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5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광야가 먼저 노래하고 사람들이 돌아온다

이사야 35장은 매우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직 돌아온 백성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행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야가 먼저 기뻐하고 꽃을 피웁니다.

하나님은 돌아올 사람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세상을 마련하십니다.

바로 앞의 34장에서 에돔의 땅은 황폐해지고, 궁전과 요새는 야생 생물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35장에서는 그와 반대로 광야가 꽃피고, 물이 솟으며,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나갈 길이 생깁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35장 본문 읽기 →

아무도 살 수 없던 땅이 환호하기 시작한다

이사야 35:1–2 본문 →

광야가 꽃피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첫 절에는 메마른 환경을 가리키는 세 표현이 등장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환호할 것이다. 사막 평원은 기뻐하며 크로커스처럼 꽃필 것이다.이사야 35:1 · 본디새김

세 낱말의 지리적 의미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문맥에서는 모두 물이 부족하고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기 어려운 환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야는 본래 감정을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광야를 사람처럼 노래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전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풍성한 꽃을 기대하지 않는 땅에서 꽃이 핍니다.

꽃피고 또 꽃피며,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2절에서는 같은 동작이 반복됩니다.

꽃피고 또 꽃필 것이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환성을 올릴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찬란함이 그 땅에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영광을, 우리 하나님의 찬란함을 볼 것이다.이사야 35:2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서는 꽃피는 동사를 같은 어근의 형태와 함께 사용하여 그 동작을 강조합니다. 본디새김의 「꽃피고 또 꽃필 것이다」는 그 반복을 살린 표현입니다. 꽃이 피는 일이 넘쳐나고, 그 변화가 환호할 만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반복을 통해 느끼게 합니다.

레바논은 울창한 산림으로, 갈멜은 풍요로운 산지로, 샤론은 비옥한 평야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이사야는 이 세 지역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광야에 가져다 놓습니다.

여기서 바로 앞선 이사야 33:9와의 연결이 눈에 띕니다. 그곳에서는 레바논이 시들고, 샤론이 사막처럼 변하며, 갈멜이 잎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풍요가 광야에 주어집니다.

앞에서는 가장 풍성하던 땅조차 쇠약해졌습니다. 이제는 가장 메마른 땅조차 풍성해집니다.

이 변화의 근거는 땅 자체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주어질 것이다」라는 표현이 그것을 알려 줍니다. 광야는 스스로 풍요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풍요를 받는 존재입니다.

광야의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광야의 변화는 단순히 풍경이 아름다워졌다는 사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연의 풍요가 하나님의 찬란함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화된 광야를 지나갈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본문은 아직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먼저 그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손에 힘이 풀리고, 무릎이 휘청거리며,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바첼레트(⁨חֲבַצֶּלֶת⁩)입니다. 이 낱말은 아가 2:1에도 등장하지만, 정확히 어떤 식물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크로커스는 가능한 식별 가운데 하나입니다. 2절의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남성 복수 대명사 헴마(⁨הֵם⁩)가 사용됩니다. 반면 앞서 광야와 사막 평원은 여성 단수로 받아 서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그들」을 앞에서 의인화된 땅들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아직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려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소식

이사야 35:3–4 본문 →

누구의 손을 굳세게 하라는 것인가

3절에서 예언의 목소리가 갑자기 명령으로 바뀝니다.

힘 풀린 손들을 굳세게 하고, 휘청거리는 무릎들을 튼튼하게 하라.이사야 35:3 · 본디새김

하나님의 구원이 가져올 변화를 선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명령은 복수형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향한 호소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언을 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격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약한 사람들에게 그저 스스로 강해지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손을 굳세게 해 주고 무릎을 튼튼하게 해 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탓하거나 조급하게 몰아붙이는 대신, 그가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는 이유가 있다

4절은 그 격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합니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복수와 함께, 하나님의 보응과 함께 올 것이다. 그가 와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이사야 35:4 · 본디새김

사람이 스스로 충분히 강해져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복수」와 「보응」을 동반하여 오십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두려움에는 실제로 그들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세력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력이 아무런 제약 없이 계속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약속에는 그 위협에 응답하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34장에서는 시온의 송사를 위한 보응이 선포되었습니다(34:8). 35장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보응이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구원의 소식이 됩니다(35:4). 따라서 여기서 복수와 구원은 서로 분리된 두 가지 행동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개입이 서로 다른 대상에게 미치는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되고, 위협받는 자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물론 이 구절이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의 복수라고 주장하며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수와 보응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5장의 희망은 상황이 저절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상황을 바꾸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눈과 귀가 열리고,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온다

이사야 35:5–7 본문 →

사람들이 다시 보고 듣기 시작한다

5절은 「그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때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는 이들의 귀가 열릴 것이다.이사야 35:5 · 본디새김

이 「그때」는 바로 앞의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시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몸이 변화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이러한 감각의 회복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새롭게 경험하고 깨닫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죄가 있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은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장애의 원인을 개인의 죄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인간의 몸과 삶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걷는 것을 넘어 사슴처럼 뛴다

그때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올릴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 평원에서 물줄기들이 터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35:6 · 본디새김

여기서는 단순한 기능의 회복을 넘어 기쁨의 움직임이 등장합니다.

사슴은 빠르고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자유롭고 활기찬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이사야는 몸의 회복을 단순히 이전의 기능을 되찾는 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 몸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광야가 사람처럼 환호했습니다.

이제는 말하지 못하던 사람의 혀가 환성을 올립니다.

땅의 기쁨과 사람의 기쁨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몸이 변화되는 일과 땅이 변화되는 일이 나란히 놓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이 뛰어오르고, 메마른 땅에서는 물이 터져 나옵니다. 환성을 올리지 못하던 혀가 노래하고, 생명이 자라기 어려웠던 광야에서는 물줄기가 흐릅니다.

두 장면 모두 막혀 있던 것이 열리고, 생명력이 밖으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물이 사람의 장애를 직접 치료한다는 물리적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몸과 그 몸이 살아가는 세계에 함께 미친다는 사실을 시적 병행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기루처럼 보이던 곳에 실제 물이 생긴다

7절은 광야의 변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불볕에 마른 땅은 못이 되고, 목마른 땅은 물 솟는 샘들이 될 것이다. 자칼들의 거처, 그것들이 눕던 곳에서는 풀이 갈대와 파피루스로 바뀔 것이다.이사야 35:7 · 본디새김

물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땅이 물이 풍성한 곳으로 바뀝니다.

이사야 34:13에서는 자칼들이 인간의 궁전과 요새가 있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35장에서는 자칼의 거처에 물이 생기고 갈대와 파피루스가 자랍니다. 두 장면을 기계적으로 같은 장소의 변화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폐한 땅과 물이 풍성한 땅이 서로 대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곧 그 광야에 길이 생깁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물은 장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입니다. 그들이 지나갈 땅에 물이 솟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여정 자체를 가능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6:9–10에서는 백성이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등장했습니다. 29:18에서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의 말씀을 듣고 눈먼 사람들의 눈이 어둠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도 마태복음 11:4–5와 누가복음 7:22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이 눈먼 이들의 시력 회복, 다리 저는 이들의 걸음, 듣지 못하는 이들의 청각 회복 등으로 제시됩니다. 이는 이사야 35:5–6의 구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뚜렷한 주제적 연결이며, 이사야 61:1 등 다른 구약의 회복 약속도 함께 반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35장을 처음부터 신약의 특정 치유 사건만을 설명하는 예언으로 좁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 자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땅과 몸과 길을 회복시키시고, 마침내 그들을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구원의 전망을 제시합니다. 「불볕에 마른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라브(⁨שָׁרָב⁩)는 뜨거운 열기나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 구절을 신기루의 이미지로 읽으면 특히 인상적인 대조가 나타납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멀리 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실제로 물이 생깁니다. 본디새김은 그 낱말을 「불볕에 마른 땅」으로 옮겼습니다. 갈대와 파피루스는 물이 있는 습지 환경을 떠올리게 하는 식물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물웅덩이가 하나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의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광야 한가운데 나타나는 거룩함의 길

이사야 35:8–9 본문 →

왜 광야에 길이 생기는가

8절은 새로운 장면을 엽니다.

거기에 큰길과 길이 생기고, 그 길은 거룩함의 길이라 불릴 것이다. 부정한 이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어리석은 이들이라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35:8 · 본디새김

여기서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구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속량하신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사야는 8절에서 길의 이름을 먼저 밝히고, 9–10절에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먼저 길이 마련됩니다.

그다음 속량된 사람들이 그 길을 걷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통과할 길을 여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습니다(출애굽기 14:21–22; 16:4; 17:5–6).

그러나 이사야 35장 자체가 새로운 모세나 특정한 출애굽 사건의 정확한 반복을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도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부정한 이는 지나가지 못하지만, 어리석은 이도 길을 잃지 않는다

8절 후반부에는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되는 긴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외되지만, 어떤 사람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지나갑니다. 본디새김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어리석은 이들조차 길을 잃지 않는다는 읽기를 따랐습니다.

거룩함의 길은 아무런 구별도 없는 길이 아니지만, 동시에 특별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길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의 거룩함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호가 함께 강조됩니다.

또한 앞에서 눈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의 회복을 선언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길의 거룩함을 장애나 신체적 조건에 따른 배제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흐름은 오히려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이 걸어갈 길을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사자가 없는 길

9절에서는 길의 안전이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 길에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짐승은 거기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속량된 이들이 그 길을 걸을 것이다.이사야 35:9 · 본디새김

고대의 광야 길에는 여러 위험이 있었습니다. 물이 부족할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으며, 야생 동물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그리는 길에서는 그러한 위협이 제거됩니다.

물론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현실에서 야생 동물이나 다른 위험으로부터 항상 보호받는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미래를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9절 끝에서 비로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다시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용맹한 군대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으로 광야를 정복한 개척자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가 마침내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부정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메(⁨טָמֵא⁩)는 구약에서 의례적인 부정을 가리킬 때도 쓰이고, 도덕적인 타락이나 더러움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을 가리키는지는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이들」에 해당하는 에빌림(⁨אֱוִיל⁩)은 잠언 등에서 도덕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단순히 지능이 낮거나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곧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히브리어 문장 구조 자체가 압축되어 있어, 어리석은 이들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 길에서 헤매지 않는다는 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어가 어느 표현에 연결되는지를 둘러싸고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쁨이 머리 위에 있고, 슬픔이 달아난다

이사야 35:10 본문 →

길의 마지막에서 목적지가 밝혀진다

여호와야훼가 속량한 이들이 돌아와, 환성을 올리며 시온에 들어올 것이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환희와 기쁨을 얻고, 슬픔과 탄식은 달아날 것이다.이사야 35:10 · 본디새김

이사야는 그동안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돌아오는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와」라는 표현과 시온이라는 목적지를 고려하면, 고향과 예배의 중심지에서 멀어졌던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돌아오는 구원의 전망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계심을 나타내는 중심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단지 옛집으로 돌아가거나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차지한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기쁨이 머리 위에 있다

마치 기쁨이 사람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이나 화관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35:10의 기쁨을 머리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기쁨이 그들의 모습 전체를 특징짓는다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는 곳에는 지속되는 기쁨이 약속됩니다. 물론 이것을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신자가 매 순간 기쁘기만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의 상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 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속량과 귀환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기쁨은 얻고, 슬픔은 달아난다

이 문장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희와 기쁨을 얻습니다. 반대로 슬픔과 탄식은 달아납니다.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짓누르던 것들이 떠나갑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신 길의 끝에는 단지 고향으로의 귀환만이 아니라, 더 이상 슬픔에 쫓기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0:3에서는 광야에서 여호와야훼의 길을 준비하고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한 큰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3:19에서는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들을 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51:11은 35:10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 속량받은 사람들이 시온에 돌아오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으며, 슬픔과 탄식이 달아난다는 선언이 다시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머리에 쓰는 장식은 기쁨과 영광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1:3에서도 슬퍼하는 시온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얻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시구(⁨נָשַׂג⁩)는 얻다, 도달하다, 따라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이 환희와 기쁨을 얻는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희와 기쁨이 그들에게 이르거나 그들을 따라잡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쁨을 얻는다고 읽으면, 오래도록 슬픔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마침내 기쁨을 되찾는 모습이 됩니다. 기쁨이 그들에게 이른다고 읽으면, 그들이 애써 붙잡을 수 없었던 기쁨이 오히려 그들을 찾아오는 모습이 됩니다.

오늘의 의미 — 하나님은 돌아갈 길도 마련하신다

이사야 35:1–10 본문 →

이사야 35장의 중요한 특징은 구원의 길을 홀로 걷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속량된 사람들이 함께 돌아옵니다. 그들은 모두 완벽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어서 그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길을 걷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광야를 두려워하며 헤매지 않습니다. 꽃이 피는 땅을 지나고, 물이 솟는 곳을 지나며, 사나운 짐승이 없는 길을 걷습니다.

멀리 시온이 보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고, 입에서는 환성이 울려 나옵니다.

처음에 아무도 노래하지 않던 광야가 먼저 환호했습니다.

이제 그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온에 들어설 때, 슬픔과 탄식은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광야에 길을 내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