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1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깨어나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가 깎여 나온 바위를 바라보고, 너희가 파여 나온 채석장을 바라보아라.」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왜 먼저 오래전 조상들을 돌아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 장에는 눈여겨볼 만한 두 가지 명령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들어라’이고, 다른 하나는 ‘깨어나라’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르면 누군가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깨어나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이야말로 백성을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대답하시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게 깨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화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구원과 의는 인간의 힘이나 세상의 형편에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51장 본문 읽기 →

무너진 도시를 보며 처음을 기억하라

이사야 51:1–3 본문 →

왜 바위와 채석장을 바라보라고 하는가

이 장의 첫 번째 명령은 의를 추구하며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의를 추구하며 여호와야훼를 찾는 이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깎여 나온 바위를 바라보고, 너희가 파여 나온 채석장을 바라보아라.」이사야 51:1 · 본디새김

여기서 바위는 단단하게 붙들고 의지할 대상을 가리키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뒤따르는 2절을 보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비유입니다.

돌을 깎아 건축 자재를 얻으려면 원래의 바위나 채석장이 있어야 합니다. 완성된 건물을 바라보면 그것이 처음 어떤 돌에서 나왔는지 생각하기 어렵지만, 채석장으로 돌아가면 그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산고를 겪으며 너희를 낳은 사라를 바라보아라. 그가 혼자였을 때 내가 그를 불렀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번성하게 했다.」이사야 51:2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처음 받았을 때 많은 후손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1:30은 사라에게 자녀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은 그런 가정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창세기 18:11-14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늙었고, 사라에게 아이를 낳는 일은 인간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혼자였을 때’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문자 그대로 세상에 혼자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당시 약속된 큰 민족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 그들은 과거의 번영을 잃고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원을 돌아보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풍요롭고 강대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도움을 보태 주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이루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들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어떤 방식으로 일해 오셨는지를 기억하라는 요청입니다.

채석장에서 에덴으로

3절에서는 시선이 다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위로했다. 시온의 모든 폐허를 위로하고, 그곳의 광야를 에덴처럼, 그곳의 사막 평원을 여호와야훼의 동산처럼 만들었다. 그곳에서 환희와 기쁨, 감사와 노랫소리가 발견될 것이다.」이사야 5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한 사람에게서 민족이 생겨나는 일을 기억하게 하셨다면, 이제는 황폐한 도시가 풍요로운 동산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생명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2:8-15에서 에덴은 하나님이 동산을 마련하시고 사람이 살도록 하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과 나무가 있습니다. 반대로 이사야 51장의 시온은 폐허이며 광야이고 사막 평원입니다. 에덴의 이미지를 통해 황폐한 땅에 생명과 풍요가 돌아올 것임을 보여 줍니다.

무너진 도시를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벽을 다시 쌓고 건물을 복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고, 서로 함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기원과 시온의 미래를 연결한 뒤, 말씀의 시야는 뜻밖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3절은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위로했다’고 말합니다. 아직 회복을 기다리는 백성에게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들리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위로했다는 동사는 완료된 행동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는 문맥상 앞으로 이루실 일을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행동처럼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법 형태만으로 구체적인 성취 시점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온의 회복은 왜 민족들의 빛이 되는가

이사야 51:4–6 본문 →

한 민족의 구원에서 모든 민족의 정의로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듣기를 요구하십니다.

「내 백성아, 내게 주의를 기울여라. 내 겨레야, 내게 귀를 기울여라. 가르침이 내게서 나갈 것이며, 내 정의를 민족들의 빛으로 자리 잡게 하겠다.」이사야 51: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민족들의 빛이 등장할까요? 이사야 42:1-4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민족들에게 정의를 펼치는 사명을 받습니다. 42:6에서는 그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1장은 그 사명을 하나님의 가르침과 정의라는 표현으로 다시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과 정의가 세상에 드러나고, 민족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그의 가문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온의 회복은 한 민족의 과거를 되찾는 일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세상에 자신의 의와 구원을 드러내시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내 의가 가까이 있고, 내 구원이 나섰으며, 내 팔들이 민족들을 심판할 것이다. 해안 땅들이 나를 기다리고, 내 팔에 희망을 걸 것이다.」이사야 51:5 · 본디새김

이 말씀에서 ‘의’, ‘구원’, ‘심판’은 서로 떨어진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다스리신다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소식이 되고, 불의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또한 여기서 ‘심판’은 단순히 형벌을 내린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들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는 통치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안 땅들이 여호와야훼의 팔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해안 땅들은 바다 너머의 먼 지역들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42:4에서도 해안 땅들이 종의 가르침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보다 오래가는 것은 무엇인가

6절에서는 시선이 갑자기 위아래로 넓어집니다.

「하늘로 눈을 들어라. 아래로 땅을 바라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지며, 그곳에 사는 이들은 날벌레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내 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51:6 · 본디새김

하늘은 늘 머리 위에 있고, 땅은 늘 발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생애보다 훨씬 오래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연기는 잠시 모양을 이루다가 사라집니다. 옷은 오래 입을수록 낡고 결국 해어집니다.

우리가 영원할 것처럼 여기는 세상의 질서조차 하나님의 구원과 의에 비하면 영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반드시 하늘과 땅의 물리적 소멸 과정을 상세하게 예고하는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서의 시적 언어는 창조 세계의 덧없음과 하나님의 구원이 지닌 영속성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창조 세계의 종말을 가리키는 의미가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시고,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는 신실한 행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의는 세상의 강대국이 무너지거나 정치적 질서가 바뀐다고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현실에서는 강대국의 권력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보다 훨씬 확실해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무엇이 정말 오래가는지를 다시 판단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51:7–8 본문 →

1절에서는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부름받았습니다. 7절에서는 그들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의를 아는 이들아, 마음에 내 가르침을 품은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사람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욕설에 낙담하지 마라.」이사야 51:7 · 본디새김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모욕과 욕설이 찾아옵니다.

이 점은 앞 장의 여호와야훼의 종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50:6에서 종은 사람들에게 모욕과 침 뱉음을 당했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목소리를 듣는 백성에게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외부에서 듣기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기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버리면, 마음에 품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받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따르는 기준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8절에서는 다시 옷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좀은 옷을 먹듯 그들을 먹어 치우고, 좀벌레는 양털을 먹듯 그들을 먹어 치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의는 영원히 있을 것이며, 내 구원은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이사야 51:8 · 본디새김

6절에서는 땅이 옷처럼 해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모욕하는 사람들도 좀먹는 옷에 비유됩니다. 겉보기에 튼튼한 옷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해어집니다.

사람들의 비난은 지금 당장 크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한 하나님의 판단보다 더 큰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향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의 팔이여, 다시 깨어나십시오

이사야 51:9–11 본문 →

왜 하나님을 깨우려고 하는가

9절에서 말씀의 화자가 바뀝니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을 입으십시오, 여호와야훼의 팔이여. 옛날처럼, 아득한 옛 시대처럼 깨어나십시오. 라합을 토막 내고 바다 괴물을 꿰뚫은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이사야 51:9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하나님을 향해 말씀드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이미 보여 주셨던 능력을 다시 드러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5절에서 여호와야훼의 팔은 민족들을 심판하고 먼 나라들의 희망이 되는 힘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팔을 향해 깨어나라고 요청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지금 자신들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라합과 바다 괴물은 무엇인가

여기서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여인 라합과 다른 이름입니다. 이러한 표현에는 고대 세계에서 바다와 괴물을 혼돈과 위협의 상징으로 묘사하던 시적 언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여 여호와야훼가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옛 바다에 생긴 길이 새로운 귀환의 희망이 되다

10절에서는 이미지가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바다를, 큰 심연의 물을 말리고, 되찾아진 이들이 건너도록 바다 깊은 곳을 길로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이사야 51:10 · 본디새김

이는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에는 물이 있고 뒤에는 추격하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자 길이 생겼습니다.

지금 포로 생활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도 돌아갈 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여호와야훼는 바다 한가운데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제는 멀리 흩어진 백성이 시온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11절은 미래의 귀환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속량한 이들이 돌아와, 환성을 올리며 시온에 들어올 것이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환희와 기쁨을 얻고, 슬픔과 탄식은 달아날 것이다.이사야 51:1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35:10과 거의 그대로 일치합니다. 이사야 35장에서는 메마른 땅이 꽃을 피우고 구원받은 이들이 거룩한 길을 따라 돌아오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51장은 그 약속을 다시 불러와, 예전에 바다를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합니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기쁨이 마치 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영예처럼 주어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의 기억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행렬의 기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끝나자 하나님은 예상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목소리를 예언자의 기도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간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화자의 신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시편 44:23-24에서도 고난 가운데 있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깨어나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잠드셨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욥기 26:12에서도 하나님이 바다를 다스리시고 라합을 꺾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편 89:10에서도 라합을 부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합니다. 이사야 30:7에서는 라합이라는 이름이 이집트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사야 51장에서도 이집트를 상징한다고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10절에서 바다를 말리고 속량받은 이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사건을 언급하므로, 출애굽과 이집트의 패배를 떠올리는 읽기는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9절 자체는 라합을 이집트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는 시적 이미지와 출애굽의 역사적 기억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본문의 표현을 더 충실하게 살립니다.

하나님은 왜 두려워하는 백성을 책망하시는가

이사야 51:12–16 본문 →

두려움을 낳는 잘못된 비교

9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여호와야훼의 팔을 향해 깨어나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 바로 내가 너희를 위로하는 이다. 너는 누구이기에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고, 풀처럼 될 사람의 자식을 두려워하며,」이사야 51:1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첫 말씀은 ‘나, 바로 내가’라는 반복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강하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질문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이 백성에게 겁쟁이라고 꾸짖으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두려움의 대상은 실제로 위협적인 압제자입니다. 13절은 그 압제자가 파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백성의 두려움에는 현실적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를 잊어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펼치고 땅의 기초를 놓은, 너를 만든 여호와야훼를 잊고, 압제자가 파괴할 준비를 할 때 그 분노 앞에서 온종일 줄곧 떨었느냐? 그런데 압제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이사야 51:13 · 본디새김

하늘과 땅조차 하나님의 구원보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잊고, 잠시 살다가 죽을 인간의 분노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압제자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압제자가 누구인지 올바른 자리에 놓고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압제자는 강할 수 있지만 창조주가 아닙니다. 사람을 위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릴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닙니다.

백성은 하나님께 깨어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시며, 오히려 백성이 자신을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능력을 새로 얻으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몸이 구부러진 사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위로가 구체적인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몸이 구부러진 이는 곧 풀려날 것이다. 그는 죽어 구덩이로 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빵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51:14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영원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영원한 구원은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장엄한 모습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몸이 구부러진 사람을 풀어 주시고, 굶주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15절은 다시 바다를 다스리시는 여호와야훼를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 너의 하나님이다. 바다를 뒤흔들어 그 물결이 포효하게 하는 이다.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다.」이사야 51:15 · 본디새김

앞에서 백성은 바다를 말리신 여호와야훼의 팔을 불렀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여전히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직접 밝히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과거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입에 말씀을 넣으셨는가

16절은 이 장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 말을 네 입에 넣었고, 내 손의 그늘로 너를 덮었다. 하늘을 심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시온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다.」이사야 51:16 · 본디새김

그런데 그 ‘너’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맡은 종이나 예언자를 가리킨다는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한 사람처럼 부르는 표현이라는 이해입니다. 어느 한쪽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말씀하시던 자리에서 갑자기 시온과의 관계를 선언하십니다. 창조의 장엄한 이미지가 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지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셨고 그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창조주라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적 관계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 다음에 매우 고통스러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린 시온은 지금 땅에 쓰러져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압제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도 그가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는 상황 설명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압제자의 위협을 말하고 있는 만큼, 그 분노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 수사적 질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몸이 구부러진 이’라는 표현은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초에는 몸이 굽거나 기울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억압을 받아 몸이 구부러진 사람, 특히 포로로 묶인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기도 합니다. 다만 낱말의 정확한 의미와 문장 첫 부분의 연결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형태의 감옥이나 결박 도구를 본문이 확정적으로 묘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구절의 ‘네 입’과 ‘너를’은 남성 단수형입니다. 바로 앞에서는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 이어졌고, 12절에는 여성 단수형 호칭도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청자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지만, 16절의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본문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사야 49:2에서도 종은 하나님의 손 그늘에 숨겨지고, 그의 입은 특별한 사명을 위해 준비됩니다. 50:4에서도 종은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으로 지친 사람을 돕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51:16은 종이나 예언자에게 주어진 말씀과 보호의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한 사람처럼 부르는 표현으로 읽을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은 그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며 시온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하늘을 심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라는 목적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늘은 펼치고 땅은 기초를 놓는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하늘을 심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표현은 창조 세계가 새롭게 세워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면서 시온에게 자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말씀을 받은 대상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문법과 문맥만으로 이 문제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깨어나야 한다

이사야 51:17–20 본문 →

비틀거리게 하는 잔을 마신 도시

17절에서 또다시 ‘깨어라, 깨어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깨어라, 깨어라. 일어나라, 예루살렘아. 너는 여호와야훼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받아 마셨다. 너는 그 잔을, 비틀거리게 하는 잔을 마시고 남김없이 비웠다.」이사야 51:17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누군가가 여호와야훼의 팔을 향해 깨어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향해 깨어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일어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잔을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원 선언이 이제 쓰러진 도시를 일으키는 말씀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 잔은 사람이 받아들이는 몫이나 운명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도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듯, 시온은 심판의 결과로 스스로 일어설 힘을 잃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잔은 실제로 마신 술이 아닙니다. 21절에서 본문은 예루살렘이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취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어머니를 부축할 자녀가 없다

18절은 더욱 비참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녀가 낳은 모든 아들 가운데 그녀를 이끌어 줄 이가 없었다. 그녀가 기른 모든 아들 가운데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이가 없었다.이사야 51:18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손을 잡아 줄 이가 없다’는 표현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비틀거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실제로 손을 붙잡고 몸을 지탱해 주는 사람입니다.

20절은 그 자녀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 아들들은 기절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처럼 모든 거리 어귀에 누웠고, 여호와야훼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꾸짖음으로 가득 찼다.」이사야 51:20 · 본디새김

그물에 걸린 영양은 달아나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49:22-23의 약속과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곳에서는 민족들이 시온의 아들딸을 품에 안고 데려오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들이 어머니를 도울 수 없을 만큼 쓰러져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의 간격이 바로 시온의 현재와 약속된 미래 사이의 거리입니다.

19절에서는 그 비참함을 두 종류의 재난으로 묘사합니다.

「이 두 가지가 네게 닥쳤다. 황폐와 파괴가 하나요, 굶주림과 칼이 다른 하나다.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겠느냐?」이사야 51:19 · 본디새김

황폐와 파괴는 도시와 삶의 터전이 무너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굶주림과 칼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입니다.

여기서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하겠느냐?’라는 질문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탄식으로 들립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겠느냐?’ 역시 절망의 깊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12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위로할 사람이 없어 보이는 현실과, 자신이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 사이의 긴장입니다.

누가 이 도시를 위로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 잔을 거두신다

이사야 51:21–23 본문 →

위로는 심판의 잔을 거두는 일이다

21절에서는 쓰러진 도시를 향해 다시 듣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는 이여, 포도주 때문도 아닌데 취한 이여, 부디 이것을 들어라.」이사야 51:21 · 본디새김

이사야 51장의 앞부분에서 여호와야훼는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취한 듯 비틀거리는 예루살렘에게 듣기를 요구하십니다.

너의 주 여호와야훼, 자기 백성을 위해 다투는 너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네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잔, 그 잔 곧 내 분노의 잔을 거두었다. 너는 다시는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51:22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자신의 힘으로 잔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 잔을 남김없이 마시고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그 잔을 거두십니다.

예루살렘이 충분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스스로 심판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손으로 그 잔을 거두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시는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시온이 다시는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심판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명제가 아닙니다. 지금 시온을 비틀거리게 만든 심판의 잔을 하나님이 거두시고, 그 고난을 끝내시겠다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사람을 길바닥처럼 밟았던 자들

23절에서 하나님은 그 잔을 압제자들의 손에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너를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 놓겠다. 그들은 네게 『몸을 굽혀라. 우리가 넘어가게 하라』라고 말했고, 너는 네 등을 땅처럼, 지나가는 자들에게 거리처럼 내놓았다.」이사야 51:2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단순한 패배보다 더 깊은 모욕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자신의 발로 길을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발 아래 놓인 길처럼 취급됩니다.

압제자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를 짓밟고 지나갈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이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도, 그들을 짓밟았던 압제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바꾸어 동일한 폭력을 되풀이하자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압제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시온에게 주어진 회복은 단순한 권력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발 아래 거리처럼 놓였던 존재가 더 이상 그렇게 취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 백성을 위해 다투는’이라는 표현에는 법정에서 누군가의 권리와 사정을 변호하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50:8-9에서 종이 자신의 정당함을 판결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했던 장면과 연결됩니다. 50장의 종은 자신의 순종 때문에 부당하게 고난받는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반면 51장의 시온은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위해 다투신다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사야 50:6에서 종은 때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등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피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51:23에서 예루살렘은 압제자들의 명령에 따라 등을 땅처럼 내놓았습니다. 두 장면에 모두 고통받는 등이 등장하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종은 자신의 사명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예루살렘은 압제에 짓눌려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겼습니다. 이사야 10:5-15에서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묘사되면서도,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교만하게 행동한 책임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사야 51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의와 위로

이사야 51:1–23 본문 →

하나님의 위로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 현실에 개입하여 새로운 미래를 여시는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생명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짓밟혀 아무 힘도 남지 않은 도시에서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장은 마지막까지 시온이 완전히 회복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성벽이 다시 세워지는 장면도 없고, 자녀들이 모두 일어나 어머니를 부축하는 장면도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한 가지 결정적인 행동이 선포됩니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분노의 잔을 마셔 왔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자녀들은 쓰러져 있었으며, 그녀를 붙잡아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가 그 도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네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잔, 그 잔 곧 내 분노의 잔을 거두었다.」

아직 예루살렘은 폐허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은 더 이상 그녀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시온의 회복은 자신을 쓰러뜨렸던 잔을 하나님이 친히 거두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