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1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하나님도 지혜로우십니다
이사야 31장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이상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왜 마치 그 사실을 뒤늦게 덧붙이듯 「그도」라고 말할까요?
유다의 지도자들은 앗시리아라는 강대국에 맞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병거와 기병을 계산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현실적인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계산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분이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였습니다.
이사야 31장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힘을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병거는 세었지만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다
숫자가 많고 힘이 강하다는 이유
1절은 이집트를 찾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아, 도움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 말에 기대는 자들아. 그들은 병거가 많다고 병거를 믿고, 기병이 매우 강하다고 기병을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바라보지 않았고,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다.이사야 31:1 · 본디새김
고대 근동에서 병거와 기병은 중요한 군사력이었습니다. 특히 평탄한 지형에서 말과 병거는 빠른 이동과 강력한 공격에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이집트의 기병 전력을 주목한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병거와 기병의 수량과 강도를 살피면서, 그 힘이 어디까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말은 「그들의 병거는 강하지 않다」가 아닙니다. 「그들의 병거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만으로 너희의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에 가깝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힘의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힘이 자신을 궁극적으로 지켜 줄 수 있다는 판단을 다시 검토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분을 바라보지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 문제를 해결할 때는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행동했습니다.
또한 신명기 17:16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말을 많이 두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왕이 군사력 증강을 위해 이집트와 연결되는 일을 경계했고, 이사야에서는 유다가 실제로 이집트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려 합니다. 두 본문이 공유하는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안전을 강대국의 군사력에 종속시키는 위험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군사적 준비나 국가 간 협력을 본질적으로 죄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불의한 수단을 신뢰하며, 피조물의 힘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도 지혜롭다」
그러나 그도 지혜롭다. 그는 재앙을 가져왔고, 자기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집안을 대적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돕는 세력을 대적하여 일어설 것이다.이사야 31:2 · 본디새김
유다의 지도자들은 외교적 지혜를 발휘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에 맞서려면 다른 강대국과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지혜를 정면에서 풍자합니다.
너희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러나 하나님도 지혜로우시다.
이 표현의 힘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수준의 전략가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 판단의 자리에 하나님을 다시 등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29:14에서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가 사라지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2는 그러한 인간의 지혜를 다시 문제 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실행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계획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외교적 약속은 상대국의 사정이 바뀌면 지켜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심판은 유다와 이집트가 동맹을 맺는다고 해서 취소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집안」은 이 문맥에서 유다의 불의한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돕는 세력」은 그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이집트를 가리킵니다.
유다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의한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유다도 대적하십니다.
여호와야훼와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사실이 불의를 저질러도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특권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모든 선택을 승인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도 정의를 요구하십니다.
돕는 자와 도움받는 자가 함께 무너진다
이집트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말은 살이지 영이 아니다. 여호와야훼가 손을 뻗으면 돕는 자는 비틀거리고 도움받는 자는 쓰러져, 그들 모두가 함께 멸망할 것이다.이사야 31:3 · 본디새김
이 대조는 육체가 악하고 영적인 존재만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은 실제로 빠르고 강합니다. 이집트의 군대도 실제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능력은 피조물의 능력입니다.
죽음과 피로와 패배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는 그런 한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와 앗시리아를 비교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더 많은 병거를 보유했는지, 어느 나라의 군대가 더 강한지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집트와 앗시리아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집트와 하나님을 비교합니다.
이렇게 비교 대상을 바꾸는 순간, 유다의 전략은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실패에 함께 휘말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이집트의 힘을 빌리면 자신이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을 뻗으시면 이집트의 실패가 곧 유다의 실패가 됩니다.
이러한 구약의 구원 이해는 훗날 신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나 자랑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주제와도 이어집니다(고린도전서 1:25–29). 이것은 이사야 31장의 직접적인 인용이나 특정 사건에 대한 예언 성취라기보다, 하나님과 인간의 능력을 대조하는 신학적 주제의 연결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와 이집트의 잘못된 동맹을 심판하신다면, 유다는 앗시리아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때 본문은 전혀 다른 두 동물을 등장시킵니다. 사자와 새입니다.
사자처럼 싸우고 새처럼 지키시는 하나님
목자들이 소리쳐도 물러서지 않는 사자
4절에서 예언자는 여호와야훼께 직접 들은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자와 젊은 사자가 제 먹이 위에서 으르렁거릴 때, 목자들의 무리가 그것을 치려고 불려 와도 그들의 목소리에 겁먹지 않고, 그들의 소란에 움츠러들지 않듯이, 그렇게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내려와 시온 산과 그 언덕 위에서 싸울 것이다.」이사야 31:4 · 본디새김
그분이 시온 산에 내려와 싸우실 때, 아무리 많은 적이 모여들어도 그분을 물러서게 할 수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라는 호칭은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와 권세 위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드러냅니다. 유다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두렵기 때문에 이집트의 군대를 찾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군사력 위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말은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의 위협이 하나님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자는 시온을 위해 싸우는가, 시온을 향해 싸우는가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시온 자체를 향해 싸우시는 것일까요? 다만 31장 전체의 흐름에서는 5절의 보호 약속과 8절의 앗시리아 심판이 4절을 시온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읽도록 강하게 이끕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의 요청을 수행하시는 군사적 조력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의와 뜻에 따라 싸우시는 분입니다.
사자 다음에 등장하는 새들
5절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을 지킬 것이다. 지키며 건져 내고, 그 성을 넘어가며 살려 낼 것이다.」이사야 31:5 · 본디새김
사자의 장면에는 공격과 위협에 굴하지 않는 힘이 두드러집니다. 새의 장면에는 높은 곳에서 살피고 보호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집니다.
5절의 동사들의 배열에서 보호는 단순히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예루살렘이 실제로 구원을 얻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넘어가며 살려 낼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벗어나야 할 압제의 땅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31장에서 유다는 바로 그 이집트로 도움을 구하러 내려갑니다.
한때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의 권세에서 구원하셨던 백성이, 이제는 이집트의 권세 아래에서 안전을 찾으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건져 내시며 넘어가 살려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잊고 있던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하는 기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알 하르 치욘」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전치사 알은 문맥에 따라 장소를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대상을 향한 적대적 행동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문법만으로는 어느 해석이 옳은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시온을 위해 싸우신다는 해석입니다. 바로 다음 5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시고 건져 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8–9절에서는 앗시리아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시온을 향해 싸우신다는 해석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앞의 2절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악한 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자가 자기 먹이를 붙들고 있는 모습은 보호의 이미지라기보다 공격과 심판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이사야 29:1–4에서도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고통과 포위를 선언하십니다. 5절의 「넘어가며」는 파소아흐로, 동사 파사흐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 어근은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2:23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를 치러 지나가실 때, 피가 표시된 이스라엘 집의 문을 넘어가시며 파괴자가 그 집에 들어가 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사야 31:5의 「넘어가며 살려 낼 것이다」는 출애굽기의 구원 사건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이 동일한 어근을 사용한다는 사실과, 이사야가 유월절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31장에는 유월절이라는 명칭도, 문설주의 피도, 어린양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돌아오라는 명령과 버려지는 우상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이 돌아와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의 보호가 약속된 직후, 예언자는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아, 너희가 깊이 반역한 이에게로 돌아오라.이사야 31:6 · 본디새김
원문의 「깊이」(עָמַק)는 단순히 반역의 횟수가 많다는 뜻이라기보다, 반역이 깊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우연히 길을 잃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셨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말씀입니다. 돌아오라는 명령은 그들의 잘못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돌아갈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1:27–28에서는 시온의 회복과 반역자들의 멸망이 대조됩니다. 이사야 31:6에서도 돌아옴의 요청은 단순히 종교적 감정을 회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진 방향에서 실제로 돌이키라는 요청입니다.
그렇다면 그 돌아옴은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자기 손이 만든 것을 자기 손으로 버린다
그날에는 저마다 자기 은 우상과 자기 금 우상을 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너희 손이 너희를 위해 죄를 지으며 만든 것들이다.이사야 31:7 · 본디새김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은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쓸모없는 물건을 치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을 더 이상 의지할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면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다시 자신의 안전을 맡기려 합니다.
3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손을 뻗으시면 인간의 군사적 동맹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사람의 손이 우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손이라는 이미지가 전혀 다른 능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만든 우상은 자신을 만든 사람조차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대조는 이사야 44:9–20에서 훨씬 자세하게 전개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하고, 나머지 부분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또한 7절에서 예언자는 우상을 내버리는 일이 「그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보호와 뒤에서 예고되는 앗시리아 심판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드러나는 날, 백성은 자신들이 의지했던 우상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이 모든 백성이 예외 없이 완전한 회개에 이르는 시점을 역사적으로 특정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 나타나야 할 백성의 응답을 예언적으로 그린 말씀입니다.
여기서 돌아옴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백성이 무엇을 버리는지에서 그 변화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의 칼이 아닌 칼 앞에서 무너지는 제국
앗시리아를 쓰러뜨리는 칼은 누구의 것인가
8절에 이르면 드디어 유다가 가장 두려워하던 적의 운명이 선포됩니다.
「앗시리아는 사람의 것이 아닌 칼에 쓰러지고, 인간의 것이 아닌 칼이 그를 삼킬 것이다. 그는 칼 앞에서 달아나고, 그의 젊은이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될 것이다.」이사야 31:8 · 본디새김
3절에서는 이집트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말은 살이지 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사람의 힘으로 앗시리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병거와 기병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시리아의 패배가 또 다른 강대국의 인간적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군사적 수단을 설명하는 대신, 그 패배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제는 앗시리아가 달아난다
지금까지 달아날 것을 두려워한 쪽은 유다였습니다. 적의 침략이 다가오고 있었고, 유다는 살아남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앗시리아가 달아납니다.
앗시리아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 속에서는 자신들이 행사하던 권력의 역전을 경험합니다.
사람을 굴복시키던 세력이 굴복당하는 것입니다.
「그의 바위」가 사라진다
「그의 바위는 공포 때문에 사라지고, 그의 고관들은 깃발 때문에 겁에 질릴 것이다.」 시온에 불이 있고 예루살렘에 화덕이 있는 여호와야훼의 발언이다.이사야 31:9 · 본디새김
왕이나 군사 지도자처럼 나라를 지탱하는 인물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견고한 요새나 피난처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상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앗시리아가 의지하던 견고한 것이 공포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군사적 지도력을 행사해야 할 고관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 두려움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임재를 마지막 문장으로 드러냅니다.
시온의 불과 예루살렘의 화덕
이사야는 왜 하나님의 이름 뒤에 불과 화덕을 덧붙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시온과 예루살렘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두 표현은 여호와야훼의 임재를 뜨겁고 강력한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31장의 문맥에서는 불의 이미지가 특히 앗시리아의 패배와 연결됩니다. 유다가 두려워하던 군대는 예루살렘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도시에 이미 여호와야훼의 불과 화덕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기 백성을 지키기로 하실 때, 앗시리아의 힘은 그 뜻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예언은 이사야 37:36–37에 기록된 앗시리아 군대의 패배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본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앗시리아 진영을 치고, 산헤립이 돌아가 니느웨에 머무르는 장면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31:8 자체가 37장의 사건을 세부적으로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된다는 것은 전투력을 제공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지배와 강제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군대의 깃발은 부대의 위치와 소속을 알리고 병력을 집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깃발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인지, 공포 때문에 자기 깃발을 버리고 흩어지는 것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불 역시 보호와 심판의 맥락에서 나타납니다. 이사야 10:16–17에서는 이스라엘의 빛이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가 불꽃이 되셔서 앗시리아의 영광을 태우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한 이사야 29:1–2에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아리엘」이라는 이름은 심판의 문맥에 등장합니다. 그 이름과 제단의 화덕을 연결하여 이해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 해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므로 31:9의 화덕을 반드시 특정한 제단 시설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의미 — 우리가 계산하지 않는 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잘못된 계획을 무너뜨릴 만큼 날카롭고, 자기 백성을 지킬 길을 알고 계실 만큼 깊습니다. 그분은 불의한 동맹에 기대는 백성을 책망하시지만, 그들이 돌아올 길도 열어 두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앗시리아의 고관들이 깃발 앞에서 떨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제국이 공포에 휩싸인 순간, 이사야는 더 이상 군대의 숫자를 세지 않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여호와야훼의 불이 있습니다.
유다가 안전을 찾아 멀리 내려가려 했을 때, 그들이 의지했어야 할 분은 시온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