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끊어진 수확의 기쁨

열매는 많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간 것은 없었습니다

포도나무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가지마다 열매가 맺혔고, 땅은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 번영을 묘사하면서 이상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풍요로워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열매가 늘어날 때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깊어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예배를 위한 시설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농사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해 의를 향해 씨를 뿌려라.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거두어라.」 처음에는 이미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중간에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거두었는지가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며 살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810장 본문 읽기 →

열매가 많아질수록 제단도 많아졌다

호세아 10:1–2 본문 →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나무, 자기를 위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많아질수록 그는 제단들을 늘렸고, 그 땅이 좋아질수록 그들은 기둥들을 아름답게 꾸몄다.호세아 10:1 · 본디새김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시편 80:8–11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포도나무를 가져오셔서 다른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고 노래합니다. 이사야 5:1–7에서도 하나님께서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가 스스로 그 자리에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심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보다 그 열매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는 표현은 뒤따르는 문장 때문에 비판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 풍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문제입니다. 열매의 증가와 제단의 증가가 나란히 놓입니다. 땅의 풍요와 기둥의 장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요가 커질수록 그것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종교적 수단에 더욱 많은 것을 투자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둥들」은 단순한 건축용 기둥이라기보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운 돌기둥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는 돌기둥이 하나님을 만난 일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창세기 28:18). 그러나 신명기는 돌기둥을 세우는 일을 금지합니다(신명기 16:22).

이 장면은 종교적 열심과 신실함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2절은 그 원인을 마음에서 찾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간사하다. 이제 그들은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가 그들의 제단들의 목을 꺾고, 그들의 기둥들을 파괴할 것이다.호세아 10:2 · 본디새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하지만 실제 마음과 행동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들여 세운 제단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늘린 것은 열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뿌리내릴 자리도 함께 넓혀 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간사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할라크(ḥālaq)는 매끄럽거나 미끄럽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진실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마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마음이 나뉘었다는 의미로 옮깁니다. 하나는 진실하지 못한 태도를, 다른 하나는 충성이 분열된 상태를 강조합니다. 본디새김의 「간사하다」는 읽기는 뒤에 나오는 거짓 맹세와 언약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특히 잘 어울립니다. 여기서 「목을 꺾고」(⁨עָרַף⁩)에 해당하는 동사는 목을 꺾거나 베는 행동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무생물인 제단에 적용되면서 파괴의 폭력성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왕이 사라진 뒤에야 왕의 무력함을 말하다

호세아 10:3–4 본문 →

참으로 이제 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 우리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라 해도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겠는가?」호세아 10:3 · 본디새김

왕이 있다면 나라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며 공동체를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권은 반복되는 정치적 혼란과 불의 속에서 그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4절은 그 실패가 단순히 군사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말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언약을 맺었다. 판결이 밭고랑 위의 독초처럼 돋아난다.호세아 10:4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맹세와 언약은 사람들 사이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국가 간의 조약에도 맹세가 사용되었고, 공동체 내부의 분쟁에서도 증언과 약속의 진실성이 중요했습니다.

무엇을 약속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밭고랑을 만드는 이유는 곡식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밭고랑에서 독초가 돋아난다면, 땅을 갈고 씨를 뿌린 수고는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낳습니다.

정의를 이루어야 할 제도가 오히려 사람을 해치고 있습니다.

법과 판결이라는 이름은 남아 있지만, 그 내용은 생명을 살리는 곡식이 아니라 해로운 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1절의 제단 문제와 평행을 이룹니다.

제단은 많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없고, 판결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을 진정한 회개의 시작으로 읽을 수도 있을까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발언이 곧바로 마음의 변화와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왕의 무력함을 깨닫고 체념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회개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4절의 독초를 정확히 어느 식물 종으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성이 있거나 해로운 식물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자신들을 지켜야 할 송아지를 위해 사람들이 떨다

호세아 10:5–8 본문 →

사마리아 주민들은 벳아웬의 암송아지들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다. 그 송아지의 백성은 그것을 두고 슬퍼했다. 그 송아지의 우상 제사장들은 그것을 두고, 그 영광을 두고 떨 것이다. 그 영광이 그 송아지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호세아 10:5 · 본디새김

이곳에 있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을 상징하는 중요한 대상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2:28–30에서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일이 이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원래 사람들이 그 형상을 의지한 이유는 자신들의 안전과 풍요를 보장받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뒤집힙니다.

사람들이 송아지에게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송아지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합니다.

그것도 아시리아로 실려 가, 야레브 왕에게 바치는 조공이 될 것이다.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고, 이스라엘은 자기의 계책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이다.호세아 10:6 · 본디새김

금속으로 만든 귀한 형상이 정복자의 손에 들어가 전리품이나 공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방 제국의 위협을 막아 주리라고 기대했던 대상이, 그 제국의 권력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 수치는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선택이 얼마나 허망했는지가 드러나는 수치입니다.

7절에서는 왕도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은 물 위의 나뭇조각처럼 사라질 것이다.호세아 10:7 · 본디새김

왕은 나라의 방향을 정하고 백성을 이끌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은 방향을 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물살에 떠밀리는 물체처럼 묘사됩니다.

나라를 통제해야 할 사람이 자기 운명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가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된 악의 산당들은 파괴되고, 그들의 제단들 위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랄 것이다.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어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할 것이다.호세아 10:8 · 본디새김

사람들이 정성껏 돌보던 장소가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닥칠 재난이 얼마나 끔찍한지, 차라리 산과 언덕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과거에는 산당에 올라가 자신들에게 복을 달라고 구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산에게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구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높여 놓은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려 했지만, 마지막에는 그 높이 솟은 것들 아래로 사라지고 싶어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벧엘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창세기 28:19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벧엘이라 부른 일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벧엘과 관련된 종교적 중심지를 종종 「벳아웬」이라고 부릅니다(4:15; 5:8).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곳이 악과 헛됨의 장소가 되었다는 풍자입니다. 5절에서는 암송아지들이 복수로 언급되지만, 곧이어 하나의 송아지를 가리키는 단수 표현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그 장소에 실제로 여러 송아지 형상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야레브 왕」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야레브(yārēb)를 특정 인물의 이름으로 보기도 하고, 다투거나 싸우는 왕이라는 의미를 가진 별칭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호세아 5:13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문맥상 아시리아의 강력한 왕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신원을 한 사람으로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7절 원문의 비유에 사용된 낱말은 뜻이 완전히 확정되지 않아, 물 위의 거품처럼 이해하는 번역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의 「나뭇조각」을 따르면, 물에 떠다니며 물살에 따라 흘러가는 작은 물체의 이미지가 됩니다. 8절의 장면은 창세기 3:17–18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호세아가 창세기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죄가 땅의 모습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공통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닥칠 재난을 말씀하시면서 호세아 10:8의 산과 언덕을 향한 외침을 직접 가져오십니다(누가복음 23:30). 호세아의 본래 문맥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와 국가적 파멸을 묘사한 말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언어를 새로운 역사적 심판의 경고에 사용하십니다.

기브아에서 시작된 죄, 그리고 멍에를 메게 될 암송아지

호세아 10:9–11 본문 →

이스라엘아, 기브아 때부터 너는 죄를 지었다. 그들은 거기에 서 있었다. 불의한 자들을 치는 전쟁이 기브아에서 그들에게 닥치지 않겠느냐?호세아 10:9 · 본디새김

사사기 19–21장에 기록된 기브아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심각한 폭력과 정의의 붕괴를 보여 줍니다. 그 사건에서는 한 여성이 극심한 폭력을 당했고, 이후 지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비극이 확대되었습니다. 호세아 9:9에서도 기브아는 깊은 부패를 가리키는 장소로 등장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겠다. 그들이 자기들의 두 죄악에 묶일 때, 민족들이 그들을 치려고 모일 것이다.」호세아 10:10 · 본디새김

「내가 원하는 때에」라는 말은 심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은 외국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강화하면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때를 정하시는 분이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죄에 붙들린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또 다른 묶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에브라임은 길들여진 암송아지, 타작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암송아지의 아름다운 목 위를 지나갔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쟁기를 끌게 하겠다.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그를 위해 써레질할 것이다.」호세아 10:11 · 본디새김

여기서는 앞에 등장한 금송아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암소가 등장합니다.

타작하는 소는 농사를 돕는 중요한 가축이었습니다. 곡식을 밟거나 타작 도구를 끌어 낟알을 분리했습니다. 신명기 25:4에서는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규정도 나옵니다. 타작을 좋아하는 암송아지라는 표현은 익숙한 노동과 먹을거리의 풍요를 함께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암송아지에게 다른 일을 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타작은 이미 거둔 곡식에서 먹을 것을 얻는 일입니다. 밭갈이는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땅을 뒤집는 일입니다. 특히 굳은 땅을 가는 일은 힘든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지금까지 자신이 누리던 풍요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유다와 야곱도 밭갈이에 함께 언급됩니다. 심판의 언어가 북이스라엘만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향한 경고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 이미지를 단순한 형벌의 장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땅을 가는 일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은 히브리어 문장의 연결이 어려워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처럼 전쟁이 닥칠 것임을 되묻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기브아의 죄가 지금 이스라엘에게 다시 심판을 불러오는 상황이 됩니다. 반면 전쟁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았다는 진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기브아의 죄에 대한 심판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죄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점이 강조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서 있었다」 역시 과거의 반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인지, 맞서 버티고 있었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역사적 장면을 하나로 고정하기보다는,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현재를 기브아의 죄와 연결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두 죄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은 우상숭배와 정치적 반역을 연결하고, 다른 해석은 구체적인 두 범죄나 두 제의 중심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문이 직접 두 죄악을 이름 붙이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목 위를 지나갔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묘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암송아지의 목을 그대로 두었다는 뜻으로도, 그 위에 멍에를 얹는 움직임과 연결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밭갈이의 명령을 고려하면, 전체 이미지가 익숙하고 편안한 노동에서 더 무거운 노동으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묵은 땅을 갈아라 — 심판 한가운데 놓인 초청

호세아 10:12 본문 →

너희를 위해 의를 향해 씨를 뿌려라.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거두어라. 너희를 위해 묵은 땅을 갈아라. 그가 와서 너희에게 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여호와야훼를 찾을 때다.호세아 10:12 · 본디새김

호세아 10장의 중심에 놓인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심판의 결과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명령입니다.

의를 향해 씨를 뿌려라

첫 번째 명령은 농사에 관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씨앗의 이름이 다릅니다.

여기서 의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착하게 행동한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올바른 관계와 질서를 이루는 삶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이 독초를 자라게 했다면, 이제는 올바른 삶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를 버리고 진실하게 말하며, 왜곡된 판결을 바로잡고, 공동체의 관계를 의롭게 만들어 가라는 요구를 포함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거두어라

「한결같은 사랑」은 일시적인 친절이나 감정적인 애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신실함과 지속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호세아 6:6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도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

의와 사랑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의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르게 세우는 삶이라면, 한결같은 사랑은 그 관계를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는 삶과 연결됩니다. 엄격한 판결이 있어도 사랑과 신실함이 없다면 사람을 해치는 제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다면 그 사랑도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이 둘을 하나의 농사로 묘사합니다.

묵은 땅을 갈아라

세 번째 명령은 앞선 두 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 작업을 가리킵니다.

묵은 땅은 오랫동안 제대로 경작하지 않은 땅을 가리킵니다. 땅이 굳어 있거나 잡초가 자라 있다면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성한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길러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제단을 늘리고 기둥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정의와 한결같은 사랑을 이루는 삶은 제대로 가꾸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묵은 땅을 갈라는 명령은 기존의 생활 방식에 조금 더 종교적 열심을 보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온 삶의 방식 자체를 다시 손보라는 요청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4:3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단순히 외적인 종교 활동을 늘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삶의 토양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비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데 12절은 인간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씨를 뿌리고 땅을 갈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농부는 땅을 준비하고 씨를 뿌릴 수 있지만, 비를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실과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를 궁극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자세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운데서 아직 자신을 찾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심판이 아무런 조건 없이 취소되었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제단과 왕권을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를 심고 사랑을 거두며, 하나님을 찾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파괴될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무엇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비처럼 내릴」(⁨יָרָ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가르친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를 가르치신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이 절 전체를 이루는 농사의 이미지를 따라 비를 내리신다는 뜻을 선택했습니다. 비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의를 생명력 있게 내려 주시는 분이 되시고, 가르침으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의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시는 분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심으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악을 갈았다

호세아 10:13 본문 →

너희는 악을 갈아 불의를 거두었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다. 네가 네 길을, 네 수많은 용사들을 믿었기 때문이다.호세아 10:13 · 본디새김

12절의 명령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이스라엘의 순종이 아닙니다.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를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거짓은 단순히 그들이 저지른 하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들이 먹고 살아가는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짓으로 맹세하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정치적 계책을 세웠고, 군사적인 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결과를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양식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길을 선택하거나 군대를 보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궁극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판단과 군사력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풍요로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3절에 이르면 그 열매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거짓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심으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악을 갈았습니다.

이제 그 농사의 결과를 거둘 때가 다가옵니다.

요새는 무너지고, 새벽에는 왕이 사라진다

호세아 10:14–15 본문 →

네 백성 가운데 전쟁의 소란이 일어나고, 전쟁의 날에 살만이 벧아르벨을 파괴했듯이 네 모든 요새가 파괴될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내동댕이쳐져 박살 났다.호세아 10:14 · 본디새김

자신들이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수단들이, 가장 필요할 때 아무런 보호가 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이 장면은 전쟁의 폭력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요새가 무너진다는 말만으로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요새의 붕괴 뒤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 안에서 살던 가족들이 보호를 잃습니다.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죽임당하는 장면은 전쟁이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 어떤 파괴를 가져오는지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많은 용사와 강력한 방어 시설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들의 끝에서 파괴되는 것은 추상적인 국가의 권력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입니다.

15절에서 호세아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을 한 장소에 연결합니다.

벧엘이 너희에게 이렇게 할 것이다. 너희의 악하고도 악한 짓 때문이다. 새벽에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호세아 10:15 · 본디새김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요새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결과를 두고 벧엘이 너희에게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잘못된 예배를 발전시켜 온 그 중심지가, 결국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 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5절의 벳아웬과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곳이 헛된 예배의 장소가 되었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이 나라를 지켜 주기는커녕 멸망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로 세운 왕권도 이제 마지막을 맞습니다.

새벽은 보통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밤이 지나면 빛이 찾아오고,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새벽에 왕이 멸망한다고 말합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에 나라의 왕권은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살만이 누구인지, 벧아르벨이 정확히 어디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살만을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과 연결하는 견해가 있고, 다른 지역의 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벧아르벨 역시 어느 성읍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특정 연도와 전쟁을 단정하여 이 구절의 배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세아가 이 사건을 언급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시 청중이 기억할 만한 참혹한 전쟁을 끌어와, 이스라엘이 맞을 재난의 성격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새벽에」가 특정한 전투의 시간을 가리키는지, 신속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

호세아 10:1–15 본문 →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토록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둔 열매가 아니라 그들이 심어야 했던 씨앗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해 의를 향해 씨를 뿌려라.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거두어라.」

그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길과 수많은 용사들을 믿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의 소란이 일어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요새들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새벽이 밝습니다.

하지만 그 새벽에 이스라엘의 왕은 사라집니다.

열매가 많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심었는지가 마침내 드러나는 아침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