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왜 저를 가만두지 않으십니까?

사람이 너무 외로울 때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욥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시는 것조차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제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시고, 제가 침을 삼킬 동안조차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렵니까?」(19절) 성경에서 하나님의 시선은 대체로 은혜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시선이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고 시험하는 눈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7장의 가장 날카로운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지나치게 주목하신다고 탄식합니다.

앞 장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 그의 시선은 하나님께 향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괴롭지만,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왜 자신을 이토록 괴롭게 하시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말은 세 단계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끝나지 않는 노동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1–6절). 이어 자신이 곧 사라질 존재임을 하나님께 기억시킵니다(7–10절). 마침내 하나님을 직접 향해, 왜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11–21절). 그 과정에서 시간, 잠, 하나님의 시선처럼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얻습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67장 본문 읽기 →

하루는 끝나지 않는데,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욥기 7:1–6 본문 →

「사람에게는 땅 위에서 치러야 할 노역이 있지 않은가? 그의 나날은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욥기 7:1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인간의 삶 자체를 노동에 비유합니다.

욥이 떠올린 두 사람은 종과 품꾼입니다. 종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늘을 기다리고, 품꾼은 하루의 일을 마친 뒤 받을 품삯을 기다립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고된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기다릴 것이 있습니다. 노동이 끝나면 그늘이 오고, 일을 마치면 품삯을 받습니다. 지금의 수고가 끝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에게 돌아온 몫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렇게 내게는 허무한 달들이 몫으로 주어졌고, 고통의 밤들이 내게 배정되었네.」욥기 7:3 · 본디새김

「몫으로 주어졌다」(⁨נָחַל⁩)는 무엇을 상속하거나 몫으로 받는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속은 사람이 누리게 되는 재산이나 기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욥이 받은 것은 재산이 아니라 허무한 달들입니다. 그에게 배정된 것은 휴식이 아니라 고통의 밤들입니다.

마치 누군가 삶의 몫을 나누어 주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일한 뒤의 쉼과 보수가 돌아가고 자신에게는 끝없는 수고만 돌아온 것처럼 말합니다. 본문은 누가 이 몫을 배정했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욥이 하나님께 말을 건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묻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고통이 자신의 시간 감각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이야기합니다.

「누우면 나는 『언제 일어날까?』 하고 말하네. 밤은 길게 늘어지고, 나는 동틀 무렵까지 뒤척임에 질리네.」욥기 7:4 · 본디새김

보통 사람에게 잠자리는 노동이 끝났다는 표시입니다. 종이 그늘을 기다리고 품꾼이 품삯을 기다리듯, 사람은 밤의 휴식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밤이 새로운 고통의 시작입니다.

하루 종일 괴로웠던 몸을 눕혀도 잠들지 못합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아침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시간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5절은 그 이유를 몸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내 살은 구더기와 흙덩이를 입었고, 내 살갗은 굳어 있고 진물이 흐르네.」욥기 7:5 · 본디새김

욥의 피부는 상처와 딱지, 진물이 뒤섞인 상태입니다. 앞서 욥기 2:7은 그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심한 종기를 앓았다고 전합니다. 7장은 그 질병이 일상에서 어떤 고통을 일으키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과 망가진 피부가 그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간이 갑자기 빨라집니다.

「내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더 빨리 지나가고, 희망도 없이 다해 가네.」욥기 7:6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밤이 끝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두 얼굴입니다. 하루하루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길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삶 전체가 너무 빠르게 사라져 갑니다.

베틀의 북은 직물을 짤 때 실을 가로질러 빠르게 움직입니다. 욥의 나날도 그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러나 베틀이 움직이며 천을 완성하는 것과 달리, 욥은 자신의 시간이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 시간이 「희망도 없이」 끝나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음 단락에서 욥이 하나님의 기억에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노역」으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본래 군대나 군사적 복무를 가리키는 데 쓰이며, 정해진 기간 동안 감당해야 하는 힘든 임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곧바로 종과 품꾼을 언급하므로, 여기서는 전투보다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는 고된 복무의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5절의 묘사만으로 특정 질병을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바라보실 때,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욥기 7:7–10 본문 →

「제 삶이 바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제 눈은 다시는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욥기 7:7 · 본디새김

여기서 말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 욥은 일반적인 인간의 삶을 말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직접 향해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실 정보를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근거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호소입니다.

「바람」(⁨רוּ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바람, 숨,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금세 지나가는 호흡처럼 짧고 덧없는 생명을 표현합니다.

「저를 보던 눈은 저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눈이 저를 향할 때 저는 없을 것입니다.」욥기 7:8 · 본디새김

욥은 두 종류의 시선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눈입니다. 지금 자신을 보던 사람들도 곧 자신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바라보실 때에도, 자신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실제로 욥을 잊으셨다는 객관적인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긴박한 호소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동안 저를 돌아봐 주십시오. 제가 사라진 뒤에는 너무 늦습니다.’

그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구름이 스러져 사라지듯, 스올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않습니다.」욥기 7:9 · 본디새김

구름은 분명히 하늘에 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욥은 자신의 삶을 그런 구름과 비교합니다.

여기서 스올은 구약의 죽음에 관한 언어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욥이 말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가능성에 관한 체계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죽음이 지금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끝낸다는 사실입니다.

10절은 그 상실을 훨씬 일상적인 이미지로 바꿉니다.

「그는 다시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가 있던 곳도 다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욥기 7:10 · 본디새김

죽음은 사람이 세상에서 차지하던 자리를 비워 놓습니다.

집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앉던 자리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살던 장소조차 이제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장면에서 욥은 특별한 명예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자기 자리에서 살며, 좋은 것을 바라보는 평범한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합니다.

제가 바다 괴물이기에 저를 감시하십니까?

욥기 7:11–16 본문 →

「저도 제 입을 억누르지 않겠습니다. 제 영이 괴로운 가운데 말하고, 제 마음이 쓰라린 가운데 하소연하겠습니다.」욥기 7:11 · 본디새김

이 선언은 욥기 3장 이후 계속된 탄식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합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지 직접 묻기로 합니다.

그 질문은 예상 밖의 이미지로 시작됩니다.

「제가 바다나 바다 괴물이기에 저를 감시 아래 두십니까?」욥기 7:12 · 본디새김

왜 갑자기 바다와 괴물이 등장할까요? 고대 근동의 문학에서 바다는 때때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혼돈과 위협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거나 거대한 바다 생물을 다스리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시 74:13–14, 욥 38:8–11).

욥은 묻습니다. ‘제가 그렇게 위험한 존재입니까? 제가 통제하지 않으면 세상을 위협할 존재이기에 이렇게 감시하십니까?’

이 질문의 날카로움은 욥의 처지를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산을 잃었고, 자녀들을 잃었고,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이제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약한데,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시는 방식은 마치 자신이 너무나 강하고 위험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욥기 앞부분과도 대조를 이룹니다. 욥기 1:10에서 사탄은 하나님이 욥과 그의 집과 소유를 두루 둘러 보호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가두고 감시하시는 것 같다고 호소합니다.

물론 두 구절은 서로 다른 상황을 말하며 동일한 표현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독자는 하나님이 욥을 보호하셨다는 앞선 이야기와, 욥이 하나님의 시선을 감시로 느끼는 지금의 이야기 사이에서 깊은 간격을 발견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독자는 1–2장의 하늘 장면을 알고 있지만, 욥 자신은 그 대화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독자에게도 욥이 겪는 고통의 모든 의미가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욥의 질문은 단순히 정보를 몰라서 생긴 오해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과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있습니다.

잠자리마저 위로가 되지 않는 밤

「제가 『내 침상이 나를 위로하고, 내 잠자리가 내 하소연을 덜어 주겠지.』 하고 말하면,」 「당신은 꿈으로 저를 겁에 질리게 하시고, 환영으로 저를 두렵게 하십니다.」욥기 7:13–14 · 본디새김

처음에는 침대가 위로의 장소처럼 보입니다. 낮 동안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침대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합니다. 잠들면 꿈과 환영이 자신을 두렵게 만듭니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을 직접 행위자로 지목합니다. 그에게는 꿈에서 겪는 공포조차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일의 일부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본문은 실제로 하나님이 욥에게 그러한 꿈을 보내셨다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여 하나님께 항의하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과, 그 책임에 관한 욥의 판단이 모두 정확하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분을 지키면서도 욥의 말을 약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깨어 있을 때에도, 잠들어 있을 때에도 괴롭습니다. 낮에는 몸의 고통이 있고 밤에는 꿈의 공포가 있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원한다고 말합니다(15절). 분명한 것은 욥이 현재의 육체적 고통을 계속 겪는 것보다 죽음을 원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욥은 짧지만 강한 요청을 던집니다.

「저는 질렸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닙니다.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 나날은 입김이기 때문입니다.」욥기 7:16 · 본디새김

이것은 묘한 요청입니다. ‘어차피 금세 사라질 인생인데, 왜 잠깐이라도 편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까?’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은 흔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할 이유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욥은 바로 그 사실을 하나님께 자신을 놓아 달라고 요청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죽음의 희망을 말하는 15절과 16절의 표현은 욥의 절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욥기의 최종적인 삶의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지금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말을 들려주고 있으며, 그 말의 긴장과 위험까지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요청을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발전시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바다 괴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문맥에 따라 큰 뱀이나 바다의 거대한 생물을 가리키며, 혼돈을 상징하는 존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욥이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특정한 신화 속 괴물을 정확히 지칭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제하거나 경계해야 할 거대한 위험이라는 이미지입니다. 15절의 히브리어는 특히 후반부의 비교 표현이 어렵습니다. 「숨이 막혀 죽는 편」이라는 번역은 본문의 한 요소를 반영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죽음의 방식이나 실행 의도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16절의 「입김」은 전도서에서 반복되는 바로 그 낱말로, 입에서 나왔다가 곧 사라지는 숨결처럼 붙잡을 수 없고 덧없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7절의 「바람」과 의미상 연결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욥은 앞에서는 자신의 생명이 바람처럼 지나간다고 했고, 여기서는 자신의 날들이 입김처럼 덧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그렇게 크게 여기십니까?

욥기 7:17–19 본문 →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크게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두시며,」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욥기 7:17–18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시편 8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8:4는 하나님이 지으신 광대한 하늘을 바라보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고 돌보시는지 묻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시편 8편과 욥기 7장은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질문을 공유하며, 하나님이 사람을 돌아보신다는 뜻의 동사도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같은 질문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시편 8편에서 시인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봅니다. 그 거대한 창조 세계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작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인간을 기억하시고 존귀하게 대하신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욥도 인간이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하늘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스러운 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시편 8편의 질문은 이렇게 들립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귀하게 여기십니까?’

욥의 질문은 이렇게 들립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집요하게 살피십니까?’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존엄을 드러냅니다. 욥기 7장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압박으로 느껴집니다.

같은 하나님의 관심도 사람이 처한 현실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17절의 「크게 여기시고」는 인간을 높이거나 중요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을 두시며」 역시 깊은 관심을 뜻할 수 있습니다.

18절의 「살피시고」(⁨פָּקַד⁩)에 해당하는 동사는 방문하거나 돌보는 뜻으로도, 조사하거나 점검하는 뜻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시험하십니까」가 나오면서 욥의 말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게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살피신다는 사실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욥은 그 살핌을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검사처럼 경험합니다.

더구나 그 검사는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순간마다」.

아침은 원래 새날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긴 밤이 끝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때입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아침이 하나님의 새로운 검사가 시작되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1–6절에서 밤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욥은 이제 아침이 오는 것도 두렵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는 마침내 견딜 수 없다는 듯 묻습니다.

「언제까지 제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시고, 제가 침을 삼킬 동안조차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렵니까?」욥기 7:19 · 본디새김

「침을 삼킬 동안」은 매우 짧은 순간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표현입니다. 욥은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랜 안식이나 새로운 번영을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침을 한 번 삼킬 만큼의 시간이라도 자신을 놓아 달라고 합니다.

이 사소한 신체적 행동이 오히려 그의 고통을 실감 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작고 자연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욥에게는 그 작은 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 요청을 하나님께 직접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말을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관심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욥 자신이 이 차이를 분명하게 정리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상반된 요청들을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긴장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8편과의 연결이 반드시 한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인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본문의 표현이 매우 가깝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어느 본문이 먼저 쓰였고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는지는 이 유사성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시편 8편의 찬양을 무너뜨리기보다, 그 찬양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욥기 7장은 시편의 다른 탄식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13:1–2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오래 잊고 계실 것인지 묻습니다. 반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신다고 항의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시선을 심판이나 감시로 경험하는 고통입니다. 또한 시편 39:13에서 시인은 죽기 전에 잠시라도 자신을 놓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는 욥기 7:16, 19의 요청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을 이유로 욥과 시편 기자들이 같은 경험을 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본문은 자신만의 상황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다 한들, 하나님께 무슨 해를 끼치겠습니까?

욥기 7:20–21 본문 →

「제가 죄를 지었다 한들, 제가 당신께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을 지켜보는 이여? 왜 저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게 짐이 되었습니다.」욥기 7:20 · 본디새김

욥의 탄식은 이제 죄의 문제에 이릅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하타티(⁨חָטָא⁩), 마 에프알 라크입니다. 앞부분은 문자적으로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형태이지만, 이어지는 질문과 연결하여 가정하거나 양보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두 방향의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실제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해를 끼쳤기에 이토록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묻는 읽기입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방향을 택했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에 합당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앞선 대화의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문법만으로 첫 번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욥의 질문은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방식과 자신이 겪는 고통 사이의 관계를 겨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람을 지켜보는 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사람을 지키거나 살피는 이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도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키는 사람은 보호자일 수 있지만, 끊임없이 감시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욥은 지금 후자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녁은 화살이 겨냥하는 대상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이 쏘시는 화살의 목표물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앞서 6:4에서 그는 전능자의 화살이 자신의 몸에 박혔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이미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고통이 우연한 방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정확히 겨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그렇게 겨누실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서 자신이 바다 괴물이냐고 물었던 질문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는 셈입니다. 자신은 너무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인데, 왜 이렇게 엄중하게 다루시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짐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은 7장의 앞부분과도 연결됩니다. 처음에 욥은 인간의 삶을 무거운 노역에 비유했습니다. 그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견디기 어려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삶의 조건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제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제 죄악을 없애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저는 흙 속에 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애써 찾으시겠지만, 저는 없을 것입니다.」욥기 7:21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뜻밖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을 정당화할 만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용서를 요청합니다. 이것을 앞선 주장과 모순된다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어떤 중대한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잘못이 없는 존재라고 확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합니다. ‘설령 제게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왜 그것을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용서하다」(⁨נָשָׂא⁩)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들어 올리거나 짊어지는 뜻을 가지며, 문맥에 따라 죄를 용서하거나 그 책임을 벗겨 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욥은 바로 앞 절에서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짐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그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두 절은 서로 연결됩니다. 욥은 더는 자신의 존재와 고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무게가 죄와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없애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욥의 신학적 항의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면, 왜 그 죄를 용서하실 수는 없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 능력을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이제 저는 흙 속에 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에 이르러 그의 어조는 다시 급박해집니다. 그가 말하는 「흙」은 자신의 육체가 돌아갈 자리입니다. 이는 창세기 3:19에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인간의 유한성을 추상적인 교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곧 그 흙 속에 누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욥을 찾으신다는 말은 죽음 이후에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의 삶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8절과도 호응합니다. 그곳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눈이 자신을 향할 때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의 중간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했던 욥은, 마지막에는 자신이 사라진 뒤 하나님이 자신을 찾으셔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핏 모순된 요구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제는 자신이 사라지기 전에 찾아 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요청은 고통 속에서 나온 하나의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욥은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삶이 끝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히시는 분으로만 남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감시로 느끼는 사람

욥기 7:1–21 본문 →

욥기 7장의 독특함은 하나님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그분께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호자라고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그 보호를 경험하는 것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현실에서는 그 돌보심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욥기 7장은 바로 그 간극을 숨기지 않습니다.

욥의 질문은 매우 불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나치게 감시하신다고 항의하고, 자신을 과녁으로 삼으셨다고 말하며, 잠깐이라도 내버려 두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욥기는 이 말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진술만 골라 남기는 대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실제로 드리는 말을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완성된 설명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욥기 7장은 놀라울 만큼 작은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처음에 욥은 몇 달을 이야기했습니다. 허무한 달들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밤을 이야기하고, 하루를 이야기하고, 인생 전체가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나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간이 한순간으로 줄어듭니다.

침을 삼킬 동안.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놓아 주시라고 요청합니다.

한때 욥에게는 재산과 자녀들과 자기 집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잃었고, 심지어 자기 몸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조차 감당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언제까지 제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시고, 제가 침을 삼킬 동안조차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는 아직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욥기 7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두시는지를 찬양하는 장이 아닙니다. 그 관심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된 한 인간이, 바로 그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하는 장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욥은 긴 밤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또 하나의 간절한 말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제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제 죄악을 없애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저는 흙 속에 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애써 찾으시겠지만, 저는 없을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