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남은 이들의 기도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장은 뜻밖에도 가장 단순한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저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주십시오. 살펴 주십시오. 저희의 수치를 보십시오.」예레미야애가 5:1 · 본디새김
왜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고통을 기억해 달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실제로 그 사건을 모르시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도 백성은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기억해 주십시오」는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떠올려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시고, 우리의 처지를 살펴 행동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종종 그분이 관계와 약속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23–25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기억은 이어지는 구원 이야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5장의 백성도 하나님께 자신들의 처지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상황과 달리,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 뒤의 현실이 펼쳐집니다. 백성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시 바라보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5장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입니다.
이 장은 예레미야애가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가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하나의 기도로 읽을 수 있는 장입니다. 앞선 장들에는 시인의 설명과 예루살렘의 목소리, 다른 사람들의 말이 교차했지만, 여기서는 「저희」가 「당신」께 호소하는 방식이 유지됩니다.
형식도 달라졌습니다. 앞선 네 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활용한 시였지만, 5장은 22절로 이루어졌으면서도 각 절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독자는 마지막 장에서 이전보다 덜 정돈된 듯한 호흡 속에 공동체의 탄원을 듣게 됩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물을 돈 주고 마시다
2절부터는 백성이 잃어버린 것들이 하나씩 등장합니다.
「저희 유산은 낯선 이들에게 넘어갔고, 저희 집들은 외국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예레미야애가 5:2 · 본디새김
여기서 「유산」은 단순히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따라서 자기 유산이 낯선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는 탄식에는 경제적인 손실과 더불어 언약의 땅에서 누리던 삶의 기반을 잃었다는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집은 사람이 쉬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을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소유의 상실이 가족 관계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저희는 고아가 되었고 아버지가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들은 과부들 같습니다.」예레미야애가 5:3 · 본디새김
고아와 과부는 구약에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지켜 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사람들의 실제 고통을 포함하면서도, 보호와 생계 기반을 잃은 공동체 전체의 처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전쟁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매일 겪는 현실이 나타납니다.
「저희 물을 돈을 주고 마셨고, 저희 나무는 값을 치러야 들어옵니다.」예레미야애가 5:4 · 본디새김
그들은 남의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값을 치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희 물」이라고 합니다. 나무 역시 「저희 나무」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속했던 것을 사용하려면 이제 돈을 내야 합니다.
여기서 물과 나무는 사소한 생활용품이 아닙니다. 물은 생존에 필수적이고, 나무는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거나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떤 행정 제도나 세금을 통해 이 비용을 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생활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권한을 잃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전쟁이 끝나도 삶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물도 쉼도 없는 사람들
「저희는 목덜미까지 바짝 쫓겼습니다. 저희는 지쳤고, 저희에게는 쉼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애가 5:5 · 본디새김
「목덜미」는 누군가가 바로 뒤에서 바짝 따라붙는 모습을 생생하게 만듭니다. 문장의 정확한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하든, 쫓기는 사람의 압박과 탈진을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충분히 쉬어 다시 일어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저희는 빵을 배불리 먹으려고 이집트에 손을 내밀었고, 아시리아에도 손을 내밀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5:6 · 본디새김
원문의 「손을 내밀다」는 표현은 단순한 구걸뿐 아니라 협정이나 복종의 표시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뜻과,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외국 세력에 종속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뜻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협정이 체결되었는지, 어느 시기에 어떤 집단이 그렇게 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여러 시대에 걸쳐 의지하거나 두려워했던 주변 강대국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호세아 7:11에서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번갈아 찾는 모습이 비판됩니다.
그들의 관심은 정치적 영광을 얻거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손을 내밉니다.
한때 자기 땅에서 살아가던 백성이 이제는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의 손에서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의 무게를 누가 지고 있는가
7절에는 매우 어려운 고백이 나옵니다.
「저희 조상들은 죄를 지었고 이제는 없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저희가 짊어졌습니다.」예레미야애가 5:7 · 본디새김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아도 되는가요?
신명기 24:16은 부모가 자녀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며, 각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에스겔 18장도 이 문제를 다룹니다. 특히 에스겔 18:2–4는 부모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녀의 이가 시리다는 속담을 문제 삼으면서, 각 사람의 생명과 책임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는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앞선 세대의 죄가 후손들의 삶에 남기는 결과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 세대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그 결과가 자녀 세대에도 미칠 수 있습니다. 전쟁과 국가의 멸망,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파괴는 그것을 직접 일으킨 사람들만 겪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짊어졌다」는 말에는 죄의 책임과 그 결과로 인한 형벌의 무게가 모두 연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에 대해 모두 똑같은 개인적 죄책을 지녔다고 단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16절에서 백성은 다시 「저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백성은 현재의 고난이 자기 세대에서 처음 시작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상들만 잘못했고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래에 놓이다
8절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뒤집힙니다.
「종들이 저희를 다스렸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저희를 빼내 줄 이가 없습니다.」예레미야애가 5:8 · 본디새김
여기서 「종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정복국의 관리나 하급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지배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지만, 특정한 집단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목숨을 걸고 저희 빵을 들여옵니다. 광야의 칼 때문입니다.」예레미야애가 5:9 · 본디새김
광야의 칼이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의 공격을 가리키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식량을 구하는 길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4절에서는 자기 물과 나무에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6절에서는 외국에 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빵을 가져오는 길 자체가 생명을 위협합니다.
시인은 생존의 비용이 점점 커지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10절은 그 결과를 몸으로 표현합니다.
「저희 살갗은 화덕처럼 달아올랐습니다. 굶주림의 맹렬한 열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애가 5:10 · 본디새김
화덕은 뜨거운 열기로 음식을 익히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열기가 사람의 살갗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이 구절이 실제 발열을 가리키는지, 극심한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몸을 열기에 비유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뒤에 「굶주림의 맹렬한 열기」가 나오므로, 기근이 몸에 미친 참혹한 영향을 표현한 것은 분명합니다.
폭력은 사람들의 생존만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몸과 존엄, 나이에 따라 이루어지던 삶의 질서까지 파괴했습니다.
폭력은 사람의 몸과 존엄을 무너뜨렸다
11절은 매우 직접적으로 전쟁의 폭력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시온에서 여자들을 강간했고, 유다의 성읍들에서 처녀들을 강간했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1 · 본디새김
시인은 이 사실을 비유로 감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여성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공동체가 겪은 재앙의 일부로 증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을 읽는 독자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일으킨 가해자들의 책임을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지도자들과 노인들이 겪은 모욕이 이어집니다.
「지도자들은 손이 걸린 채 매달렸고, 노인들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2 · 본디새김
지도자들이 매달린 모습은 극심한 굴욕과 폭력을 나타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인은 삶의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9:32는 노인 앞에서 일어나고 나이 든 사람의 얼굴을 존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와 경험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13절에서는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폭력과 강제 노역이 이어집니다.
「젊은이들은 맷돌을 짊어졌고, 소년들은 나무짐 아래서 비틀거렸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3 · 본디새김
젊은이들과 소년들이 무거운 일을 떠맡아 고통받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아직 성장 중인 어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도성이 무너졌다는 말만으로는 그 도성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의 몸에 남겨진 고통을 하나씩 말합니다.
그들은 정치적 패배만을 기억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성들이 당한 폭력, 노인들이 겪은 모욕, 어린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역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하나님이 보아 주시기를 요청하는 「저희의 수치」에는 이런 구체적인 고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 원문의 표현을 손으로 매달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손과 관련된 다른 형태의 매달림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어 구체적인 처형 방식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3절에서 맷돌을 짊어졌다는 말은 무거운 맷돌을 옮기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맷돌질하는 노동 자체를 떠맡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사기 16:21에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일을 하게 된 장면은 이런 노동이 강제 노역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애가 5:13은 특정한 노동 제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문에서 노인들이 사라지고 젊은이들의 음악이 멈추다
14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겪은 폭력과 강제 노역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라진 일상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노인들은 성문에 나오는 일을 그쳤고,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음악을 멈추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4 · 본디새김
성문은 단순히 성벽에 난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도시에서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거래하며, 재판과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룻기 4:1–12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과 함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노인들이 성문에서 사라진 것은 공동체의 공적인 질서가 무너진 모습입니다. 젊은이들의 음악이 사라진 것은 일상의 기쁨이 멈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정의를 판단하던 자리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던 자리가 모두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마음의 기쁨이 그쳤고, 저희 춤은 애도로 바뀌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5 · 본디새김
기쁨과 춤은 고대 이스라엘의 축하와 감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5:20에서는 홍해를 건넌 뒤 미리암과 여자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춤과 애도는 단순히 서로 다른 감정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두 행동 모두 몸을 통해 표현되는 공동체의 반응입니다. 예전에는 몸을 움직여 기뻐했지만, 이제는 그 몸으로 슬픔을 표현합니다.
16절에서는 이 상실이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됩니다.
「저희 머리의 왕관이 떨어졌습니다. 아, 저희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애가 5:16 · 본디새김
왕관은 영광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 고백이 앞서 언급된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이 당한 성폭력이나 어린 사람들이 겪은 강제 노역이 마땅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공동체는 자신들이 겪은 역사적 재앙을 돌아보면서, 자신들 역시 언약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충분히 말하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저희 머리의 왕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윗 왕조의 왕권이 무너진 일을 떠올릴 수 있고, 예루살렘 공동체가 누리던 영광과 존엄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관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지위와 영광의 상실을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우들이 돌아다니는 시온 산
17절은 앞서 묘사한 모든 상실을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모아 놓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 마음이 병들었고, 이 일들 때문에 저희 눈이 어두워졌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7 · 본디새김
여기서 「이 때문에」와 「이 일들 때문에」가 반복됩니다. 앞에서 말한 수많은 고통이 백성의 마음과 눈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병들었다는 말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공동체가 깊은 상처를 입었음을 나타냅니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 역시 실제 시력의 문제를 반드시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과 눈물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듯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시온 산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여우들이 그곳을 돌아다녔습니다.」예레미야애가 5:18 · 본디새김
시온 산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 다윗 왕조와 하나님의 통치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시편 48:1–3은 시온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찬양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 동물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온 산은 백성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곳이 황폐해졌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현실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여우는 황폐하고 사람이 떠난 장소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히브리어 슈알림(שׁוּעָל)은 여우나 자칼과 같은 야생 동물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인지 세밀하게 구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본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예배하던 곳을 이제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시온의 왕관은 떨어졌지만,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그대로 있다
19절은 5장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전환입니다.
「여호와야훼, 당신께서는 영원히 앉아 계시고, 당신의 왕좌는 대대로 이어집니다.」예레미야애가 5:19 · 본디새김
백성의 왕관은 떨어졌지만,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왕권과 공동체의 영광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왕좌는 예루살렘의 정치적 운명이나 성전 건물의 존속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02:12는 여호와야훼가 영원히 계시고 그분에 대한 기억이 대대로 이어진다고 노래합니다. 시편 93:1–2 역시 여호와야훼의 통치와 영원한 왕좌를 찬양합니다. 예레미야애가 5:19는 이와 같은 왕권 신앙을 폐허 앞에서 고백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절에서 더욱 어려운 질문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저희를 영원히 잊으십니까? 저희를 그토록 오랫동안 버려두십니까?」예레미야애가 5:20 · 본디새김
하나님이 영원히 왕좌에 앉아 계신다면, 왜 그분의 백성은 이렇게 오랫동안 버림받은 것처럼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신이 고통에 관한 질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20절에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19절의 「영원히」와 맞물립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히 앉아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영원히 잊으시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합니다.
같은 영원이라는 시간이 두 가지 전혀 다른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20절을 하나님이 실제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잊으셨다는 확정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백성이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들을 잊으신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현실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곧 마지막 간구로 이어집니다.
「저희를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21절은 예레미야애가 전체의 마지막을 향하는 가장 중요한 요청입니다.
「여호와야훼, 저희를 당신께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돌아가겠습니다. 저희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해 주십시오.」예레미야애가 5:21 · 본디새김
시인은 먼저 예루살렘을 재건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땅과 집을 되돌려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외국의 지배를 끝내 달라는 요청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간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이 간구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정치적·군사적 회복에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회복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게 해 달라고 구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이 돌아갈 것입니다.
앞서 예레미야애가 3:40에서는 「우리의 길들을 살피고 따져 보자. 여호와야훼에게 돌아가자」고 권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공동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살피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5장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한쪽에서는 인간이 돌이켜야 할 책임을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돌이킴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백성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자기 힘만으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31:18에서도 발견되는 신앙의 언어와 가깝습니다. 그곳에서 에브라임은 하나님께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편 80:3, 7, 19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반복하여 요청합니다.
다만 예레미야애가 5:21은 인간의 응답을 없애 버리지 않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가게 해 주시기를 구하면서, 자신들도 실제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회복과 그분께 응답하는 백성의 행동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예전의 날들을 새롭게 해 달라는 역설
보통 새롭게 한다는 말은 이전과 다른 것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예전처럼 새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백성이 그리워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정치적 영광이나 풍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공동체의 삶, 자기 땅에서 안전하게 살고, 가족이 함께 먹고, 노인들이 성문에 모이며, 젊은이들이 음악을 즐기던 날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가 지금까지 보여 준 것은 과거의 예루살렘 역시 죄와 불의가 있었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거를 아무런 변화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참된 회복일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옛날의 죄악까지 다시 가져오는 복구가 아니라, 잃어버린 삶의 온전함을 새롭게 회복하는 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예레미야애가가 희망의 기도로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독자의 기대를 뒤흔듭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와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새 언약은 단순히 옛 질서를 외적으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관계의 회복을 포함합니다. 예레미야애가 5:21 자체가 새 언약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고 삶의 날들을 새롭게 해 달라는 간구는 그와 같은 회복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내치신 것이라면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다만 당신께서 저희를 완전히 내치시고, 저희에게 몹시 노하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예레미야애가 5:22 · 본디새김
그런데 이제 그 기도 뒤에 조건처럼 들리는 말이 붙습니다.
끝까지 남겨진 해석의 갈림
첫째, 본디새김처럼 앞선 간구에 붙는 조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을 완전히 내치셨느냐고 묻는 탄식의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고 몹시 노하셨다는 진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법과 문맥만으로 이 세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고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읽든 예레미야애가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바로 앞에서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가게 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지지도 않았고, 백성의 삶이 회복되었다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다시 받아 주실 것입니까?
마지막 문장의 불확실성이 갖는 의미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 설명은 고통을 끝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애와 연민에 대한 고백도 있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의 회복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백성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들을 받아 주셨다는 확신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는 열린 채 남습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는 하나님의 회복 약속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30–31장은 포로 상태와 공동체의 회복을 약속하며, 신명기 30:1–10은 흩어진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간구를 더 넓은 정경의 문맥에서 읽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을 가져와 예레미야애가 5:22의 마지막 질문을 없애 버려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키 임으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문맥에 따라 「다만 ... 아니라면」이라는 제외의 조건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말을 뒤집거나 강하게 전환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조건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내치신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을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백성은 회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탄식의 질문으로 읽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거절을 확정하기보다 그 가능성을 하나님께 직접 묻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진술로 읽으면 마지막 문장은 앞선 회복의 간구와 더욱 강한 긴장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완전히 내치시고」(מָאַס)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부정사와 동사가 결합한 강조 표현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잠시 멀리하셨다는 말보다 강한 거절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왜 회복된 예루살렘으로 끝나지 않는가
예레미야애가는 회복이 이루어진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직 응답을 기다리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고통을 숨기지 않았고, 자신들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장면에는 황폐해진 시온 산이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던 그곳에 이제는 여우들이 돌아다닙니다. 백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병들었고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온 산의 폐허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영원히 앉아 계시는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그 고백 뒤에 모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왜 오랫동안 버려두시는지 묻습니다. 자신들을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혹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예레미야애가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끝납니다.
황폐한 시온 산 위에는 여전히 여우들이 돌아다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백성의 기도는 그 폐허 앞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