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마지막 권면
머물지 않는 도시에서 남는 것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은 뜻밖에도 아주 평범한 말로 시작합니다.
「형제 사랑이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저자는 하늘의 성소와 영원한 언약, 하나님의 왕좌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자 손님을 맞아들이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기억하고, 혼인을 귀하게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늘의 성소를 이야기하던 글이 갑자기 일상생활의 윤리로 내려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13장을 끝까지 읽으면 이것이 단순한 주제 전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형제 사랑이 머물러 있게 하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우리에게는 여기 머물러 있는 도시가 없」다고 합니다. 그 사이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라는 선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세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마지막 장의 질문이 드러납니다.
영원히 머물 수 없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지속하며 살아야 합니까?
땅의 도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재산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고, 사람들이 의지하던 지도자들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지금의 도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을 지속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버리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13장은 네 움직임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1–6절에서는 사랑과 손님 대접, 혼인과 돈에 관한 권면을 제시합니다. 7–16절에서는 변함없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믿음과 예배의 자리를 다시 정합니다. 17–19절에서는 공동체의 지도자와 글쓴이 자신이 독자들과 맺은 관계를 드러내고, 마지막 20–25절은 하나님이 독자들을 갖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와 개인적인 인사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죄를 위한 새로운 속죄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드려야 할 것은 찬미와 고백, 좋은 일과 나눔입니다.
완성된 희생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긴 제사장 논증을 마치고 마지막에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오는 이유입니다.
형제 사랑에서 낯선 사람의 사랑으로
첫 문장은 매우 짧습니다.
형제 사랑이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십시오.히브리서 13:1 · 본디새김
형제 사랑은 형제나 가족 같은 관계 안에서 나누는 사랑을 가리키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다른 단어가 등장합니다.
손님 대접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대접으로 어떤 이들은 모르는 채 천사들을 대접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2 · 본디새김
손님 대접은 낯선 사람을 사랑하고 환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두 단어는 모두 사랑을 나타내지만, 사랑을 받는 대상이 다릅니다.
첫째는 형제입니다.
둘째는 낯선 사람입니다.
저자는 공동체 안에서 이미 서로 알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라고 말한 뒤, 그 사랑이 낯선 사람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제 사랑은 공동체의 결속만을 강화하는 폐쇄적인 사랑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환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했다
2절에 붙은 이유는 창세기 18–19장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곁에서 찾아온 세 사람을 맞이합니다. 그는 물을 가져와 발을 씻게 하고 음식을 준비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방문은 여호와야훼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롯 역시 소돔에 찾아온 두 사람을 집으로 맞아들입니다. 창세기 19장은 그들을 천사로 소개하지만, 롯이 처음부터 그들의 정체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특정 인물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가 이 구절의 주요 배경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두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방문자의 정체가 특별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환대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환대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환대의 가치는 상대방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보는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낯선 사람의 가치를 미리 계산하지 말라고 권하는 셈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갇힌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3절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다시 바뀝니다.
갇힌 이들을 함께 갇힌 사람처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을 지닌 사람으로서 학대받는 이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리서 13:3 · 본디새김
「기억하십시오」에는 「함께 갇힌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여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과거에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10:34에서 저자는 그들이 갇힌 이들과 함께 아파했다고 말했고, 이제 마지막 장에서 그 사랑을 잊지 말고 계속하라고 권합니다.
두 번째 문장의 「여러분도 몸을 지닌 사람으로서」는 자신도 언젠가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과 고난당하는 사람이 같은 육체적 연약함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은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둡니다. 어느 방향으로 읽든 강조점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통을 느끼고, 배고프고, 외로우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 역시 그런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형제 사랑을 구체적인 몸의 현실로 끌어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감정을 품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머물 자리를 마련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과 고통을 나누며, 학대받는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몸으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형제 사랑은 그리스어로 필라델피아(φιλαδελφία), 손님 대접은 필록세니아(φιλοξενία)입니다. 두 단어는 모두 사랑을 나타내는 필로- 계열의 표현을 포함하지만, 사랑을 받는 대상이 다릅니다.
혼인과 돈 — 무엇을 귀하게 여길 것인가
4절과 5절은 얼핏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혼인과 성적인 관계에 관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돈에 대한 태도를 다룹니다. 그러나 두 구절에는 공통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을 귀하게 여기며, 무엇을 삶의 만족과 안전의 근거로 삼을 것입니까?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
혼인은 모두에게 귀해야 하고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않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이들과 간음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4 · 본디새김
그리스어 원문에는 명령형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혼인은 귀하다」라는 진술로도,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는 권면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뒤가 실천적인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면적 읽기는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모두에게」는 혼인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혼인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혼인해야 한다는 명령은 아닙니다. 저자의 관심은 혼인의 의무화가 아니라 그 관계의 존귀함입니다.
저자는 혼인의 가치를 당시 사회의 관습에 기대어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혼인은 사적인 즐거움만을 위한 관계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향한 신실함과 책임이 요구되는 관계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삶의 근거
돈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넉넉히 여기십시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코 너를 놓지 않고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히브리서 13:5 · 본디새김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부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돈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가장 근본적인 안전과 만족의 근거로 삼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유가 뜻밖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에 왜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약속이 등장합니까?
저자는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적인 부족을 결코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을 이야기합니다. 이 약속은 신명기 31:6, 8과 여호수아 1:5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할 때, 그리고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본래 문맥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감당해야 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전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재산이 필요 없다는 낭만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일과 돈을 절대적인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일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겠는가
6절에서는 시편 118:6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겠는가?」히브리서 13:6 · 본디새김
독자들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겠는가?」는 다른 사람이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 시편을 인용합니다.
사람의 위협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돈을 더욱 움켜쥐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은 그런 두려움이 삶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이 단순한 검소함의 미덕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무엇을 의지하며 계속 살아가야 합니까? 다음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들에게 말씀을 전했던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그들보다 더 근본적인 한 분을 보여 줍니다.
지도자들은 떠나가도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시다
7절에서 저자는 다시 「기억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독자들을 이끌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이끄는 이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처신이 어떤 끝을 맺었는지 눈여겨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브리서 13:7 · 본디새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높은 지위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간 믿음의 모습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지도자들의 권위나 직책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했던 방식과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 라합과 예언자들의 믿음을 보여 주었고, 이제는 독자들이 실제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믿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믿음의 모범은 먼 과거의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던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처신이 어떤 끝을 맺었는가
「처신이 어떤 끝을 맺었는지」는 지도자들이 생애를 마친 모습으로도, 그들이 살아간 방식이 낳은 결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충분히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유명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서 13: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흔히 변함없는 예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독립적인 교리 문장으로 읽힙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놓인 위치를 보면 더 구체적인 뜻이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했고, 뒤에서는 낯선 가르침에 휩쓸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이 선언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갈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가르침이 등장하여 공동체를 흔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전해 들었던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지만, 믿음의 최종적인 기준은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지도자들의 권위는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은 히브리서 첫 장과도 이어집니다. 1:12에서 저자는 아들을 두고 「당신은 같은 분이시고」라는 시편의 언어를 인용했고, 이제 마지막 장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 밝힙니다.
예수님.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공동체의 믿음과 가르침의 중심에 계십니다.
낯선 가르침에 휩쓸리지 말라
9절은 그 선언을 실제적인 문제에 적용합니다.
여러 가지 낯선 가르침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먹을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마음이 굳게 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 먹을 것을 따라 걸어온 이들은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히브리서 13:9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낯선 사람을 환대하라고 했습니다. 낯선 사람은 사랑으로 맞아들여야 하지만, 낯선 가르침은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가르침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먹을 것」이 정확히 어떤 관습이나 가르침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유대교의 음식 규정이나 제사 음식에 관한 관습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공동체 안에서 구원이나 정결을 얻는 수단으로 강조된 특정한 음식 관련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제사장 논증을 고려하면 유대교의 제의적 음식 관습과 연결하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저자가 염두에 둔 구체적인 집단이나 규칙을 재구성할 만큼 정보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핵심은 음식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굳게 세우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자는 먹을 것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는데, 특정한 음식 규정을 따르는 일이 그 은혜를 대신하여 마음을 굳게 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음 절에서 다시 제단과 제사로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크바시스(ἔκβασις)는 어떤 일의 결과나 결말을 가리킵니다. 생애를 마친 모습으로 읽으면 지도자들은 이미 죽었으며, 독자들은 그들의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믿음을 기억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살아간 방식이 낳은 결과로 읽으면 반드시 그들이 죽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 혹은 순교했는지를 기록하지 않으므로 순교한 지도자들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10절은 짧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선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습니다. 장막에서 예배하는 이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습니다.히브리서 13:10 · 본디새김
저자는 왜 여기서 제단 이야기를 꺼냅니까? 앞절에서 먹을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마음이 굳게 되어야 한다고 한 저자는, 이제 옛 제사 제도의 식사 관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제사장들이 어떤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었지만(레위기 6:26),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 속죄를 이루는 특정한 제물은 먹지 못했습니다(레위기 6:30). 히브리서는 바로 이 차이를 사용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무엇인가
저자는 10절의 「제단」이 정확히 무엇인지 직접 정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는 견해, 예수님 자신이나 그분의 희생이 가져온 속죄의 유익을 가리키는 비유로 보는 견해, 성찬과 연결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본문에 제단이 성찬상이라고 직접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하나의 물리적 대상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보다는 문맥에서 그 역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제단의 모양이나 위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속죄 제물의 몸이 어디에서 처리되는지 말합니다.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간 피, 진 밖에서 태워진 몸
죄를 위해 그 피가 대제사장을 통해 성소로 들여지는 짐승들의 몸은 진 밖에서 태워지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11 · 본디새김
이것은 특히 레위기 16:27의 속죄일 규정과 연결됩니다. 그날 죄를 위한 제물로 바쳐진 황소와 염소의 피는 성소 안으로 들여졌지만, 그 짐승들의 몸은 진 밖으로 가져가 불태워졌습니다. 하나의 제물에 서로 다른 두 방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피는 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몸은 진 밖으로 나갑니다.
가장 거룩한 곳과 공동체의 경계 밖이라는 두 장소가 하나의 속죄 제물 안에서 연결됩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의 죽음에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히브리서 13:12 · 본디새김
복음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소가 도시 밖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요한복음 19:17–20). 히브리서는 그 역사적 장소를 속죄일에 진 밖으로 옮겨져 태워졌던 제물의 모습과 연결하여, 새 언약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희생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13절은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의 권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의 욕을 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시다.히브리서 13:13 · 본디새김
히브리서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고, 우리 역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진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진 밖으로 이어집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가 영광스럽게 환영하는 중심 장소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문 밖으로 끌려나가시어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받으신 수치와 거절을 피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욕을 지고」는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니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분께 속했다는 이유로 수치와 거절을 당할 수 있더라도 그분을 버리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그리스도의 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11:26과도 연결됩니다. 모세는 왕실의 특권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곳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사회에서 소외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충실하게 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 비난이 곧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판받는 일과 예수님께 충실하기 때문에 수치를 감당하는 일은 구별됩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고난 자체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여기 머물러 있는 도시는 없다
14절은 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여기 머물러 있는 도시가 없고, 도리어 앞으로 올 도시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14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터를 가진 도시를 기다렸고(11:10), 독자들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나아왔다고 선언되었습니다(12:22). 이 문장은 땅에 있는 모든 도시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어떤 도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종적인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도시 안에 속한다는 것은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와 연결되었습니다. 반대로 도시 밖으로 추방되거나 쫓겨난다는 것은 수치와 위험을 뜻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의 수치를 지고 진 밖으로 나가라고 권합니다.
왜 그런 수치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곳의 도시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미래의 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리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잃은 도시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도시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인정이 전혀 필요 없는 초인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인정과 소속이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는 서로 반대되는 듯한 두 방향이 있습니다.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안으로 맞아들이는 일, 그리고 예수님의 수치를 지고 진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진 밖으로 나가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사회적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볼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13:13에 직접 적힌 명령을 넘어서는 신학적 적용이지만, 그 권면을 앞의 환대와 나눔의 명령과 함께 읽으면 이런 방향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제단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는 견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셨으므로 그 십자가가 새 언약의 제단이라고 봅니다. 성찬과 연결하는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희생에 참여한다는 의미에 근거하며, 여러 전통의 주석에서 이 해석들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또 12절의 해석에서는 두 본문을 구별해야 합니다. 레위기 16장의 본래 규정은 이스라엘 진영의 정결과 속죄 예식에 관한 것이며,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처형되실 것이라고 직접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그 예식의 구조를 예수님의 희생과 연결하는 유형론적 해석을 제시합니다.
더 이상 속죄 제물은 없지만, 드릴 제물은 남아 있다
15절에는 전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 찬미의 제물을 언제나 하나님께 올려 드립시다. 곧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말입니다.히브리서 13:15 · 본디새김
앞에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죄를 위한 제물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장에서 다시 제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은 죄를 속하기 위해 반복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며 이웃과 나누는 삶은 여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고, 저자는 바로 그것을 제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입술에서 열매가 맺힌다
「입술의 열매」라는 표현은 호세아 14:2와 연결됩니다. 호세아의 본래 문맥에서 예언자는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권하고, 그들은 말로써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여호와야훼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이 입술로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고 찬미합니다.
제물의 언어가 입술의 언어와 만납니다.
저자는 이 제물을 「언제나」 올려 드리라고 합니다. 속죄를 위해 같은 희생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께 대한 찬미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통해 드리는 찬미는 계속됩니다.
찬미가 좋은 일과 나눔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좋은 일 하기와, 함께 나눔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제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16 · 본디새김
저자는 입술의 찬미만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제물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손님을 대접하고 갇힌 사람을 기억하라고 했던 사랑을,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모든 속죄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희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이 이제 삶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좋은 일과 나눔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앞에서 시편 40편을 인용할 때에는 하나님이 반복되는 제물보다 자신의 뜻을 행하는 일을 바라신다고 설명했습니다(10:5–10).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백성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찬미와 선행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입술은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손은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눕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14:2에서 전승된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우리 입술의 수소들」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입술로 드리는 찬양과 고백을 제물에 비유하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그리스어 구약은 「입술의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히브리서 13:15는 이 그리스어 표현과 연결됩니다.
이끄는 이들도 하나님께 셈을 바쳐야 한다
17절에서는 다시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7절과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7절에서는 말씀을 전했던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고, 17절에서는 지금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에게 협력하고 그들의 인도를 따르라고 권합니다.
여러분을 이끄는 이들은 셈을 바칠 이들로서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깨어 있으니, 그들을 따르고 그들에게 굽히십시오. 그들이 그 일을 탄식하며 하지 않고 기쁘게 하도록 말입니다. 그들이 탄식하며 그 일을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3:17 · 본디새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의 행정과 질서를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믿음과 삶을 살피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에는 「셈을 바칠 이들로서」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권위는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섬김입니다.
순종과 책임은 함께 놓인다
「그들을 따르고 그들에게 굽히십시오」를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구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따르다(πείθω)」로 옮긴 말은 설득을 받아들이거나 신뢰하여 따르는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굽히다(ὑπείκω)」는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들은 실제로 지도자들의 인도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지만,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명령할 절대적 권한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저자는 지도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그 말씀과 믿음에 연결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께 셈을 바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이 공동체를 잘 돌보도록 협력하라는 권면과 지도자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경고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검토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책임 있게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이 본문의 방향입니다.
탄식이 아니라 기쁨으로
17절의 마지막은 지도자들이 그 일을 기쁨으로 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하고, 공동체는 그들의 책임 있는 섬김에 협력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혼자 모든 짐을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반대로 지도자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공동체를 억누르는 관계는 이 본문이 지향하는 모습과 거리가 있습니다.
글쓴이 자신도 기도를 부탁한다
18절에서는 분위기가 더욱 개인적으로 바뀝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좋은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면서 말입니다.히브리서 13:18 · 본디새김
믿음을 붙들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지도자들에게 협력하라고 권했던 저자가 이제 자신도 독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역시 공동체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앞서 양심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깨끗하게 되는 내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글쓴이는 자신이 좋은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안에 아무런 죄도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신의 태도와 사역의 진실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18절의 「우리」는 19절에서 「내가」로 바뀝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더 빨리 돌아가게 되도록 이렇게 해 주기를 더욱 힘써 권합니다.히브리서 13:19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에서 이 글이 추상적인 신학 논문이 아니라 실제 관계 안에서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글쓴이와 독자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떨어져 있었는지, 왜 즉시 돌아가지 못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독자들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 일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기도에서 그는 다시 가장 큰 신학적 주제로 돌아갑니다.
양들의 큰 목자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하나님
저자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명령을 남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바라는지 기도합니다.
평화의 하나님, 곧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분이,히브리서 13:2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평화의 하나님, 영원한 언약의 피, 양들의 큰 목자,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예수님을 한꺼번에 모읍니다.
대제사장이 마지막에는 목자로 등장한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줄곧 대제사장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분이셨고,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기도에서는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부릅니다.
왜 하필 목자입니까? 목자는 양들을 다스리는 주인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먹이고 위험 가운데서 돌보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목자로 자주 묘사됩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야훼를 목자로 고백하고, 에스겔 34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양들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특히 에스겔 34:23은 하나님이 자신의 양들 위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고 말하며, 그 목자는 다윗의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서가 에스겔 34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는 목자라는 주제는 분명히 연결됩니다.
이 표현은 바로 앞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책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목숨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큰 목자가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인간 지도자들이 공동체를 돌보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돌봄의 최종적인 근거와 모범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마지막에서 부활이 직접 언급된다
20절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이 반복해서 강조되었습니다. 6:2와 11:35 등에도 부활이 언급되지만,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하나님의 행동이 직접 선언되는 중요한 자리는 바로 여기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치셨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기도에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8의 언약의 피,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 약속, 그리고 예수님의 피에 관한 앞선 논증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이 표현이 예수님의 부활과 정확히 어떤 문법적 관계를 맺는지는 해석이 나뉩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피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영원한 언약의 피와 관련된 큰 목자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읽기에서도 예수님의 피와 영원한 언약,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일이 하나의 구원 사건에 속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언약은 잠시 유효하다가 사라질 계약이 아닙니다.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과하시어 살아 계신 목자로 서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전치사구 엔 하이마티 디아테케스 아이오니우(영원한 언약의 피로)를 부활을 가리키는 동사에 연결하느냐, 「큰 목자」에 연결하느냐에 따라 위의 두 읽기로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갖추어 주시기를
21절은 이제 독자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로 이어집니다.
모든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갖추어 자기 뜻을 이루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보시기에 기쁜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이루시면서 말입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히브리서 13:21 · 본디새김
「갖추어(καταρτίζω)」로 옮긴 동사는 어떤 것을 알맞게 마련하거나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온전하게 갖추는 일을 뜻합니다. 이 동사는 히브리서의 앞선 구절들과 연결됩니다. 10:5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몸을 갖추어 주셨다고 말씀하셨고, 11:3에서는 시대들이 하나님의 말로 갖추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시대들을 갖추신 분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도록 몸을 갖추어 주신 분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독자들 역시 자신의 뜻을 이루도록 갖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명령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
앞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형제 사랑을 지속하십시오.
손님을 대접하십시오.
갇힌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돈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찬미의 제물을 드리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나누십시오.
지도자들과 협력하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기도에서 그는 이런 행동들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성해야 하는 과제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자들을 갖추어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들 안에서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바깥에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사랑해야 하고, 실제로 나누어야 하며, 실제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삶의 근본적인 가능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3장의 윤리적 권면을 단순한 도덕주의와 구별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루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 순종하며 응답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히 있기를」
기도는 영광을 돌리는 말로 끝납니다. 여기서 「그분」이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바로 앞에 언급된 예수님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 논의될 수 있습니다. 문장의 주어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가까이 언급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중심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일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저자는 독자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을 자신의 명령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이 권함의 말씀을 참아 주십시오"
이제 히브리서는 아주 개인적인 인사로 끝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권함의 말씀을 참아 주십시오. 내가 짧게 써 보냈으니 말입니다.히브리서 13:22 · 본디새김
저자는 자신의 글을 「권함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15에서도 「권할 말」에 해당하는 표현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전할 권면이나 설교를 요청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가 낭독되기 위해 작성된 설교적 성격의 글이라는 견해에는 실제 언어적 근거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일반적인 고대 편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인사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긴 신학적 논증과 권면을 전개한 뒤에야 마지막 장에서 개인적인 인사와 소식을 전합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히브리서는 편지의 형식을 지니면서도 설교적 권면의 성격이 매우 강한 문서로 이해됩니다.
왜 짧게 썼다고 말할까
13장에 이르는 긴 글을 두고 저자는 「짧게 써 보냈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글의 절대적인 분량이 짧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룰 수 있는 주제의 깊이와 범위에 비추어 비교적 간결하게 권면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참아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저자는 자신이 한 말이 독자들에게 쉬운 말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믿음을 버리는 위험을 말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으며, 끝까지 견디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마지막 부탁에는 지적인 동의를 넘어, 그 말씀이 독자들의 삶을 붙들고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디모데와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
23절에서는 디모데가 등장합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풀려난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가 더 빨리 오면 그와 함께 여러분을 보겠습니다.히브리서 13:2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서의 저작 배경을 추정하는 데 자주 사용되지만, 본문은 디모데가 무엇에서 풀려났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보여 주는 것은 저자가 디모데를 알고 있었고, 독자들에게 그와 함께 방문할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여러분을 이끄는 모든 이와 모든 성도에게 인사해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히브리서 13:24 · 본디새김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글쓴이와 함께 있는 사람들로도,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로도 이해될 수 있어서, 이 구절만으로 편지의 작성 장소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인사를 전할 때에도 지도자들만 언급하지 않고, 이끄는 사람들과 모든 성도를 함께 부릅니다. 마지막까지 공동체 전체를 향한 관심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는 아주 짧은 축복으로 끝납니다.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히브리서 13:25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지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듣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조금 더 깊이
디모데가 옥에서 풀려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떤 임무나 구속 상태에서 해방되거나 떠나게 되었다는 의미로도 논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도시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는 식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디모데가 바울의 동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를 바울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발신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저자가 바울 자신인지, 바울과 관계된 다른 사람인지, 또는 별도의 그리스도인 지도자인지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24절의 그리스어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글쓴이와 함께 있는 사람들로 읽으면 글이 이탈리아 밖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로 읽으면 이탈리아 안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은 첫 번째 방향을 따른 번역입니다.
성문 밖에 계신 분을 향해
히브리서 13장의 첫 장면에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형제 사랑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맞아들여야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과 학대받는 사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저자는 독자들을 성문 밖으로 이끕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도시의 중심에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며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글은 그 성문 밖의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기도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이끌어 올리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음 가운데 남아 계시지 않고, 양들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굳센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자신의 백성을 붙드시는가 하는 선언입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손님을 맞아들이고, 갇힌 사람을 기억하고, 좋은 일을 하며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완성해야 하는 사람들로 남겨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으로」 그들을 갖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그들의 삶을 감쌉니다.
그 모든 논증이 끝난 뒤, 저자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짐을 남기지 않습니다.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여기 머물러 있는 도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미래의 도시를 찾으면서 지금 이곳에서 사랑을 지속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