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7–21장 · 무너지는 공동체
한 지파를 살리며 빼앗은 삶
사사기 21장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제인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을 슬퍼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한 지파의 생존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 지파를 살리기 위해 희생되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그토록 무관심했을까요?
이 장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제물을 바치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지키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온전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형제 지파를 향한 연민이, 정작 다른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위기를 하나님께 묻다
이야기는 이미 이루어진 맹세를 밝히면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이렇게 맹세해 두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습니다.」사사기 21: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이스라엘은 기브아의 범죄자들을 넘겨주지 않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베냐민은 거의 멸망했고, 육백 명의 남자만 림몬 바위로 피신했습니다(20:47).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내린 맹세 때문에 새로운 문제를 만납니다.
남아 있는 베냐민 남자들이 다른 지파의 여자들과 결혼할 수 없다면, 베냐민 지파가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위태로워집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부계 중심 가문과 상속 체계에서는 후손을 통해 가문과 지파의 계보를 이어 가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벧엘에 와서 하나님 앞에 앉아 저녁까지 크게 웁니다.
그들이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여, 어째서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 오늘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습니까?」사사기 21:3 · 본디새김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형제 지파입니다. 그 지파가 사라진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상실을 겪게 됩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단순히 패배한 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다시 이스라엘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을 앞 장의 사건과 함께 읽으면 긴장이 드러납니다.
베냐민 지파의 성읍들을 공격하고, 그곳의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성읍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신이었습니다(20:48). 전쟁에서 베냐민을 패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야훼라고 서술되지만(20:35), 이스라엘이 그 뒤에 행한 모든 파괴까지 별도의 명령으로 주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자기 행동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거나, 그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에게 닥친 결과를 슬퍼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결과를 슬퍼하는 것과,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다음 날 그들은 제단을 쌓고 번제와 친교 제물을 바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엄숙한 제의적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기도에 대답하셨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물을 때마다 여호와야훼의 응답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장에서는 사람들이 울고 제물을 바친 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떠올린 것은 또 다른 맹세입니다.
두 개의 맹세가 만나 새로운 살육을 낳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지 조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말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여호와야훼 앞 모임에 올라오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야훼 앞에 모이러 미스바로 올라오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라는 엄중한 맹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사사기 21:5 · 본디새김
하나는 자기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스바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맹세입니다.
두 맹세 모두 인간이 한 것입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이 두 맹세를 직접 명령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신들에게 의무를 부과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맹세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민수기 30:2는 여호와야훼께 서원하거나 맹세한 사람이 자기 말을 함부로 깨뜨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맹세를 신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과, 어떤 내용으로든 맹세하기만 하면 그 행동이 의로워진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신명기 23:21–23은 서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가르치며, 서원하지 않은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맹세의 엄중함은 그 내용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21장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내린 맹세를 다시 검토하거나, 그 맹세의 내용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논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맹세를 모두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 결과 야베스 길르앗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미스바의 모임에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은 그들의 부재를 확인하자 곧바로 군대를 보냅니다.
공동체는 용맹한 사람들 가운데 일만 이천 명을 그곳으로 보내며 이렇게 명령했다.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칼날로 쳐 죽이십시오.」사사기 21:10 · 본디새김
한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10절과 11절의 명령은 더 구체적입니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잠자리를 한 여자들을 진멸하라고 하며, 12절에서는 남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 젊은 여자들이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백 명이 발견됩니다. 그 여자들은 실로로 데려와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남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죽임당하거나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은 여자들의 운명 역시 그들을 데려간 사람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대의 혼인 관습으로 설명하고 지나갈 수 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본문은 군대를 동원해 주민들을 살해하고, 특정 조건에 해당하는 여자들을 데려오는 강제적인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을 잃을까 봐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 길르앗의 사람들이 죽는 일에는 같은 방식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연민은 베냐민에게는 미쳤지만, 베냐민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여호와야훼는 약한 사람을 돌보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신명기 10:18–19는 여호와야훼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며, 거류민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라면, 한 지파를 살리기 위해 다른 공동체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한 맹세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때에는, 자신이 한 말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일만이 아니라 그 맹세 자체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평화를 선포했지만, 그 평화의 대가는 다른 사람들이 치렀다
이스라엘 회중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베냐민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선포합니다.
이것은 앞 장의 전쟁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행동입니다. 이제 그들은 베냐민을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다시 함께 살아가야 할 형제로 대합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아내로 줍니다. 그런데 수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살아남은 베냐민 남자는 육백 명이었습니다(20:47). 야베스 길르앗에서 데려온 젊은 여자는 사백 명입니다(21:12). 따라서 이 이야기의 계획대로라면 이백 명의 아내가 더 필요합니다.
백성은 베냐민을 두고 마음 아파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틈을 냈기 때문이었다.사사기 21:15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제 그 공동체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겼다는 말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자체가 여호와야훼의 행동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베냐민을 패하게 하셨다고 기록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폭력이 한 사건 안에서 함께 나타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행한 모든 행동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앞 장 마지막의 광범위한 파괴와 이번 장의 야베스 길르앗 공격은 사람들이 실제로 결정하고 실행한 행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가 지파들 사이에 틈을 내셨다는 서술과, 이스라엘이 그 틈을 더 깊게 만든 책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또다시 여성들을 데려올 방법을 찾습니다.
한 지파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다른 성읍은 살육당했습니다. 한쪽의 평화가 다른 쪽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 평화가 어떻게 성립했는지까지 물어야 합니다.
「한 지파가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 무엇을 지키려는가
공동체의 장로들은 다시 의논합니다.
공동체의 장로들이 말했다. 「베냐민에서 여자들이 전멸했으니, 남은 이들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사사기 21:1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7절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이제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하고 사백 명을 데려온 뒤에도 같은 질문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사람들의 해결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베냐민의 살아남은 이들에게 상속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사사기 21:1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단순한 행정 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나누어 받은 공동체들이며, 그들의 가문과 상속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지파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려는 관심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목적을 위해 무엇을 희생시키는가 하는 점입니다.
장로들은 베냐민의 상속과 지파의 생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상속을 이어 갈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여성들의 의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정을 이루기 원하는지,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부계 중심 상속 제도와 관련된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과 그 안에서 행해진 강제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다시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딸들을 그들에게 아내로 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에게 아내를 주는 자는 저주받는다.』라고 맹세했기 때문입니다.」사사기 21:18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딸들을 베냐민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냐민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되 자신들이 직접 딸을 ‘주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다시 묻기보다, 자신들이 한 맹세를 형식적으로 어기지 않으면서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찾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축제가 여자들을 납치하는 장소가 되다
장로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여호와야훼의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말했다. 「보십시오, 실로에서는 해마다 여호와야훼의 축제가 열립니다. 실로는 벧엘 북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의 동쪽, 르보나 남쪽에 있습니다.」사사기 21:19 · 본디새김
여호수아 18:1에서 이스라엘은 실로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사사기 18:31에서도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그런데 지금 장로들은 그곳의 여호와야훼의 축제를 이용하여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려 합니다.
그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가서 포도밭들에 매복하십시오.」사사기 21:20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베냐민과 싸울 때 기브아 주변에 매복병을 배치하여 승리했습니다(20:29–40).
그런데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들이 매복합니다.
목표는 적군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축제에서 춤추는 여자들입니다.
「지켜보다가 실로의 딸들이 춤을 추러 나오면, 포도밭들에서 나와 실로의 딸들 가운데서 각자 자기 아내로 삼을 여자를 낚아채고 베냐민 땅으로 가십시오.」사사기 21:21 · 본디새김
이것은 명백한 납치 계획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축제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 포도밭에는 그들을 납치하려는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사기 11장도 떠올리게 합니다.
입다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딸은 소고를 들고 춤추며 아버지를 맞으러 나왔습니다(11:34). 그러나 아버지가 한 서원 때문에 그녀의 삶은 비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사사기 21장에서도 여자들은 춤을 추러 나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한 맹세 때문에 그들의 삶이 강제로 바뀝니다. 두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서원과 맹세를 둘러싼 남자들의 결정이 젊은 여성들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장로들의 계획에서 가장 교묘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 여자들의 아버지들이나 형제들이 우리에게 따지러 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 여자들 일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전쟁에서 그들 각자에게 아내로 줄 여자들을 데려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므로, 이번 일로 여러분에게 죄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사사기 21:22 · 본디새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을 직접 주는 대신, 베냐민 사람들이 그 여자들을 납치하도록 하면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납치할 장소를 알려 주고, 매복하도록 지시하며, 여자들의 가족이 항의할 때 어떻게 답할지도 준비합니다. 실제로는 납치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돕는 사람들이면서, 형식적으로는 자신들이 여자들을 ‘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22절의 죄책에 관한 설명은 장로들의 주장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서술자가 그들의 법적 논리가 옳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여자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항의하는 상황은 예상하면서도, 여자들 자신의 항의나 의사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들은 이 계획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대상으로만 취급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율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지킨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정의와 이웃에 대한 책임은 놓아둔 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맹세의 문구만 해석한 문제입니다.
베냐민 자손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춤추는 여자들을 자기들 수만큼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다. 그들은 떠나 자기들의 상속지로 돌아가 성읍들을 세우고 그곳에 살았다.사사기 21:23 · 본디새김
이야기는 그 여자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가족과 다시 연락할 수 있었는지, 새로운 가정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여자가 폭력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를 수습한다면서 다시 여러 여자들이 강제로 데려가졌습니다.
악을 없애려는 행동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히브리어 문장 자체에도 해석상 어려움이 있어,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지금은 죄가 없다’는 뜻으로 읽거나, ‘직접 주었다면 죄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장로들이 자신의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려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신명기 16:20의 명령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받습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여자들을 납치한 뒤 자기들의 상속지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성읍들을 다시 세우고 거기서 살기 시작합니다. 이어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도 흩어집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은 그곳에서 각자 자기 지파와 자기 씨족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 각자 자기 상속지로 갔다.사사기 21:24 · 본디새김
그러나 실로의 여자들에게는 그런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그 여자들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서술자는 그들이 새로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사사기 전체를 마무리합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다.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하곤 했다.사사기 21:2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사사기 17:6과 동일한 표현으로, 마지막 다섯 장을 감싸는 역할을 합니다. 오히려 이 장의 사람들은 한 지파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속지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옳다고 여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끔찍한 악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하는 것과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왕이 없었다’는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분명 이스라엘에 공동체를 이끌고 질서를 바로잡을 통치 권위가 없었다는 현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왕이 있었다면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신명기 17:18–20은 왕이 세워지더라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읽고 지키며, 자기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핵심은 공동체가 누구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가에 있습니다.
결론 — 축제에서 돌아오지 못한 여자들
그들은 공동체의 존속을 소중히 여겼지만, 그 공동체 안에 있는 개별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형태는 지키려 했지만,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식은 잃어버렸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바로 이 침묵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며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실로에서 춤추러 나왔던 여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원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을 막았지만, 그 지파를 살리기 위해 빼앗긴 여자들의 삶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상속지로 돌아갔다는 말 뒤에, 그 모든 일을 돌아보게 하는 마지막 문장을 남깁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다.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하곤 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