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마.」창세기 48:9 · 본디새김

이집트는 요셉에게 형제들의 배신 이후 끌려온 땅이었고, 종살이와 감옥 생활을 경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요셉의 말 속에서 두 아들은 단순히 요셉이 이집트에서 쌓아 올린 성공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입니다.

그는 입을 맞추고 끌어안습니다. 여기서 가족 관계에 관한 선언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앞에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했고, 이제는 그들을 품에 안습니다.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곱은 요셉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보아라, 하나님께서 네 자손까지 내게 보여 주셨구나.」창세기 48:11 · 본디새김

야곱은 실제로 눈이 어두워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셉의 자손까지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문맥에서 「보여 주셨다」는 말은 다시 만나고 경험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의 눈은 늙어 어두워졌지만, 그의 삶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가족이 다시 만난 일을 그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감격적인 장면 다음에 요셉은 두 아들을 야곱의 무릎 곁에서 데리고 나와 절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야곱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져 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이 질문은 아이들이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축복을 앞두고 요셉이 아들들의 신분을 밝히는 것입니다. 두 의미가 반드시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무릎 곁에 있었다는 표현은 앞에서 야곱이 두 손자를 끌어안았던 장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아이들을 무릎에 가까이 두고 품에 안은 뒤, 축복을 받도록 다시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가족 관계에서 무릎에 아이를 두는 행동은 출생이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되기도 합니다(창세기 30:3; 50:23). 그러나 48:12 자체가 별도의 정형화된 입양 의식을 묘사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엇갈린 두 손 — 야곱은 왜 동생을 앞세웠는가

창세기 48:13–20 본문 →

요셉이 정한 자리와 야곱이 선택한 자리

요셉은 두 아들을 야곱 앞에 세웁니다.

그는 에브라임을 자기 오른손으로 이끌어 야곱의 왼편에 세우고, 므낫세를 자기 왼손으로 이끌어 야곱의 오른편에 세웁니다. 그러면 야곱은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맏아들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동생의 머리에 얹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과 오른손은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우월한 지위나 특별한 권위와 연결됩니다. 요셉 역시 이런 순서를 당연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 손을 엇갈려 놓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른손을 뻗어 동생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다. 므낫세가 맏아들이었지만 그는 두 손을 엇갈려 놓았다.창세기 48:14 · 본디새김

뒤이어 요셉이 손을 바로잡으려 하자 야곱이 거절하는 장면이 그 행동이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과거에는 속여서 얻었지만, 이제는 알고서 준다

야곱이 젊었을 때 아버지 이삭도 눈이 어두워져 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형 에서인 것처럼 꾸미고 아버지에게 나아갔습니다. 이삭은 아들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야곱은 형에게 돌아갈 복을 받았습니다(창세기 27장).

그런데 이제 야곱 자신이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야곱을 속이지 않습니다. 요셉은 맏아들이 누구인지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확한 순서에 따라 두 아들을 세우려 합니다.

야곱도 자신이 누구를 축복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항의하자 야곱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며 말했다. 「안다, 내 아들아, 안다. 그도 한 민족이 되고, 그도 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크게 되고, 그 동생의 후손은 수많은 민족을 이룰 것이다.」창세기 48:19 · 본디새김

옛날의 이삭은 속임수 때문에 누구를 축복하는지 몰랐습니다. 지금의 야곱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압니다.

창세기 48장의 복은 속임수로 빼앗는 복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복입니다.

므낫세도 복을 받는다

요셉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못마땅해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오른손을 이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 주십시오.」창세기 48:18 · 본디새김

자신의 눈으로는 두 아이의 순서가 분명합니다. 므낫세가 먼저 태어났고, 따라서 오른손으로 축복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대답합니다. 「그도 한 민족이 되고, 그도 크게 될 것이다.」

에브라임이 앞선다는 것은 므낫세가 버림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복을 받지만, 그들의 장래에 서로 다른 위치가 주어집니다.

야곱의 오른손이 에브라임에게 향했지만,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두 아이 모두 그의 손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누가 결정하는가

야곱이 에브라임을 앞세운 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에브라임을 먼저 축복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손을 엇갈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는 이 선택을 통해 약속의 계승이 맏아들의 순서에만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조건 통념을 뒤집으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야곱이 동생을 앞세웠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나중에 온 사람이 먼저 온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법칙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를 알고 있었고, 야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순서를 선택했습니다. 이 장면의 긴장은 무지와 지식의 대립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질서와 장차 펼쳐질 미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사이에서 생깁니다.

두 형제의 이름이 함께 남다

20절에서 야곱은 두 손자를 위한 축복을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말로 만듭니다.

그는 그날 그들에게 복을 빌며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희를 본보기로 삼아 『하나님께서 너를 에브라임처럼, 므낫세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하며 복을 빌 것이다.」 이렇게 그는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창세기 48:20 · 본디새김

형과 동생 사이의 순서는 달라졌지만, 두 사람 모두 다음 세대가 바라볼 복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의 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장은 이미 앞에서 야곱이 했던 기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얼마나 크게 될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그들을 축복하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에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예상되던 순서가 바뀌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세기 4:4–5). 이삭은 형 이스마엘보다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되었습니다(17:19–21). 야곱 역시 형 에서보다 앞서는 복을 받았습니다(25:23; 27장).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7:20). 에서에게도 자신의 삶과 후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36장). 창세기의 선택 이야기는 특정한 가계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선택받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복도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훗날 각각 지파를 이루고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습니다(여호수아 16–17장).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끈 여호수아가 나옵니다(민수기 13:8, 16). 이후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됩니다(호세아 4:17 등). 다만 모든 시대에 에브라임 지파의 인구가 므낫세보다 많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만 비교해도 두 지파의 규모와 관계는 시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더 크게 된다」는 말씀을 단순히 모든 시기의 인구수가 더 많다는 뜻으로 제한하기보다는,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차지할 두드러진 위치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또한 「그 동생의 후손은 수많은 민족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정치적 구조나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야곱의 마지막 신앙 고백 — 나를 목자처럼 돌보신 하나님

창세기 48:15 본문 →

15–16절은 창세기 전체에서 야곱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상들이 그 앞에서 걸어온 하나님

먼저 야곱은 하나님을 조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소개합니다.

그는 요셉에게 복을 빌며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앞에서 걸어온 하나님, 내가 살아온 동안 오늘까지 나를 목자처럼 돌보신 하나님,」창세기 48:15 · 본디새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으셨고, 이삭에게 약속을 이어 주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그 하나님을 자신의 손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야곱은 조상들이 그런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나를 목자처럼 돌보신 하나님」

두 번째 표현은 더욱 개인적입니다.

야곱은 평생 가축을 돌보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양과 염소를 쳤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가축을 지켰습니다(창세기 31:38–40). 가축을 먹일 곳을 찾아 이동했고, 가족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위험에 맞섰습니다.

평생 양 떼를 돌보던 야곱이 마침내 자신을 돌보신 목자가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동안 오늘까지」라는 시간 표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신 시기를 좋은 일이 있었던 때로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의 생애에는 도망과 두려움, 착취당한 세월, 가족의 갈등,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긴 세월 전체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앞 장에서 파라오에게 자신의 삶이 짧고 고달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과 지금의 고백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 삶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려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주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모든 재앙에서 건져 주신 천사」

「나를 모든 재앙에서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 이 아이들을 통해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이어지고, 이 아이들이 이 땅 가운데서 크게 불어나기를 바란다.」창세기 48:16 · 본디새김

야곱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을 구하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한다는 데 본문의 초점이 있습니다.

왜 야곱은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손자들에게 말하는가

야곱은 손자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어떤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말합니다. 그다음에 그 하나님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는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들에게 이집트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도 연결합니다.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신의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과 후손들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는 요셉에게 복을 빌며 말했다」고 시작하지만, 실제 축복의 내용은 두 아들을 향합니다. 요셉에게 주어지는 복은 두 아들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자신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요셉에게도 복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나를 목자처럼 돌보신 하나님」은 직역하면 「나를 먹이고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목자가 양을 치고 돌보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훗날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야훼를 목자로 고백하는 말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편의 목자 이미지보다 먼저, 실제 목자로 살아온 야곱 자신의 경험에서 이 비유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져 주신」에 해당하는 동사는 누군가를 되찾거나 구속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가족의 재산을 되찾거나 친족을 보호하는 책임과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위험에서 탈출시켜 주었다는 말보다 관계에 따른 구원과 보호라는 의미를 더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라반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서 야곱에게 말씀했고(창세기 31:11–13), 야곱은 귀향길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습니다(32:1–2). 그런 경험들이 여기서 말하는 천사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사가 하나님과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본문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15–16절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조상들의 하나님, 목자처럼 돌보시는 하나님, 건져 주신 천사가 하나의 축복 안에서 이어지고, 결국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로 모입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만으로 하나님과 천사가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고 확정하거나, 천사를 신약의 특정 인물과 직접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의 이름이 손자들에게 이어진다는 것

창세기 48:16–20 본문 →

16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아이들을 통해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이어지고」.

여기서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계속 태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 두 아이의 가계를 통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이제 단순히 요셉의 개인적인 가계를 잇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어져 온 가족의 역사 안에 들어옵니다. 이는 앞에서 야곱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선언과 연결됩니다.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어떤 과거를 물려받고 어떤 미래를 이어 갈 것인지를 새롭게 규정합니다.

핵심은 이집트 출생이라는 배경이 그들이 조상들의 약속을 이어받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크게 불어나기를」이라는 말은 창세기의 창조와 족장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번성의 주제를 이어 갑니다. 야곱은 두 손자를 통해 후손이 크게 번성하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여러 민족의 무리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말씀이, 이제 그의 축복 속에서 다음 세대를 향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야곱이 여전히 가나안을 바라보다

창세기 48:21–22 본문 →

「나는 죽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며」

축복을 마친 야곱은 요셉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아라, 나는 죽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며 너희를 너희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세기 48:21 · 본디새김

하나님은 과거 야곱에게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제 그 약속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셉과 그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후손들이 이집트를 떠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들의 미래가 이집트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후손에게 남기는 마지막 확신은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약속을 이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가족을 떠나 먼 곳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함께할 것이며 다시 이 땅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8:15). 이제 야곱은 생애의 끝에서 비슷한 약속을 후손들에게 전합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후손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네 형제들보다 한 몫을 더 주었다」

마지막 22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나는 네게 네 형제들보다 한 몫을 더 주었다. 그것은 내가 내 칼과 내 활로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창세기 48:22 · 본디새김

「한 몫」은 형제들보다 더 받는 한 몫의 상속을 가리킬 수도 있고, 세겜이라는 특정 장소와 관련된 토지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특별한 몫을 주면서 그 몫이 세겜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관여했던 어떤 무력 충돌이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야곱이 자신의 가족이나 집안의 행위를 대표하여 「내 칼과 내 활」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고대의 다른 해석 전승에서는 이 표현을 문자적인 무기보다 기도와 간구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 자체는 분명히 칼과 활을 말하며,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본문에 없는 전쟁을 만들어 내거나, 반대로 칼과 활을 반드시 비유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형제들보다 특별한 몫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소유권 또는 취득 행위와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독립적인 상속 지위를 부여한 것은 요셉의 가계가 추가적인 몫을 받는 일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48장 마지막의 상속 선언은 앞부분에서 시작된 일을 마무리합니다.

죽어 가는 야곱은 자신이 가진 것을 넘겨주는 동시에, 후손들이 장차 돌아갈 땅과 그 안에서 차지할 몫을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에 살고 있는 이 가족에게 가나안의 상속은 여전히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이미 중요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몫」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셰켐 에하드입니다. 셰켐은 어깨나 산등성이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고, 지명 「세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창세기 33:19에서 야곱은 세겜 근처의 밭을 은을 주고 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24:32는 훗날 이집트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의 땅에 묻었다고 기록합니다. 그곳은 야곱이 샀던 밭이며 요셉 자손의 소유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48:22는 장차 요셉의 가계가 세겜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역사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공격한 사건이 나오지만, 야곱이 직접 칼과 활을 들고 땅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아들들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다고 말합니다(창세기 34:30). 다음 장의 축복에서도 그들의 폭력을 다시 언급합니다(49:5–7). 따라서 48:22가 그 사건을 야곱 자신의 무력 정복으로 단순히 재서술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

창세기 48:1–22 본문 →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그 돌보심이 손자들에게도 이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는 미래를 자기 손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 손자의 장래를 축복하지만, 결국 그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손은 아이들의 머리 위에 놓여 있지만, 그가 부르는 이름은 하나님입니다.

한때 눈먼 아버지를 속여 복을 받았던 야곱이 이제 눈이 어두워진 채 두 손자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그가 자신의 손자들에게 전하는 것은 맏아들의 자리보다 더 큰 것입니다. 평생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 모든 재앙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자신이 죽은 뒤에도 후손들과 함께하실 하나님에 관한 고백입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자신의 손을 두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 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