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니느웨의 회개
뒤집힐 성읍에서 일어난 일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는 겨우 한 문장의 경고를 외칩니다.
이 이야기에는 뜻밖의 역설이 있습니다. 니느웨는 뒤집힐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고, 실제로 뒤집혔습니다. 다만 건물들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성읍을 향해 왜 심판을 미리 알리셨을까요? 이미 재앙을 결정하셨다면, 그들에게 사십 일이라는 시간을 주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찾아온 말씀
여호와야훼의 말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이렇게 이르렀다.요나 3:1 · 본디새김
3장은 처음부터 낯익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1장 첫머리에서 요나에게 임했던 여호와야훼의 말이 다시 그에게 찾아옵니다.
앞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예언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부르시면서 니느웨를 향한 자신의 뜻도 그대로 유지하십니다.
요나가 거부했다고 니느웨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일어나 그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내가 네게 말하는 내용을 그 성읍을 향해 선포하라.」요나 3:2 · 본디새김
요나는 자신이 전할 말씀의 내용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니느웨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요나가 움직입니다.
요나는 일어나 여호와야훼의 말대로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하나님이 보기에 큰 성읍이었고, 그 규모는 사흘 길이었다.요나 3:3 · 본디새김
1장에서 요나는 일어나 도망쳤습니다. 3장에서는 일어나 순종합니다.
본문은 그사이에 요나의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그 명령을 주신 분의 마음까지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하나님께 큰 성읍’이라는 독특한 표현, 이르 게돌라 렐로힘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성읍’을 뜻하는 강조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본디새김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성읍이라는 의미도 살려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의미만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흘 길」이라는 표현도 구체적인 거리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성읍을 가로지르는 데 필요한 시간인지, 성읍과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는 여정인지, 선포 활동에 필요한 기간인지 본문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악도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거대한 성읍에 요나가 들어갑니다.
다섯 낱말의 경고, 사십 일의 시간
요나는 성읍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하루 길만큼 나아갔다. 그는 외쳐 말했다. 「사십 일이 더 지나면 니느웨는 뒤집힐 것이다.」요나 3:4 · 본디새김
히브리어 본문에서 요나의 선포는 단 다섯 낱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직접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결과만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경고와 재앙 사이에 시간을 두셨습니다.
심판을 알리는 말씀이 미리 주어졌다는 것은, 아직 사람들이 그 말씀에 응답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나의 선포에는 용서의 조건이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사십 일이 반드시 회개의 기회로 보장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그 시간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으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문맥상 선포의 직접적인 의미는 재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만 성읍을 뒤집겠다는 말씀이 성읍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학적 반전이 형성됩니다.
앞서 니느웨는 사흘 길이나 되는 큰 성읍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 길만큼 들어가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가 성읍 전체를 다 돌기도 전에 회개가 시작되었다는 뜻인지, 하루 동안 선포한 일을 대표적으로 기록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긴 사역의 과정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짧은 선포 뒤에 곧바로 성읍 전체의 반응을 기록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선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은 요나의 말솜씨나 설교의 길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요나에게서 니느웨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왜 하필 사십 일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십이라는 수가 시험이나 전환의 기간과 관련되는 사례들은 있지만, 여기서 그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어근 하파크(הָפַךְ)는 ‘뒤집다’, ‘전복하다’, ‘바꾸다’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19:25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뒤집히는 장면에 이 어근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말은 분명히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같은 어근은 상태가 달라지는 변화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사무엘상 10:6에서 사울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가 등장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요나가 처음부터 ‘니느웨가 회개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왕의 명령보다 먼저 시작된 변화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자루천을 입었다.요나 3:5 · 본디새김
본문은 그들이 요나를 믿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전달된 심판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 전통을 받아들였다거나, 평생 여호와야훼만을 예배하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를 믿고 실제로 반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자루천은 거칠고 불편한 옷감으로,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세계에서 슬픔과 애도, 굴욕, 간절한 탄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평소의 생활을 중단하고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온몸으로 드러냅니다.
그 말이 니느웨 왕에게 이르렀다. 왕은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천으로 몸을 덮은 뒤 재 위에 앉았다.요나 3:6 · 본디새김
이 이야기에서 변화는 왕의 명령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먼저 사람들의 믿음이 서술됩니다. 왕도 자신에게 도달한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왕좌와 겉옷은 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것들을 내려놓고 재 위에 앉습니다. 재는 슬픔과 낮아짐을 표현하는 자리입니다.
그는 여전히 니느웨의 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지위와 권력으로 재앙을 막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과 성읍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자리에 앉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의례적 행동에 그치는지,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지는 이어지는 왕의 명령에서 드러납니다.
짐승까지 금식하다 — 온 성읍이 위험 앞에 서다
왕은 고관들과 함께 명령을 내립니다.
그는 왕과 그의 고관들의 명령으로 니느웨에 이렇게 외쳐 알리게 했다. 「사람과 짐승, 소 떼와 양과 염소 떼는 아무것도 맛보지 말라. 풀을 뜯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요나 3:7 · 본디새김
금식은 식사를 거르는 것을 넘어 물도 마시지 않는 엄격한 형태로 명령됩니다. 가축은 풀을 뜯는 일조차 금지됩니다. 왕의 명령은 도시 전체가 심판의 위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큰 성읍은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업을 지탱하는 가축도 있고, 그 가축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도 있습니다. 성읍에 재앙이 닥치면 그 결과는 인간의 사회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은 금식과 자루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자루천으로 몸을 덮고 하나님에게 힘껏 외쳐라. 사람마다 자기의 악한 길에서, 자기 손으로 저지르는 폭력에서 돌아서라.」요나 3:8 · 본디새김
그들은 단지 음식을 끊거나 옷을 바꾸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기들이 살아온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길’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방향을 가리킵니다. ‘손’은 그 삶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니느웨가 돌아서야 하는 것은 단지 마음속의 종교적 태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폭력을 행사하는 행동, 자신들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 단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 왔는지를 바꾸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금식과 자루천이 진지한 탄원의 표현이라면, 폭력에서 돌아서는 것은 그 탄원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살려 달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 왔던 행동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행동의 변화가 마지막 절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에서는 짐승까지 자루천을 덮고 하나님께 외치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 문장은 원문에서도 흥미로운 여지를 남깁니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자루천을 입고 부르짖으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자루천을 입는 일에는 짐승도 포함되지만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짐승들이 인간과 같은 도덕적 책임을 지고 회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חָמָס)는 폭행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부당한 행위와 폭력적 불의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낱말은 창세기 6:11–13에서도 등장합니다. 홍수 이전의 땅에 폭력이 가득했다는 표현입니다.
“누가 알겠는가?” — 보장받지 못한 자비를 바라다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이 돌아서서 뜻을 돌이키고, 타오르는 분노에서 돌아서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요나 3:9 · 본디새김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금식과 자루천이 하나님께 자비를 요구할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며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구합니다.
「누가 알겠는가?」는 회개할 이유가 없다는 체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붙들고 행동하게 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요엘 2:14에서도 나타납니다. 거기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요청과 함께,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복을 남겨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두 본문 모두 회개를 하나님께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기술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는 자신들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악에서 돌아섭니다.
폭력을 멈춥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는 자신이 온 성읍에 명령할 수 있는 왕이지만, 하나님께는 명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한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켰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요나 3:10 · 본디새김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루천을 보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금식했는지를 보셨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나타낸 슬픔이 삶의 변화와 연결된 것입니다.
8절에서 왕은 사람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명령했습니다. 9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돌아서서 뜻을 돌이키고」 분노에서 「돌아서서」 재앙을 거두실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선 것」을 보시고, 자신도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악을 버립니다.
하나님은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서로 다른 행동이지만 이야기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내면에서 어떤 결정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과정을 상세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 돌이킴을 단지 겉으로 나타난 변화라고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기로 하셨던 결정에 대해 뜻을 돌이키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악에서 선으로 바뀌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신다는 사실과, 악인이 돌아설 때 그를 살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슈브는 ‘돌아가다’, ‘돌아서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일과 하나님께서 분노에서 돌아서시는 일에 사용됩니다. 나함은 문맥에 따라 후회하다, 마음을 바꾸다, 뜻을 돌이키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에 대해 결정을 바꾸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라아(רַע)는 문맥에 따라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기도 하고, 재앙이나 불행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10절에는 이 낱말이 두 번 나옵니다. 같은 낱말이지만 하나는 사람들이 행하던 도덕적 악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악을 심판하기 위해 내리시려던 재앙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악을 뉘우치신 것처럼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못을 저지르셨다가 후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에서 돌아섰을 때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심판을 실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7–8에서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나라를 뽑아 버리고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아서면 내리시려던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심판의 경고는 인간의 응답과 아무 관계없이 정해진 미래를 알려 주는 선언만은 아닙니다. 악을 계속할 경우 맞이할 결과를 알리고, 악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18:23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이 죽는 것보다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스겔 33:11에서도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아서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강조됩니다.
니느웨는 어떻게 뒤집혔는가?
심판의 말씀은 악을 드러냈고, 그 악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렸으며,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갈 수 있게 했습니다. 예언자의 선포에는 이처럼 미래를 알리는 기능뿐 아니라 현재의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기능도 있습니다.
이 장의 결말은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찬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변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이후에 모두가 정의롭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한편 요나는 그 결말에 대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다음 장을 향한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심판을 선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거두셨을 때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요나 3장은 그 답을 서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서 내려온 왕이 재 위에 앉아 있습니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평소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폭력을 행하던 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멈추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십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사라질지도 몰랐던 그 성읍에서, 사람들이 먼저 자신들의 길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선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