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변하지 않는 사랑

야곱의 이름과 길

호세아 12장은 한 사람의 이름에서 시작합니다.

야곱.

이스라엘은 원래 한 민족의 이름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뒤꿈치를 잡았고,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으며, 마침내 하나님과 겨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단순한 조상 이야기로 꺼내지 않습니다.

야곱의 후손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길까지 따라가고 있는가?

문제는 에브라임이 야곱의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 야곱의 회심 이전 모습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누구의 후손인가”보다 “너희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읽는 시간 9분소단락 412장 본문 읽기 →

바람을 먹는 백성

호세아 12:1–2 본문 →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집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다.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떠돌며, 거룩한 이들에게 신실하다.」호세아 12: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사람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의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다른 기준을 따르는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제단을 늘렸고(8:11; 10:1), 제물을 드렸으며,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습니다(8:2). 그러나 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계산과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1절 후반은 유다를 언급합니다. 유다가 하나님과 함께 떠돈다는 말이 긍정적인 순례와 의존을 의미하는지, 불안정한 방황을 의미하는지 논의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본문만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호세아는 이 장에서 주로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하고 있으므로, 이 짧은 유다 언급은 당시 두 왕국의 상태를 비교하는 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유다를 완전히 긍정하거나 부정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고 동풍을 뒤쫓으며, 온종일 거짓과 폭력을 늘린다. 그들은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기름은 이집트로 실려 간다.」호세아 12:2 · 본디새김

바람의 이미지는 호세아 8:7에서도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뿌리니, 폭풍을 거둘 것이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고, 먹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은 그것을 먹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동풍」은 더 강한 이미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건조하고 파괴적인 바람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곡식을 마르게 하고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따라서 에브라임은 단순히 바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할 것을 좇고 있는 셈입니다.

바람을 쫓는 행동은 실제 정치적 선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시리아와 관계를 맺고, 동시에 이집트에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혜로운 외교가 아니라 바람을 쫓는 행동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보다 강한 나라들의 힘을 이용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백성입니다(11:1). 그런데 이제 다시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생존을 구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보다 제국의 힘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두 얼굴: 붙잡는 사람과 붙들리는 사람

호세아 12:3–6 본문 →

여호와야훼에게는 유다와 다툴 일이 있다. 그는 야곱이 걸어온 길에 따라 그를 벌하고, 그의 행실에 따라 그에게 갚을 것이다.호세아 12:3 · 본디새김

여기서 본문은 현재의 이스라엘을 갑자기 야곱이라는 개인에게 연결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야곱은 단순한 조상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일입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삶에서 두 장면을 선택합니다.

첫째는 태중의 장면입니다.

그는 태 안에서 형의 뒤꿈치를 잡았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과 겨루었다.호세아 12:4 · 본디새김

창세기 25:26에서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야곱이 형제보다 먼저 나오려 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이후 야곱의 삶 전체에 나타나는 특징을 암시합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얻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자신의 몫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끈기와 열정이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계산과 힘으로 미래를 만들려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둘째 장면은 전혀 다른 야곱입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32:22–32의 얍복강 사건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밤에 어떤 사람과 씨름했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호세아는 이 사건을 「하나님과 겨루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천사와 겨루어 이겼고, 울며 그에게 은혜를 구했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났고, 거기에서 우리와 이야기했다.호세아 12:5 · 본디새김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끝내 축복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씨름하지만 결국 다리를 절게 됩니다. 그는 힘으로 하나님을 굴복시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됩니다.

야곱은 더 이상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붙잡고 축복을 구했습니다.

5절은 이 사건을 벧엘과 연결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가는 길에 벧엘에서 꿈을 꾸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과 후손의 약속을 주시고,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호세아 시대의 벧엘은 이미 다른 의미를 가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 중심지가 바로 벧엘이었습니다(열왕기상 12:28–30). 야곱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같은 장소에서 만든 형상을 섬겼습니다.

같은 장소가 기억의 장소에서 배신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은 여호와야훼다.호세아 12:6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조상 야곱의 기술이나 정치적 능력이 아닙니다.

야곱을 만나셨던 하나님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겨루다」(⁨שָׂרָה⁩)로 옮긴 히브리어 어근은 힘을 다해 상대와 맞서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야곱이 단순히 기도했다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고 씨름 끝에 변화된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돌아오라: 야곱에게서 배워야 할 길

호세아 12:7–8 본문 →

너는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을 지키고, 언제나 네 하나님을 기다려라.호세아 12:7 · 본디새김

돌아온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한결같은 사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관계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관계를 떠나 다른 대상에게 충성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다는 것은 다시 관계의 신실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공정

앞서 10:4에서는 판결이 독초처럼 자란다고 했습니다. 정의를 세워야 할 사회가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개인적인 마음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다시 세우는 삶입니다.

기다림

셋째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앞에서 에브라임은 아시리아와 이집트를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강대국의 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상인의 손에는 속이는 저울이 있고, 그는 착취하기를 좋아한다.호세아 12:8 · 본디새김

이제 호세아는 예배의 문제에서 경제생활의 문제로 이동합니다.

속이는 저울은 단순한 개인의 부정직이 아닙니다. 거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레위기 19:35–36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확한 저울과 공정한 측량을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거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제단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장에서는 이웃을 속였습니다. 호세아는 이것을 하나의 문제로 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무너집니다.

“나는 부자가 되었다”: 성공이 죄를 가리는 순간

호세아 12:9–15 본문 →

에브라임이 말했다. 「참으로 나는 부자가 되었다. 내 재산을 마련했다. 내가 애써 얻은 모든 것에서 아무도 내게 죄가 되는 잘못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호세아 12:9 · 본디새김

여기서 문제는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부가 자신을 의롭게 증명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성공의 뒤에 숨겨진 문제를 드러냅니다.

8절의 속이는 저울입니다. 그들의 재산은 정직한 수고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착취를 좋아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노력과 결과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취가 곧 의로움은 아닙니다.

많이 얻었다고 해서 올바르게 얻은 것은 아닙니다.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기 이해를 깨뜨리십니다.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네 하나님인 여호와야훼다. 절기의 날들처럼 다시 너를 천막들에 살게 하겠다.」호세아 12:10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시작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출발점은 출애굽이었습니다. 노예였던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수고」라는 말은 어디에 연결되는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신이 힘써 얻은 재산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모든 수고를 자랑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