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변하지 않는 사랑
어찌 너를 내주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의 성읍에는 칼이 휘돌고, 아시리아가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선언하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질문하기 시작하십니다.
「어찌 너를 내주겠느냐, 에브라임아? 너를 넘겨주겠느냐, 이스라엘아?」
이 질문은 누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해명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묻고 계십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 어떻게 그들을 내줄 수 있겠느냐고 다시 물으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한 아이에게 걸음을 가르치시던 시절의 기억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반역자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했고,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호세아 11:1 · 본디새김
지금까지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빗대어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남편을 떠나 다른 연인들을 찾아가는 아내의 배신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는 가족 관계의 다른 모습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되시고, 이스라엘은 어린아이가 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먹이고, 돌보고, 위험에서 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아이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이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노예 노동력으로 붙잡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출애굽은 단지 억압받던 민족이 정치적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불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에는 해방뿐 아니라 관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 이르면 그 부름에 대한 뜻밖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부르는 이들에게서 더욱 멀리 떠나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새긴 우상들에게 제물을 태워 올리곤 했다.」호세아 11: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의 삶은 그 부름을 거절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듣지 않는 것과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이 나란히 놓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관계를 대신할 다른 대상을 적극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배신을 설명하시면서도 이스라엘을 먼저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누구였는지를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부르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는 부르는 주체를 복수형으로 나타내며, 그들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과 같은 전달자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이 직접 그렇게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11:1의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2:15에서 직접 인용됩니다. 다만 호세아의 본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미래에 태어날 한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출애굽의 역사를 회상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은 이 역사적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돌아오신 사건과 연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경험이 예수의 삶에서 새롭게 드러난다고 보는 신약의 정경적 읽기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할 때는 먼저 호세아가 말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걸음을 가르친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친 것은 나였다. 그가 그들을 자기 팔에 안았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그들을 고친 줄 알지 못했다.」호세아 11:3 · 본디새김
이제 하나님의 기억은 더욱 구체적인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는 혼자 서는 것도 서툽니다. 발을 내디디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쉽게 균형을 잃습니다. 누군가가 아이의 곁에 머물며 걸음을 익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성숙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할 때마다 두려워했고, 반복해서 불평했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만나를 주셨고, 17장에서는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신명기 1:31에서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안으셨다고 회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걸음을 가르치셨고,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돌봄의 주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온 돌봄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인정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살아남고 성장한 결과를 누리면서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돌보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돌봄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바뀝니다.
「나는 사람의 줄로, 사랑의 밧줄로 그들을 이끌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턱 위에서 멍에를 들어 올리는 이들 같았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울여 먹였다.」호세아 11:4 · 본디새김
여기서는 어린아이의 이미지와 가축을 돌보는 이미지가 겹쳐집니다. 멍에를 들어 올린다는 표현은 짐승의 목이나 턱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 주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먹인다는 말은 돌보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낮춰 먹을 것을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서 명령하는 사랑이 아니라, 짐을 덜고 먹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군대를 물리치시고, 산을 흔드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백성이 걸음을 배우도록 도와주시고, 먹을 수 있도록 몸을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돌봄의 세밀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하나님은 단지 법을 제정하시고 불순종을 처벌하시는 통치자가 아니셨습니다.
그들이 걷지 못할 때 걸음을 가르치시고, 아플 때 고치시며, 배고플 때 먹이셨던 분이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에서는 앞에서는 「나였다」라고 말씀하시다가 여기서는 「그가」라는 삼인칭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러한 인칭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으셨다는 의미로 읽는 길이 있고, 원문의 삼인칭을 그대로 존중하는 길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문법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걸음을 가르치시고 고치신 주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4절의 「사람의 줄」과 「사랑의 밧줄」을 어린아이를 부드럽게 이끄는 관계의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뒤에 나오는 멍에의 이미지와 연결하면, 짐승을 이끄는 줄과 대비하여 인간에게 합당한 사랑의 방식으로 이끄셨다는 뜻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줄의 성격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돌아오기를 거부한 백성이 다시 종속됩니다
「그는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시리아가 그의 왕이 될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호세아 11:5 · 본디새김
5절에서는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집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은 다시 다른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정치적 독립의 상실이면서 동시에 출애굽에서 주어졌던 자유가 뒤집히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결과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칼이 그의 성읍들에서 휘돌고, 그의 빗장들을 끝장내며 삼킬 것이다. 그들의 계책 때문이다.」호세아 11:6 · 본디새김
성문의 빗장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방어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은 그 빗장까지 끝장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파멸의 원인을 「그들의 계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여러 정치적 계책을 세웠습니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외교적 관계를 선택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거절했습니다. 호세아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내 백성은 나를 떠나는 데 매달려 있다. 그들이 그를 위로 부르지만, 아무도 그를 높이지 않는다.」호세아 11:7 · 본디새김
떠나려는 태도가 우연한 실수나 일시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집하는 방향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거부하는 삶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7절까지의 말씀만 읽으면 이스라엘의 미래는 완전히 결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반복해서 부름을 거부했고, 다른 신들에게 나아갔으며, 마침내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앞선 호세아 9:3에서는 에브라임이 이집트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에서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말은 실제 이동이나 피난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과거의 종속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1:5에서는 히브리어의 부정 표현이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본디새김처럼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 5절은 이집트가 아니라 아시리아가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절에 「돌아가다」와 「돌아오다」라는 말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같은 동사가 서로 다른 방향의 귀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7절의 「위로」라는 표현은 높은 곳을 가리킬 수도 있고, 높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지만 실제로 그분을 높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곳의 신적 존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상황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부르고 누구를 높이는지에 관해서도 문법적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이 뒤집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너를 내주겠느냐, 에브라임아? 너를 넘겨주겠느냐, 이스라엘아?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주겠느냐?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속에서 뒤집혔고, 내 연민이 온통 달아올랐다.」호세아 11:8 · 본디새김
이름을 부르며 연달아 질문하시는 모습은 법정에서 판결을 읽는 재판장의 어조와는 다릅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사건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언급되는 성읍들입니다. 그 성읍들은 철저한 파괴의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성읍들처럼 완전히 멸망시킬 것인가를 질문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뒤엎을 것인가를 말씀하시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이 뒤집혔다고 선언하십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연민이 달아오릅니다. 그 죄에 대한 분노가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연민 또한 깊고 강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내 불타는 분노대로 행하지 않겠다. 다시 에브라임을 파멸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다. 나는 격분하여 오지 않겠다.」호세아 11:9 · 본디새김
이미 아시리아가 그들의 왕이 되고, 칼이 성읍을 파괴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경고가 여기서 모두 취소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즉, 심판을 거두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심판이 이스라엘을 최종적으로 없애 버리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엄격하게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감정에 흔들리고 때로는 잘못을 눈감아 주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조금의 악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반대의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신의 불타는 분노대로 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분노는 때로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행동으로 치닫습니다. 특히 배신당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와 분노에 휩싸이면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까지 파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했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들과 맺은 모든 관계를 즉시 폐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과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하심은 자기 백성을 향한 연민을 제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심판할 만큼 진지하고, 죄인을 완전히 버리지 않을 만큼 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4:2, 8에서는 이 성읍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나란히 등장합니다. 신명기 29:23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 하나님의 진노로 뒤집힌 성읍들로 언급됩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읍들을 뒤집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같은 어근의 표현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사용됩니다. 이 연결이 의도적인 언어유희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매우 인상적인 대조가 나타납니다. 민수기 23:19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호세아 11:9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불타는 분노대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연결됩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갈등하시다가 처음의 계획을 바꾸셨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문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연민의 언어로 하나님의 결정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내면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라기보다, 심판받아야 할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시기로 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자의 포효를 듣고 새처럼 돌아오는 자녀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따라갈 것이다. 그는 사자처럼 포효할 것이다. 그가 포효하면, 아들들이 바다 쪽에서 떨며 올 것이다.호세아 11:10 · 본디새김
2절에서는 그들을 부를수록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그들이 여호와야훼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행동의 변화가 아닙니다. 관계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호세아 5:14에서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게 사자처럼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사자는 먹이를 찢어 가져가는 심판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11:10에서는 같은 사자의 이미지가 다른 역할을 합니다.
사자의 포효는 여전히 두려운 소리입니다. 본문도 사람들이 「떨며」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포효의 결과는 파괴가 아니라 귀환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이제 흩어진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새처럼, 아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떨며 올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살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호세아 11:11 · 본디새김
사자는 강하고 위엄 있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작은 새와 비둘기는 쉽게 놀라고 연약합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포효하시는 분이지만, 그분께 돌아오는 백성은 사자처럼 당당하고 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 떨림은 두려움과 놀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완전히 평온한 상태로 귀환한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포로 생활과 상실의 경험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이미지는 단순히 빠르게 날아오는 기쁨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귀환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고향에 도착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살 자리를 주시는 일입니다.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들의 집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 다시 거할 집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 삶의 자리의 회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단순한 희망이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언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근거는 자신들이 이제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바다 쪽」이 정확히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다를 가리키는 말은 지중해가 있는 서쪽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방향을 구체적인 지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5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고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 양쪽에서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이것은 5절의 심판 선언과 모순되는 장면이라기보다, 그 심판을 넘어서는 귀환의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어느 지역들로 흩어지게 될지 이 두 절만으로 상세한 이동 경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흩어짐을 마지막 상태로 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돌아오는 자녀들을 위한 집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회복에는 관계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움직임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완전한 파멸을 거절하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한 아이가 등장했습니다.
그 아이는 이집트에서 불려 나왔고,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걸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멀어졌습니다. 마침내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에는 사자의 포효입니다. 그 소리가 울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자녀들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강한 군대처럼 당당하게 행진하지 않습니다. 새처럼, 비둘기처럼 떨며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한 가지 약속을 남기십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살게 하겠다.」
처음에는 걸음을 가르치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돌아온 자녀들이 머물 집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의 긴 반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11장은 그 반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자의 포효를 듣고 떨며 돌아오는 새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살게 될 집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