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평안을 말하는 성읍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6장에는 두 종류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는 다가오는 적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종교 지도자들의 목소리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거듭 선언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피할 길을 보여 주십니다.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과 훈계를 받아들이라는 호소가 나란히 등장하고, 심판의 선언 한가운데서도 쉼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제시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까닭을 밝히는 과정 자체가, 그 성읍을 살리기 위해 여호와야훼가 얼마나 거듭 말씀하셨는지를 드러냅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성읍에서 도망쳐라
첫 절의 명령은 당시 예루살렘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한가운데서 벗어나 피신해라. 드고아에서 뿔나팔을 불고, 벳학게렘 위에 신호를 올려라. 북쪽에서 재앙이 내려다보고 있다. 큰 파괴가 다가온다.」예레미야 6:1 · 본디새김
예레미야 4:6에서는 백성이 시온으로 피신하도록 촉구받았습니다. 침략의 위협 앞에서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모여들 피난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오라고 명령합니다. 안전을 찾아 들어가야 했던 성읍이 도리어 탈출해야 할 장소가 되었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산지에 있었으며, 벳학게렘 역시 예루살렘 인근의 지명으로 등장합니다. 벳학게렘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뿔나팔과 높은 곳의 신호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재앙이 북쪽에서 다가오는 동안 경고는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어서 예루살렘은 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아름답고 곱게 자란 딸 시온을 내가 멸하겠다.」예레미야 6:2 · 본디새김
‘아름답고 곱게 자란’이라는 표현은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려 온 성읍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아름다움이 파괴의 선언과 부딪힙니다.
「목자들이 자기 양 떼와 함께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에워싸고 천막들을 칠 것이고, 저마다 제 몫의 땅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게 할 것이다.」예레미야 6:3 · 본디새김
목자와 양 떼는 일반적으로 돌봄과 평온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군대의 모습이 됩니다. 그들은 시온을 자기 양 떼가 풀을 뜯을 목초지처럼 취급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삶의 터전을 지닌 성읍이 아니라 침략자들이 나누어 차지할 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평화로운 목축 이미지가 포위전으로 돌변한 직후, 장면은 군대의 목소리로 전환됩니다.
「그녀를 칠 전쟁을 성별해라. 일어나라, 한낮에 올라가자. 아, 우리에게 화가 닥쳤다. 날이 이미 기울었고, 저녁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진다.」예레미야 6:4 · 본디새김
여기서 ‘성별하다’는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구별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의 전쟁이 종교적 의례와 연결될 수 있었던 표현이지만, 이것이 침략자들의 모든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군대는 정오에 공격하자고 재촉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아쉬워합니다. 그러자 곧 밤에라도 올라가자는 말이 뒤따릅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집니다. 길게 늘어지는 저녁 그림자는 곧 그 성읍의 운명을 비추는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내가 멸하겠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다미티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를 무엇에 견준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고, 멸하겠다는 선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따르는 포위 장면과 연결하여 멸망의 선언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성읍을 향한 위협이라는 문맥은 분명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이어지는 목자들의 비유와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성벽 밖의 침략자보다 성벽 안의 억압
전쟁의 목소리가 끝나자, 여호와야훼가 직접 포위 공격을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무들을 베고, 예루살렘을 향해 흙더미를 쌓아라. 이 성읍은 벌받을 성읍이다. 그 안은 온통 억압으로 가득하다.」예레미야 6:6 · 본디새김
나무를 베고 흙더미를 쌓는 것은 성벽을 공격하기 위한 포위전의 준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북쪽에서 오는 군대의 잔인함을 두려워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자기 성읍 안에서 벌이는 억압을 문제 삼으십니다.
「우물이 제 물을 차게 간직하듯, 그 성읍은 제 악을 차게 간직했다. 그 안에서 폭력과 약탈이 들리고, 내 앞에는 늘 질병과 상처가 있다.」예레미야 6:7 · 본디새김
우물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물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간직한 것은 물이 아니라 악입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에는 ‘차게 하다’, ‘신선하게 유지하다’라는 뜻과 연결되는 표현이 있으며, 비유의 세부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악이 끊임없이 솟아 나온다는 뜻에 무게를 둘 수도 있고, 악을 지속적으로 간직한다는 뜻에 무게를 둘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요점은 일회적인 잘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악은 순간적인 일탈을 넘어 그곳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추상적인 죄의 목록이 아니라 ‘폭력과 약탈’, ‘질병과 상처’로 나타납니다. 7절에는 여호와야훼 앞에 늘 상처가 있다고 했고, 14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진단 다음에도 여호와야훼는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 네게서 떨어져 나가고, 내가 너를 황무지로, 아무도 살지 않는 땅으로 만들 것이다.」예레미야 6:8 · 본디새김
여기서 ‘훈계’는 잘못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심판의 선언이 이미 주어졌지만, 본문의 호소는 예루살렘이 그 가르침에 응답하기를 요구합니다.
황무지는 단순히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그분의 훈계를 거부하여 거처를 잃는 모습입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평안하다고 선언하다
9절은 갑자기 포도 수확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포도나무에서 남은 열매를 모조리 따듯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조리 거두어 갈 것이다. 포도 따는 사람처럼 네 손을 바구니들 위로 다시 돌려라.」예레미야 6:9 · 본디새김
포도 수확이 끝난 뒤에도 가지에 열매가 조금씩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0에서는 이렇게 남은 것을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남겨 두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6장의 수확자는 남은 열매까지 다시 거두어 갑니다. 여기서 수확은 은혜로운 양식의 공급이 아니라 심판의 철저함을 나타냅니다.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읽고 곧바로 훗날의 구원받을 남은 자들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우선 앞선 재앙을 피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마저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는 문자적 예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5:18에는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6:9의 강렬한 언어는 남은 사람들에게까지 닥치는 재앙의 가혹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10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절망을 토로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경고해야 그들이 듣겠는가? 보아라, 그들은 귀가 할례받지 않아 귀를 기울일 수 없다. 보아라, 여호와야훼의 말이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예레미야 6:10 · 본디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신체가 아니라 귀에 할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4:4가 마음의 할례를 요구했다면, 여기서는 귀의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표지를 지녔지만 언약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말씀이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의 분노로 가득 찼으며 더는 억누르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그 결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재앙에 휩쓸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본문은 전쟁의 피해가 죄에 책임 있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친다고 묘사합니다. 집과 밭과 가족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다는 12절의 말은 전쟁이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참혹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그 사회의 내부 상태가 밝혀집니다.
「그들 가운데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 부당한 이익을 얻고, 예언자부터 제사장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기 때문이다.」예레미야 6:13 · 본디새김
경제적 탐욕은 사회 곳곳에 퍼져 있고, 진실을 말하고 가르쳐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거짓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말하지만, 평안은 없다.」예레미야 6:14 · 본디새김
의사가 심각한 상처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가벼운 약만 발라 놓은 뒤 다 나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서 안심만 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폭력과 약탈을 보시는데, 그들은 평안을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상처가 있다고 하시는데, 그들은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거짓된 평안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15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평가받습니다. 문제는 악을 저지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판단하는 감각까지 무뎌졌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언어가 현실을 은폐하는 도구가 된 상황에서, 여호와야훼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예언자의 탄식이 어느 지점에서 여호와야훼의 명령으로 바뀌는지는 화자의 구분에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쏟아라’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평안은 없지만 쉼을 얻을 길은 있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길들 위에 서서 살펴보아라. 옛길들을 두고 어느 것이 좋은 길인지 물어라. 그 길로 걸어가고, 너희 자신을 위한 쉼을 찾아라. 그러나 그들은 『저희는 걷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예레미야 6:16 · 본디새김
거짓 예언자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삶의 길을 돌이킬 때 쉼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옛길’은 과거에 행해졌던 모든 관습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옛길들 가운데 ‘좋은 길’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이 문맥에서 좋은 길은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알려 주신 삶의 방향, 곧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에 부합하는 길입니다.
신명기 30:15–2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의 선택을 놓았습니다. 그 선택은 단순히 종교적 입장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문제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길도 그 언약적 삶과 연결됩니다. 정의를 행하고, 억압을 버리고,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입니다.
「내가 너희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뿔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나 그들은 『저희는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예레미야 6:17 · 본디새김
그들에게는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경고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제시된 길을 거절했고, 들려오는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6장은 나팔을 불라는 명령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나팔 소리를 들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나팔을 불어도 듣지 않는다면, 경고 체계는 무용해집니다.
18–19절에서는 민족들과 땅이 증인으로 불립니다. 18절의 ‘무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의 일이 더 넓은 청중 앞에 공개된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땅아, 들어라. 보아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온다. 그것은 그들 생각의 열매다. 그들이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내 가르침도 거부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6:19 · 본디새김
이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보여 줍니다. 재앙을 가져오시는 주체는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러나 그 재앙은 백성이 계속해서 선택해 온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앞서 9절에서는 포도나무에 남은 열매까지 거두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길러 낸 생각의 열매가 등장합니다. 수확의 이미지는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다가, 심판을 불러온 삶의 결과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20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배의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스바에서 유향이, 먼 땅에서 좋은 향기로운 갈대가 내게 오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너희 번제물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고, 너희 희생제물은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예레미야 6:20 · 본디새김
스바에서 가져온 유향과 먼 지역에서 들여온 향료는 귀한 예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멀리서 값비싼 재료를 가져올 만큼 예배에 자원을 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제사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예배 행위와 실제 삶이 서로 모순된다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그분께 값비싼 예물을 바치는 것은 언약에 충실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11–17이나 아모스 5:21–24에도 나타나는 예언자적 문제 제기와 연결됩니다. 제물과 종교 행사가 정의와 올바른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그들 앞에 걸림돌을 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좋은 길로 걸어가라는 초대가 거부되자, 이제 그들이 걷는 길에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마태복음 11:29 역시 영혼이 얻는 쉼을 말한다는 점에서 예레미야 6:16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이를 예레미야 6장의 심판 장면 전체에 대한 직접 인용이나 성취 선언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읽어야 할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좋은 길을 제시하셨으며, 그 백성이 그 길을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걷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이제 길로 다닐 수 없게 된다
22절부터 북쪽 군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납니다.
북쪽에서 오는 군대는 예레미야 1:14–15에서부터 중요한 심판의 이미지로 등장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더 넓은 역사적 전개를 보면 바벨론과 연결되지만, 6장은 아직 이 군대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활과 투창을 움켜쥔다. 그 민족은 잔인하고, 그들은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소리는 바다처럼 으르렁거리고, 그들은 말을 타고 온다. 딸 시온아, 그 민족은 너를 치려고 전쟁에 나서는 사람처럼 대열을 갖추었다.」예레미야 6:23 · 본디새김
바다의 으르렁거림은 인간이 쉽게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군은 단순히 많은 군사가 아니라 온 땅을 뒤흔드는 파괴의 세력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시점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우리가 그 소문을 듣고 우리 손에 힘이 풀렸다. 고통이 우리를 움켜잡았다. 아이 낳는 여자의 진통 같은 고통이.」예레미야 6:24 · 본디새김
멀리서 들려오던 전쟁의 소식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몸을 사로잡습니다. 전쟁은 아직 성읍 전체를 파괴하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너희는 들로 나가지 마라. 길로 다니지도 마라. 적에게 칼이 있고, 사방에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6:25 · 본디새김
불과 몇 절 전, 여호와야훼는 좋은 길을 찾아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걷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적이 다가오자 그들은 실제로 길을 다닐 수 없게 됩니다.
살 수 있는 길을 거부한 성읍이 마침내 자유롭게 길을 다닐 수 없는 성읍이 되었습니다.
26절에서는 애도의 명령이 이어집니다.
「내 백성의 딸아, 자루천을 두르고 잿더미에서 뒹굴어라. 외자식을 잃은 듯 애도하고, 쓰라리게 통곡해라. 약탈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6:26 · 본디새김
‘외자식을 잃은 듯’이라는 비유는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당시 사회에서 외아들의 죽음은 부모의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 가문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하는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은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없던 낯선 민족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 백성’이라는 호칭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이 호칭은 심판의 아픔을 약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이 모든 일이 그렇게 비극적인지를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전까지 군대의 움직임을 바깥에서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우리’가 등장합니다. 이 목소리를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으로 읽을 수 있고, 예언자가 백성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여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제련했지만 끝내 은을 얻지 못했다
예레미야 6장의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지금까지는 포위된 성읍과 다가오는 군대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절에서는 금속을 제련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네가 그들의 길을 알아보고 시험하도록, 나는 너를 내 백성 가운데 금속을 시험하는 자이자 요새로 세웠다.」예레미야 6:2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겉모습이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실제 삶의 상태를 조사하고 판별하도록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독하게 거역하는 자들,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구리와 철이다. 그들은 모두 파괴하는 자들이다.예레미야 6:28 · 본디새김
구리와 철이 그 자체로 쓸모없는 금속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귀한 은을 기대하며 시험했지만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제련 비유 안에서 등장합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순전한 언약적 충실함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신 거역과 비방과 파괴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제련은 더욱 격렬해집니다.
풀무는 타 버렸고, 불에 납이 다 소모되었다. 거듭 제련했지만 헛수고였고, 악한 자들은 분리되지 않았다.예레미야 6:29 · 본디새김
이것은 여호와야훼께서 백성을 시험하고 바로잡으려 하셨지만, 그들이 끝내 악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형상화합니다. 이미 예레미야 5:3에서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치시고 징계하셨지만, 그들은 훈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이 실제로 능력이 부족하여 백성을 변화시키지 못하셨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거듭된 경고와 훈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백성의 완고함입니다.
그 결과 마지막 판정이 내려집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버림받은 은」이라고 불렀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다.예레미야 6:30 · 본디새김
이는 금속의 상태에 대한 판정인 동시에 언약 백성의 현재 상태에 대한 판정입니다. 한때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성읍은 이제 시험을 견디지 못한 금속으로 묘사됩니다.
이 결말이 예레미야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미래가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 예레미야서는 다시 세우심과 새 언약의 약속으로 나아갑니다(예레미야 30–33장). 그러나 그 미래의 약속을 가져와 지금의 판정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본디새김에서 ‘요새’로 옮긴 미브차르(mibṣār)는 이 금속 시험의 비유와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예언자가 굳게 세워졌다는 뜻으로 읽거나, 금속 시험 과정에 더 적합한 의미로 해석하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예레미야 1:18에서 예언자를 견고한 성읍으로 세우셨다는 말씀도 연상되지만, 이 구절이 반드시 그 표현을 되풀이한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대의 은 제련 과정에서는 납을 이용하여 불순물을 분리하는 기술이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어는 풀무와 불, 납 사이의 문법적 관계에 어려움이 있어 번역이 갈립니다. 그러나 제련이 거듭되었고, 그 과정이 아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결론은 명확합니다.
예루살렘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 그는 단지 하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실제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심판의 예언과 돌이키라는 호소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며, 그들이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요구합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여호와야훼의 분노를 전하면서 고통스러워했고, 공동체를 향한 재앙 앞에서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일이 타인의 파괴를 즐기는 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금속을 시험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불을 지폈습니다. 풀무는 뜨거워졌고, 납은 소모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던 은은 얻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들려온 말씀을 거부한 성읍의 실상이 마침내 드러난 장면입니다.
풀무의 불이 잦아든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 금속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버림받은 은」.
그 이름은 한 성읍이 무너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성읍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말씀의 무게를 남깁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