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어린아이가 맹수를 이끄는 나라
이사야 11장에서 가장 놀라운 인물은 어쩌면 새로운 왕이 아니라 어린아이일지도 모릅니다.
늑대와 표범, 사자와 곰이 등장하는 곳에서 어린아이는 그들을 몰고 다닙니다. 젖먹이는 독뱀의 굴 위에서 장난치고, 젖을 뗀 아이는 살무사의 굴에 손을 뻗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아이를 해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이 장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통치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거대한 나라의 위엄이나 강력한 군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시작합니다.
앞선 10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높이 솟은 숲을 베어 내셨습니다. 11장은 그 장면과 대조되듯,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나무에서 돋아나는 작은 가지를 보여 줍니다. 앞 장이 교만한 권력의 몰락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다윗 왕조에서 시작될 새로운 통치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왜 다윗이 아니라 이새의 그루터기인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가지 하나가 돋아나고, 그의 뿌리에서 난 싹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이사야 11:1 · 본디새김
본문은 쓰러진 나무의 잔해를 보여 주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의 그루터기’가 아니라 ‘이새의 그루터기’라고 했을까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새로운 왕을 찾으러 갔을 때, 다윗은 이미 왕궁에서 왕권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새의 집안에서 양을 돌보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새’라는 이름은 왕조의 화려한 역사보다 그 왕조가 시작된 자리로 독자의 시선을 돌립니다.
다윗 왕조는 한때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지만, 이사야 시대에는 외적의 침략과 내부의 불신앙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이새’를 부르는 것은 이미 확립된 왕조의 영광을 단순히 연장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새 출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본문이 왜 이새를 선택했는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윗 이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이미지라고 읽는 것은 문맥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은 지금 존재하는 왕조가 얼마나 견고한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가지의 생존만이 아니라 그 가지가 이루어 낼 결과에 관심을 둡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정의로운 재판과 평화로운 세계를 보면, 새로운 왕의 열매는 단순히 왕조의 존속이나 영토 확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통치를 이루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사야 11장의 왕은 사무엘하 7:12–16에서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세우고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윗 왕조가 단순히 오래 지속되는 것 이상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새로운 왕에게 머무는 영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 위에 머물 것이다. 곧 지혜와 분별의 영, 조언과 힘의 영, 지식과 여호와야훼에 대한 두려움의 영이다.이사야 11:2 · 본디새김
이사야는 새로운 왕의 혈통을 소개한 뒤 곧바로 그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능력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 전통에서 하나님의 영은 통치자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13에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뒤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지혜와 분별은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조언과 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이루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지식과 여호와야훼에 대한 두려움은 그러한 판단과 행동이 어떤 관계와 기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힘은 지혜와 조언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에 대한 지식과 두려움이 등장합니다. 이사야가 기대하는 왕은 힘이 부족한 통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통치자입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재판하지 않고, 그의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1:3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기쁨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야훼에 대한 두려움은 위험한 권력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판단을 자신의 판단보다 높이 여기는 태도입니다.
왕은 다른 사람을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법을 제정하고, 판결을 내리고, 군대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자신보다 높으신 여호와야훼를 경외합니다.
자기 권력이 최종적인 권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만 판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증거를 살펴보거나 귀로 증언을 듣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사람들의 말이 언제나 진실을 온전히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존경받는 외모를 갖출 수도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왕은 그런 외적인 조건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그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기 때문에 사람의 지위와 외모, 영향력보다 더 높은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기대하는 왕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모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실제 재판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기뻐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표현 바하리호는 냄새를 맡는다는 뜻의 어근 리아흐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호와야훼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마치 냄새를 맡듯 그 경외를 통해 사물을 분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기쁨의 의미를 선택했습니다. 이 경우 왕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바로 그런 태도에서 바른 판단이 나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눈과 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특별한 분별력이 더욱 강조됩니다.
왕의 힘은 가장 약한 사람에게서 드러난다
그는 힘없는 이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땅의 억눌린 이들을 위해 공정하게 판결할 것이다. 자기 입의 몽둥이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숨결로 악인을 죽일 것이다.이사야 11:4 · 본디새김
새로운 왕의 첫 번째 통치 행위로 묘사되는 것은 정복이나 건설이 아니라 재판입니다.
앞 장인 이사야 10:1–2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법령을 제정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재판에서 밀어내며,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자들을 고발하셨습니다. 이전의 권력은 재판을 이용하여 약자를 밀어냈습니다.
새로운 왕은 재판을 통해 약자를 보호합니다.
여기서 ‘힘없는 이들’과 ‘억눌린 이들’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의 사회적 처지가 강조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킬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억압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정과 정의는 같지 않습니다.
동정은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재판은 그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마땅한지 판단하고, 침해된 권리가 회복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 나라의 질서 자체가 힘없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작동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예루살렘은 정의와 공의를 잃어버린 도시로 고발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바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장에서는 정의를 기대하신 하나님이 오히려 폭압과 부르짖음의 현실을 보셨습니다(5:7).
그런데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왕이 힘없는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합니다. 이는 이전에 무너졌던 질서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왕의 입이 몽둥이가 된다
그런데 4절 후반부는 갑자기 무서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왕은 자기 입의 몽둥이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숨결로 악인을 죽입니다. 힘없는 사람에게 정의가 이루어지려면 그들을 억압하는 악한 힘을 방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와 악을 심판하는 권위는 이 문맥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새로운 왕의 권위는 그의 말과 판결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의견이 아닙니다. 악을 심판하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효력을 가집니다. 다만 ‘악인을 죽일 것이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생명을 빼앗는 심판의 언어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악한 생각을 교정한다는 뜻으로 약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어떤 인간 통치자든 자신이 악하다고 판단한 사람에게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영이 머물고, 그분을 경외하며, 공의로 판단하는 특별한 왕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떼어 놓고 심판의 권한만 가져오는 것은 본문의 중심을 뒤집는 일입니다.
공의는 그의 허리에 두르는 띠가 되고, 신실함은 그의 허리춤에 두르는 띠가 될 것이다.이사야 11:5 · 본디새김
왕의 옷차림을 설명하는데, 금관이나 화려한 겉옷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약속과 책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통치자의 성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띠는 몸에 두르고 옷을 여미는 물건입니다. 활동할 때 옷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이사야가 왕의 공의와 신실함을 띠에 비유한 것은 그 덕목들이 장식적인 칭찬이 아니라 왕의 모든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공의와 신실함을 자신의 몸에 두르고 살아가는 왕입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예상보다 훨씬 멀리 나아갑니다.
이사야는 왕이 인간 사회를 얼마나 잘 다스리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맹수와 가축의 관계까지 달라집니다.
어린아이가 맹수를 몰고 다니는 이유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다.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다.이사야 11:6 · 본디새김
한쪽은 포식자이고, 다른 한쪽은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포식자가 먹잇감을 공격하지 않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눕고, 함께 머문다고 말합니다.
특히 어린양과 새끼 염소, 송아지처럼 어린 가축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강한 동물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약한 생명들이 포식자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고대의 목자는 자신의 양 떼를 맹수에게서 보호해야 했습니다. 사자가 나타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맞서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에서 다윗은 사자와 곰에게서 양을 구했던 경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11장에서는 어린아이가 맹수와 가축을 함께 이끕니다.
아이를 위협하던 관계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평화는 약한 존재가 스스로를 지킬 만큼 강해지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4절의 정의로운 재판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왕은 힘없는 사람과 억눌린 사람을 위해 정의를 세웠습니다. 이제 그 정의가 만들어 내는 평화가 가장 연약한 생명들을 통해 표현됩니다.
맹수는 단순히 공격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암소와 곰은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은 함께 누울 것이다.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이사야 11:7 · 본디새김
서로를 먹고 살아가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향해 느끼던 위협적인 욕구 자체가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어떤 읽기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실제 피조세계의 생태적 관계까지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맹수와 가축을 통해 인간 사회의 폭력과 억압이 사라지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평화가 피조세계 전체의 평화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평화가 역사 속에서 어느 범위까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된다
8절에서 이사야는 더 이상 늑대나 사자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젖먹이가 독뱀의 굴 위에서 장난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 입구에 손을 뻗을 것이다.이사야 11:8 · 본디새김
젖먹이와 젖을 뗀 아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충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독뱀은 그런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아이가 뱀을 제압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아이가 위험을 의식하지 않고 평범하게 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무지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평화를 설명하기 위해 강한 전사나 무장한 파수꾼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가장 부족한 아이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내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해치지 않고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듯, 땅이 여호와야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11:9 · 본디새김
2절에서는 한 왕이 여호와야훼를 아는 지식과 그분에 대한 두려움의 영을 받았습니다. 9절에서는 온 땅이 여호와야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해집니다. 왕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가 세우는 통치를 통해 온 세상에 어떤 질서가 이루어지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 본문에서 폭력과 무관한 추상적 종교 지식으로 남지 않습니다.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앎입니다.
바다는 물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물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사야는 그처럼 여호와야훼를 아는 지식이 땅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그립니다.
처음에는 ‘내 거룩한 산’이 등장합니다. 이는 시온과 연결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영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근거가 설명될 때는 ‘땅’ 전체가 등장합니다.
거룩한 산에서 드러나는 질서는 그 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까지는 인간의 정의와 재판이 중심이었고, 6절부터는 동물들의 관계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흐름은 인간 사회의 변화를 동물의 비유로 확장한 것으로 읽을 여지를 줍니다. 그러나 본문이 동물들의 먹이와 행동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은, 이를 오직 인간 사회에 관한 은유로만 제한하지 않도록 합니다. 창세기 1:29–30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먹거리로 주시고, 동물들에게도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십니다. 이사야 11장의 사자와 소가 함께 짚을 먹는 모습은 이러한 창조의 질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다는 선언 속에서 생물들의 삶을 묘사하고, 이사야 11장은 장차 이루어질 평화를 동물들의 변화로 보여 줍니다. 두 본문을 연결하는 핵심은 생명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비전입니다.
한 그루터기에서 돋은 가지가 민족들의 깃발이 된다
그날에는 백성들의 깃발로 서 있는 이새의 뿌리를 민족들이 찾을 것이며, 그가 쉬는 곳은 영광스러울 것이다.이사야 11:10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와 뿌리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났습니다.
깃발은 고대의 군대나 공동체가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데 사용하던 표지입니다. 먼 곳에서 깃발이 보이면 사람들은 그 깃발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이스라엘의 왕권 전통에서 나오지만, 그에게 향하는 시선은 여러 민족으로 확장됩니다. 이것은 앞선 6–9절의 평화가 특정 민족의 내부 문제로만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2:2–4에서도 비슷한 전망이 등장합니다.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올라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민족들 사이의 분쟁이 판결되며, 전쟁의 무기가 농기구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2장에서는 민족들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올라옵니다. 11장에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인물이 민족들의 깃발로 섭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윗 왕조의 새로운 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11장에서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시편 72편에서 왕의 공의로운 통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 풍요로운 땅, 여러 민족이 그를 찾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11장 역시 정의로운 왕과 민족들의 참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그가 쉬는 곳은 왜 영광스러운가
왕의 통치는 여호와야훼의 영이 머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의 통치 아래서는 여러 민족이 찾아올 만큼 영광스러운 쉼의 자리가 나타납니다. 포식자와 먹잇감이 함께 눕고, 어린아이가 위험 없이 노는 세계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쉼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가 쉬는 곳’이 정확히 어느 건물이나 장소를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왕의 거처나 시온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특정한 성전이나 왕궁으로 한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 민족이 새로운 왕을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조금 더 깊이
신약은 이사야 11장의 왕권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로마서 15:12에서 바울은 이사야 11:10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는 여러 민족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통치자를 바라보는 말씀을 통해, 이방인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바울의 인용은 칠십인역의 표현을 따릅니다. 히브리어 본문이 민족들이 그를 ‘찾는다’고 말하는 곳에서, 칠십인역은 민족들이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뜻을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사야의 원래 문맥에서는 다윗 왕조의 새로운 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여러 민족에게 알려지는 미래가 중심입니다. 신약은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이 이사야 11장의 모든 이미지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피조세계의 평화와 모든 폭력의 종식은 여전히 더 큰 완성을 바라보는 약속으로 읽힙니다.
돌아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시 함께 사는 것이다
그날에 주가 두 번째로 손을 뻗어, 앗시리아와 이집트와 바드로스와 쿠시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의 해안 지역들에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들을 되찾을 것이다.이사야 11: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새로운 왕보다 주의 행동이 중심에 놓입니다.
‘두 번째로’ 손을 뻗으신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펴서 이집트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출애굽기 3:20; 6:6). 한때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여러 지역에 흩어진 남은 자들을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강대국이고, 이집트와 바드로스는 나일강 유역과 연결됩니다. 쿠시는 이집트 남쪽 지역을, 엘람과 시날은 동쪽의 지역들을, 하맛은 시리아 북쪽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의 바다 해안 지역들은 더욱 먼 곳까지 시야를 넓힙니다.
이 지명들은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으로 흩어진 백성의 처지를 보여 줍니다. 전쟁과 정복, 강제 이주와 도피로 인해 여러 지역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실제로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열왕기하 17:6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시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사로잡혀 간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어느 나라의 지배 아래 있느냐가 그들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민족들을 향해 깃발을 들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흩어진 유다 사람들을 땅의 네 끝에서 모아들일 것이다.이사야 11:12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이새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섭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민족들을 향해 깃발을 드십니다. 그런데 두 장면에서 모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10절에서는 여러 민족이 그 왕을 찾아옵니다. 12절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모입니다. 새로운 왕의 통치는 민족들의 관심을 끌고, 하나님의 구원은 흩어진 백성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을 한곳에 데려오는 것만으로 공동체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문제를 다음 절에서 다룹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여전히 서로를 미워한다면
에브라임의 질투는 사라지고, 유다를 적대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않고, 유다는 에브라임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1:13 · 본디새김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이고, 유다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었습니다(열왕기상 12장). 두 왕국은 때로 협력했지만, 서로 경쟁하고 적대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북이스라엘과 유다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7장에서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함께 유다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13절의 약속은 단순히 민족 사이의 일반적인 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분열과 경쟁의 역사를 경험한 두 왕국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는 선언입니다.
함께 살게 되더라도 서로를 경쟁자와 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공동체는 다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질투와 적대감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돌아올 길이 열리는 것과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사야가 기대하는 회복에는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됩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장면에서는 원래 서로를 위협하던 존재들이 안전하게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제 에브라임과 유다도 서로를 적대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의 평화와 이스라엘의 재결합은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둘 다 오래된 적대 관계가 끝나는 미래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화해한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번에는 다른 민족들을 공격합니다.
평화를 약속한 본문에 왜 다시 약탈이 등장하는가
그들은 서쪽으로 블레셋의 산기슭을 덮치고, 함께 동쪽 사람들을 약탈할 것이다. 에돔과 모압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암몬 사람들은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다.이사야 11: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선 평화의 비전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평화로운 문화 교류나 자발적인 종교적 참여만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실제 군사적 승리와 정치적 복종을 나타내는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은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던 주변 민족들입니다. 사무엘하 8장에는 다윗이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벌여 이들을 제압한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14절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말하는 문맥에서, 과거 왕국의 군사적 우위와 주변 민족에 대한 지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6–9절의 보편적인 평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는 이사야가 서로 다른 시간적·신학적 지평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6–9절은 적대와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궁극적인 평화를 그리고, 14절은 당시 이스라엘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회복과 정치적 안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14절의 군사적 언어를 회복된 백성이 더 이상 주변 민족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뜻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도 본문이 분명히 ‘약탈’과 ‘복종’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11장은 이 긴장을 직접 풀어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구절을 처음부터 완전히 비폭력적인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6–9절의 평화를 단순히 군사적 승리의 결과로 축소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이 구절을 오늘날 다른 민족을 침략하거나 지배하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허락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군사적 장면으로 장을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의 행동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쟁터가 아니라 바다와 강이 등장합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강에 길이 생긴다
여호와야훼가 이집트 바다에서 혀처럼 뻗은 만을 완전히 없애고, 자기 바람의 열기로 그 강 위에 손을 휘두를 것이다. 그 강을 쳐서 일곱 개울로 만들고, 사람들이 신을 신은 채 건너가게 할 것이다.이사야 11: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출애굽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앞에는 바다가 있었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출애굽기 14:21–22).
그런데 이사야 11장에서는 바다뿐 아니라 강까지 등장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그 강을 쳐서 일곱 개울로 만들고’라는 표현은 거대한 물길이 여러 작은 흐름으로 나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의 큰 강은 사람이 쉽게 건너기 어려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작은 개울로 나뉘면 건널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신을 신은 채 걸어서 건넙니다.
건널 수 없었던 물길이 일상의 발걸음으로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스스로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찾아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에 그들을 위해 길이 생겼듯, 그의 백성 가운데 앗시리아에 남은 자들을 위해 큰길이 생길 것이다.이사야 11:16 · 본디새김
출애굽 당시에는 이집트라는 하나의 지배 중심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는 사건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모입니다. 구원의 방식은 출애굽을 닮았지만, 구원의 범위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맞게 확장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강대국의 지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적대하던 형제들이 화해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갈 공동체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마지막에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한 탈출로가 아니라 돌아오는 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집트 바다에서 혀처럼 뻗은 만’은 일반적으로 홍해의 북쪽으로 뻗은 해역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히 어느 해역을 가리키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강’은 문맥상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8:7에서도 ‘그 강’은 앗시리아의 강력한 세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를 반드시 정확한 수로 계산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적 표현 속에서 강 전체가 건널 수 있는 상태로 바뀌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바람의 열기로’에 해당하는 부분의 아얌(עֲיָם)은 뜻이 확실하지 않은 낱말입니다. 뜨겁고 세찬 바람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글자를 바꾸지 않고 열기로 읽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강렬한 바람이 물길을 말려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장면이 됩니다.
그루터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가 한 왕의 삶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고, 그 결과가 공동체와 피조세계에까지 확장된다는 약속입니다. 어린아이는 맹수를 제압할 능력이 없지만 맹수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흩어진 백성은 거대한 바다와 강을 스스로 없앨 수 없지만 그 길을 건넙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들의 능력이 충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새로워졌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신을 신은 채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한때 거대한 제국의 지배 아래 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물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들의 발 앞에는 큰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강대한 왕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