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다시 빚을 수 없는 그릇
예레미야는 다시 토기장이와 관련된 물건 앞에 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토기장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질그릇 병을 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앞 장에서 진흙은 토기장이의 손에서 망가졌지만, 다시 다른 그릇으로 빚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유다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9장에서 예레미야가 손에 든 것은 더 이상 모양을 바꿀 수 없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은 그 병을 사람들 앞에서 깨뜨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만들 수 있는 진흙에서 다시 고칠 수 없는 그릇으로 바뀌었을까요?
앞 장에서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돌이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기 계획을 고집했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까지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깨지는 것은 질그릇 하나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생명을 바알에게 바쳤던 종교의 논리가 무너집니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도시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집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는 한 자신들은 안전하리라는 확신도 무너집니다.
예레미야 19장은 하나님께서 그릇을 깨뜨리시는 이유를 그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가에서 찾도록 이끕니다.
질그릇 조각 문을 지나 도벳으로 — 장소가 먼저 증언하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구체적인 준비를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가서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 병을 사라.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의 장로들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질그릇 조각 문 입구에 있는 벤힌놈 골짜기로 나가라. 거기서 내가 네게 할 말을 외쳐라.」예레미야 19:1–2 · 본디새김
일반적인 진흙 덩어리가 아니라 토기장이가 만든 병 모양의 그릇을 가리킵니다. 물레 위의 진흙은 다시 빚을 수 있지만, 한번 구워진 질그릇은 깨지고 나면 원래의 온전한 그릇으로 다시 빚을 수 없습니다.
장로들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의 장로들은 종교적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그가 행할 행동과 선포할 말씀을 직접 보고 듣는 증인들이 됩니다.
이 장에서 선언되는 심판은 개인 몇 사람의 은밀한 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과 제사장, 왕들의 삶에 걸쳐 있는 공동체 전체의 죄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이 심판의 표징을 직접 보아야 합니다.
벤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쪽과 남쪽을 따라 이어지는 골짜기와 관련됩니다. 「질그릇 조각 문」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본문은 그 문을 통해 벤힌놈 골짜기로 나갈 수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질그릇 조각 문」이라는 이름과 예레미야가 들고 가는 질그릇 병은 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 문이 실제로 깨진 토기를 버리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가 도착해야 할 골짜기에는 이미 유다의 죄를 증언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7:31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벤힌놈 골짜기의 도벳에 산당을 세워 아들딸들을 불에 태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떠났는지를 드러내는 장소였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곳에 서는 순간, 아직 그가 병을 깨뜨리지 않았더라도 심판의 이유를 보여 주는 풍경은 이미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너는 이렇게 말해라. 『유다의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리겠다. 그 소식을 듣는 이는 누구나 두 귀가 울릴 것이다.』」예레미야 19:3 · 본디새김
「두 귀가 울릴 것이다」는 표현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같은 표현이 사무엘상 3:11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엘리의 집에 닥칠 심판이 예고됩니다. 열왕기하 21:12에서도 예루살렘과 유다에 닥칠 재앙을 선포할 때 사용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내부의 심각한 죄와 그에 대한 심판을 다룬다는 점에서 예레미야 19장과 연결됩니다.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은 일」 —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제사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유다의 죄를 세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낯선 곳으로 만들었으며, 자기들도 자기 조상들도 유다의 왕들도 알지 못했던 다른 신들에게 이곳에서 제물을 태워 바쳤고, 이곳을 죄 없는 이들의 피로 채웠으며,』」예레미야 19:4 · 본디새김
유다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벌인 행동인데도, 하나님은 그들이 그곳을 낯선 곳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 그곳을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장소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바친 제물입니다.
「『자기 아들들을 불에 태워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은 일이다.』」예레미야 19:5 · 본디새김
본문은 이것을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일과 연결합니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행했다고 해서 그 행위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표현은 특히 강합니다. 그 행위가 단순히 율법에 명시되지 않은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자신이 명령하신 제사처럼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희생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폭력이라면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제물의 크기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셨는가가 예배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먼저 골짜기의 이름부터 바꾸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이 그 행위의 발생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가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있습니다. 신명기 12:31에서도 다른 민족들이 자기 신들에게 행하는 방식으로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그들이 아들딸들을 불살라 신들에게 바치는 일을 언급합니다.
살육의 골짜기 — 장소의 이름이 바뀌다
6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곳은 더 이상 도벳이나 벤힌놈 골짜기라 불리지 않고 살육의 골짜기라 불릴 것이다.』」예레미야 19:6 · 본디새김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단순히 지명을 새롭게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규정하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무엇인가를 얻으려 했더라도, 이제 그 장소는 참혹한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는 그들 자신과 가족들이 전쟁과 포위 속에서 죽음에 직면할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폭력으로 생명을 파괴했던 공동체가 결국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는 무서운 역전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헛되게 하겠다. 그들을 원수들 앞에서 칼에 쓰러지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손에 쓰러지게 하겠다. 그들의 시체를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겠다.』」예레미야 19:7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들고 있는 질그릇 병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이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계획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이 결국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참상을 보고 경악하며 조롱의 휘파람을 불게 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자기 아들들의 살과 자기 딸들의 살을 먹게 하겠다. 그들의 원수들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그들을 몰아붙이는 포위와 곤경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이웃의 살을 먹을 것이다.』」예레미야 19: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전쟁으로 포위된 도시에서 식량 공급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극단적인 굶주림에 내몰리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런 행동을 선한 일로 승인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 행위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으로 닥칠 포위와 굶주림의 극한 상황을 예고합니다.
앞에서는 아이들이 종교적 제물로 희생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 부모의 생존과 관련된 끔찍한 희생의 대상이 됩니다.
두 장면에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다만 앞의 제사와 뒤의 포위 상황은 서로 다른 행위와 상황이므로, 모든 부모에게 동일한 동기나 죄책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유다가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파괴한 일을 책망하면서, 심판의 날에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마저 무너지는 재앙을 예고합니다.
골짜기에 흘린 피가 도시 전체의 미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여기까지 말한 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질그릇 병을 깨뜨려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6:29와 신명기 28:53–57에는 언약을 어겼을 때 닥칠 재앙 가운데 자녀의 살을 먹는 끔찍한 상황이 언급됩니다. 열왕기하 6:28–29에는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비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9:9은 언약의 저주가 역사 속에서 얼마나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깨진 병 — 다시 빚는 손과 깨뜨리는 손
10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함께 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병을 깨뜨려라.」예레미야 19:10 · 본디새김
앞에서 그들은 전쟁과 굶주림, 도시의 황폐함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의 의미를 눈앞에서 보게 됩니다.
온전한 병이 깨집니다.
흩어진 조각들은 더 이상 원래의 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행동의 의미를 예레미야 자신의 판단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11절에서 직접 해석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해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는 고칠 수 없듯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이렇게 깨뜨리겠다. 묻을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은 시체를 도벳에 묻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19:11 · 본디새김
그릇이 깨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듯이, 예루살렘이 겪게 될 파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행동은 나중에 후회한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뒤에 돌이켜도 그 사람의 생명이 그 행동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가 파괴된 뒤에 과거의 평온한 일상이 그대로 복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릇이 깨졌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도벳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던 곳입니다. 이제 그곳은 죽은 사람들을 묻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평소의 매장 공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이 많아질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죽음의 장소가 이제 공동체가 겪을 죽음의 참상을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도벳이라는 한 장소에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장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선언을 들은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을 따라가겠다고 응답했습니다(18:11–12). 다만 19장의 깨진 그릇을 근거로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영원히 폐기되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11절이 직접 말하는 대상은 이 백성과 이 성읍에 닥칠 파괴입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도벳처럼 되다 — 골짜기의 죄가 도시를 덮다
12절은 이 장의 공간을 결정적으로 확장합니다.
「『내가 이곳과 그 주민들에게 이렇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 성읍을 도벳처럼 만들겠다.』」예레미야 19:12 · 본디새김
도벳에서 이루어진 우상숭배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13절에서는 그 연결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은 도벳 터처럼 더럽혀질 것이다. 사람들이 그 지붕 위에서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부어 바친 모든 집이 그러할 것이다.』」예레미야 19:13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흔했고, 지붕은 일상생활에서도 활용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늘의 군대에게 제물을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부어 바쳤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모든 군대」는 이 문맥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천체들과 관련됩니다. 열왕기하 23:12에서도 유다 왕들이 왕궁의 지붕 위에 세운 제단들이 등장합니다. 스바냐 1:5 역시 지붕 위에서 하늘의 군대에게 절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게다가 13절은 「유다 왕들의 집들」까지 언급합니다. 왕들의 집이라고 해서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거처라고 해서 더 거룩하거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그곳에서 누가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입니다.
도벳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과 집의 지붕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장소가 다릅니다. 그러나 둘 다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도시 전체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도시의 건물과 사회적 지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예레미야는 도벳을 떠나 바로 그 도시의 중심으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더럽혀질 것이다」는 히브리어 문장 구조상 이미 더럽혀진 집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지붕 위의 우상숭배와 그 집들이 도벳처럼 되는 일을 직접 연결합니다.
도벳에서 성전 뜰로 — 더 이상 남의 이야기일 수 없는 심판
14절에서 장소가 다시 바뀝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가 예언하라고 그를 보냈던 도벳에서 돌아왔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 뜰에 서서 온 백성에게 말했다.예레미야 19:14 · 본디새김
처음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질그릇이 깨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이 더욱 넓은 청중에게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에서 예레미야는 도시 전체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성전이라는 장소가 심판의 선언을 막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4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성전의 존재 자체를 안전의 보증처럼 여기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 의지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집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 성읍을 두고 말한 모든 재앙을 그곳과 거기에 딸린 모든 성읍에 내리겠다. 그들이 목을 뻣뻣하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9:15 · 본디새김
「목을 뻣뻣하게 하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인도와 명령에 자신을 굽히지 않는 완고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말씀을 들은 백성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는지, 반발했는지, 조용히 들었는지 이 장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사람들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깨뜨리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시는가
18장은 돌이키라는 부르심을 들려주었습니다. 19장은 그 부르심을 계속 거절한 사람들에게 닥칠 파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잘못과 무고한 생명을 해친 폭력을 함께 다룹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미지를 근거로 어떤 사람에게 이제는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런 판단은 이 비유의 권한을 인간이 자기 손에 가져오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토기장이도, 물레도, 온전한 병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여호와야훼의 집 뜰에 서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뜨리실 그릇에 대한 경고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의 귀에 다시 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