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7장
이 장의 자리 · 32–37장 · 엘리후의 말
폭풍은 말하고, 사람은 침묵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고,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며, 욥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에게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에도 제 심장은 떨리고, 제자리에서 뛰어오릅니다.」욥기 37: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판단하던 엘리후가 자기 몸의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까지 두렵게 만드는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격하게 울리는 것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렁찬 소리를 들으십시오.」욥기 37: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천둥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말로는 충분히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천둥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폭풍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욥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우리는 어둠 때문에 말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19절).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할 말이 남아 있다고 했던 사람이(36:2),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변화가 욥기 37장 전체를 관통합니다.
엘리후는 천둥과 눈, 비와 얼음, 구름과 바람을 차례로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욥에게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라고 요청하고, 끝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찾아낼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바로 다음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십니다(욥 38:1).
따라서 37장은 단순한 자연 찬양시가 아닙니다. 오랜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기 직전에 놓인, 특별한 전환의 장입니다.
번개가 먼저 번쩍이고, 그 뒤에 목소리가 들린다
엘리후는 천둥을 들으며 몸이 떨린다고 말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본문은 먼저 번개와 천둥이 온 세상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온 하늘 아래로 그것을 곧게 내보내고, 자기 번개를 땅끝까지 펼칩니다.」욥기 37:3 · 본디새김
「그 뒤로 소리가 포효하고, 그는 위엄 찬 목소리로 천둥을 울립니다. 자기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들을 붙들어 두지 않습니다.」욥기 37:4 · 본디새김
먼저 번개가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빛이 땅끝까지 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천둥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엘리후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순서에 가깝게 묘사합니다. 눈으로 빛을 본 다음 귀로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둥을 단순한 자연의 소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위엄 찬 목소리로 천둥을 울리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가 천둥을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둥을 통해 욥에게 구체적인 문장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본문에는 욥을 직접 부르시는 하나님의 발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은 38장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연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현상만으로 하나님께서 개별 사건에 관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후도 그 한계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그 목소리로 놀랍게 천둥을 울립니다. 그는 큰일들을 하며,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욥기 37:5 · 본디새김
여기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천둥이라는 현상 자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크기와 그 모든 뜻을 인간이 헤아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 위엄을 설명할수록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천둥을 하나님의 위엄 찬 목소리로 부르는 표현은 시편 29편과 가깝습니다. 그 시편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는 물 위에 울려 퍼지고, 백향목을 꺾으며, 광야를 뒤흔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시 29:3–9). 두 본문 모두 자연의 거대한 힘을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합니다.
눈이 내리자 사람의 손이 멈춘다
천둥에서 시작한 시선은 이제 눈과 비로 내려옵니다.
「그는 눈에게 『땅으로 내려라』 하고 말하며, 쏟아지는 비에게도, 그의 힘찬 빗줄기에게도 그렇게 말합니다.」욥기 37:6 · 본디새김
여기서 눈과 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과 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연 세계가 창조주의 명령에 응답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사람은 눈과 비가 언제 내릴지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자연 세계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손을 봉합니다. 그가 지은 모든 사람이 알도록 말입니다.」욥기 37:7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눈과 비를 움직이시지만, 인간의 손은 멈추게 하십니다.
「봉합니다」(חָתַם)에 해당하는 동사는 ‘봉인하다’라는 뜻입니다. 문서에 인장을 찍어 닫아 두는 것처럼, 사람의 손이 더 이상 평소의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눈이 쌓이고 큰비가 쏟아지면 농부는 밭에서 일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길을 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인간이 세운 계획이 자연의 힘 앞에서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러한 멈춤에도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지은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앞뒤 문맥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한계를 깨닫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엘리후의 시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행동이 제한되는 보편적인 경험을 묘사합니다.
사람의 손은 일을 멈춥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눈과 비는 계속 움직입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세상의 모든 일이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후는 곧이어 짐승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짐승은 은신처로 들어가고, 제 굴에 머뭅니다.」욥기 37: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7절과 짝을 이룹니다. 사람은 일을 멈추고, 짐승은 굴로 들어갑니다. 인간과 짐승 모두 날씨를 자기 뜻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야 합니다.
엘리후가 보여 주는 세계에서는 인간도 자연의 질서 안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가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의 능력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엘리후의 눈과 비에 대한 설명은 그러한 무력함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도덕적인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무엇을 알게 되는지는 원문에서도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사람이 ‘알도록’이라는 표현입니다.
바람은 어디에서 오고, 구름은 어디로 가는가?
엘리후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합니다.
「방에서 폭풍이 나오고, 흩어 버리는 바람들에서 추위가 옵니다.」욥기 37:9 · 본디새김
「하나님의 숨결에서 얼음이 생기고, 드넓은 물이 굳어집니다.」욥기 37:10 · 본디새김
9절의 「방」은 바람이 나오는 장소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마치 폭풍이 어느 거처 안에 보관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그립니다. 「흩어 버리는 바람들」은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서는 바람의 이미지가 하나님의 숨결로 발전합니다. 물은 인간이 손으로 붙잡아 모양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추위가 찾아오면 그 넓은 수면이 단단하게 굳습니다. 움직이던 것이 멈추고, 유동적이던 것이 고정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을 봉하셨습니다. 이제는 물까지 굳게 하십니다.
이처럼 엘리후가 보여 주는 자연 세계는 고정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눈이 내리고,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며, 물이 얼어붙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변화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름의 움직임은 더욱 복잡합니다.
「또 그는 물기로 짙은 구름을 무겁게 하고, 자기 번개를 품은 구름을 흩어 놓습니다.」욥기 37:11 · 본디새김
「그것은 그의 여러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돌며 방향을 바꿉니다. 그것들이 땅 위 온 세상에서 그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말입니다.」욥기 37:12 · 본디새김
「여러 지시」(תַּחְבֻּלָה)와 연결되는 원어는 지도나 지휘, 계획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구름을 무질서하게 떠도는 물체로만 보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하나님께서 어떤 구름을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시는 개별적인 이유를 인간이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점을 드러냅니다.
「매로 쓰기 위해서든, 자기 땅을 위해서든, 인애를 베풀기 위해서든, 그는 그것이 오게 합니다.」욥기 37:13 · 본디새김
엘리후는 동일한 자연 현상이 서로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매」로 쓰일 수 있습니다. 원어는 막대기나 지팡이, 징계의 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연 현상이 징계나 심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땅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에게 내리는 보상이나 벌보다 땅 자체를 돌보는 하나님의 활동에 주목합니다.
셋째, 「인애」를 베풀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사용된 원어는 사랑과 자비, 성실한 호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를 돌보시는 선한 의도가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가 내리는 이유를 흔히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따라 판단합니다. 농사가 잘되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집이 무너지면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자연 현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만으로 그 목적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땅을 위해 일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에 대한 보상이나 형벌이라는 두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일어난 일을 그의 도덕적인 상태와 직접 연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묘사하는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을 징계하는 목적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엘리후 자신이 욥의 고난을 설명할 때 이 가능성을 얼마나 일관되게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13절의 진술 자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단순한 계산보다 넓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엘리후는 구름을 설명하던 말을 멈추고 욥을 직접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자연 현상을 창고나 방에 보관된 물건처럼 묘사하는 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욥기 38장 22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욥에게 눈의 창고와 우박의 창고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9절의 「흩어 버리는 바람들」을 문맥상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원문 자체에 북쪽이라는 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방위를 확정하기보다 바람의 움직임과 그 결과인 추위에 주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12절 「여러 지시」의 원어는 잠언 11장 14절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지략과 관련된 말로도 사용됩니다. 13절의 「자기 땅을 위해서」라는 생각은 욥기 38장 26–27절에서 더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과 인간이 없는 광야에도 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비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속합니다.
욥, 멈추어 서서 바라보십시오
「욥, 이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곰곰이 살펴보십시오.」욥기 37: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엘리후의 긴 연설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그는 욥에게 더 많은 논증을 제시하는 대신, 잠시 멈추어 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는 두 개의 명령형이 이어집니다. 하나는 ‘서라’, 다른 하나는 ‘깊이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던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7절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14절에서는 멈춤이 적극적인 행동이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활동과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자기 구름의 번개를 빛나게 할 때를 당신은 아십니까?」욥기 37:15 · 본디새김
「구름이 균형을 잡고 떠 있는 것, 곧 지식이 온전한 이의 놀라운 일들을 아십니까?」욥기 37:16 · 본디새김
이 질문들은 욥의 무지를 조롱하는 말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후가 묻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욥은 번개를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구름은 무거운 물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너무 익숙한 현상이지만, 엘리후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원문의 「지식이 온전한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과 인간이 아는 것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그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번에는 욥 자신의 몸에서 출발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남풍으로 땅이 고요해질 때 당신의 옷이 뜨거워지는데,」욥기 37:17 · 본디새김
「부어 만든 거울처럼 단단한 하늘을 당신이 그와 함께 두드려 펼칠 수 있습니까?」욥기 37:18 · 본디새김
욥은 남풍이 불어 더위가 찾아오면 자신의 옷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바람이 가져오는 열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욥이 하늘 자체를 만들거나 펼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인간이 직접 경험하는 작은 일에서 시작해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큰 일로 질문을 확장합니다.
금속 장인은 작은 금속판을 다듬어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늘 전체를 금속 거울처럼 단단하고 넓게 펼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이 실제로 단단한 금속으로 구성되었다는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당시 독자에게 친숙한 제작 기술을 사용하여 하늘의 광대함과 인간의 무력함을 대비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 안에서 살지만, 그 세계를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존재는 아닙니다.
욥은 하늘을 바라보며 더위와 추위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 하늘을 만든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이 욥의 모든 질문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욥이 자신의 경험과 판단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가 다음 단락에서는 말의 문제로 발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엘리후가 36장 4절에서 자신의 지식에 대해 강한 확신을 표현했던 것과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이제 인간이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의 온전한 지식에서 나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대비를 엘리후가 자신의 지식에 관한 앞선 주장을 철회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의 「두드려 펼칠 수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동사는 금속을 두드려 넓게 펴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또한 「부어 만든 거울」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울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유리 거울이 아니라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어 빛을 반사하게 한 금속 거울을 생각하면 됩니다. 출애굽기 38장 8절에도 여성들이 사용하던 거울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엘리후는 돌연 욥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우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우리는 어둠 때문에 말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욥기 37:1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욥기 전체의 법정 논쟁이 다시 등장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사정을 펼쳐 놓겠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23장 4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송사를 진술하고 자신의 입을 논증으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말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עָרַךְ)의 원문 동사는 질서 있게 배열하거나 차례를 갖추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욥기 23장 4절에서도 욥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송사를 펼쳐 놓겠다고 할 때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37장 19절의 말은 단순히 적절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주장을 정돈하여 제시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그 이유를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앞에서 천둥과 구름을 묘사했으므로 실제 하늘의 어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에서는 인간의 이해가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알지 못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논증을 완전하게 정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은」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엘리후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말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욥에게 반어적으로 질문하면서 모든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문장 자체는 엘리후까지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지식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하겠다고 그에게 알려야 하겠습니까? 사람이 말을 한다면, 정녕 삼켜질 것입니다.」욥기 37:20 · 본디새김
「삼켜질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사람에게 압도적인 파멸이 닥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원문의 조건절과 문장 연결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함부로 말하려는 사람이 파멸을 맞는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삼켜지는지 구체적인 상황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엘리후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일을 극도로 위험하고 두려운 것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독자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께 말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까?
욥은 이미 하나님께 수없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대답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억울함을 들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하나님께 질문하거나 부르짖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자기 판단 아래 두고 반드시 자신의 요구대로 답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대답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욥의 말에는 때때로 첫 번째 태도로 기울어지는 위험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행동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다음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모든 요구에 그대로 응답하시지는 않지만, 욥이 제기한 문제를 전혀 상대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은 아직 그 대답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으로 하늘의 빛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에도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묻고,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실 것인지 탄식하는 기도가 등장합니다(시 13:1–2; 22:1–2).
보이지 않던 빛과 북쪽에서 오는 금
「지금 사람들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 빛은 하늘에서 환히 빛나며, 바람이 지나가 하늘을 깨끗이 했습니다.」욥기 37:21 · 본디새김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하늘에서 환히 빛난다는 말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문장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이해는 구름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상황에서 바람이 불어 구름을 걷어 내는 장면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른 이해는 바람이 지나가 하늘이 맑아진 뒤, 빛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히브리어 문장의 압축적인 표현에서 나옵니다. 본디새김은 빛을 보지 못한다는 문면을 보존하고, 보지 못하는 이유를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빛은 하늘에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 빛을 항상 자기 뜻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에 가려서 볼 수 없을 수도 있고, 너무 강렬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인간의 시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북쪽에서 금이 옵니다. 하나님 위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위엄이 있습니다.」욥기 37:22 · 본디새김
「북쪽에서 금이 옵니다」라는 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이 낱말을 금으로 그대로 옮긴 것은 원문의 모호함을 보존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제 금속인 금이 북쪽에서 운반되어 온다는 뜻인지, 금처럼 빛나는 광채를 묘사한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앞 절에 빛과 맑아진 하늘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쪽에서 오는 황금빛 광채를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나타나고, 그 광채가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께서 실제로 북쪽에서 나타나신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황금빛 현상과 하나님의 위엄을 나란히 놓지만, 두 표현의 정확한 관계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처음에 천둥소리를 들으며 몸이 떨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빛과 광채를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합니다.
이 장은 소리로 시작해 빛으로 끝나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둥소리를 듣는다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늘의 빛을 본다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분명히 드러나지만, 하나님 자신은 인간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억누르지 않으신다
「우리는 전능자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는 힘이 크고, 공의와 풍성한 의로움을 지녔으며, 사람을 억누르지 않습니다.」욥기 37:23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하면서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완전히 찾아낼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힘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와 의로움을 지니셨으며 사람을 부당하게 억누르지 않으십니다.
「찾아내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거나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엘리후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행동을 매우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시고, 인간을 가르치시며,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다 찾아낼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참되게 아는 것과 하나님을 빠짐없이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은 세상의 많은 것을 탐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 안에 완전히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23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있습니다. 「사람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엘리후가 처음부터 변호하려 했던 하나님의 정의를 다시 강조합니다.
마지막 동사는 문맥에 따라 괴롭히거나 억압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억누르지 않으신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에 놓인 공의와 풍성한 의로움의 문장 관계를 달리 파악하면, 하나님께서 정의를 왜곡하거나 훼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정의 자체에 초점을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큰 능력을 불의하게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큰 방향에서는 서로 만납니다.
여기서 욥기의 중심 문제가 다시 드러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당하게 억누르지 않으신다고 확신합니다. 반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억눌리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욥기 10장 3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존재를 억누르시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욥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충돌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에서 출발하여 욥의 판단을 교정하려 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엘리후가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한다는 사실만으로 욥의 질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시다는 선언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욥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가 설명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에서 엘리후는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욥기 37:24 · 본디새김
「두려워합니다」는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고 경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흔히 이 표현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지혜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경고가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이 직접 들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기 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이해입니다. 문맥상 엘리후가 인간의 지적 교만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시거나 그들의 판단에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도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판단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서 참된 지혜 자체를 멸시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 28장 28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36장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37장 24절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하찮게 여기신다는 의미로 확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권위를 요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사람은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그분의 판단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하며 자신의 연설을 마칩니다. 다음 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실 때, 그 말씀은 욥을 향합니다. 이것이 엘리후의 모든 진술이 승인되거나 부정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다만 이야기의 중심이 인간들 사이의 논쟁에서 하나님과 욥 사이의 만남으로 옮겨 간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28장에서도 지혜를 찾는 인간의 한계가 강조됩니다. 사람은 땅속 깊은 곳에서 금과 보석을 찾아낼 수 있지만, 참된 지혜가 있는 곳을 스스로 발견하지는 못합니다(욥 28:12–21). 그 장의 결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지혜의 길을 아시며,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욥 28:23–28). 엘리후의 마지막 말은 이러한 지혜 전통과 통합니다. 욥기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욥 28:28).
폭풍 속에서 인간의 말이 끝나다
욥기 37장을 마지막까지 읽으면 처음과 끝 사이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엘리후는 자신의 심장이 떨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욥에게 멈추어 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멈추어야 하는 것은 욥의 행동만이 아니라 인간의 설명과 논증처럼 보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일을 다 알지 못합니다. 엘리후 역시 그 모든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능력과 하나님께서 실제로 일하시는 범위는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재난이나 질병, 실패를 경험할 때 그 원인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 장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판단이 됩니다. 욥기 37장의 「멈추어 서서」라는 요청은 욥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설명을 멈추고,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사람의 말이 끝납니다.
엘리후의 마지막 선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억누르지 않으시며, 인간의 지혜에 의해 판단받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욥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욥기 37장은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를 폭풍 앞에 세웁니다.
사람의 손은 멈추고, 짐승은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구름은 방향을 바꾸며 움직이고, 번개는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빛이 나타나고, 그 위에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이 있습니다.
엘리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는 아직 폭풍이 울리고 있지만, 하나님을 설명하던 인간의 목소리는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욥기 3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