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무너진 나라에서 들려오는 울음
이사야 15장은 한 나라의 멸망을 선언하지만, 정작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적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침략자의 이름도, 전투의 경과도, 승리한 군대의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들리는 것은 울음소리입니다. 성읍들이 울고, 군인들이 울고, 피난민들이 울며, 마침내 그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도 함께 부르짖습니다.
이사야 13–23장은 여러 민족에 관한 신탁을 모아 놓은 부분이고, 15장은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갈등해 온 모압을 다룹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모압을 조롱하거나 그 멸망을 축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너진 도시와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게 합니다.
이 장의 중요한 질문은 모압이 왜 멸망하는가에 앞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사람이 그 멸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입니다.
밤사이에 무너진 두 성읍 — 확실하다고 믿었던 세계의 붕괴
모압에 관한 신탁. 참으로 밤사이에 모압의 아르가 황폐해져 멸망했다. 참으로 밤사이에 기르모압이 황폐해져 멸망했다.이사야 15:1 · 본디새김
‘밤사이에’라는 표현은 재앙의 갑작스러움을 강하게 전달합니다. 어제까지 사람이 살던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됩니다. 내일도 계속되리라 여겼던 삶의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두 행에서 거의 동일한 문장을 반복합니다. 두 성읍의 이름만 바뀔 뿐, 그 뒤에 따라오는 운명은 같습니다.
모압은 사해 동쪽에 자리 잡았던 왕국입니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관계는 단순한 적대 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9:37은 모압을 롯의 후손으로 소개하며, 신명기 2:9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모압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땅을 롯의 자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명기 2:9에 등장하는 지명이 바로 ‘아르’입니다. 신명기에서는 모압이 차지한 땅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인 아르가, 이사야 15장에서는 황폐해졌다는 소식의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두 본문의 직접적인 문학적 연관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성경 전체를 함께 읽는 독자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웁니다.
모압은 단지 이스라엘의 적이라는 이유로 존재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바깥의 민족에게도 역사와 땅이 있으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도시가 무너졌다는 두 차례의 짧은 선언이 끝나자, 이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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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표현만으로 실제 공격이 야간 기습이었다거나, 두 성읍이 정확히 같은 밤에 함락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의 시적 언어는 시간의 급작스러움을 통해 멸망의 충격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일으킨 군대도, 전쟁이 벌어진 정확한 연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여러 역사적 배경을 검토할 수 있지만, 이 장의 묘사를 어느 한 전쟁에 확실하게 대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산당에서 거리까지 — 슬픔이 나라 전체를 뒤덮다
바잇과 디본이 울려고 산당들로 올라갔다. 느보 때문에, 메드바 때문에 모압이 울부짖는다. 모든 머리는 벗겨졌고, 모든 수염은 잘렸다.이사야 15:2 · 본디새김
높은 곳에 있는 성소는 고대 근동에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도움을 구하는 장소였습니다. 모압에서도 산당은 종교생활의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밀고 수염을 자르는 행위는 고대의 애도 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수염은 남성의 외모와 사회적 체면에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수염을 잘라 버린 모습은 평소의 단정한 모습을 포기할 정도의 슬픔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 48:37에서도 모압의 재앙을 묘사하면서 같은 행동이 나타납니다.
모압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의 지붕들과 광장들에서 모두 울부짖으며 울음 속에 주저앉는다.이사야 15:3 · 본디새김
굵은 베는 슬픔과 낮아짐을 나타내는 의복입니다. 평소 사람들이 오가고 물건을 사고팔던 광장이 이제 집단적인 애도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특정한 성소에서 시작된 울음이 생활 공간 전체를 채우는 것입니다.
본문은 모압을 여성 단수로 가리키기도 하고, 그 주민들을 복수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특히 3절의 ‘그녀의 지붕들과 광장들’이라는 표현은 모압을 한 인물처럼 바라보게 합니다. 모압은 여러 도시와 주민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면서, 동시에 슬퍼하는 한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4절에서는 울음소리가 더 멀리 퍼집니다.
헤스본과 엘르알레가 외쳤고, 그들의 목소리가 야하스까지 들렸다. 그러므로 모압의 무장한 이들이 소리친다. 모압의 넋이 제 안에서 떨었다.이사야 15:4 · 본디새김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군인들을 언급한다면 일반적으로 적을 향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모습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군인들이 하는 일은 소리치는 것입니다. 평소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마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모압이 자기 힘으로 재앙을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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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절의 ‘바잇’은 해석이 갈립니다. 히브리어 하바이트(בַּיִת)는 일반적으로 ‘그 집’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성전이나 신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지명으로 읽으면 바잇과 디본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반면 ‘집’ 또는 ‘신전’으로 읽으면, 모압 사람들이 성전과 산당으로 올라가 통곡하는 모습이 됩니다. 문장의 짜임이 쉽지 않아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든 재앙 앞에서 사람들이 종교적 장소를 찾는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4절의 군인들의 외침이 전투의 함성인지, 공포에 질린 절규인지 단어 하나만으로는 완전히 판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로 뒤에 ‘모압의 넋이 제 안에서 떨었다’는 말이 이어지므로, 적어도 이 장면은 군사적 자신감보다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강조합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두고 부르짖는다」 — 심판의 예언 가운데 들리는 연민
내 마음이 모압을 두고 부르짖는다. 모압의 도망자들은 소알까지,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른다. 루힛 오르막을 울며 올라가기 때문이다. 호로나임 길에서 파멸의 외침을 터뜨리기 때문이다.이사야 15:5 · 본디새김
앞의 네 절에서 울부짖던 사람들은 모두 모압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재앙을 겪는 사람들을 바깥에서 묘사하던 시가, 그 재앙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분명한 것은 심판의 신탁 안에서 모압을 향한 연민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늘 우호적인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22–25장에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심각한 갈등이 기록되어 있고, 열왕기하 3장에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신탁은 모압의 과거 잘못을 길게 열거하는 대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독자가 바라보게 합니다.
이 연민은 심판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연민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이 둘을 함께 놓는 것이 본문의 특징입니다.
화자의 시선은 이제 무너진 성읍을 떠나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길 위를 움직입니다. 루힛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울면서 올라가고, 호로나임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파멸을 외칩니다. 오르막도, 길도 피난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15장의 피난민들은 어디로 가야 안전할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여 줍니다. 그들의 길은 생존을 위한 길이지만, 아직 구원의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들이 지나가는 땅조차 황폐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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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예언자 자신의 목소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16:9과 16:11에도 모압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마음 깊이 슬퍼하는 일인칭 표현이 나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언서에서는 예언자의 말과 하나님의 말이 서로 가까이 놓이며, 때로는 명시적인 도입 없이 화자가 바뀌기도 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48:3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라는 문맥 속에서 모압을 향해 슬퍼하는 일인칭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사야 15:5 자체에는 화자의 신분을 분명히 지정하는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곧바로 ‘하나님이 우신다’고 단정하거나, 반드시 예언자 개인의 감정일 뿐이라고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압의 도망자들’에 해당하는 말은 달아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모압의 ‘빗장들’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뒤에 소알이 등장하기 때문에 도망자라는 읽기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원문에는 본디새김의 ‘이른다’에 해당하는 이동 동사가 직접 쓰이지 않았습니다. ‘에글랏 슬리시야’도 소알과 별개의 지명일 수도 있고, 소알에 붙은 별칭일 수도 있습니다. 말 자체를 ‘세 살 된 암송아지’와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19:20–23에서 롯은 소돔의 멸망을 피해 소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에서 모압의 기원이 등장합니다(창세기 19:30–37). 다만 이사야가 의도적으로 롯의 도피를 암시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을 때 발견되는 의미 있는 연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물이 사라진 땅, 등에 짊어진 재산 — 삶의 기반을 잃다
님림의 물이 황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풀이 말랐고, 풀싹이 사라졌으며, 푸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사야 15:6 · 본디새김
도시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른 뒤, 시선은 자연환경으로 옮겨 갑니다.
님림은 물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건조한 지역에서 물이 흐르는 곳은 사람과 가축, 농경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물이 황폐해지고, 풀과 초목이 사라집니다.
갈수록 남아 있는 생명의 가능성을 좁혀 가는 표현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푸른 것이 없었다’는 말은 독자가 어디에서도 회복의 징후를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압 사람들은 모은 재물과 쌓아 둔 것을 포플러나무 시내 너머로 가져갈 것이다.이사야 15:7 · 본디새김
재물은 원래 사람이 한곳에 머무르며 생활을 이어 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압 사람들은 그 재물을 보관하던 장소를 떠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 짊어진 채 국경을 향해 움직입니다.
여기에는 재물의 무가치함을 선언하는 직접적인 교훈이 없습니다. 그들이 재물을 지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사람들이 삶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챙겨 떠나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오랫동안 쌓아 둔 재산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누리며 살아갈 삶의 터전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재앙은 그들이 벗어나려는 땅의 가장자리까지 이미 퍼져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물과 초목이 황폐해진 상태를 묘사하지만, 그 원인이 가뭄인지, 전쟁으로 인한 파괴인지, 혹은 두 가지가 결합된 상황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쟁 전체의 황폐함을 나타내는 시적 묘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포플러나무 시내’의 정확한 위치 역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국경까지 번진 울음, 피로 가득 찬 물 — 피할 곳이 보이지 않다
외침이 모압의 경계를 두루 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에글라임까지, 그녀의 울부짖음은 브엘엘림까지 이르렀다.이사야 15:8 · 본디새김
8절은 앞선 장면들의 공간적 움직임을 하나로 묶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정확한 지리적 순서보다 울음의 확산입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서로 다른 외침이 하나의 커다란 탄식이 되어 나라 전체를 채웁니다. 군대가 국경을 포위하는 장면을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는 모압이 사방에서 재앙에 둘러싸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사야는 전쟁의 상황을 소리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9절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울음의 이미지가 피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디몬의 물이 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하겠다. 모압에서 피한 이들과 그 땅에 남은 이들을 사자가 덮치게 하겠다.」이사야 15:9 · 본디새김
한곳에서는 물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는 물이 피로 물듭니다. 두 장면 모두 생명을 유지하는 정상적인 질서가 깨졌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재앙을 더하겠다’는 선언에서 화자는 더해질 재앙을 자신의 결정과 연결합니다. 도망친 사람들도, 고향에 남은 사람들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본문은 멸망한 도시에서 시작해 피난민의 길을 따라갑니다. 독자는 그들이 마침내 안전한 곳에 도착하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피난처가 아니라 사자입니다.
이 장은 재앙을 피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이사야 15장은 독립적인 신탁의 시작이면서,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모압에 관한 말씀의 앞부분입니다. 따라서 15장의 결말을 곧바로 모압의 최종 운명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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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몬’이라는 지명에도 언어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디몬(דִּימוֹן)과 ‘피’를 뜻하는 담(דָּם)은 소리가 비슷합니다. 디몬을 앞서 등장한 디본과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음성적 유사성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다만 디몬과 디본이 반드시 같은 장소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재앙을 더하겠다’는 선언은 예언 전체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를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절 자체에는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와 같은 별도의 화자 표시가 없으므로, 문학적으로는 화자의 전환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자’는 이것을 실제 맹수의 공격으로 읽을 수도 있고, 계속되는 파괴적인 위협을 나타내는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자가 특정한 왕이나 군대를 가리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역사적 인물이나 침략군을 사자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특히 이사야 16:3–4에는 피난민을 숨겨 주고 보호하라는 요청이 나타나며, 16:5에는 다윗의 집안과 관련된 왕좌, 인애와 신실함, 정의의 문제가 이어집니다. 그 요청을 누가 누구에게 하는지에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지만, 피난민의 안전과 정의로운 통치가 가까이 놓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모압의 울음은 왜 이사야의 말씀 안에 남아 있는가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만, 그 심판을 전하는 행위가 반드시 멸망을 기뻐하는 태도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 15장은 왜 하나님이 이러한 고통을 허용하시는지, 모든 고통이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쉽게 해결하지 않은 채 심판과 탄식을 나란히 놓습니다. 누군가의 몰락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기뻐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님림에서는 물이 황폐해졌고, 디몬에서는 물이 피로 가득 찼습니다. 길 위에는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고, 나라의 경계에는 울부짖음이 가득합니다.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짊어질 수 있는 재물을 챙겨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 한가운데서 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두고 부르짖는다.」
아르와 기르모압은 밤사이에 무너졌습니다. 그 이름들은 오래된 도시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그 도시들에 관해 마지막까지 들려주는 것은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울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